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란이었다.그녀는 화를 내면서 얘기했다.“이지원이 이렇게 더럽게 노는 아이인 줄은 몰랐어! 차라리 박민정이 낫지. 그 애는 우리 집에 3년 동안 있으면서 아무 논란도 만들지 않았잖아!”3년. 박민정은 유씨 가문 사람을 보살피지 않으면 집에만 있었기에 알고 지내는 남자가 거의 없었다.유남준은 어머니의 원망을 들으면서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어머니. 아까 알아보니 그때 어머니를 구한 게 이지원이 아니라고 합니다.”고영란은 멍해졌다.“그럼 누군데.”“박민정이요.”유남준은 자기가 조사한 것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옛 저택의 고영란은 마음이 복잡해졌다.“이렇게 중요한 일을, 박민정은 왜 말하지 않은 거야!”“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겠죠. 이지원이 공로를 빼앗아 간 걸 몰랐을 수도 있고요.”고영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책상에 놓인 사진을 보면서 박민정에게 한 짓을 떠올리고 약간 죄책감을 느꼈다.“내일 민정이를 데리고 와. 밥이나 먹자.”“떠났어요.”그 한 마디만 하는데 유남준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떠나다니? 어디로?”고영란이 물었다.“몰라요. 다른 일이 없으면 이만 끊겠습니다.”유남준은 더이상 박민정이 떠난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그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게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고영란은 원래 유남준에게 동생 유남우의 일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유남준은 간밤 자지 못했다.이튿날 아침. 유남준은 회사로 가지 않고 박민정을 찾아 나섰다. 다만 행방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연지석을 감시하는 사람 말에 따르면 연지석은 에스토니아로 돌아갔다고 한다.유남준은 그 보고를 들으면서 속이 탔다.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 며칠 동안 그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박민정은 그저 그렇게 도망쳤다.이번에는 그가 보는 앞에서 도망쳤다.유남준은 그녀의 편지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해줄 박
해운 별장.박예찬을 데려온 조하랑은 한숨을 돌렸다. 이윽고 김인우를 보면서 얘기했다.“무조건 배상해줘야 해요!”김인우가 수표를 밀었다.“나도 그쯤은 알아요.”김인우는 조하랑과 박예찬을 보면서 약간 실망했다.솔직히 자기한테 아들이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싫다기보다 기대되었다.박예찬은 약간 장난기가 많긴 했지만 그는 그런 박예찬이 좋았다. 또 총명하기도 했고.조하랑은 수표를 건네받고 미간에 힘을 풀었다. 이 돈이 그녀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잠시나마 꺼뜨린 것 같았다.“그럼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이만 안녕히 계세요. 영원히 다시 만나지 말자고요.”조하랑은 말을 마치고 박예찬을 데리고 차에 올랐다.두 사람이 택시에 타서 멀어져갔다.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검은 차에 탄 유남준이 이글거리는 시선을 박예찬에 고정시킨 채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유남준의 두 눈동자에는 놀라움만이 담겨있었다.서다희가 다가와 얘기했다.“박윤우가 아닙니까?”유남준은 입술을 꽉 말고 천천히 얘기했다.“따라가. 나는 김인우를 만나러 간다.”“네.”...김인우는 유남준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유남준이 인터넷의 여론 때문에 바쁜 줄 알았다.“남준아, 걱정하지 마. 그저 여자일 뿐이잖아. 이지원 같은 여자는 널리고 널렸어.”김인우는 술 한 병을 따서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유남준은 그의 앞에서 이지원 얘기를 꺼내지 않고 물었다.“조하랑이 데려간 아이가 요즘 계속 너한테 있었어?”김인우는 약간 어색해져서 코를 긁적였다.“오해였어.”그는 앉아서 그와 박예찬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오해가 생겼는지 다 유남준한테 알려주었다.유남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아까 본 아이가 정림원에 있던 박윤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그는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니까 박예찬이라는 애가 조하랑의 아들이라고?”“응.”유남준은 바로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김인우는 그가 바로 떠나려는 것을 이상히 여겨 물었다.“왜?”유남준이 가기 전
유남준은 박예찬과 박윤우가 쌍둥이라는 것을 확신했다.한 명은 조하랑과 있고 한 명은 은정숙과 있다.이게 무슨 뜻이겠는가.그날 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이 내렸다. 유남준은 추위를 못 느끼는 사람처럼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었다.경호원이 보내온 자료에는 조하랑의 출국 전후의 일들이 적혀있었다.남자친구도 사귀지 못한 그녀에게 아이가 있을 리 없었다.그러니 이 두 아이는 다 박민정의 아이다.그렇다면 왜 유남준을 속인 것일까.담배에 불을 붙인 유남준은 얼마 가지 않아 세게 기침했다.기사가 나와 물었다.“대표님, 차에 타시는 게 어떻습니까.”“괜찮다.”이 추위만이 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유남준은 박윤우가 자기 성을 연이라고 한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의 성은 박이었다. 그는 연지석과 박민정이 한 아이의 성을 연으로 하고 한 아이의 성을 박이라고 결정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유남준은 2, 3일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더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그저 당장 박민정을 찾아 자기 곁에 묶어놓고 어디도 갈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그 생각에 유남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내일은 유씨 가문의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다.유남준은 거절했지만 고영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라고 했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그는 조하랑과 박예찬의 일을 부하에게 맡겨두고 옛 저택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유씨 가문 옛 저택.모든 사람들이 유남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항상 흐트러짐 없던 그가 지금은 꼴이 엉망이었고 수염도 나 있었다.여자 고용인이 그의 방에서 나오면서 반지 하나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유남준이 그녀를 막아 나서서 물었다.“손에 든 거, 뭐야.”고용인은 유남준을 보자마자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일부러 훔친 건 아니고 이불을 정리할 때 베개 밑에
고영란은 유남준이 온 것을 보고 얘기했다.“남우가 너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대.”말을 마친 고영란은 다른 사람들을 다 물러가게 했다.유남준은 유남우에게로 걸어갔다.“전의 문자도 네가 보낸 거야?”유남우는 온화한 표정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유남준은 몸을 약간 숙였다. 유남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그 애가 좋아하는 건 나야.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고.”유남준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눈빛은 어느새 차갑게 돌변해 있었다.이제야 박민정이 쓴 편지의 뜻을 알 것 같았다.사람을 잘못 봤다니.유남우와 유남준을 헷갈렸다는 소리였다.참 어이가 없었다.그는 박민정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유남우는 유남준의 감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민정이의 남편은 나였어야 해.”유남준의 목울대가 약간 움직였다. 눈앞의 사람이 친동생만 아니었다면 죽이려고 들었을지도 모른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가 박민정 남편이야.”그가 허리를 곧게 펴고 얘기했다.“겨우 일어났으니 쉬어야 하지 않아? 다시 잠들면 영영 못 깨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차갑게 말을 마친 유남준이 걸어 나갔다.유남우의 방에서 걸어 나오자 고영란이 그의 곁에서 얘기했다.“의사 선생님 말로는 기적이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유남준은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차가운 기운만 내뿜고 있었다.“영원히 일어나지 못했으면 좋겠네요.”말을 마친 그는 놀란 표정의 고영란을 그대로 둔 채 옛 저택을 떠났다. 두원으로 돌아가는 길, 유남준의 머릿속에는 박민정과 유남우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그 애가 좋아하는 건 나야. 그 애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나고.”유남준은 머리가 너무 아팠다. 휴식하지 못해 몸이 쓰러질 것 같았지만 잠에 들고 싶지는 않았다.그렇게 결국 두원에 도착했다.유남준은 술을 한 병 들고 혼자
유남준은 공항이 아닌 정림원으로 돌아가 사람을 시켜 박윤우가 썼던 칫솔을 병원에 가져가 유전자 검사를 맡기도록 했다.다른 한편 조하랑과 박예찬은 이미 비행기에 탑승했고 누군가가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창밖의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조하랑은 밖을 내다보며 마음을 내려놓았다.“앞으로는 좀 조용히 살 수 있겠구나...”박예찬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조하랑은 그가 유치원 친구들과 떨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줄만 알고 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나중에 동민이 데리고 널 보러 갈게.”그 말에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은 박예찬이 그녀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응.”조하랑은 더 얘기를 나누려고 하다가 박예찬이 앞좌석 주머니 안에 있는 신문을 꺼내 들고 보자 입을 닫았다.신문 헤드라인에는 아직도 이지원의 뉴스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마 한 일주일 정도는 열기가 식지 않을 것 같았다. 외부에서는 모두 이지원이 유남준의 여자 친구인 줄로만 알고 있으니 말이다.대충 훑어보고 흥미를 잃은 박예찬은 신문을 얼굴 위에 덮고 잠깐 잠을 청했다.조하랑은 옆에 앉은 조그만 아이를 보며 한창 귀여울 나이에 왜 저렇게 애어른 같을까, 하며 속으로 감탄했다.박예찬은 진주에 있는 동안에 한 번도 아빠를 찾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집에 가겠다는 말도 없었다.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는 지금도 그는 여전히 침착하고 차분한 표정이기만 하다.박민정이 있는 항구도시 오르후스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일여덟 시간은 족히 가야 하기에 조하랑도 눈을 감고 좀 자기로 했다.그리고 8시간 뒤.시차 때문에 오르후스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한밤중이었다.박민정은 진작부터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조하랑과 박예찬을 발견하고 다가오면서 그들을 불렀다.“예찬아, 하랑아.”박민정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박예찬을 안았다.박예찬은 뽀송뽀송하고 발그스름한 얼굴을 엄마의 품에 비볐다.“엄마.”“가자. 우리 먼저 집으로 가자.”한편 집에서는 은정숙과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은 날 사랑하지도 않는데 계속 찾진 않을 거야. 시간이 좀 지나면 포기하겠지.”유남준이 자신을 찾아다니는 건 그저 달갑지 않아서일 뿐이라고 박민정은 생각했다.박민정은 그한테 큰돈을 남겨 빚 갚는 셈 치고 돌려주었다.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며 조하랑은 생각에 잠깐 잠겨있더니 또 물었다.“그럼 너 윤우랑 예찬이한테 새 아빠 만들어줄 생각은 없는 거야?”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박민정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최근 몇 년 밖에서 떠돌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오직 어떻게 두 아이를 잘 키울지 하는 생각으로만 고민했었다.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난 지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애들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잘 보살필 수 있어. 괜히 새 아빠 만들어서 애들한테 영향 끼치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 지금...”그녀는 손을 평탄한 아랫배에 얹으며 매만졌다.그걸 보자 조하랑은 눈을 크게 떴다.“진짜 임신한 거야?”“응.”박민정이 고개를 약간 주억거렸다.“여기 오자마자 병원에 가서 검사해 봤는데 임신 맞대. 한 달 됐어.”조하랑은 호기심이 들어찬 눈빛으로 그녀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너무 잘 됐다. 그러면 아홉 달 후면 윤우 수술할 수 있겠네?”“정확히 말하면 8개월 후야.”박민정은 이런 방면에는 문외한인 조하랑에게 열 달 임신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실제로는 아홉 달이면 아이가 출산한다고.“아...그런 거구나...”조하랑은 손을 거둬들이며 박민정에게 국내의 소식을 들려주었다.“너 뉴스 봤지? 이지원 이번엔 끝장이야. 그리고 유남준도, 네티즌들이 오쟁이 진 남자라고 엄청 놀려대고 있어.”일이 이렇게 될지는 알았었지만 유남준이 여론을 막지 않은 것은 좀 의외였다.“유앤케이가 원래 여론 막는 데는 도가 텄지 않았어? 쓸데없는 말은 한 줄도 안 나오게 했던 것 같은데.”“몰라. 아빠 얘기 들으니까 유앤케이 지금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서 대표 자리에 앉혀놓고 유남준은 막후에서만 활동한대.”“그 사
과거의 일을 전부 없었던 걸로 하자고?유남준은 그 서류를 낚아채 조목조목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두 사람이 더 이상 관계가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가서, 배상액을 보는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1조 6천억!이렇게나 많은 돈을...박민정이 이 많은 돈을 어디서 났단 말인가.유남준은 진즉에 박민정의 회사를 조사했다. 유동자산이 많아 봐야 천억 정도밖에에 안 되었고, 그 회사를 통째로 판다 해도 이 많은 돈을 모으기엔 턱 없이 모자란다.냉소를 흘리며 유남준은 그 서류를 휴지통에 처박았다.“허, 왜 내가 여기에 사인할 거라 생각해요?”“제 의뢰인이 얘기한 바 있습니다. 유 대표님이 사인을 안 하시게 되면 이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옛날 일들을 전부 없던 일로 하자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요.”장명철은 목소리를 낮추며 동시에 무게를 실었다.“그러니까 앞으로 그 일을 들먹여서 박민정 씨의 목을 조르지 마세요. 당신이 싫다고 한 것이지, 박민정 씨가 갚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란 걸 잊지 말란 말씀입니다.”박민정을이 어릴 때부터 쭉 봐온 셈인 장명철은 전부터 그녀를 대신해 유남준한테 시원하게 욕을 날리고 싶었다.영락없이 얻어맞으며 쫓겨날 줄 알았는데 유남준은 그가 한 말에는 별로 화가 난 눈치가 아니었고 이렇게만 말했다.“걱정 마세요. 앞으로 그 일 다시 꺼내지 않을 테니까.”너무 순순히 나오자 장명철은 오히려 어리둥절해졌다.하지만 유남준은 여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했다. 박민정이 어처구니없는 금액의 큰돈을 서슴없이 내놓으면서까지 자신을 떠나려는, 자신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결심이 얼마나 견결한지를 그는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장명철이 가고 난 후 유남준은 음침한 소리로 서다희한테 물었다.“널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변심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서다희는 자기 여자 친구를 떠올리며 물음에 대답했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난 그녀를 반드시 후회하게 할 겁니다.”그래, 그
유남준은 입구에 서서 집 안에 있는 너무나 익숙해 마지않은 얼굴을 바라봤다.분명 못 본 지 겨우 반달 남짓 되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경호원들은 대문 밖으로 나가버리고 유남준만 집안에 들어섰다. 그가 들어오자 실내의 기압마저 낮아지는 기분이 들었다.“내가 분명히 다 얘길 한 줄로 아는데요.”박민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의 코앞까지 와서 우뚝 선 유남준은 빛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색을 살필 수가 없었다.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깊게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며 시선을 한시도 떨구지 않았다.데일 것만 같은 따가운 시선에 박민정은 저도 몰래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장명철 변호사님한테서 돈 받았죠? 그러니까 우린 이제 끝난 사이에요.”여전히 말이 없는 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박민정의 모습만 박혀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얹으려고 했으나 박민정은 놀란 표정으로 그의 손을 피해 연거푸 몇 발짝이나 물러났다.그러고는 긴 숨을 들이쉬며 그녀가 물었다.“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허공에 떠 있는 손 그대로 유남준은 한 글자씩 또렷하게 내뱉었다.“나랑 집에 돌아가자.”“집이요?”박민정은 자조적으로 웃었다.“무슨 집이요? 두원 별장 말하는 거예요? 거긴 여태껏 내 집인 적이 없어요.”과거에 유남준은 이렇게 그녀와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젠 박민정이 그한테 그대로 돌려줄 차례였다.유남준은 박민정 때문에 상처받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고작 한마디 말뿐인데 가슴이 바늘로 찌르듯이 아팠다.“우리 아직 이혼 안 했어!”“허울뿐이잖아요!”박민정은 망설이지도 않고 받아쳤다.순간일순 큰 바위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느낌에 유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어 잡았다. 눈빛에서는 불씨가 타오르는 듯하며 그녀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허울뿐?! 너 지난달까지만 해도 내 침대에 있었어. 너 기분 좋을 때 어떤 소리 내지르는지 내가 한 번 실감 나게 질러줘 봐?”쨕!박민정은 손을 들어 그의 뺨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