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아는 원래 닷새만 휴가를 낸 상태였지만 부모님을 찾느라 휴가를 더 연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이제 모두 써버렸다.매니저와 간단히 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부모님에게 다가갔다.“엄마, 아빠, 병원에서 잘 요양하고 계세요. 전 이제 회사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그래,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네.”최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민호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병원 밖으로 나오자 최민아가 그에게 물었다.“아까 우리 부모님과 무슨 얘기 했어요?”박민호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두 분께서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하시더라고요. 민아 씨와 민아 씨 가족 때문에 내가 힘들어할까 봐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아...”최민아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우리 부모님은 정말 너무 걱정이 많으세요. 사실 난 결혼할 생각조차 없는데...”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말에 박민호의 마음이 왠지 쿵 내려앉았다.“왜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결혼하면 좋지 않아요?”최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결혼 자체는 좋죠. 그런데 나는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아서요.”“무슨 소리예요? 민아 씨처럼 알뜰하고 요리도 잘하고 집안일도 척척 하는 사람은 완벽한 현모양처인데요.”그는 이내 서둘러 덧붙였다.“내가 말한 현모양처는 진심으로 칭찬한 거예요. 절대 민아 씨가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박민호는 회사에서 동료들이 최민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던 일들을 떠올렸다.게다가 요즘 세상에 병든 부모를 책임지고 끝까지 돌보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최민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민호 씨가 모르는 게 많아요.”그 말을 마친 후, 최민아는 발걸음을 재촉해 앞서 나갔고 박민호는 서둘러 따라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내가 뭘 모른다는 거죠? 민아 씨만 괜찮다면 나랑 결혼해요.”박민호는 말하고서 자신도 놀랐다. 최민아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지
부모님이 병원에 다시 가겠다고 약속한 끝에야 최민아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부모님의 손을 꼭 붙잡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요. 두 분의 병은 오랜 피로 누적이 원인이라고요. 치료만 잘 받으시면 곧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있어요.”최민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이제 반년 정도만 더 치료받으면 우리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잖아요. 그러니 제발 이제는 몰래 떠나지 마세요.”“알았다, 알았어.”안순자가 딸을 가볍게 안아주며 달랬다.“착한 우리 딸,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최상철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이번엔 엄마, 아빠가 잘못했어. 네게 사과할게.”그제야 최민아는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지었다.“다음부터는 절대 이러시면 안 돼요.”“그래, 알았어.”운전석 옆에 앉아 있던 박민호는 그 따뜻한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그에게도 박민정과 부모님이 함께했던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어느 순간 조금씩 멀어지더니 끝내 사라져 버렸다.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조차, 그는 크게 울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다정한 가족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불쑥 밀려들었다.박민호는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속으로 외쳐보았지만 창밖에 조용히 내리는 눈만이 아무 대답 없이 흩날릴 뿐이었다.그는 갑자기 자신을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곁을 지켰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는 고집을 부리며 찾아뵙지 않았다. 그 일을 지금에서야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그리고 문득, 누나 박민정도 자신에게 정말 잘해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도 그런 누나를 좋아했었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박민호는 지난 기억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최민아가 병원비를 결제하러 간 사이, 부부는 조용히 박민호에게
박민정은 경호원에게 여관 주소를 보내달라고 한 뒤, 곧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시각이었지만 박민호와 최민아는 여전히 밖을 헤매고 있었다.박민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안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누나,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박민정은 동생의 감사 인사에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어서 가서 어르신들 모시고 돌아가. 그리고 그 친구한테도 잘해줘.”“알았어.”박민호는 연신 대답했지만 추위에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최민아에게 소식을 전했다.“가요. 두 분 계신 곳을 찾았어요.”추위에 질린 최민아의 얼굴은 창백하게 얼어 있었고 말문을 열려고 해도 입술이 얼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재빨리 택시를 잡은 뒤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 따뜻한 차 안에서 최민아의 몸이 조금씩 녹아들자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지금 어디에 계시대요? 무사하신 거죠?”“작은 여관에서 쉬고 계신대요. 별일은 없으시대요.”그 말에 최민아는 그제야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민호 씨, 누나 분께 대신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아니에요, 나중에 제가 직접 찾아뵙고 감사 인사드릴게요.”그녀는 말로만 감사를 전하는 건 부족하다고 느꼈다.“그래요. 두 분 병원에 잘 모시고 나면 내가 누나 주소 알려줄게요. 그때 직접 인사드리죠.”박민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실종됐던 사람들을 찾은 기쁨에 두 사람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그들이 최상철 부부가 머물고 있는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날이 밝아 있었다.최민아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곧 안에서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엄마!”최민아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질 듯이 북받쳐 올랐다. 안순자 역시 딸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민아야, 네가 어떻게 여길 찾아왔어?”“엄마, 아빠,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셨어요?”최민아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왜
박민정은 동생의 부탁을 듣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동생이 말한 ‘친구’라는 게 누구인지 그녀는 이미 짐작이 갔다. 지금의 박민호는 예전처럼 화려한 생활을 누리던 때와는 달리 곁을 지키던 이들마저 모두 떠난 처지였다. 그가 이제 와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최민아밖에 없었다.박민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알았어. 그 친구 부모님의 정보부터 보내 줘. 내가 사람을 붙여서 찾아볼게.”“정말? 고마워, 누나. 역시 누나밖에 없어.”박민호는 이전에는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누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과거 그녀가 대신 빚을 갚아 줬을 때도 이렇게까지 감사해했던 적은 없었다.박민정 역시 정말 동생이 변하긴 변했나 싶었다.“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직 모르니까 너무 일찍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응, 그래도 고마워.”박민호는 곧바로 최민아한테서 그녀 부모님의 신상 정보를 받아 누나에게 보냈다.자료를 확인한 박민정은 예상대로였다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 친구라는 건 최민아였다.“너한테 하나 물어봐도 돼?”“응, 물어봐, 누나.”“너 어떻게 친구를 위해서 나한테 부탁할 생각을 다 했어?”과거의 그였다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누나를 찾았을 뿐, 남을 위해 도움을 요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박민호는 어색하게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그게... 그 사람이 내 생명의 은인이야. 그러니까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해.”생명의 은인이라니. 박민정은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동생한테 아무리 많은 도움을 주었어도 그는 그것을 늘 당연하게만 여겼었고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니 믿기 어려웠다.“알았어. 일단 내 연락 기다려 봐.”“응,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박민정은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가 최민아에게 소식을 전했다.“민아 씨,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누나가 직접 나서서 사람을 찾겠다고 했으니까 분명히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그 말에 최민아의 눈빛에 다시금 간절한 희망이 깃들
박민호는 몸을 낮춰 슬픔에 잠긴 최민아 곁에 앉아 조용히 위로했다.“너무 슬퍼하지 마요. 분명 두 분 별일 없으실 거예요. 우선 계속 찾아봐요. 이렇게 계속 울고 있으면 힘이 다 빠져서 나중에 제대로 찾지도 못하면 어떡해요.”그의 따뜻한 목소리에 최민아는 조금씩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민호 씨 말이 맞아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박민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우리 다시 힘내서 찾아봐요.”하지만 두 사람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박민호는 몸을 휘청거렸다.그가 앞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최민아가 깜짝 놀라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민호 씨!”걱정스러운 그녀의 외침에, 박민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겨우 중얼거렸다.“왜 그래요?”“방금 쓰러질 뻔했어요!”최민아의 눈빛엔 놀람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박민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그래요? 아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지금은 두 분부터 빨리 찾아야죠.”그러나 그의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보자, 최민아는 더 이상 그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하다고 직감했다.“우리 일단 집에 돌아가요. 민호 씨, 요즘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요.”사실 박민호는 며칠째 밤에는 일을 하고 낮에는 그녀 부모님을 돌보느라 단 한 순간도 온전히 쉰 적이 없었다.“아니에요. 아직 괜찮아요. 버틸 수 있어요.”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이미 그의 몸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최민아는 그의 말을 더는 듣지 않았다.“안 돼요. 지금은 무조건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결국 그녀는 단호하게 박민호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지금은 푹 쉬세요. 부모님 일은 내가 경찰에 가서 신고할게요. 민호 씨는 쉬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알겠죠?”박민호도 더는 고집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그 말에 최민아는 안도하며 집을 나섰고 박민호는 그녀가 떠나자마자 소파 위에 쓰러진 채 곧 깊은 잠에 빠졌다.얼마나
최민아는 저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졌다.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이 먹먹해졌다.지금 그녀의 손에는 거의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일단 그 돈을 받기로 하고 월급을 받으면 꼭 갚을 생각이었다.그녀는 돈뭉치를 조심스레 챙겨 부엌으로 가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쯤 부모님도 벌써 일어나 계셨을 텐데, 오늘따라 방문이 굳게 닫힌 채 조용했다.아직 주무시는 건가 싶어 그녀는 깨우지 않고 조용히 아침을 다 차린 뒤, 조심스레 방 앞으로 가 가볍게 노크했다.“엄마, 아빠... 아침 드세요.”몇 번을 불렀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순간 최민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방문을 밀어 열었다.방 안은 놀랍도록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아빠! 엄마!”다급한 목소리로 부르며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욕실, 주방, 베란다까지 모두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부모님의 모습은 없었다.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부모님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종이 한 장이었다.[민아야, 아빠랑 엄마는 더 이상 너를 힘들게 할 수 없어서 조용한 곳으로 떠나기로 했단다. 우리를 찾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아라. 앞으로의 인생을 잘 살아. 민호랑도 잘 지내고 싸우지 말고 빨리 결혼도 하렴. 사랑한다, 내 딸아.]종이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고 눈물이 종이를 타고 조용히 떨어졌다.“아빠, 엄마... 대체 무슨 소리예요? 지금 어디로 가신 거냐고요!”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한 채, 그녀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아버지의 번호를 눌렀다.하지만 예상대로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아무도 받지 않았다.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어떡해, 어떡하지...”최민아는 울먹이며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지만 어느 누구도 부모님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급히 옷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