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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9화

Author: 경옥
계연수는 멍하니 고준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도 진지했고 지금 자신에게 건네는 말들이 이미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헤아려진 끝에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고준안이 얼마나 이를 악물고 공부해 왔는지. 그는 국자감에서 해마다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그대로 유임될 만큼 인정받았다는 사실도.

앞길이 환히 열려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자신을 따라 휘안현으로 가겠다는 말인가.

계연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를 따라오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다시 혼인할 생각도 없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아마 평생, 다시는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고준안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졌고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공기가 금세 빗소리로 채워졌다.

고준안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연수야, 나를 짐이라 여길 필요도, 무엇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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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춘귀   제350화

    계연수는 그 일을 떠올렸다. 어릴 적 그녀는 유난히 먹을 것을 밝히는 아이였다. 많이 먹으면 항상 배를 잡고 앓아누웠기에 어머니는 밤에 더 먹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몰래 밖으로 나갔다.그날도 밤에 먹었던 얼음피 녹두떡이 생각나 부엌을 뒤지러 갔다가 하필이면 고준안에게 들키고 말았다.그 기억에 계연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다 먹고 나니 온 집안이 우리를 찾느라 난리였죠. 오라버니께서는 큰 외숙부께 맞기까지 하셨잖아요.”고준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버지도 얼마나 놀라셨는지. 손바닥 스무 대를 맞았지. 손이 퉁퉁 부었었다. 그래도 덕분에 다음 날 새벽 글씨 연습은 면했지.”그가 그 일로 슬쩍 게으름을 피웠다는 사실에 계연수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이내 입을 가리며 웃었다.웃음 끝이 한결 가벼워졌고 마음의 무게도 조금은 옅어졌다.고준안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섯, 일곱 살 무렵의 계연수는 아직 여물지 않은 눈 덩이처럼 동그랗고 통통한 아이였다.지금의 그녀는 달랐다. 어느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는 여인이 되었다.사가에서 마음을 바꾼 것인지 오늘 오전에 찾아왔다. 그리고 심가의 그 인물까지.앞으로 또 누가 있을까?고준안은 입술을 가만히 다물었다.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계연수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가 바라던 공명 또한 결국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없다면 공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담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누각 위에서 심서준은 어두운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계연수가 고준안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옷자락이 거의 스칠 듯 가까이 선 모습.고준안은 이곳을 드나드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고 계연수 또한 그의 방문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고 편안했으며 가벼웠다.반면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만 계연수를 볼 수 있었다.그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졌다. 먹빛 비가 무겁게 내리며 세상을 젖게 만들었고 빗물은

  • 주문춘귀   제349화

    계연수는 멍하니 고준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도 진지했고 지금 자신에게 건네는 말들이 이미 오래도록 마음속에서 헤아려진 끝에 나온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고준안이 얼마나 이를 악물고 공부해 왔는지. 그는 국자감에서 해마다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그대로 유임될 만큼 인정받았다는 사실도.앞길이 환히 열려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자신을 따라 휘안현으로 가겠다는 말인가.계연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말씀 마세요. 저를 따라오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다시 혼인할 생각도 없습니다.”잠시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아마 평생, 다시는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고준안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졌고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공기가 금세 빗소리로 채워졌다.고준안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잠시 후, 그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연수야, 나를 짐이라 여길 필요도, 무엇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다. 이 일은 어머니와도 이미 상의했고 어머니께서도 허락하셨다. 네가 휘안현에서 평생을 산다면 나도 그곳에서 평생 네 곁을 지키겠다. 설령 네가 평생 혼인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다. 내가 조금이라도 지켜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계연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낮고 단단한 그의 목소리는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늘 뒤에서 묵묵히 지켜주는 그림자 같았다.그 순간, 그녀의 마음이 분명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준안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러니 앞날을 약속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의 앞길을 꺾고 싶지 않았다.자신은 여인이니 휘안현에 평생 머무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때 찬란한 가능성을 지녔던 고준안이 그곳에서 평생을 묶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그의 마음은 고마웠으나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계연수는 자세를 바로 세우고 더욱 또렷한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오라버니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

  • 주문춘귀   제348화

    안에서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는 연수의 마음을 안다. 그 애는 나를 데리고 휘안현으로 가 좋은 날을 보내고 싶어 하지. 휘안현으로 가는 게 큰 형님 집에 얹혀 눈치 보는 것보다는 낫겠지. 게다가 경성에 남아 있으면 사가 사람들이 또 찾아와 소란을 피울까 걱정이기도 하고. 그 애는 모든 걸 다 헤아려 두었다. 이제는 예전과 다르다. 전에는 무슨 일이든 내 품에 안겨 투정 부리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나를 지켜 주겠다고 한다. 헌데 내가 어찌 그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겠느냐? 지난번에도 나 때문에 길을 미뤘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더 늦출 수 없다. 내 몸은 괜찮다. 조금만 나아지면 떠나자꾸나.”휘장을 들려던 계연수의 손이 공중에서 굳었다.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며 젖어 들었으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뒤뜰 회랑의 정자에 앉아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발아래 푸른 연못 물결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모두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하늘은 어느새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도 춥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곁에 있던 용춘이 말했다.“날이 금세 흐려지네요. 비가 올 듯해요.”이른 봄에는 비가 잦다. 계연수는 그저 가볍게 대답할 뿐이었다.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연수야.”계연수는 놀라 돌아보았다. 고준안이 바로 곁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언제 오셨어요?”고준안이 웃으며 답했다.“조금 전에 먼저 고모를 뵈었지. 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줄 알았는데, 부엌에 물건을 두러 갔다가 왕 어멈이 네가 돌아왔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여기로 와 보았다.”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연못을 바라보았다.고준안은 그녀 곁에 앉아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둘째 숙부께서 보내신 편지다.”계연수는 서둘러 몸을 틀어 받아 들었다.편지를 펼치니 둘째 숙부가 출발은 했는지 묻는 말로 시작되어 있었다. 어머니의 병세를 염려

  • 주문춘귀   제347화

    예전의 계연수는 사금희를 어느 정도는 양보해 주었다. 사가의 아가씨였으니 겉으로나마 화목을 유지하고 싶었고 일까지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더는 그녀의 체면을 세울 생각이 없었다.계연수는 담담히 사금희를 바라보았다.“그 말씀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기억을 잃지 않으셨다면 제가 이미 사가와 아무런 연이 없다는 것은 알고 계셔야지요. 저는 사옥현 나으리께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는 저를 찾아와 얽매지 말아주십시오.”말을 마치자 더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밖에서는 사금희의 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길 한복판이었고 무엇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그녀였기에 크게 고함치지는 못했다. 계연수는 그녀의 표정이 어떤지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사실 그녀 역시 사가와 완전히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금희의 남편은 북진부사의 지휘사였으니 마음먹고 보복하려 든다면 구실 하나만으로도 고부와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는 일쯤은 어렵지 않았다.경성은 그런 곳이었다. 권세 앞에 등 뒤가 비어 있는 자는 억울함을 호소할 곳조차 없었다. 사금희의 성정이라면 그런 일도 못 할 사람은 아니었다.계연수는 마차를 서둘러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내밀어 익살을 부리려던 용춘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용춘은 입을 삐죽이며 말을 꺼내려 했으나 계연수의 낮은 음성이 먼저 흘러나왔다.“지금은 말하지 말거라.”용춘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보았다. 계연수의 시선이 마차 뒤편을 향해 있었다.“아가씨, 무엇을 보시는 겁니까?”계연수가 낮게 답했다.“사금희의 마차가 뒤따르고 있어.”용춘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왜 따라오는 겁니까?”계연수는 조금 전의 말을 떠올리며 속삭였다.“무슨 이유든, 우리가 어디에 사는지는 알게 해선 안 돼.”곧 마차를 북성 쪽으로 돌리게 했다. 그곳은 골목이 복잡하고 사는 이들 대부분이 넉넉지 않아 낯선 마차가 눈에 띄기 쉬운 곳이었다. 사람을 따돌리기

  • 주문춘귀   제346화

    계연수는 사금희의 목소리를 듣고 돌아섰다. 그녀 쪽으로 성큼 다가오는 사금희의 얼굴에는 여전히 오만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몇 걸음 만에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냉소를 흘리며 첫마디를 던졌다.“고부를 나왔다고 들었다.”계연수는 담담히 되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사금희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며 이를 악물었다.동생에게 그런 큰일이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명유가 무려 삼 년이나 약을 먹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궁의 태의까지 불러 진맥했으나 약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 방면이 이미 제대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말뿐이었다.사가 안은 그야말로 뒤집혀 있었다. 이명유를 가둬 두었지만 울며 불며 소리친 탓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오늘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고가를 찾았었다. 계연수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였다. 이제 동생은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해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이런 상황에서 다른 여인이 과연 시집오겠는가?남은 희망은 결국 계연수뿐이었다.게다가 이혼한 여자의 삶이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어쩌면 고맙다며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고가의 문 앞에서 들은 말은 뜻밖이었다. 계연수는 이미 그곳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사금희는 차갑게 계연수를 훑어보았다. 병약한 어머니까지 데리고 있으니 고가에서도 마뜩잖았겠지. 생각해 보라, 어느 집이 평생 과부와 이혼녀를 먹여 살리겠는가? 쫓겨나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다.그러나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이제 계연수는 선택지가 없을 터였다. 고분고분 따라와 사가로 돌아가는 수밖에. 그리하면 동생이 매일같이 그녀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요 며칠 사옥현은 방에 틀어박힌 채 출근과 귀가만 반복하며 어디에도 나가지 않았고 누가 말을 걸어도 답하지 않았다. 그늘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에 노부인 또한 애가 타 있었다.더구나 어머니는 집안 살림권을 빼앗겨 셋째 숙모에게 넘어갔고 아버지는 연말에 돌아오면 휴처하겠다고까지 했다. 어머니는 눈물로 노부인께 매달렸고 노부인은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 주문춘귀   제345화

    그녀는 뒤뜰의 작은 회랑에 걸터앉아 있었다. 뒷마당으로는 산들바람이 잔잔히 불어왔다.장 선생의 편지는 길지 않았다.계연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내용을 모두 읽어 내렸다. 편지에는 계연수의 두 개 점포가 모두 이미 매각되었으며 그림 한 점 역시 좋은 값에 팔렸다고 적혀 있었다. 은자의 액수가 적지 않으니 직접 와서 받아 갈지, 아니면 사람을 보내 전해 줄지 묻는 내용도 함께였다.계연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직접 가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먹었다.돈을 받는 일은 순조로웠다.장 선생은 묵직한 돈주머니를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송문남가에 있던 점포는 위치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 거리 자체가 값이 높은 곳은 아니지요. 장사는 그럭저럭 되었지만 큰돈을 받긴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인근 점포들보다는 조금 높게 쳐서 은 구백 냥에 팔았어요. 그리고 성북의 다른 한 곳은 그보다 못해, 육백 냥에 넘겼습니다.”계연수는 송문가의 점포가 본래 값이 나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정도 값에 팔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 장 선생.”장 선생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별말을 다 하십니다. 제가 도운 게 뭐 있겠습니까.”그는 이어 지난번 그림 값 사백여 냥을 그녀에게 건네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덧붙였다.“당신 그림은 매번 화루에서 가장 높은 값에 팔립니다. 정말로 경성을 떠날 생각이라면, 몇 점 더 그려 두십시오. 그 사람도 분명 사 갈 것입니다.”그 말 속에 숨은 뜻이 스며 있었다.계연수는 그동안 매년 포산루에 서너 점밖에 보내지 않았지만 그림 값이 결코 낮지 않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장 선생, 조금 더 분명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장 선생은 순간 멈칫했다. 자신이 말을 지나치게 흘렸다는 걸 깨달은 듯 급히 말을 돌렸다.“그저 한 말입니다. 당신 그림을 사는 이는 여럿이니 더 그려 두라는 뜻이었

  • 주문춘귀   제142화

    임씨의 손끝이 순간 떨렸다.옆에 있던 둘째 부인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계연수가 정말 사씨 가문의 재물이 아닌, 사비로 그 비싼 비단을 샀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이어진 어멈의 말에 임씨의 표정도 서서히 굳었다.“창고에 둔 물건들은 대부분 새것이었고 작은 마님 처소의 어멈에게 들은 바로, 대부분 물건들은 창고에 입고된 이후로 건들지 않아서 먼지까지 쌓여 있었습니다.”“명절이나 연회 때 쓰인 물건들도 창고에서 가져다 쓴 게 아니라고 하더군요.”그 말이 끝나자, 방 안은 고요해졌다. 하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조용히 자리를

  • 주문춘귀   제139화

    임씨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아니면 집안에서 지급한 물건들을 팔아서 은자로 바꿔 고씨 가문에 보태준 것이냐?”계연수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을 2년이나 입었다. 그러나 그녀의 옷은 그렇게 적은 편이 아니었다. 겨울 옷이라 몇 번 입을 기회도 없었다.그녀는 임씨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아무리 고씨 가문의 형편이 안 좋다고 해도 사씨 가문의 며느리인 제가 시댁 물건을 팔아 보태줄 만큼 궁핍하지는 않습니다.”임씨는 냉랭한 목소리로 반박했다.“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한필에 80냥이나 하는 비단을 눈도 깜짝 안 하

  • 주문춘귀   제133화

    용춘은 괜히 은자가 아까워 작게 속삭였다.“부인, 좀 아껴 써야 하지 않나요?”용춘은 화리 후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워질 텐데 은자를 좀 더 모아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계연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나름 모아둔 게 좀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그렇게 옷감 점포를 지나다가 둘은 사씨 저택의 둘째 부인과 며느리를 마주치게 되었다.마침 용춘은 점주를 시켜 구매한 옷감을 고씨 가문에 보내려 하고 있었다.이 점포의 옷감은 모두 값어치가 상당했으니, 경성에서도 손에 꼽히는 점포라 할 수 있었다.둘째 부인은 면사포

  • 주문춘귀   제137화

    사옥현이 떠난 후, 방안에 남은 계연수는 바닥에 쏟아진 조각난 자기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사옥현과의 3년은 지금 발아래 보이는 난장판과 다르지 않았다.밖에서 사옥현은 청렴하고 공정한 대리시의 관원이고 어린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은 귀공자였다. 하지만 안채에서 그는 집안일을 상관하지 않고 지금처럼 모든 잡다한 일을 그녀에게 떠넘겼다.그는 언제든 귀찮으면 떠날 수 있고 그녀의 입장은 생각해 준 적 없었다.밖에서 들어온 용춘이 계연수의 발아래에 흩어진 파편들을 보고 다급히 다가왔다.계연수는 용춘을 달래준 후에 물었다.“물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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