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그룹. 유남준은 강연우를 불러 정씨 가문을 조사하라고 했다. 하지만 강연우는 멍한 듯했고, 정신이 산만해 보였다.유남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아니에요, 지금 가보겠습니다.” 강연우는 정신을 차리고 나갔다.그가 나가자마자 서다희가 와서 유남준에게 말했다. “모레가 조하랑 양과 김인우 군의 결혼식입니다.”유남준은 이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강 변호사가 조하랑 씨를 포기한 거 아니었어? 이제 와서 결혼한다고 하니까 이러는 건가?”솔직히 말해서, 남자로서 유남준은 이런 강연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욕심내는 꼴이란 생각이 들었다.서다희는 그의 말에 서둘러 자신이 아는 걸 설명했다. “대표님, 모르시는 게 있으세요. 강 변호사님께서 조하랑 씨를 포기한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그를 깊이 바라보며 계속 말하라는 눈짓을 했다. 유남준이 이런 가십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조하랑이 박민정의 친한 친구인 만큼 박민정과 관련된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아둬야 했다.“그때 두 사람이 헤어진 건 사실 조하랑 씨 아버지가 쫓아냈기 때문이에요. 당시 강 변호사님은 다리가 거의 부러질 뻔했고 목숨도 위험했다고 해요.”서다희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강 변호사님은 살기 위해 서울로 도망쳤고, 거기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죠.”“그분이 강 변호사님을 구해주고 불편한 몸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줬어요.”유남준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은혜를 갚으려고 결혼한 건가?”“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서다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강 변호사님이 건강을 회복한 후, 지금 아내의 아버지를 통해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고 많은 사람을 알게 됐어요. 그래도 여전히 조하랑 씨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고, 그분의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다음 진주시로 돌아왔죠.”“그래서?” 유남준은 흥미가 생겼다. 이렇게 들어보니 강연우는 박민정과 그녀의 친구들이 말하는
강연우는 듣고 나서 무력감을 느꼈다. 담배를 세게 몇 모금 빨다가 끄고 쓰레기통에 버렸다.“제가 하랑이한테 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비서님이 하랑이라면,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어떻게 하겠어요? 설마 몇 년을 더 기다리다가, 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결혼하자고 할 겁니까?” 강연우가 물었다.서다희는 이 말을 듣고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나중에 하랑 씨가 진실을 알게 되면 분명 변호사님을 미워할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분이 정말로 김인우 씨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서다희는 자주 조하랑과 김인우가 다투는 걸 봤고, 그녀가 김인우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마도 김인우와 결혼하는 건 강연우에 대한 보복일지도 모른다.강연우는 다시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전 바로 그런 상황이 생길까 봐 두려워요. 그래서 김인우 씨와의 결혼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요.”“모레면 두 분 결혼하세요.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어요. 변호사님이 진실을 말하면 그분이 김인우 씨와 결혼할지, 변호사님을 기다릴지, 아니면 둘 다 선택하지 않을지 직접 판단하게 하세요.” 서다희가 말했다.남자로서 그는 강연우가 조하랑의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이해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진실을 알 권리도 중요하다. 일방적으로 이유도 없이 관계를 끝내는 것이 진실보다 더 상대방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서다희가 보기에 조하랑은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더 생각해 볼게요.” 강연우가 고개를 숙였다.“그러세요.” 서다희는 그제야 자리를 떴다.강연우는 그가 간 후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고 확인해 보니 아내였다.“여보, 무슨 일이야?”“연우 씨, 아직도 안 왔어? 야근해?”강연우가 시간을 보니 벌써 저녁 7시 30분이었다. 그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응, 지금 바로 갈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밥 먹어.
휴대폰을 쥐고 있던 조하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강연우의 결혼식에 참석하긴 했어도 그와 결혼하는 신부가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생각은 없었다.저도 모르게 본인과 신부를 픽하면 시도 때도 없이 그 기억이 불쑥 나타나 자신을 괴롭힐까 봐 두려웠다.자신을 강연우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황예지를 보며 조하랑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왜 저를 만나고 싶으셨던 건데요?”조하랑이 겨우 입을 뗐다.“하랑 씨와 연우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연우 대신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황예지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내일모레가 당장 결혼식인 상황에 조하랑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 간절하면서도 진지한 황예지의 목소리에 조하랑은 홀린 듯 대답했다.“알겠어요.”두 사람의 약속 장소는 한 평범한 식당이었다.조하랑은 여리여리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의 황예지를 바라보며 자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안녕하세요.”조하랑은 먼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황예지도 그런 조하랑의 인사에 함께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고, 두 사람은 마주 본 상태로 한 테이블 앞에 착석했다.“저한테 하실 말씀이 뭐죠?”조하랑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황예지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병원 진단서를 꺼내 조하랑의 앞에 내밀었다. 그녀가 내민 진단서에는 황예지의 남은 수명이 3년밖에 안 된다는 검사 결과가 적혀있었다.조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단서를 바라보았다.젊은 나이에 이렇게나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이 안쓰러웠다.조하랑이 곧장 입을 열었다.“걱정 마요, 저는 연우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저도 곧 결혼할 예정이에요.”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황예지 괜한 오해를 하는 일이 없길 바라서였다.황예지는 그런 조하랑을 보며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
그 말에 강연우는 주먹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그런 말은 왜 한 거야?”고개를 잠시 떨어뜨린 황예지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우리 내일 이혼하자.”또 이혼 그 소리.강연우의 목울대가 일렁였다.“예지야, 내가 얘기했을 텐데. 죽음은 있어도 이혼은 절대 없을 거라고.”황예지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강연우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걱정하지 마. 난 정말 하랑이랑 다시 시작할 생각이 없어. 우리 둘이 잘살아가면 돼. 내가 너 잘 챙겨줄게.”말을 마친 강연우는 황예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어떤 사람이나 일은 한 번 놓친 순간,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게 된다.황예지는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강연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어쩌면 강연우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계속 자신을 챙겨주며 살겠다는 말을 할까?...조하랑은 넋 나간 사람처럼 정처 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빠.”딸이 재벌 집에 시집간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던 조석천이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 우리 딸?”“그때, 아빠는 정말 강연우를 죽일 생각이셨어요?”그 말에 조석천의 심장이 철렁했다.이미 결혼까지 한 강연우가 그 일을 딸에게 얘기해줄 리 없다고 굳게 믿어왔건만, 결국...조하랑이 재벌 집에 시집간다는 것을 안 강연우가 중간에서 뭐라도 뜯어먹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하랑아, 아빠 말 좀 들어 봐. 강연우 그 쓰레기 자식은 신경 안 써도 돼,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야. 지금은 김인우랑 할 결혼식에만 집중해.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그는 애써 말을 돌렸다.조석천의 말에 조하랑의 눈빛은 한층 더 공허해졌다.“아빠, 일단 대답부터 해주실래요? 왜 강연우가 갑자기 실종됐었는지, 그리고 다시 나타난 강연우가 왜 갑자기
“하랑아, 왜 아무 말도 안 해? 제발 아빠 좀 놀라게 하지 마. 난 정말 널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지금 아빠는 먹고사는 데 아무 문제 없고,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굳이 너를 재벌 집에 시집 보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네 미래도 생각해야지. 아무 걱정 없이, 특히 돈 걱정 없이 살기 위해서는 재벌 집으로 들어가는 게 최고야.”“너도 알잖아. 우리 집은 그냥 졸부일 뿐이야. 돈 없을 때를 생각해 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릴 무시했는지. 엄마랑 아빠는 네가 그렇게 살길 원하지 않아.”조석천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그의 아내가 세상을 뜨게 된 것도 치료비가 부족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은 탓에 조석천은 가난할지도 모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갖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 혹시라도 가난한 남자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을까 무서웠다.그 남자가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단순한 도박에 불과했으니 말이다.조하랑 역시 아버지가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아버지의 행동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돌발행동 같은 건 할 생각 없으니까요. 지금은 조금 혼자 있고 싶네요.”말을 마친 조하랑은 전화를 끊었다.갑자기 끊긴 전화에 조석천은 다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조하랑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방법이 없었던 그는 결국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혼자 거리를 배회하던 조하랑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파묻혀 있었다. 눈앞에 강연우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는지, 왜 본인을 정말 쓰레기로 여기게 했는지.얼마나 걸었을까. 돌아가기 싫었던 조하랑은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혹시라도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올까 봐 휴대폰 전원을 꺼두었고, 아직도 다시 켤 용기가 나지 않았고, 연락
조하랑은 김인우를 그저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인우 씨...”김인우는 조하랑이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내일까지 고민할 시간 더 줄게요. 하지만 그다음 날에 갑자기 결혼 취소해서 나한테 망신을 준다면, 나도 하랑 씨 용서 안 해줄 거예요.”김인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김인우가 진주시에서 그 어떤 여자를 못 만나봤을까. 적어도 진주시 90%의 여자들은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할 것이다.만약 조하랑이 결혼식 당일 갑자기 결혼을 취소해 버린다면 그는 조하랑을 절대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김인우의 말에 조하랑은 한동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자신이 사랑하던 강연우는 이미 유부남이었고, 황예지도 아주 좋은 여자였다.“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조하랑이 말했다.핸들을 잡고 있던 김인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이미 결혼을 확정 지은 조하랑이 이제 와서 결혼식을 취소할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그런데도 아직까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그녀는 김인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단순한 예비 후보 취급을 받은 김인우의 마음이 불쾌했다.“집으로 데려다줄까요?”이틀 뒤면 결혼식이었던 탓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집으로 갈 수 없었다. 결혼 절차라는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이었으니까.“싫어요.”조하랑은 단호하게 그의 말을 거절했다.“근처에 있는 아무 호텔로 데려다주세요.”“그래요.”김인우가 대답했다.그는 시설이 좋은 호텔 하나를 찾아 조하랑을 내려주었다.원래였다면 조하랑을 직접 방까지 데려다줬을 테지만 이미 빈정이 상해버린 탓에 김인우는 그녀를 혼자 호텔로 들어가게 두었다.그녀를 호텔까지 데려다준 김인우는 곧장 조석천에게 안부를 전했다.호텔 방 안으로 들어온 조하랑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따로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결국,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연락했다.마침 휴식을 취하려던 박민정은 조하랑에게서 결려온 전화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박
조하랑은 종일 그저 멍하니 호텔에만 있으며 결혼 준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다음날 오후가 되자 그녀는 김인우에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해주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방 문을 두드렸다.조하랑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내려놓고는 슬리퍼를 끌며 문을 열어주러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문이 열린 그 순간,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 그녀의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막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조하랑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김인우의 집.김인우는 오늘 종일 마음이 복잡했다. 그는 초조한 심경으로 조하랑의 결정을 기다렸지만, 오후 5시가 돼도, 6시가 돼도 울리지 않는 휴대폰에 마음은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결국, 참지 못한 김인우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생각 정리 끝났어요?”하지만 1분이 지나도,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김인우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원하면 원한다, 싫으면 싫다는 의사 표현조차 똑바로 하지 않는 조하랑을 원망했다.마음 같아서는 조하랑의 앞으로 순간이동을 해서라도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초조하게 자신의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김인우를 바라보던 박예찬은 덩달아 함께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아저씨, 가만히 좀 앉아계시면 안 돼요?”그 말에 김인우는 곧장 걸음을 멈춘 채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하랑 이모한테 전화 좀 해줄래?”박예찬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이용해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아이의 스마트워치에서도 들려온 건 그저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이었다.“왜 아직도 전화기가 꺼져 있는 거지?”김인우가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그때, 김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솔직히 말해 봐. 너 하랑이한테 뭐 잘못한 거 있지?”김인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제가 감히 어떻게 그래요.”“그럼 하랑이가 왜 갑자기 네 연락을 안 받겠어? 휴대폰도 꺼져 있고 말이야. 내일이 당장 결혼식인데.”김훈은 김인우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어갔다.“솔직하게 말해. 너 밖에서
하지만 이지원이 예상 못 했던 것은 그 노인네가 자신보다 못한 소녀를 며느리로 맞는다는 사실이었다.다가 더 충격적인 것은 김인우도 그 결혼을 받았다는 것이다.조하랑을 보는 이지원의 눈빛은 질투로 가득 찼다.침대 위의 조하랑은 그제야 천천히 의식을 되찾는 듯했다.눈을 뜬 그녀는 극심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낯선 주위를 둘러보았다.“여기가 어디지?”조하랑이 눈을 뜨자 이지원은 곧장 방에서 걸어 나왔다.적어도 이지원은 지금 자신에게 도주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했다. 조하랑에게 그녀를 납치한 사람이 이지원이라는 사실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됐다. 만약 조하랑이 김인우에게 얘기라도 한다면 절대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오늘 밤, 저 여자는 당신들 거야. 그러니까 잘 즐기도록 해. 내 호의 무시하지 말고.”이지원은 건장한 남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녀의 말에 남자들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지원 씨.”“앞으로 나 지원이라고 부르지 마. 차라리 아가씨라고만 불러.”이지원이 말했다.“알겠습니다, 아가씨.”이지원은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한편, 병원에서는 박민정이 치료 중인 박윤우의 옆에 있어 주었다.아직 조하랑이 실종됐다는 사실을 모르던 박민정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박민정은 김인우에게서 조하랑이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그렇게 박민정 역시 더는 조하랑에게 연락을 하진 않고 그녀의 생각이 다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엄마, 나 물 마시고 싶어요.”박윤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 엄마가 따라줄게.”박민정은 몸을 일으켜 물을 받으러 걸음을 옮겼다.빅윤우는 곧 있을 수술을 받기 위해 머리를 깔끔하게 민 상태였다.아이는 온몸이 아파왔지만 박민정을 굳이 걱정시키기는 싫었던 탓에 묵묵히 참고만 있었다.박민정이 물을 받아왔지만 박윤우는 한 모금만 마신 후 또다시 재촉하기 시작했다.“엄마, 얼른 가서 쉬어요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