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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

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

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할 얘기 다 했어요?”

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

...

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

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

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

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

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지원아, 생일 축하해. 널 꼭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세 번째 장은 유남준과 이지원이 손잡고 나란히 모래사장을 걷는 뒷모습이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진들에 박민정은 숨이 꽉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감히 더는 뒤로 넘기지 못하고 얼른 휴대폰을 껐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젠 포기해야 해. 놓아줄 때가 됐어.’

이날, 박민정은 일기장에 이런 말을 적었다.

「난 원래 어둠을 견딜 수 있었어. 하지만 그건 빛을 보지 못한 전제하에서야.」

다음날 그녀는 습관적으로 일어나 아침밥을 차렸다.

하지만 6시가 다 돼도 유남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기억났다. 앞으로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했던 말.

유남준이 안 돌아올 줄 알고 그녀는 홀로 소파에 누워 스르륵 잠들었다.

“아침 안 차려도 된다고 했잖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고 박민정은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유남준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얼른 습관처럼 사과했다.

“미안해요, 깜빡했어요.”

또 깜빡했다는 말, 또 미안하다는 말...

유남준은 고개 돌려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오늘도 늘 똑같은 그레이 톤의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마치 그가 돈 없어서 와이프를 막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집에 돌아오는 건 깜빡 안 해? 왜 나랑 결혼한 건 깜빡 안 해? 이참에 그냥 너 자신도 깜빡하지 그랬어? 아쉽겠지? 우리 집안 재산이 욕심나겠지! 돈 버는 기계인 날 놓치기가 싫겠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 마음을 정처 없이 난도질했다.

박민정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남준 씨, 난 한 번도 남준 씨 돈을 노린 적 없어요.”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건 오직 유남준이란 사람 그 자체이다.

유남준은 야유 섞인 미소를 날렸다.

“그런데 너희 엄마가 오늘 아침 회사로 찾아와서 나한테 애 낳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앞뒤가 안 맞잖아.”

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

한없이 싸늘하고 어두운 그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그제야 알아챘다. 유남준은 어젯밤 일로 그녀에게 화낸 게 아니었다.

유남준은 그녀와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지 않았다.

“박민정, 너 우리 집에 무사히 있고 싶거든, 너희 집안 무너지지 않게 하고 싶거든! 너희 어머니더러 분수 지키라고 해.”

말을 마친 유남준은 서재로 가서 물건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집을 나섰다.

...

박민정이 한수민을 찾아가기도 전에 그녀가 불쑥 집으로 오더니 쌀쌀맞았던 이전 모습과는 달리 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민정아, 남준이 찾아가서 아이 낳자고 빌어! 의학적인 수단을 빌려서라도 꼭 낳자고 해, 응?”

의학적인 수단이라!

박민정은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며 말을 계속 들었다.

“지원이가 이미 알려줬어. 이 3년 동안 남준인 널 단 한 번도 다친 적 없다며.”

참고 또 참았던 분노가 이 한마디에 전부 폭발해 버렸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공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각자의 이익뿐!

유남준은 대체 왜 이런 말을 이지원에게 한 걸까?

그녀를 정말 너무 사랑해서?

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해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 인제 그만 해요.”

한수민은 흠칫 놀라더니 미간을 구기고 그녀에게 물었다.

“뭐라고?”

“나 너무 지쳤어요. 남준 씨랑 이혼하고 싶어요...”

“찰싹!”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한수민이 그녀의 뺨을 가차 없이 내리쳤다.

자애로운 어머니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눈을 부릅뜨며 딸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논해? 유씨 가문을 떠나면 너같이 온전하지 못한 이혼녀가 재혼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같이 쓸모없는 딸을 낳은 거야?! 넌 정말 하나도 나 안 닮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데려오는 게 아닌데!”

박민정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려서부터 한수민은 그녀를 싫어했다.

한수민은 유명한 무용가인데 난청인 딸 박민정을 낳은 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그녀는 모질게 딸아이를 가정부에게 맡겼다가 학교 갈 나이가 돼서야 박씨 일가로 데려왔다.

박민정은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 세상에 제 자식을 싫어하는 엄마는 없다는 그 말.

그때부터 그녀는 더 우수해지려고 노력했고 엄마에게도 최대한 잘 보이려고 애썼다.

난청이지만 무용, 음악, 서예, 언어 등 장르마다 손꼽히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다 결국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의 마음속엔 영원히 좋은 딸이 못 된다는 걸.

엄마 말대로 그녀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몸뿐만 아니라 가족도 사랑도 전부 다...

한수민이 떠난 후.

박민정은 파운데이션으로 얼굴에 난 선명한 손자국을 커버한 후 홀로 차 타고 로펌으로 갔다.

사무실 안.

박민정의 아버지가 생전에 고용했던 법무 장명철은 그녀가 건네준 위임장을 다 훑어본 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너희 아빠가 몰래 네게 남겨주신 일부 유산을 정말 유남준에게 다 줄 거야?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이까짓 돈이 부족하지 않아.”

박민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이건 내가 빚진 거니까 갚아야죠 무조건.”

3년 전 박민정의 아빠 박형식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생전에 이미 세 개의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한수민이 딸 민정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지 이 마지막 유언장은 사석에서 딸에게 전해주라고 장 변호사에게 당부했다.

마지막 유언장엔 박민정이 결혼한 3년 후, 만약 불행하다고 느껴지거나 본인만의 사업을 차려 남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을 때 이 유언장을 쓸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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