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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

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

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오셨어요, 민정 씨.”

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

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

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

“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

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요, 깜빡했어요.”

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

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

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

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

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

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

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

“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

장애인 아내라...

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

먼지 하나 안 날릴 정도로 집 청소를 깨끗이 해놨지만 여전히 쉬지 않고 구석구석 닦았다.

이렇게 해야만 마지막 남은 일말의 가치라도 느낄 수 있으니까.

오늘 오후엔 유남준의 문자가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화났거나 매우 바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밤이 깊어졌지만 박민정은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놔두었던 휴대폰이 갑자기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쳐다봤는데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달콤하면서도 늘 그녀를 불안감에 떨게 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바로 이지원이다.

“민정 씨? 남준 오빠 취했어요. 지금 데리러 올 수 있나요?”

...

수호 클럽.

유남준은 메인 석에 앉아 넋 놓고 술을 퍼마셨다.

그의 옆엔 이지원이 앉아 있었고 한 무리 재벌가 도련님들이 그녀에게 노래 한 곡 불러 달라며 유난을 떨었다.

“지원 씨 이번에 우리 유 대표님이랑 잘해보려고 돌아온 거잖아요.”

“노래 한 소절로 우리 유 대표님한테 고백해 봐요.”

이지원은 예쁘고 개방적인 데다 유남준의 첫사랑이니 재벌가 도련님들은 모두 그녀와 유남준을 맺어주려고 한다.

이지원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흔쾌히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을 불렀다.

“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다들 조용히 노래를 감상했다.

박민정이 룸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지원이 막 한 곡을 다 불렀고 룸 안의 사람들은 유남준을 부추기기 바빴다. 그중에서도 절친 김인우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남준아, 너 지원이 3년이나 기다렸잖아. 인제 드디어 돌아왔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여자인 지원이가 먼저 고백까지 했잖아.”

박민정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때 마침 화장실로 가려던 한 남자가 룸 문을 열어젖혔다.

박민정이 넋 놓고 서 있는 모습에 그 남자도 화들짝 놀랐다.

“민정 씨.”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부 문 앞으로 시선이 쏠렸다.

순간 룸 안에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박민정은 메인 석에 앉은 유남준을 쳐다봤는데 맑은 눈빛은 전혀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지원에게 농락당한 걸 알아챘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보자 눈동자가 살짝 떨렸고 한창 유남준과 이지원을 엮어주려던 김인우를 비롯해 룸 안의 모든 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자리는 박민정이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민정 씨, 오해하지 말아요. 인우 씨가 장난 좀 친 거예요. 저랑 남준 오빠는 그냥 친구 사이에요.”

이지원이 정적을 깨고 그녀에게 해명했다.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짜증 섞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명할 거 없어.”

그는 곧게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

“여긴 왜 왔어?”

“취한 줄 알고 데리러 왔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이에 유남준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오늘 내가 한 말은 한마디도 귀에 안 들어갔나 보네.”

그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오직 둘만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되물었다.

“3년 전에 내가 감쪽같이 속은 걸 이 사람들이 모를까 봐 일부러 찾아와서 되새겨주는 거야?”

박민정은 흠칫 놀랐다.

유남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실없이 존재감 드러내지 마. 너 이러는 거 점점 더 가증스러울 뿐이야!”

말을 마친 유남준은 그녀에게 등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박민정은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봤다.

오늘은 어쩌면 유남준이 그녀에게 말을 제일 많이 한 날이고 또한 그녀를 제일 아프게 한 날이기도 하다.

룸 안의 재벌가 도련님들은 버림받은 박민정을 전혀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김인우도 거리낌 없이 저쪽에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이지원에게 말했다.

“지원아,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뭘 더 해명할 게 있다고... 박민정이 사기 결혼만 강행하지 않았어도 남준이는 너랑 결혼했어. 그럼 너도 굳이 머나먼 해외로 가서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고.”

박민정은 귓속이 윙윙거렸지만 그들이 한 말은 또박또박 다 들렸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

유남준이 자신과 결혼하든 안 하든, 그는 절대 아무런 집안 배경도 없는 이지원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점은 이지원도 잘 알고 있기에 단호하게 이별을 택하고 머나먼 해외로 떠나갔다.

그런데 왜 인제 와서 모든 게 박민정의 잘못으로 전락한 걸까?

그녀는 두원 별장으로 돌아갔다.

늘 그렇듯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지고 그녀가 외출할 때 모습과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유남준은 아직이다.

박민정은 우산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마치 암흑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문득 영원히 홀로 있는 이 집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바깥 정자에 앉아서 찬바람과 스산한 빗줄기를 맞이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름다운 실루엣이 그녀 앞에 나타났는데 바로 이지원이었다!

그녀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박민정 옆에 와서 앉았다.

“밤이 참 춥네요. 한밤중에 남준 오빠 찾아갔다가 한바탕 농락당한 기분이 어때요?”

박민정은 묵묵히 들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지원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제 말만 했다.

“그거 알아요? 처음에 나 민정 씨 엄청 부러워했어요. 집안 좋지, 자상하고 딸 아껴주는 아빠가 있어서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지. 근데 이젠 민정 씨가 너무 가엽네요. 남준 오빠 10여 년간 묵묵히 좋아했는데 정작 오빠는 민정 씨한테 곁을 아예 안 주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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