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성원은 유남준이 또 아들을 낳을까 걱정하며 말했다. “안되겠다. 그냥 아이들을 데려와야 하나?” 방성원이 유남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방을 왔다 갔다 하자 유남준은 그를 말리기보다 이득과 손해를 분석해 주었다. “설인하가 무슨 무리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면 가도 괜찮겠지.” 방성원은 그 말에 결국 포기하고는 설인하가 산후조리를 마치면 다시 찾아가 천천히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그럼 여기에 대해 박민정에게 말할까?” “말하지 마. 설인하가 너를 그렇게 싫어하는데 네가 박민정에게 설인하와의 관계를 알려주면 나중에 설인하가 알았을 때 박민정을 탓할 게 뻔해.” 유남준은 박민정의 진심이 오해받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네가 박민정을 못 믿을 이유가 없잖아. 설인하가 너의 아내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박민정은 설인하를 잘 돌봐줄 거야.” 방성원도 박민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 말이 맞아.” “그리고 너도 이제 하루 밤낮으로 고생했으니 좀 쉬어.” 유남준이 덧붙였다. “그래.” 방성원은 설인하와 아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잠을 못 자며 여기저기 찾아다녔기에 모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박 씨 가문 저택에서 설인하는 박민정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 집에는 경호원 외에 여자와 아이들만 있었다. “박민정 씨, 혹시 이혼한 거예요?” 설인하는 박민정이 음식을 가져다줄 때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박민정은 잠시 멈칫하며 생각한 후 대답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설인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 “미안해요. 그냥 궁금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박민정은 설인하의 말을 끊고 물었다. “다른 궁금한 점이라도 있어요?” 박민정이 자신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데도 의심했던 자신이 미안했던 설인하는 즉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더는 없어요. 정말 고마워요.”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방성원에게 오랜 시간 갇혀 지낸 탓에 외
박민정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걱정 마요. 저는 원래 반항하는 게 특기예요. 형님이 나가라고 할수록 더 안 나갈 거예요.” 그 말을 마치고는 최현아를 지나쳤다. 최현아는 화가 나 손을 꽉 쥐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유성혁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 여자 도대체 뭐예요? 아직도 잘 버티고 있다니, 제대로 압박을 주기나 했어요?” 유성혁은 약간 당황해하며 말했다. “물론이지. 내가 이전의 모든 골칫거리를 다 박민정에게 던져줬어. 지금도 버티고 있는 거라면 끈질기게 버티는 거겠지.” 최현아는 의기양양하게 자리에 앉아 말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박민정이 여러 건의 해외 대형 계약을 성사시키더라고요. 덕분에 우리 부서가 접수하니까 아주 쉬워졌어요.” “그 여자는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뭘 샀는지 봐봐.” 유성혁은 최현아에게 무언가 들킬까 두려워 서둘러 선물을 건넸다. 최현아가 선물을 받아들여다 보니 2억 원 상당의 비취 목걸이였다. “참 예쁘네요. 오늘 무슨 날이길래 이런 걸 줘요?” 유성혁은 박민정에게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최현아의 사비를 쓰려는 속셈이었지만 이를 감췄다. “당신과 함께하는 날은 매일이 기념일이잖아. 선물 당연히 줘야지.” 그는 또다시 최현아에게 말했다. “사실 요즘 관심 있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시드 자금이 좀 필요해.” “얼마나 필요해요?” “한 1000억 정도?” “그렇게나 많이요?” 최현아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나도 사비를 마련해놨어. 그러니 3, 4억 정도만 좀 지원해 주면 나중에 꼭 갚을게.” 유성혁은 계속해서 애원했다. 하지만 최현아도 눈치가 있어 유성혁이 사업에 능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결국 200억만 주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간 최현아는 남편이 준 선물을 자랑하며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역시 결혼 잘해야 돼. 남편이 직접 골라준 선물이야. 우리의 매일이 기념일이래.” 이 소식을 본 많은 사람이 좋아요 와 축하한다는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속으로 유성혁의 본성을 아
박민호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박민정은 퇴근 준비를 하며 가방을 챙겼다. “민호야, 원래 유남우와 윤소현은 약혼한 사이였잖아. 둘이 결혼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어떻게 당연한 일이야? 둘째 형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누나야! 지금 누나가 마음을 돌리면 당장 결혼을 취소할 거라고!” 박민호는 유남우가 윤소현과 결혼해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되면 자신은 더 이상 그에게서 관심을 받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박민정은 그의 속내를 이해했다. “민호야, 넌 이제 어른이야. 앞으로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할 줄 알아야 해. 우리 평생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는 없어.” 박민호는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서서 박민정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박민정이 떠난 후 그의 눈에는 싸늘한 기운이 깃들었다. “뭘 그리 잘났다고 잘난 척이야! 내가 너라면 차라리 유남우의 첩이라도 될 텐데!” 박민호는 자료 뭉치를 들고 자리를 떠났다. 그는 이 모든 장면을 아직 퇴근하지 않은 5팀 직원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5팀의 내통자는 박민호가 박민정에게 한 말을 최현아에게 전했고 최현아는 이를 듣고 웃으며 이 소식을 윤소현에게 다시 알렸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윤소현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박민호, 정말 살아남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 아빠와 소송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박민정에게 유남우를 꼬시라고 말했다고?” 윤소현은 한창 새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던 중이었고 드레스룸에서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 “박민호에게 아주 철저히 본때를 보여줘.” 윤소현은 박민호를 동생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최근 계속 결혼 준비로 바빴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박민호를 철저히 매장시켜버리고 싶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멀리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는 유남우가 보였다. “남우 씨.” 윤소현이 그를 부르자 유남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다 입어봤어?” “네, 이 드레스가 더 예쁜 것 같지 않아요?” 윤소현은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남우는 고
박민호는 박 씨 본사를 나와 돌아가던 중 몇 대의 차에 의해 길 한복판에서 가로막혔다. 그는 당황스러워했지만 곧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서둘러 창문을 닫고 경찰에 신고를 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박민정이 떠올랐다. “누나, 제발 와서 나 좀 구해줘!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어!” 박민호는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위협하는 이들이 상당한 배후를 지닌 사람들일 것이라 직감했다. 비록 똑똑하진 않지만 그를 노리고 있는 이는 분명 윤 씨 가문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박민정은 전화를 받자마자 그쪽에서 들려오는 차를 부수는 소음과 남자들의 위협적인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빨리 나와! 안 그럼 널 죽여버릴 거야!” 박민호는 차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겉보기엔 허세를 부리느라 비싼 차를 샀지만 그 덕분에 장비가 좋은 차 안에 있어 버틸 수 있었다. “누나, 들리지? 제발 나 좀 구해줘. 가능하면 둘째 형도 불러와.” 그는 박민정의 능력이 크게 뛰어나다고 믿진 않았지만 그녀의 뒤에 유남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박민정은 바로 일어서서 말했다. “주소를 보내줘. 지금 바로 갈게.” 박민호는 곧바로 위치를 보냈다. 박민정은 망설임 없이 정민기를 불러 사람들을 데리고 가도록 했다. 박민호는 전화가 끊긴 후 박민정이 반드시 와서 자신을 구해주길 빌었다. 만약 그가 이대로 죽는다면 절대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 밖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차량을 두드리고 있었고 박민호는 온몸을 떨면서 평생 저지른 좋고 나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후회스러웠다. 그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박민정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한편, 박민정도 차를 타고 박민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있는 곳이 박민호가 사고가 난 곳에서 가깝긴 했지만 임신 중인 그녀는 자신이 나설
병원에 도착한 후 박민정은 박민호의 수술비를 지불하고 몇 마디 당부의 말을 남기고 떠나려 했다. “누나, 오늘 고마웠어.” 박민호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비록 평소에는 감사할 줄 모르고 무심했지만 오늘 목숨을 걸고 도움을 준 박민정을 가슴 깊이 기억하게 된 것이다. 박민정은 아무 말 없이 그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박민호가 어려움에 처했음에도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은 여전히 박형식의 은혜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을 떠난 후 박민정은 정민기에게 물었다. “박민호를 이렇게까지 죽이려 했던 사람이 누구였어요?” 정민기는 윤소현이라고 답했다. 박민정은 깜짝 놀랐다. 윤소현은 박민호와 같은 어머니를 둔 이복누나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무자비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민기는 주의를 기울여 말했다. “최근 당신도 안전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윤소현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걸 보니 다음엔 당신을 노릴 가능성도 있어요.”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당신이 몇 사람 더 붙여 저를 보호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임신 중인 박민정은 특히 윤소현 같은 위험인물이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집에 돌아오자 박민정은 박윤우와 방은정을 보고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설인하 역시 며칠 동안 이곳에서 요양하면서 몸과 마음이 상당히 좋아졌다.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박민정과 웃고 떠드는 여유도 생겼다. 박민정은 설인하에게 힘든 육아 대신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당부했다. “아직은 충분히 쉬면서 몸을 회복해요. 한 달 후 에너지가 생기면 그때 아이를 돌봐도 늦지 않아요.” 설인하는 박민정의 배려에 고마워하며 말했다. “고마워요. 제 몸이 회복되면 열심히 일할게요.” 설인하는 전에 본인이 했던 얘기를 잊지 않았다. 박민정은 그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요.” 이때, 진서연이 박민정에게 다
치료실에서 나온 후 지금 유남준의 시력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유 형, 상태가 어때?” 방성원이 그가 나오자마자 물었다. “훨씬 좋아졌어.” 김인우와 의사도 따라 나왔다. “방금 유 형에게 뇌 CT 검사를 해봤는데 수술 후 상태가 매우 좋아서 후유증은 더 이상 없을 거야.” “그럼 다행이네.” 방성원이 잠시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다만 최근에 유남우가 아직도 유 형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유남우가 나까지 알아낸 걸 보면 무슨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어.” 김인우는 비웃으며 말했다. “유 형이 이제 다 나았는데 유남우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유남준이 시력을 잃고 기억을 잃었을 때만 유남우가 그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제 유남준이 회복된 만큼 유남우는 유남준에게 돌아가야 할 자리를 내놓아야 할 때였다. 유남준의 눈빛이 점점 깊어졌다. “내일 가서 유남우를 한 번 만나봐야겠다.” “유 형, 혹시 호산 그룹에 갈 거야?” 김인우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유남우가 호산 그룹을 접수한 이후 김인우의 이름뿐인 부장 자리도 없어진 상태였다. 유남준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남우는 언제나 내가 걔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한 이유가 내가 자궁에서 유남우의 영양을 빼앗았기 때문이라면서 자기가 나보다 뛰어났을 거라고 믿고 있어. 내가 유남우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지. 호산 그룹은 그에게 내주겠지만 난 IM 그룹을 이용해 호산 그룹을 짓밟아 유남우가 정말로 나보다 뛰어난지 아닌지 보여줄거야.” 그는 항상 이 동생이 직접 상황을 확인해야 깨닫는다고 생각했다. 김인우도 이 말을 듣고 나니 이 방법이 유남우의 기세를 꺾는 데 효과적일 거라 느꼈다. “근데 유남우가 전에 네 목숨까지 노렸잖아. 그냥 넘어갈 거야?” 김인우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유남준이 당시 완전히 회복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를 지킬 방법을 알았고 일부러 무심한 척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계산할 거야
“이상하네. 어디 갔지?” 김인우는 의아해했다. “신경 쓰지 마.” 방성원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박 씨 가문 별장 주변에는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어 방성원이 설인하와 아이를 몰래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는 단지 멀리서 집 안의 상황을 지켜봤다. 비록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안심이 되었다. 방성원이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자 옆에 있던 김인우는 피곤해졌다. 방성원이 떠나지 않자 결국 김인우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전화했다. 그는 다짐했다. 앞으로 이 두 남자를 따라오는 호기심은 절대 품지 않겠다고.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다. 박 씨 가문 별장 안에서 박민정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얕은 잠결에 갑자기 누군가 품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는 느낌에 놀라서 눈을 떴다. 손을 뻗어 침대 옆 불을 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건가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유남준은 자신이 담을 넘다가 정민기와 다른 경호원들에게 들킬 뻔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정민기에게 경호원을 몇 명이나 배치하게 한 거야?” 그는 약간 쉰 목소리로 물었다. “많지 않아요. 이 안에 열 명 정도 있을 거예요. 왜요?” “별일 아냐. 잘했어.” 유남준은 박민정이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두고 있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봐 불안해졌다. 그는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박민정은 살짝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너무 가까워요. 제 배가 눌려요.” 유남준은 그제야 그녀를 조금 풀어주었는데 이제 박민정의 작은 배가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거예요?” 박민정가 다시 물었다. 유남준은 박민정이 답장을 보내지 않아서 온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유남우가 결혼을 준비하는 거 알아?”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윤소현이 청첩장까지 보냈어요.” 박민정이 가볍게 대답하자 유남준은 왠지 마음이 놓
“어디에 있어?” 유남우가 물었다. 도우미는 입구를 가리켰다. “바로 문 앞에 있습니다.” 유남우는 곧장 문 쪽으로 뛰어갔고 고영란도 그 뒤를 따랐다. 유남우는 유남준이 돌아오면 틀림없이 허름한 몰골일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나가 보니 차 안에서 깔끔하게 차려입고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혹시 유남준이 정신을 차린 건가?’ “형.” 곧 고영란도 다가와 유남준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남준아, 너 괜찮니?” 유남준은 이미 시력을 회복했지만 두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르게 했다. “당신 누구야? 날 만지지 마.” “남준아, 나 네 엄마야.” 고영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잘 있던 아들이 어떻게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그때 차에서 방성원이 내렸다. “이모, 며칠 전 길에서 쓰러진 유 형을 발견해 데리고 있었어요. 한동안 깨어나지 않아 걱정했는데 마침 형을 찾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야 데려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고영란은 방성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나. 성원아.” 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유남준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일을 폭로할까 봐 두려웠다. 방성원은 유남우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며 속으로 의문을 품었다. 어째서 친동생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맞아요. 의사가 진찰한 결과 유 형의 현재 지능은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하니 가족들이 곁에서 함께해 주셔야 할 겁니다.” 고영란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그러고는 유남우에게 말했다. “남우야, 우리 네 형을 옛 저택으로 데려가자. 그곳에 우리도 있으니 네 형도 좀 더 즐거워할 거야.” 유남우는 반대할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는 손을 뻗어 유남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형, 내 집으로 데려갈게.” 유남준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나를 만지지 마!” 유남우의 몸이 굳었다. 결국 고영란이 유남준을 유 씨 가문의 저택으로 데려갔다. 유남준이 미쳤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이제 유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