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우는 문 구멍을 통해 바깥을 살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할아버지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잠이나 푹 자라. 뭐 하고 있는 거냐?”“할아버지, 안 주무세요?”“이 늙은이는 여섯 시간만 자면 충분해. 밤에도 자고 낮에도 자고 아무 때나 잘 수 있어.”김훈의 목소리는 힘이 넘쳤는데 병에 걸렸다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김인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됐어, 한숨 쉬지 말고 하랑이랑 같이 침대에서 자라. 바닥에서 자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이 말에 조하랑과 김인우 둘 다 당황했다.조하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또 이러시면 저 할아버지 안 볼 거예요.”김인우도 맞장구쳤다.“맞아요, 우리 둘 다 할아버지랑 안 놀아줄 거예요.”정말이지, 나이가 들면 철든다더니, 이 할아버지는 정반대였다. 이렇게 사람을 들들 볶다니.김훈은 이 말을 듣고는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휴, 늙으니 손자한테까지 미움받네... 참, 세월이 야속하다...”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는데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그 쓸쓸한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조하랑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를 따라가 위로해드리려 했다.하지만 김인우가 그녀를 막아서며 말했다.“또 마음 약해지지 마요. 우리 할아버지 성격 몰라요? 다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최근 김인우는 할아버지가 말한 병들이 모두 꾸며낸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아냈다.조하랑은 발걸음을 멈췄다.“생각해보니 맞네요. 할아버지는 진짜 연기 대장이세요.”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지만 바닥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김인우를 보고 마음이 쓰였다.“인우 씨도 침대에서 자요. 우리 각자 한쪽씩 쓰면 되잖아요.”그도 그럴 것이, 방 안 난방이 끊겨 지금은 초봄이라 꽤 쌀쌀했다. 김인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괜찮긴 한데, 또 나 때리는 거 아니에요?”예전에 김인우가 잠결에 조하랑을 안았고 그녀가 그걸 발견고는 제대로 혼내준 적이 있었다.조하랑은
조하랑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됐어요. 얼른 일어나요.”자기도 너무 무리하게 떼를 쓸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김인우는 이불을 들어 올려 자기 몸을 덮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조하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아니, 이불은 왜 가져가는 건데요?”김인우가 대답해 줄 리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점점 더 관심이 생기고 있었다.조하랑은 그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걸 보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아래층 거실에서는 할아버지와 박예찬이 일찍부터 일어나 있었다. 박예찬은 김훈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며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위층에서 나는 인기척을 듣자 누구보다 기뻐했다.“이번에는 틀림없어.”김훈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였으나 박예찬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증조할아버지, 또 반칙하신 거예요. 방금 이 흑돌, 여기 있지 않았잖아요.”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어이구, 예찬아, 넌 눈썰미가 왜 이렇게 좋냐?”그는 곧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나중에 꼭 하랑이가 너처럼 착한 증손자를 하나 낳아야 할 텐데.”박예찬과 오래 지내다 보니 손자 따위는 바라지도 않고 그냥 증손자라도 곁에 두고 싶어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자기 손자인 김인우는 영 못 미더웠다.남의 집, 이를테면 유남준만 해도 아들만 네 명을 두었다.네 명이라니!김훈은 작년에 유씨 집안에서 쌍둥이 돌잔치를 열었을 때 그 토실토실한 아이들을 보고 얼마나 부러웠던지.“걱정 마세요! 하랑 아줌마랑 인우 아저씨가 꼭 튼튼한 증손자 한 명 낳아 드릴 거예요!”박예찬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는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인우 아저씨가 하랑 아줌마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며칠 전에도 하랑 아줌마가 밖에서 잘생긴 남자를 쳐다봤다고 질투하지 않았던가.하랑 아줌마는...박예찬 생각엔 그저 예전에 상처를 받아서 아직 자기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럼 됐어, 그럼 됐어...”김훈은 그 말에 기쁨
단호하게 끊어내지 않으면 오히려 그로 인해 더 큰 혼란을 겪게 된다.어제 일을 겪고 나서 설인하는 방성원과 하루라도 빨리 관계를 정리하고 이혼을 끝내고 싶었다.“제가 예전에 이혼 소송을 걸었다고요?”박민정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그제야 설인하는 지금의 박민정이 정말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걸 실감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당시의 일을 설명하려 했지만 등 뒤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설인하가 고개를 돌리자 유남준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는데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벌써 여덟 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아침 안 먹고 뭐 해요?”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설인하을 재촉했다.“출근 안 해요?”설인하는 순간 말을 삼켰다. 남의 집안일을 당사자 앞에서 얘기하는 건 실례가 될 수 있었다.“아, 지금 가요.”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하지만 박민정의 머릿속은 여전히 설인하의 말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유남준이 눈앞까지 다가왔을 때 바로 물었다.“저 예전에 당신한테 이혼 소송을 걸었어요?”유남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숨기지 않고 사실을 인정했다.“응. 그때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었어.”“그럼 왜 지금까지 저한테 말 안 했어요?”박민정은 살짝 화가 난 듯했다.유남준은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땐 많은 일이 있었어.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도 사심이 있어서 안 좋은 일들은 일부러 숨겼어.”그는 한숨을 쉬었다.“네가 끝내 기억을 되찾지 못할까 봐, 혹시라도 그 일들을 알게 되면 나를 멀리할까 봐 두려웠어.”“그래서요? 도대체 제가 그때 왜 이혼 소송을 걸었는데요?”박민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유남준은 숨기지 않고 당시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그때는 내 잘못이 컸어. 넌 나를 용서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혼하려고 했던 거야.”그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덧붙였다.“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우리 지금도 법적으로는 이혼 상태야.”그 한마디에 박민정은 그만 얼어
스스로 강해져야만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다. 이 점을 유남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는 박민정과 친구들을 회사에 내려준 후 혼자 IM으로 향했다.얼마 전, 부하들의 조사로 유석진이 또다시 수작을 부릴 기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유남준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유석진이 한패들과 함께 세운 신생 회사를 거침없이 압박해버렸다. 그러나 정작 유석진 본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대체 또 무슨 속셈일까.그런 생각을 하며 회사에 도착한 유남준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유명훈을 발견했다.노인은 발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렸는데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곧바로 유남준을 꿰뚫어 보았다.“남준아, 왔구나.”유남준은 태연히 걸어 들어갔다.“할아버지.”유명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앉은 후 차갑게 굳어 있는 손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엔 손주를 향한 온기는 없었다.“이 회사를 보니 호산보다도 더 대단하구나.”유남준은 예의상 대꾸했다.“과찬이십니다.”그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유명훈도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았다.“하아, 요즘 네 큰아버지랑 사촌 형이 날 찾아와서 네가 너무 몰아붙이는 바람에 밥조차 먹을 수 없다고 하더구나.”아니나 다를까. 역시 유석진과 유성혁 때문이었다.할아버지가 정말 정신이 흐려진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자기 큰아들네 가족이 얼마나 못된 짓을 저질렀는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유씨 가문이 그렇게까지 궁핍해졌습니까? 어쩌다 ‘밥도 못 먹을’ 지경이 되었는지 저는 듣지도 못했는데요. 그들이 정말 돈이 없다면 저를 찾아오라고 하세요. 빌려드릴 테니까요.”그의 말투는 뼈를 담고 있었고 유명훈은 그런 태도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 큰아버지와 사촌 형을 IM에 자리 하나 마련해 줘라. 아니면 최소한 계열사라도 보내서 일을 시켜야 하지 않겠느냐?”애초부터 목적은 그것
유남준은 회사에서 업무에 집중하느라 박민정 쪽 상황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는 알지 못했다. 박민정이 회사에 온 뒤로 쉬는 시간만 되면 에리가 그녀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온갖 살가운 말들을 늘어놓으며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밥 먹을 시간이야.”에리는 환하게 웃으며 각종 맛있는 음식들을 들고 왔는데 박민정은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놀랐다.“여기서 먹는 거야?”그녀는 밖에서 먹으러 나갈 줄 알았다.“밖엔 사람이 너무 많잖아. 붐비는 데서 먹으면 불편하니까. 차라리 여기서 먹는 게 조용하고 좋지.”사무실 밖, 설인하와 동료들은 박민정을 불러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려 했지만 이 분위기를 보아하니 불가능해 보였다.진서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아... 유 대표가 알게 되면 또 질투에 눈이 돌아가겠네요.”설인하가 피식 웃었다.“어쩔 수 없죠. 저라도 불안할 것 같은데요. 에리 정도면 솔직히 너무 경쟁력 있잖아요?”잘생겼지, 인기 폭발하는 대스타지, 심지어 유 대표보다 나이도 어리지.그 순간, 멀리 떨어진 회사에서 일하던 유남준이 별안간 재채기를 했다.진서연도 설인하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그때, 누군가 그녀 앞에 다가왔다.“같이 점심 먹을래요?”정민기였다.며칠 전, 박민정이 한마디 툭 던진 이후로 정민기는 진서연을 불러내 식사하고 영화 보고 산책하는 일이 잦아졌다.진서연은 기다렸다는 듯 설인하의 팔짱을 꼈다.“좋죠! 가요, 인하 씨!”설인하는 단박에 분위기를 눈치챘다. 이럴 때 눈치 없이 끼어드는 건 최악이다.“전 됐어요. 오늘은 바깥 음식 안 땡껴서 이미 배달시켜 놨어요.”“뭐? 언제요? 저한텐 말도 없었잖아요!”진서연이 억울하다는 듯 볼을 부풀렸으나 설인하는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아, 미안요. 깜빡했네요.”“됐어요. 다음부턴 조심해요.”진서연은 심각한 척하며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설인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무실로 잽싸게 돌아갔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면 몰래 나가서 먹으면 되니까.진서연은 결국 정민기와
에리는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굳혔는데 공용 젓가락을 쓰는 걸 깜빡했던 모양이었다.박민정은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걸 막으려 나섰다.“괜찮아, 괜찮아. 다들 친구 사이인데 뭐.”그러나 연지석은 여유롭게 비꼬았다.“친구라도 조심해야죠. 민정아, 너 원래 몸도 약한데 대스타님한테 무슨 전염병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에리의 얼굴이 확 굳었다.“부사장님,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저 매년 건강검진도 받고 아주 건강하다고요.”“아, 그래요?”연지석은 시큰둥하게 받아쳤다.에리는 더욱 분개하며 박민정을 향해 돌려 말했다.“민정아, 진짜야. 난 아무 문제 없어.”어떤 남자든 건강을 의심받으면 자존심이 상하는 법.옆에서 지켜보던 설인하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박민정도 꾹 참고는 있었지만 자꾸만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응응, 보니까 건강해 보이네.”그녀는 속으로 의아했다.‘아니, 에리 건강 상태가 나랑 무슨 상관이지? 왜 나한테 굳이 확인을 받아야 하는 거야?’박민정은 기억을 잃었지만 남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은 아직 이해하고 있었다.에리는 너무 과하게 잘해주고 있었다.결국, 박민정은 부드럽게 선을 그었다.“에리, 다음부터는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아. 앞으로는 인하 씨랑 약속 잡았거든.”말을 완곡하게 돌렸지만 에리는 바로 눈치챘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괜찮아! 다 같이 먹으면 더 재밌잖아.”그때, 연지석도 슬쩍 끼어들었다.“나도 낄게.”이제 정말로 ‘다 같이’가 되어버렸다.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어졌고 결국 네 사람은 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가 끝나고, 설인하가 먼저 자리를 털었다.“대표님, 저 사무실 가서 낮잠 좀 잘게요.”그녀는 더 이상 이 ‘수라장’에 있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설인하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지만 에리는 좀처럼 일어설 기미가 없었다.이를 본 연지석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대스타님이야 안 자도 된다지만 민정이까지 못 쉬게 하면 안 되잖
“민정이를 처음 만났을 때 전 민정이를 누나라고 불렀어요.”에리는 문득 풋풋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그땐 저도 아직 어리고 천진했죠. 민정이가 저한테 재능이 있다고 말해줬고 진짜로 친동생처럼 챙겨줬어요. 이것저것 가르쳐 주면서.”그녀는 나중에 그를 위해 직접 곡도 써 줬고 회사들을 돌아다니며 그를 위해 발 벗고 나서 줬다. 솔직히 말해 박민정이 아니었다면 그가 지금처럼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에리는 그 시절이 그리웠다. 박민정을 ‘누나’라고 부르던 때가.처음엔 그저 감사함이었다.하지만 점점 깨달았다. 세상에 박민정처럼 그를 존중해 주는 여자는 많지 않았고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그는 항상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됐다.“민정이는 제 청춘 그 자체예요.”에리는 담담하게 말했다.연지석은 그의 말에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요?”연지석이 입을 열었다.“민정이를 향한 에리 씨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존경심일 수도 있다는 거.”에리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평소의 건방진 태도를 되찾았다.“쓸데없는 참견하지 마세요.”그는 비웃듯 말했다.“제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스스로의 감정이 뭔지도 구별 못할 것 같아요?”그는 뿌리치듯 그 자리를 떠났고 연지석은 아이 같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쓸데없는 걱정을 했나 보군.”에리는 본성 자체는 나쁜 녀석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젊고 세상을 잘 모를 뿐이었다.그는 세상이 자기 뜻대로 흘러갈 거라고 믿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박민정도 결국 자기에게 마음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연지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민정이 지금까지 마음을 준 사람은 자신도, 에리도 아니었다.박민정은 한 번 무언가를 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게 사랑이든, 어떤 신념이든.사무실로 돌아온 연지석은 묵묵히 업무를 시작했다.한편, 설인하는 아직 잠이 들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그가 일하는
설인하는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곧 출근해야 하는데 더 이상 방성원과 실랑이를 벌일 여력도 없었다.그러나 퇴근 후, 그녀는 큰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딸아이가 사라졌다.설인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은정이는 어디 갔어요? 계속 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그녀는 다급하게 보모의 팔을 붙잡고 연신 물었으나 보모 역시 죄책감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저도 몰라요. 방성원 씨가 은정이를 혼자 데려가겠다고 하셨거든요. 그렇게 큰일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두 사람 모두 사라져 버렸어요.”방성원?설인하는 순간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렇다면 분명 방성원이 딸아이를 데려간 게 틀림없었다.아이의 안전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모를 향한 불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어떻게 그 사람한테 아이를 맡길 수가 있어요? 저한테 허락은 받았나요?”보모는 고개를 숙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죄송해요. 깜빡했어요.”“지난 1년 동안 아이 아빠가 종종 찾아왔고 은정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도 많았어요. 설마 아빠가 자기 자식을 해칠 리야 없다고 생각했죠.”그렇다. 방성원은 방은정의 아빠다. 아니, 그보다도 지금껏 아이에게 화 한 번, 큰소리 한 번조차 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큰소리조차 낸 적이 없었다.“그 사람은 은정이를 해칠 리 없어요. 하지만... 지금 이건 납치나 다름없다고요.”설인하는 초조한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급히 방성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차가운 자동 응답기 음성이었다.“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설인하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같았다.“날 차단했어...”그녀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물이 터질 듯이 차올랐다.그 모습을 본 박민정은 재빨리 말했다. “잠깐만요, 내 핸드폰으로 걸어봐요.”“네.”설인하는 박민정의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에는 ‘뚜... 뚜...’ 하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