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는 박민정이 최근에 수술해서 지금 정수미와 같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는 차창을 내려 담담한 얼굴로 한참 동안 병원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러다가 핸드폰을 꺼내 박민정의 번호를 눌렀지만 통화버튼까지 누를 용기는 없었다.유남우가 차를 몰고 다시 돌아가려던 이때, 박민정과 유남준이 한껏 다정한 모습으로 병원에서 나오는 걸 발견했다.순간 유남우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쥐더니 미친 사람처럼 안광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그러나 이쪽 상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두 사람은 먹을거리 사러 나왔다가 갑자기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다행히 유남준이 눈치가 빨라 박민정을 단번에 자기 쪽으로 잡아당겨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박민정도 깜짝 놀랐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차는 어느새 두 사람과 겨우 1센티미터만 사이에 두고 세워져 있었다.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심장이 떨려 한껏 창백한 얼굴로 유남준을 바라보자 그는 다정하게 박민정부터 안심시켰다.“괜찮아, 너무 무서워하지 마.”귀가 먹먹해서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지만 느낌상 자신을 안심시키고 있는 듯싶었다.“네네.”유남준은 다시 살기 돋친 얼굴로 그 차를 향해 쏘아보았고 유남우는 그대로 핸들을 돌려 자리를 떴다.유남준은 비록 운전석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차 번호를 기억한 뒤 재빨리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차 번호 하나 조회해 봐.”그 뒤 박민정과 유남준은 먹을거리 사러 갔다가 다시 병원에 돌아갔다.“푹 쉬어, 난 일하러 갈게.”“네.”유남준이 박민정에게 이불을 덮어주자 박민정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정수미는 옆에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유남준은 회사로 돌아왔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차 주인에 대해 물었다.“유남우의 차라고?”서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처 CCTV를 확인해 보니 확실히 유남우 씨였습니다.
한 술집 안.고현문은 전화를 끊고 어두운 얼굴로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무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도련님, 무슨 일 있습니까?”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유남준이 나보고 유남우와의 협력을 끊으라고 했다.”“뭐라고요? 아니, 유남우는 유 대표 친동생 아닌가요?” 누군가 의아해했다.고현문이 답하기도 전에 다른 이가 나섰다.“재벌가가 다 그렇지. 혈육이고 뭐고 아무 의미 없어. 저 두 형제, 사실상 경쟁자잖아.”“그렇군.”고현문은 아예 흥미를 잃었고 술을 따라주던 여자를 거칠게 밀쳐내며 말했다.“다 꺼져.”그의 싸늘한 목소리에 여자들은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빠져나갔다.고현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는 여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1~2년 전에도 진씨 가문의 영애가 그와 얽혔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일이 있었다.“도련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어차피 두 사람 다 사촌 아닙니까? 그런데 누구 편을 드시려고요?”고현문은 당연히 유남우를 돕고 싶었다. 사촌이긴 해도 늘 유남준에게 밀려 비교당하는 신세였다. 이번 기회에 유남준을 뛰어넘어 가족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유남준과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었다. 혹여 일이 틀어지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당연히 유남준 말대로 해야지.”그가 담담하게 답하자 주변에서도 맞장구쳤다.“그렇죠. 지금 유남준은 IM과 호산 그룹의 대표인데 유남우는 아직 한참 부족하죠.”그 말을 듣고도 고현문은 더 이상 술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방을 나섰다.한편, 유남우는 병원을 나선 뒤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차를 몰아 홍주영의 고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홍주영의 고향은 멀었는데 차로 네댓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그는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그때, 고현문에게서 전화가 왔다.잠시 화면을 보던 그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고현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유남준이 나보고 너랑
홍주영은 그가 다가오자 숨기지 않고 말했다.“도련님이에요.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도련님...“유남우?” 하민재가 되물었다.“네.”홍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하민재는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는 홍주영에게 기댄 채 투덜거렸다.“사장이면 사장, 유 대표면 유 대표, 유남우면 유남우. 도련님 좀 그만 부르면 안 돼요?”듣기만 해도 신경이 거슬렸다.하지만 홍주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요? 그냥 호칭일 뿐이잖아요.”하민재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호칭 문제가 아니거든요.”“하지만 나는 익숙한 걸요.”“그러면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요. 그냥 ‘유남우’라고 하면 안 되겠어요?”홍주영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그래요, 민재 씨가 듣기 싫다면 민재 씨 앞에서는 그렇게 안 부를게요.”이미 둘은 약혼한 사이였다. 이제부터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테니 상대의 기분을 신경 써야 했다.하민재는 홍주영이 그렇게 선뜻 동의할 줄 몰랐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끌어안더니 얼굴을 낮춰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주영 씨는 정말 착해요.”홍주영은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치 나무토막이 된 것처럼. 특히 뺨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하민재는 그녀의 경직된 반응을 눈치채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왜 그래요? 뭔가 이상한데요?”홍주영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눈앞의 잘생긴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갑자기 왜...”그녀는 얼굴을 돌린 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가슴이 두근거려 말을 잇기도 어려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하민재는 피식 웃었다.“주영 씨는 내 미래의 아내잖아요. 뽀뽀도 못 해요?”그러더니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홍주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나머지 그를 밀쳐냈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그만 뒤로 넘어지더니
하민재는 홍주영이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우리 약혼한 사이잖아요. 뭐가 문제에요? 게다가 걱정 마여, 나는 절대 신사적인 사람이니까.”신사적인 사람... 스스로를 신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짜 신사일까?홍주영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안 돼요. 결혼하고 나서 여기서 지낼게요.”그녀는 평생 할머니와 함께 살아왔고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남자 집에서 머무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하민재는 한참 후에야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내가 잠시 후에 주영 씨랑 할머니를 모셔다드릴게요.”“네, 고마워요.”그녀는 예의 바르고도 사무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그 말에 하민재는 다시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불만을 토로했다.“난 주영 씨 약혼자예요. 이제 고맙다는 말 좀 하지 마요. 그냥 나한테 막 시켜요, 데려다 달라고.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라고요. 알겠죠?”홍주영은 그가 술에 취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투정 부리는 아이 같기도 했고 그 모습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그를 다시 쳐다보다가 결국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알겠어요.”“그래야죠.”하민재는 다시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홍주영은 그가 또다시 뺨에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피곤했을 뿐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그 순간, 마침 할머니 두 분이 나왔고 그들은 그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아이고, 저 녀석. 저렇게 커서도 주영이한테 기대서 자네.”하민재의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사진 속에서 홍주영은 얼굴이 새빨갛고 하민재는 마치 아이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홍주영의 할머니도 웃음을 터뜨렸다.“주영이는 맨날 결혼 안 한다고 하더니, 내가 보기엔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
이튿날 아침, 홍주영은 할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도주로 돌아갔다.집 앞에서는 하민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술을 마신 탓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기분만큼은 한껏 들떠 있었다.홍주영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곧장 다가가 그녀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내가 들게요.”“고...”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그녀는 어제 하민재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네, 좋아요.”그 말에 하민재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차에 올랐다.운전기사가 도와주려 했지만 하민재가 눈짓 한 번 주자 곧바로 손을 거뒀다. 이건 분명 자기 아내 될 사람 앞에서 점수를 따려는 사장님의 의도일 터였다. 그러니 굳이 끼어들어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차에 오르자마자 홍주영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가 화면을 열어보니 유남우였다.[언제 도착해?]답장을 하려던 찰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주영 씨, 먼저 말해 두지만 주영 씨 핸드폰을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홍주영이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네, 상관없어요.”사실 그는 억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하민재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보여준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그러자 하민재는 슬쩍 말을 돌렸다.“근데 주영 씨 이번에 휴가 다섯 날이나 썼잖아요?”“네, 연차 쓴 거예요.”홍주영은 평소에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고 이번이 유일하게 길게 쉰 경우였다.“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딱 다섯 번째 날인데요? 근데 벌써 출근한다고요?”하민재는 뭔가 수상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의 직감이란 게 가끔은 무서울 만큼 정확할 때가 있다.홍주영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그러나 하민재는 곧바로 반박했다.“주영 씨는 그냥 비서예요. 주영 씨가 없다고 회사가 굴러가지도 않는 것도 아니고.”그는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회사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마침 택배를 가지러 나왔던 비서들이 멀리서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홍 비서는 정말 운도 좋네.”“그러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재 씨랑 엮이게 된 거야?”“뭐가 어때서? 민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다 알잖아. 그리 좋은 평판은 아니지. 여자도 많았고.”“그러게. 아마도 홍 비서가 유 대표님 따라다니면서 술자리에서 만난 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패했는데 그 와중에 홍 비서는 성공했네.”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말끝마다 시샘이 묻어나왔는데 멀리서 들어도 느껴질 정도였다.하지만 홍주영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무덤덤한 성격이었고 가까운 친구도 거의 없었다. 특히 그런 자리에서 인맥은 더더욱 만들지 않았다.비서들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까의 험담은 없던 일처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홍 비서님, 약혼 축하드려요!”홍주영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고마워요.”그러자 한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결혼식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아마 설 즈음이 될 것 같아요.”양가 할머니들이 설날이 가장 흥겹다며 날짜를 그렇게 정하자고 했다.정말 결혼을 한다는 말에 비서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명문가의 사모님이 될 사람이었다.“홍 비서님, 결혼식 때 저희도 초대받을 수 있을까요?”하씨 가문에서 열리는 결혼식이라면 하객으로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인맥을 쌓을 기회였다. 비서들은 당연히 그녀가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대놓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홍주영은 단호했다.“죄송해요. 저는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초대할 생각이에요.”그 한마디에 비서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거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홍주영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사라지자 비서들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별
홍주영은 유남우의 말을 들으며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하민재는 여러 여자와 함께 있었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여자들은 모두 달랐다.그녀는 사진을 꽉 쥐었다. 마음이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민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지금 그녀의 약혼자였다. 그녀의 약혼자로서 이렇게 많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겠는가?그러나 약혼 전후로 하민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홍주영은 고개를 들어 유남우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도련님, 제 사적인 문제입니다. 신경 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또한, 저는 도련님께서 제 약혼자를 조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도련님께서 조사하신 것들은 제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던 내용이에요.”홍주영은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결정이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그녀는 이미 하민재에 대해 충분히 알아본 후에야 이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유남우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홍 비서, 알다시피 그런 남자가 한 여자에게 마음을 정착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지 마. 바람둥이가 변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홍주영은 손을 꽉 쥐었다.“충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어요. 저는 민재 씨가 저 때문에 변할 거라고 기대한 적 없어요. 저희는 단지 결혼이 필요했고 서로에게 적합했을 뿐입니다.”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 공간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도련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홍주영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더 이상 볼일이 없으시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막 집에 왔는데 아직 정리도 못 했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유남우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나가버렸다.유남우는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남았고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과거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 작은 소녀가 점점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