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진서연이 상기된 얼굴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박민정에게 슬쩍 물었다.“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대?”그러자 박민정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데이트하러 가거든요.”‘데이트라...’그말에 문득 박민정과 이미 오랫동안 데이트를 하지 못했고 또 지금 각방까지 쓰고 있는 자신이 생각났다.“민정아.”“네?”박민정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아니면 우리도 오늘 밖에 나가서 데이트할까?”유남준의 물음에 박민정이 단번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안 돼요. 아직 처리해야 할 업무들도 많아서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없거든요. 게다가 아직 윤소현 씨가 예전에 회사 자금을 빼돌렸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내지 못했어요.”유남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자신보다 회사 일을 더 열심히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래, 그러면 다 하고 주변이라도 구경하러 가자.”그의 말에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유남준은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박민정을 지엔 그룹까지 데려다줬다.도착 후 차에서 내리려는데 박민정의 손을 갑자기 덥석 잡았다.“왜요? 또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유남준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답했다.“아니, 그냥. 저녁에 데리러 올게.”“먼저 가도 돼요. 그리고 굳이 운전 기사님더러 데리러 오라고 하지 마세요. 제가 혼자 갈 수 있어요.”그녀의 거절이 유난히 서운하게 느껴졌지만 유남준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 네가 편한 대로 해.”그리고 잡고 있던 손을 놓자마자 박민정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이때, 운전기사가 갑자기 떠나가는 박민정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사모님은 참 따뜻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그러나 유남준은 이상하게 이 말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았다.“그래요?”그리고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운전기사는 유남준의 반응을 보더니 갑자기 눈치 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네, 만약 제가 하루라도 제 아내를 데리러 가지 않으면 아주 난리를
서다희는 그들이 어렵게 모셔 온 사람을 단번에 바꾸라는 소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이지원도 당연히 그들의 대화가 다 들리는 상황이었기에 돌아가려는 유남준의 뒤를 쫓아가며 말했다.“유 대표님, 저도 예전의 일들에 대해 많이 반성하고 있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리고 계약서에도 이미 다 사인했어요.”이지원은 몇 가지 면접을 거쳐 겨우 IM 그룹의 모델이 될 수 있었다.그녀의 말에 유남준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졌다.“걱정하지 마. 계약했어도 위약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까.”이지원은 순간 멍해 있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유남준의 앞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사람이 속죄할 기회는 줄 수 있잖아요? 민정 씨도 그렇게 대표님을 용서해 준 거고요. 저는 예전에 단지 대표님을 좋아했을 뿐이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은 한 적이 없어요.”사실 유남준은 아직 박민정의 1년 전 실종과 이지원이 관련이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이지원을 곁에 남겨뒀던 원인도 혹시나 그녀가 박민정의 행방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더는 못 참고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난 더 이상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내 기분 망치지 말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이지원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두 주먹을 꽉 쥐고 답했다.“알았어요.”사실 이지원은 이번 기회를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유남준과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지금의 유남준은 그리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이지원은 다시 자기 차에 올라탄 뒤 하늘 위로 뻗은 IM 그룹의 빌딩을 올려다보며 씁쓸한 마음을 달랬다.“지원 씨, 어디로 모실까요?”옆에 있던 매니저가 작은 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이지원은 겨우 마음을 다시 진정시킨 뒤 그녀에게 말했다.“지엔 그룹으로 가.”“네?”이지원의 말에 순간 깜짝 놀랐다가 다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박민정이 한창 바삐 업무 보고 있는데 진서연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지금 이지원이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이지원은 박민정이 예전처럼 자기 말을 다 들어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수법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여기서도 쫓겨나다시피 회사에서 나온 이지원은 착잡한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는데 문득 멀지 않은 곳에 윤소현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재빨리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그녀에게 다가갔다.“윤소현 씨, 왜 여기에 혼자 서 있어요?”갑자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윤소현은 깜짝 놀랐다가 이지원인걸 알아채고는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며 되물었다.“혼자 서있든 말든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러는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데요?”이지원은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애써 참고 원래 광고 제의를 받았다가 모두 취소된 일을 윤소현에게 말해줬다.그리고 혹시나 윤소현이 그녀를 위로해 줄 줄 알고 살짝 기대했는데 위로는커녕, 오히려 이지원을 비꼬았다.“정말 한심하네요. 제가 지원 씨였다면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가지는 않았을 텐데.”여태껏 잘 참아왔던 이지원은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제가 아무리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변했다고 해도 남자한테 버림받은 적은 없어요. 제가 버렸으면 버렸지.” “당신!”윤소현은 화가 나던 참에 오늘 제대로 이지원을 혼내야겠다고 다짐했다가 문득 해야 할 일이 생각나 다시 분을 삭였다.“제가 지금 당신이랑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거든요. 그리고 민정이도 이제 얼마 가지 않아 지엔 그룹을 넘겨받을 텐데 나중에 예전의 일들이 다 기억나기라도 하면 당신은 그길로 끝장이란 사실만 알아둬요.”이지원은 아까까지만 해도 윤소현을 가볍게 말로 이겼다고 생각했다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순간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서도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사실 박민정이 돌아오고부터 이지원은 지금까지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고 매일 박민정이 모든 사실을 유남준에게 털어놓는 꿈을 꿨다.만약 진짜 유남준과 김인우가 모든 사실을 알고 그녀를 찾아오는 날에는 그냥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가요.”그렇게 차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가는
“이만 돌아가요.”이지원은 그제야 운전기사더러 돌아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매니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지원 씨, 혹시 방금 밖에 있던 사람이 윤소현 씨였나요?”그러자 이지원이 그녀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본 것들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이렇게 말하니 매니저는 그들의 행동이 더욱 의심스러워졌다.그저 레스토랑 밖에 윤소현이 있었던 것뿐인데 왜 이걸 말하지 말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지원도 사실 안에 있던 박민정이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대충 알 것 같았으나 이 일은 누구한테도 알릴 생각이 없었다.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는 박민정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박민정은 지금 모든 걸 손에 넣었지만 자신은 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에는 빈털터리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게 박민정의 타고난 운명이라고? 웃겨!’박민정이 죽어야만 모든 일이 그대로 묻혀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그렇게 이지원은 생각하다가 그만 차에서 잠이 들었다....지엔 그룹.정호철은 몇 번이나 박민정의 사무실 앞을 지나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박민정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진서연도 안 보였다.하여 호기심에 다른 비서에게 물었다.“대표님은 어디 갔어요?”“아까 프로젝트 때문에 운 대표님과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만난다고 하셨어요.”‘운 대표?’운제현이라는 사람은 예전에 윤소현을 엄청 마음에 들어 했던 사람이고 한때 두 사람이 아주 밀접하게 교류했었던 걸로 기억했다.‘그런데 왜 갑자기 대표님을 만나자고 찾아왔을까?’정호철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그 운 대표라는 사람 연락처 좀 줘요.”“네.”비서한테 받은 연락처대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으나 계속 부재중이었다.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정호철은 다시 비서에게 물었다.“혹시 어느 레스토랑이라고 말해줬어요?”비서는 다급해 보이는 정호철의 말에 빠르게 식당 위치까지 알려줬고 그는 서둘러 주소대로 차를 몰고 그
박민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려있었고 주변에서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그래도 사람 목숨인데 고작 몇억이 뭡니까? 적어도 20억은 줘야죠!”“20억 원?”귀에 익은 중년 남자 윤석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니요. 20억 달러!”사람들은 한창 뭔가를 흥정하고 있었다.20억 달러라는 소리에 윤석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가당키나 한 금액이라고 생각해요?”애초에 이만한 돈이 그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주기 싫으면 직접 처리하던지요.”가격을 제안했던 한세용은 다시 허리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꼬았다.“이번 일은 저희가 아주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해야 하는 일인데 아마 잘 처리한다고 해도 여기에 계속 머물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당신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모를 것 같나요? 그리고 과연 지엔 그룹의 대표님께 저 여자의 몸값으로 20억 원을 요구하면 저한테 줄까요?”“제 생각에는 20억이 아니라 200억도 기꺼이 주려고 할 겁니다.”윤석후는 왜 이런 사람에게 일을 부탁했는지, 순간 너무 후회스러웠다.그렇다고 해서 직접 처리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이렇게나 큰 액수는 지금 당장 구하기 힘들어요. 아니면 먼저 처리해 줘요. 그리고 해외로 출국하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입금해 드릴게요.”박민정은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누군가가 박민정을 죽이고 돈을 받으려는 상황이었다.“안 돼요!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어요? 먼저 돈부터 주세요.”한세용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세요. 돈만 주면 바로 저 여자를 처리해 버릴 테니까. 계속 살아있는 상태에서 제 쪽에 있는 것도 엄청 위험한 일입니다.”“조금만 기다려줘요. 전화 한 통만 하고 올게요.”윤석후는 어쩔 수 없이 윤소현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빌려보기로 했다.그러나 윤소현도 20억 달러라는 금액을 듣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지금 제가 그만한 돈이 어디 있겠어요? 혹시 그 사
“그, 그럼 이제 어떡해요? 이미 다 잡은 사람을 이제 와서 풀어주지도 못하잖아요.”부하는 그녀의 몸값이 지금 20억 달러나 되는데 이대로 풀어주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한세용이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풀어주면 안 되지. 그렇다고 다치게 해서도 안 되고. 돈만 받으면 바로 풀어주자.”“네?”부하는 자기 보스가 이렇게 배포가 작은 사람이란걸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방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였다.유남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진작에 죽였을 것이다.‘그나저나 대체 누가 나를 죽이려는 거지?’박민정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 차가운 바닥에 누운 채로 두 사람의 대화를 계속 들었다.그러다가 한참이 지난 후, 갑자기 밖에서 차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누군가가 우르르 차에서 내렸다.이때 윤석후가 황급히 뛰어오더니 한세용에게 말했다.“돈은 준비했으니 빨리 저 여자를 처리해요.”아까 윤석후의 전화를 받은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박민정을 이 세상에서 제거할 수만 있다면 돈이 얼마나 들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그러자 한세용은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저희가 잘 처리할 테니까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이렇게 가면 제가 마음이 안 놓이잖아요.”윤석후가 고집을 부리자 한세용은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저희를 믿지 못하는 거네요. 그렇게 믿음이 안 가면 그냥 직접 처리하세요.”윤석후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 늙은이라고 해도 아까부터 계속 불길한 예감이 들어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그런 거액을 들였는데 당연히 결과까지 봐야죠.”“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돈이 들어오는 즉시 저 여자를 죽이는 장면을 찍어서 영상으로 보내드릴게요. 그래도 못 믿겠으면 다른 방법을 찾든지 하시고요.”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이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란 것만 알아두세요.”“알겠어요.”윤석후는 어쩔 수
박민정이 몸을 돌려 다시 그에게 물었다.“또 무슨 할 말이 남았나요?”“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는데 영상 하나만 같이 찍어줘야겠어요.”박민정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자신이 맞아서 죽는 영상을 찍게 되었다.“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이제 가요.”박민정은 자리를 뜨려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저랑 같이 왔던 제 비서랑 경호원은요?”“아, 그분들은 잠깐 다른 곳에 옮겼는데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겁니다.”박민정은 그의 대답을 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그리고 밖으로 나와보고 나서야 이곳은 인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아까 한세용이 알려준 대로 박민정은 큰길로 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쭉 걸어갔다.너무 늦게 걸었다가 혹시나 방금 그 남자들이 마음이 바뀌어 따라오기라도 할까 봐 거의 달리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하늘도 점점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길은 온통 가시덤불이라 박민정의 팔과 다리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이대로 멈출 수 없었기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원래 여기에 큰 길이 있었는데 아까 한세용이 혹시나 지키는 사람이 없는지 조심하라고 했다.한 편.역시나 윤석후가 사람들을 데리고 큰길에서 은밀히 잠복하고 있었다.이때, 한세용이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다.“소현아, 이제 박민정도 죽었으니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할 거야.” 윤소현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서운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영상을 보면서 기뻐했다.“너무 잘됐어요. 아빠, 빨리 장 변호사 쪽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봐요.”그녀는 박민정을 납치하자마자 바로 장 변호사 쪽에도 사람을 보냈다.윤석후는 빠르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에게 말했다.“장 변호사도 이미 우리 쪽에서 잡아뒀대. 이제 그 사람이 상속권이 든 가짜 유언장을 만들고 정수미까지 깔끔하게 죽어주면 모든 일이 끝났어.”정수미의 얘기에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정호철이 마침 눈치채고는 빠르게 그녀를 부축했다.그리고 밖에 와보니 윤소현이 이미 차 앞에 서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엄마... 아니, 정 대표님. 아까 제가 영상 하나를 받았는데요.”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초조한 얼굴로 다급히 되물었다.“무슨 영상? 혹시 지금 민정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줬어?”윤소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보시기 전에 꼭 마음 준비를 해주셔야 해요.”그녀의 말에 정수미는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빨리 줘!”윤소현은 빠르게 영상을 틀어 정수미에게 보여줬고 정수미는 화면 속의 박민정을 본 순간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윤소현이 옆에서 위로하는 척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제 생각에는 민정이나 대표님께 원한을 가졌던 사람의 짓인 것 같아요. 그리고 대표님께서 지엔 그룹을 민정이한테 물려준다니까 더는 못 참고 손을 쓴 거고요.”그녀의 말은 온통 모순덩어리였다.그러나 정수미의 머릿속은 이미 뒤죽박죽인 상태라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이때,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정호철이 차분하게 물었다.“소현 씨, 그런데 이 동영상을 왜 소현 씨한테 보냈을까요?”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윤소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답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정호철도 그녀의 대답에 더는 캐묻지 않고 다시 정수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어쩌면 가짜 영상일 수도 있고 편집된 영상일 수도 있잖아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정씨 가문과 트러블이 있었던 회사는 없었어요. 경쟁 관계라고 해도 민정 씨의 목숨까지 위협할 만큼은 아니에요.”정수미는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아까 민정이 행적을 알아냈다고 하지 않았어?”정호철은 그제야 생각났는지 재빨리 답했다.“네, CCTV에서 민정 씨를 데려갔던 그 차량을 찾았다고 했으니까 이제 그 차가 어디로 갔는지만 쫓아가 보면 될 것 같아요. ”“그래.”정수미는 힘겹게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