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민기 씨한테서 들었어. 그 여자 이름이 최민아라고 하더라. 정말 박민호를 바꿔줄 수 있었으면 좋겠네.”사실 박민정이 가장 걱정하는 건 박민호가 최민아에게 상처 입히는 일이었다.박민정은 그녀처럼 착한 여자가 박민호 같은 사람한테 또다시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바뀔 거예요. 보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진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박민정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넸다.“고마워.”...한편, 박민호는 음식을 사서 병원으로 재빨리 돌아왔다.병실 안에서 최민아는 억지로 일어나려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눈앞이 까매지며 바닥으로 쓰러질 뻔했다.그 모습을 본 박민호는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들고 있던 음식을 내팽개치고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왜 갑자기 일어났어요? 화장실 가려고요?”박민호가 다급하게 물었다.시야가 또렷해진 최민아는 자신이 박민호 품에 기대어 있는 걸 깨닫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냥 조금 걷고 싶어서...”그녀는 얼른 침대 난간을 붙잡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박민호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의식하지 못한 채 천천히 팔을 풀었다.“조심해야 해요. 의사 선생님이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일어날 땐 누가 옆에서 잡아줘야 한다고 했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래야 기운 차리죠. 안 그러면 저혈당 오겠어요.”박민호는 그렇게 말하며 방금 바닥에 떨어뜨린 도시락을 주우러 갔다.그는 그제야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국물이 다 쏟아졌다는 걸 깨달았다.“아, 아깝네요. 그래도 조금 남았어요.”그는 도시락을 주워 조심스럽게 병실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그는 반찬들을 전부 최민아 앞에 놓고 자신은 흰쌀밥 하나만 앞에 두었다.“민호 씨.”“네? 왜요?”박민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최민아는 정말로 궁금했다.‘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걸까? 나한테 뭘 바랄 것도 없을 텐데...’박민호는 순간 멍해졌다.그는 최민아를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사실
박민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누나 안 찾아갈게요.”그를 바라보는 최민아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했다.“사실 내 말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잖아요.어떤 사람은 형제자매한테 도움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가족끼리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요. 정말 너무 힘들면 민호 씨 판단에 따라요. 나중에 후회하면서 제 탓하지 말고요.”박민호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요. 저는 민아 씨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남자가 맨날 누나한테 손 벌리는 것도 우습죠. 전에도 말했다시피 정신 차릴 거예요. 벌써 3천만 원 넘게 모았잖아요?”그는 최근에 정말 죽어라 일했다.접대 자리에 불려 다니며 술에 만취하는 날이 다반사였고 3천만 원은 그렇게 버틴 끝에 모은 돈이었다.사회에 나와 직접 일하면서 박민호는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이전엔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날려버렸는지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그 돈은 지금의 그로선 평생 벌어도 못 갚을 액수였다.최민아는 진심 어린 그의 말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그래요. 그거면 됐어요.”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비록 열은 내렸지만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무거웠다.“배고프지 않아요? 밥 좀 사 올게요.”박민호가 다정하게 물었다.최민아는 그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며 조금 미안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말을 듣고 화내며 마치 어린애처럼 절교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조금 배고프네요.”“지금 바로 사 올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아무거나 괜찮아요.”최민아는 원래 음식에 별로 까다롭지 않고 배만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박민호는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이 기분 좋게 병실을 나섰다.하지만 그는 주변엔 이미 그를 감시하는 이들이 있고 그의 모든 동선은 곧바로 박민정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박민정은 다시 한번 그 낯선 번호가 박민호에게서 온 연락이라는 것을
병실 밖으로 나온 박민호는 한참을 망설이다 핸드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병원 창밖에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이번 생에 그 돈을 다 갚는 건 불가능해. 내가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박민정뿐이야.’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이런 식으로 박민정에게 기대는 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엔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박민정을 제외하고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한편 박민정은 전화기에 뜬 낯선 번호를 확인하곤 곧바로 누군지 짐작했다.그녀의 개인 번호는 보안이 철저해 스팸 전화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아는 사람만이 연락해 왔다.그러니 낯선 번호의 출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박민정은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박민호는 전화를 몇 차례나 걸었지만 답이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왜 안 받지? 설마 번호를 바꾼 건가?”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된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진주시에 직접 가는 수밖에 없겠네.”곧 설날이 다가오고 있었다.박민호는 박민정이 명절이라는 특별함을 봐서라도 적어도 가족으로서 도와줄 거라고 믿고 싶었다.최민아는 병실로 돌아온 박민호를 향해 재빨리 물었다.“아까 말한 방법이라는 게 대체 뭐예요? 설마 나쁜 짓 하려는 건 아니죠?”“당연히 아니죠.”박민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럼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큰돈을 마련하려고요?”최민아는 집요하게 물었다.그녀는 무슨 일이든 끝까지 캐묻는 성격이었다.박민호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누나한테 부탁해 보려고요. 우리 누나는 돈 많아요. 내가 진 빚쯤은 누나한텐 별거 아니에요.”박민호가 누나에게 도움을 청하려 한다는 말에 최민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녀는 박민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병실 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묘하게 가라앉았다.박민호는 무심한 성격
구급차는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했다.박민호는 최민아를 안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녀를 병원에 무사히 데려온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의사는 최민아를 진찰한 뒤 약을 처방하고 곧바로 입원 조치를 취했다.“고열에다가 독감까지 걸렸네요. 도대체 왜 이제야 데려오신 거예요?”의사가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박민호는 얼떨떨했다.“독감이요?”의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최소 이틀에서 사흘은 됐어요. 몰랐어요?”박민호는 고개를 저었다.“전혀 몰랐습니다.”알았더라면 진작 병원에 데려왔을 터였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두 분 다 너무 태평하신 거 아니에요? 더 심각했으면 어쩔 뻔했어요.”그렇게 말한 뒤 의사는 자리를 떴고 박민호는 병상 옆 의자에 앉아 묵묵히 최민아의 곁을 지켰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민아는 천천히 눈을 떠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주위를 둘러보니 하얀 이불과 병원 기기들,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확실히 느껴졌다.“지금 병원이에요?”‘분명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언제 병원에 온 거지?’박민호는 그녀가 깨어난 걸 보자 서둘러 따뜻한 물을 건넸다.“드디어 열이 내렸네요. 정신 차리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그는 목이 메어오는 듯했다.최민아는 박민호의 말을 통해 자신이 열이 심하게 나서 병원에 실려 왔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됐어요. 전 괜찮으니까 그냥 집에 가요.”“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사 선생님이 독감에 폐렴 증상까지 있다고 하셨어요. 며칠은 입원해서 지켜봐야 한대요.”박민호가 단호하게 말했다.“며칠이나요?”최민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병원이었다.치료보다도 병원비가 무서웠고 겨우 모은 돈이 순식간에 날아갈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괜찮아요. 저 진짜 멀쩡해요. 그냥 집에 가요.”그녀는 몸보다 지갑이 더 걱정이었다.‘그냥 감기일 뿐이잖아? 심
“왜 그래요? 입맛 없어요?”박민호가 걱정스럽게 묻자 최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것 같아요. 먼저 한잠 자고 밥은 점심쯤에 먹을게요.”“그래요. 얼른 한잠 자요.”박민호가 서둘러 말했다.자리에서 일어선 최민아는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이 밀려와 거의 쓰러질 뻔했다.그녀는 단지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세를 바로잡은 뒤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침대에 누운 최민아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박민호는 익숙하게 집 안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마쳤다.예전에는 정리나 설거지 같은 건 손도 대지 않던 그였다.손에 물 한 방울 묻히기 싫어했던 그가 이렇게 된 건 다 최민아 덕분이었다.처음엔 당연히 하기 싫어했지만 최민아는 단호했다.말 안 들으면 현관문에 세워두거나 설거지 안 하면 잠도 제때 못 자게 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박민호도 차츰 익숙해졌고 이제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게 되었다.정리를 마친 박민호도 잠깐 쉬기로 했다.그들의 일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이었기에 낮에 잠을 보충하는 것은 필수였다.박민호가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 위에서 최민아가 잠꼬대하기 시작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꼭... 제가 꼭 고쳐드릴게요. 제발... 저 두고 떠나지 마세요.”흐릿하게나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박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민아를 바라보았다.“민아 씨.”박민호가 조용히 불렀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녀의 얼굴은 불에 덴 것처럼 새빨갰다.‘전기난로가 너무 강했나? 난 딱 적당한 것 같은데?’박민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그녀의 이마는 펄펄 끓을 정도로 뜨거웠다.‘난로 때문이 아니야!’박민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열 나잖아요!”그가 이마에서 손을 떼려는 순간 최민아가 손을 들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아빠, 엄마... 가지 마세요.”최민아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자 그는 순간적
“그럼 지금 볼 수 있을까요? 보고 싶어요.”진서연은 약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정민기는 병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아직 입원 중이라는 걸 진서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요. 저녁에 화상 통화해도 괜찮을까요?”정민기가 다정하게 물었다.진서연도 더 이상 어리광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좋아요. 저도 이제 일해야 해요. 그리고 보스한테도 민기 씨 괜찮다고 말씀드려야 해요. 보스도 저처럼 많이 걱정하셨거든요.”정민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두 사람은 아쉬운 마음으로 통화를 종료했다.진서연은 곧장 박민정에게 정민기가 며칠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다.박민정도 처음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상황을 파악한 뒤 진서연에게 말했다.“이제는 정말 안심해도 되겠네?”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네.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최근 며칠 동안 진서연은 제대로 잠도 못 자며 지냈다.“그런데 좀 고민돼요. 보스, 제가 민기 씨한테 너무 부족한 사람 아닐까요?”진서연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전에는 정민기와 자신이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정민기는 이제 정씨 가문의 후계자이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집안의 딸일 뿐이었다.“서연아, 어울리고 말고는 집안 환경이 다가 아니야.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한다면 그걸로도 충분한 거야.”박민정의 말에 진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됐어. 이제 걱정 내려놔.”박민정이 덧붙였다.진서연은 요즘 들어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걱정이 많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보스, 정말 감사합니다.”“우리 사이에 이 정도쯤이야.”...눈이 펑펑 쏟아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며 처마 위며 눈이 두껍게 쌓였다.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또 다른 도시에서 박민호가 전기난로를 하나 사 들고 돌아왔다.최민아는 어젯밤에 돌아온 후 아직 자고 있었다.박민호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전기난로를 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