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밤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유남준은 박민정을 뒤에서 꼭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박민정은 머리맡에 둔 작은 유리병을 보고는 드디어 떠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그 유리병 안에는 드디어 그녀가 얻고 싶었던 것이 들어있다.박민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유남준이 더욱 세게 안아왔다.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일단 그 물건을 침대 아래 숨겨두고 내일 유남준이 출근하면 다시 꺼내기로 했다.그러고는 몸을 돌려 깊은 잠에 빠져있는 유남준을 바라봤다. 괜히 죄책감이 밀려왔던 그녀는 속으로 그에게 말했다.‘아까 미안하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어요. 그 이유가 죽은 척하고 당신을 떠난 것에 대한 건 아니었지만...’지금 그녀의 행동은 유남준을 속이는 것이 된다.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 아이를 곁에 둘 수 있으니까.다음날, 날이 밝아오고 유남준은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품에는 아직 박민정이 있었고 이에 안도감이 들어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그러다 문득 그녀의 매끄러운 등에 오래된 상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형태로 봐서는 자상인 듯했다.그때 박민정도 잠에서 깼고 유남준은 그녀에게 물었다.“등에 이 상처는 뭐야?”박민정이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원망과 슬픔이 가득 들어있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기억 안 나요?”이 상처는 그때 칼을 맞을 뻔한 그를 구해주려다가 생긴 것이었다.그런데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유남준과 김인우는 정말 친구가 맞나 보다. 두 사람 다 똑같이 은혜도 모르는 인간들이었다.유남준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언제 생긴 건데?”박민정은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열일곱 살 때요.”즉 유남준이 유씨 가문에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할 때였다.당시 그 범인이 유씨 가문에서 보낸 것인지 아니면 라이벌 회사에서 보낸 것인지는 몰랐지만 유남준은 하마터면 칼에 맞을 뻔했고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유씨 가문 사람들조차 알고 있는 일을 당사자인 그는 까맣게 잊어버렸
박민정은 나쁜 짓을 하고 들킨 아이 얼굴을 한 채 그와 눈이 마주쳤다.하지만 유남준은 화를 내지 않았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이제 알려 줘. 네가 원하는 게 뭔지.”박민정은 그와 금방이라도 코가 닿을 거리에서 유남준의 시선을 마주하며 거짓말했다.“그냥 단순히 당신과 하룻밤 보내고 싶었을 뿐이에요.”그녀는 또 거짓말을 하고 있다.유남준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언뜻 슬퍼 보이기도 했다.“그럼 그 다음은? 이제 날 떠나려고?”박민정은 그에게 꽉 잡힌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파 났다.“나는...”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유남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너는 내 허락 없이 진주시에서 절대로 못 나가. 벌써 잊었어?”박민정의 몸이 살짝 떨렸다.“잊은 적 없어요. 당신 돈 다 갚고 떠나겠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윤우가 여기 있는데 내가 몰래 떠날 리가 없잖아요.”“그 많은 돈은 어떻게 마련하게?”유남준이 물었다.박민정이 해외에서 꽤 유명세를 떨치는 작곡가인 건 맞지만 그가 준 돈을 다 갚으려면 아직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돈은 내가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어요.”박민정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어 말했다.“당신 돈 갚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하지만 유남준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힘을 더 꽉 주었다.“아파요.”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고 나서야 그는 손에 힘을 풀었다.박민정은 이불로 몸을 가리며 천천히 뒤로 갔다.“그럼 난 먼저 씻을게요.”원래 그녀는 옷을 입으려고 했지만,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의 옷을 보니 전부 찢어져 있고 유남준의 옷과 함께 뒤엉켜 있는 바람에 이불이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이불을 돌돌 말은 채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유남준이 다시 한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뭐가 그렇게 급해?”그의 목소리는 살짝 젖어있었다.“네가 전에 그랬지? 나와 부부처럼 지내고 싶다고. 손도 잡고 포옹도 하고 키스도 하고...”
이혼을 결심한 이후로 박민정은 유남준과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유남준은 그녀의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내 이름 불러줘.”박민정의 빨간 입술이 서서히 움직였다.“남준 씨.”유남준은 다시 한번 그녀에게 입 맞출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들려오는 노크 소리 때문에 아쉽게도 분위기가 깨져버렸다.도우미가 두 사람의 식사를 올려왔다.그리고 한 시간 뒤, 식사를 마친 후 박민정이 물었다.“오늘 정말 출근 안 해도 되겠어요?”유남준은 그녀가 자신을 회사로 보내려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응, 직원들이 알아서 해 줄 거야.”사실 처음부터 이래야 했다. 한 회사의 대표가 많은 것을 끌어안기보다는 적당히 부하 직원에게 업무를 나눠줄 줄도 알아야 한다.박민정은 조금 곤란해졌다. 그가 집에서 나가지 않으면 정자가 들어있는 그 유리병을 찾기 힘들 테니까.유남준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내가 회사로 갔으면 좋겠어?”“아뇨.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박민정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이번 달은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이야. 너한테 더 신경 쓸 거니까.”일에서 손을 뗀다고...박민정은 조금 믿기 힘든 얼굴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참, 너 전에 신림현으로 가고 싶다고 했었지?”그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건네자 컵을 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두 사람이 막 결혼했을 당시 박민정은 자주 그에게 자신이 크고 자란 곳을 언급했다.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걸 공유하고 싶었으니까.“그랬죠.”“그럼 이따 거기로 갈 거니까 준비해.”한 달간 진짜 부부가 되기로 약속은 했지만, 정확히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하여 그는 문득 누군가가 허니문 얘기를 했던 것이 생각나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이다.박민정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알겠어요. 지금 준비할게요.”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다가 조하랑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걸려온 것을 봤다
신림현으로 가는 길에 장대비가 내렸다.박민정은 조수석에 앉아 우연히 운전석에 있는 유남준의 옆얼굴을 보고는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차창 밖을 바라봤다.솔직히 유남준을 얻기 전에는 그의 곁에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그가 있었다.유남준은 아주 잠깐 자신에게 머물었던 박민정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휴게소에 거의 다다를 때 그녀의 손을 잡았다.“네가 조용하니까 적응이 안 돼.”그에 박민정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전에는 나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그 말에 박민정은 쓰게 웃었다.“그런 내게 말 많은 거 싫다고 한 건 당신이었죠.”그녀의 말에 차 안의 분위기가 바로 차갑게 가라앉았다.박민정은 괜한 얘기를 했다는 생각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여기 휴게소에서 조금만 더 가면 단풍나무 숲이 보일 거예요. 되게 예뻐요.”벌써 가을이 훌쩍 다가온 시점이라 해가 빨리 지기 시작했고 비 때문인지 날씨도 점점 추워졌다.단풍나무 숲을 지나갈 때 저녁이기도 하고 비도 와 날이 어둡기는 했지만, 다행히 예쁜 단풍나무는 볼 수 있었다.그리고 이때 유남준은 실로 오랜만에 활짝 웃는 박민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마치 순진무구한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단풍나무 숲 풍경은 금세 사라졌고 박민정은 심심함을 달래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배터리가 없는 바람에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그때 유남준이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이거 써. 비번은 없어.”박민정은 조금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휴대폰을 건네받았다.그의 핸드폰에는 업무에 필요한 앱들과 연락할 때 필요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노래를 듣는 앱도 없었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최근 뉴스를 확인하러 포털에 들어갔다.그러자 인기 검색어에 이지원의 [공개 사과문]이라는 다섯 글자가 보였다.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인 줄 알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유남준이 그녀에게
은은한 불빛 아래 박민정은 너무나도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유남준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고 박민정은 이불을 꽉 쥐었다.“오늘은 힘들어서 싫어요.”유남준은 잠깐 멈칫하더니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유남준의 품에서 규칙적으로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남준 씨...”“응.”“우리가 처음 포옹한 게 언제인지 기억해요?”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유남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그를 꽉 끌어안은 건 두 사람의 첫날밤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때 유남준은 그녀의 기분을 헤아리려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매몰차게 떼어놨었다.박민정이 그때 일로 자신을 원망하려는 건 줄 안 유남준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때와 같은 일은 다시는 없을 거야.”그에게 이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사과나 다름없었다.한편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두 사람이 처음 포옹한 건 아직 학생이었을 당시 그가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괴롭힘당하던 그녀를 구해줬을 때였다.그런데 그때와 같은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니?하지만 박민정은 이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얘기했다.“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예요.”유남준은 그녀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기억으로 박민정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부터 자신을 좋아했다. 그런데 갑자기 결혼한 첫날밤에 자신을 좋아하게 됐다니?그의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민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그때는 남준 씨가 정말 멋져 보였어요. 그리고 나는 그런 당신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결혼 같은 건 꿈도 꿔본 적이 없어요.”유남준도 그 어린 여자아이와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박민정을 처음 만났던 건 그녀가 10살이었을 때였다. 그때의 그녀는 여리고 가녀렸지만, 얼굴에 띤 미소만큼은 그 누구보다 빛이 났다.“우리는 다
박민정은 그 말에 유남준의 손을 잡고 포옹한 후 가볍게 입까지 맞췄다.그렇게 끝난 줄 알고 방에 들어가자 유남준이 손에 들린 떡볶이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그녀의 머리를 잡고 짙은 키스를 해왔다.유남준은 방금 스킨십을 해오는 박민정의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그는 괜히 심통이 나 그녀의 입술을 꽉 깨물어버렸다.박민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밀치려고 하자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아버렸다. 이에 그녀는 복수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입술을 똑같이 깨물어버렸다. 그러고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때쯤 입술을 뗐다.유남준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속삭였다.“내 얼굴 똑바로 보고 내 이름을 불러.”박민정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의 입술은 그녀 때문에 빨갛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남준 씨.”평온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두 눈에 언제나 자신만 담던 여자아이의 눈이 아니었다.유남준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는 눈가가 빨갛게 변해버린 채 그대로 박민정을 안아 들었다.그는 그녀가 발버둥 치는 것도 무시한 채 그렇게 소파에 올려놓았다.“내 이름을 불러.”유남준은 한없이 다정했다가 또다시 지금처럼 발작했다.“남준 씨.”담담한 그녀의 말투에서는 역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유남준은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내리치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그는 아무 말 없이 박민정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뜨거운 행위를 마치고 보니 그가 사온 떡볶이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있었다.유남준은 직원에게 부탁해 다시 사 오라고 하려 했지만, 박민정이 그를 제지했다.방 안에는 전자레인지가 있었기에 데워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데운 후의 떡볶이는 그녀가 알던 그 맛이 아니었다.그러다 문득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자조하듯 웃었다. 두 사람 사이는 마치 이 떡볶이처럼 다시 데운다고 한들 처음 같은 느낌은 아닐 것이다.아침을 먹은 후, 유남준은 차를 몰아 박민정과 함께 그
방안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박형식의 유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중 그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의 아버지가 직접 그린 것이었다.박형식이 죽은 후 그녀의 어머니인 한수민과 동생 박민호는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종국에는 집안에 돈이 되는 물건들은 전부 다 경매에 넘겨버렸다.박민정이 귀국한 이유 중에는 그의 아버지 유품들을 되찾기 위함도 있었다. 특히 자신을 그린 이 작품을 말이다.박형식이 이 그림을 그렸을 때 그녀는 막 10살이었고 흰색 원피스를 입은 채 베란다에 앉아 꽃을 들고 웃고 있었다.박민정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림을 향해 다가갔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흰색 머리로 뒤덮인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녀에게 그림을 그려줄 때 그의 아버지는 항상 인자하고 다정한 얼굴을 했었다.박민정은 손을 들어 그림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다시는 못 찾을 줄 알았는데...”그녀의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이 그림은 특별함 따위는 없는 그림이라 분명히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유남준이 찾아낼 줄이야...유남준은 박민정의 표정을 보며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걸 선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이것들 전부 두원 별장으로 옮겨가도 돼.”그는 그녀가 두원 별장을 떠나기 싫어지도록,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집에 들이고 싶었다.박민정은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고마움 가득 한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고마워요.”“그러니까 앞으로는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을 해. 괜히 이상한 투정부리지 말고.”이상한 투정...그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박민정의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식었다.유남준은 이때다 싶어 블랙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네가 원하는 대로 써.”두 사람이 결혼했을 당시 유남준은 항상 서다희를 통해 그녀에게 생활비를 주곤 했었다. 그러다 박민정이 떠나고 나서야 그녀가 서다희가 건네준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박민정은 눈앞에 놓인 카드를 보며 전혀 기
펑! 펑!예쁜 불꽃들이 하늘에서 반짝였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다.그때 옆에 있던 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성은 빨개진 얼굴로 수줍어하는 여성의 손을 잡고 평생 같이하자고 외쳤다.박민정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문득 자신도 가슴 뜨거운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유남준에게 반한 뒤로 그녀는 자신에게 구애해오는 남자들은 전부 무시해버렸고 그렇게 연애 한번 하지 못한 채 그와 결혼을 했다.그러니 달콤하고 애틋한 연애란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그녀는 눈물이 앞을 가려오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빠, 나 후회해요.”유남준과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8시 반이 되고 계속 될 것 같던 불꽃놀이도 끝이 났다.사람들이 서서히 돌아가고 서다희도 마침 박민정을 데리러 이곳에 도착했다. 그는 강변에 홀로 남겨진 쓸쓸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며칠 전 자신의 약혼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려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있어?”이 순간, 서다희는 박민정을 동정했다.그는 차를 갓길에 세우고는 천천히 박민정의 곁으로 다가왔다.“민정 씨, 집까지 모시겠습니다.”박민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실망감이 가득한 눈길을 거두어들이고 애써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고마워요.”차에 올라탄 후 서다희는 히터를 조금 높게 틀었다.몇 년 동안 해외에 있으면서 박민정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여린 편으로 특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가뜩이나 허약한 몸이 후 불면 날아갈 듯했다.서다희는 유남준을 대신해 그녀에게 해명했다.“이지원 씨가 사생팬에게 습격을 당했어요. 응급 수술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대표님 얼굴이 보고 싶다는 것이였어요...”사생팬...박민정이 쓰게 웃었다. 유남준이라면 조금만 조사해도 임수호가 그녀의 사생팬이 아니라는 걸 알텐데.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