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민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박민정에게 뭔가 아는 게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 박민정이 덧붙였다.“친딸인 제가 왜 의붓딸보다 못한 거죠? 그렇게 미워하면서 왜 날 낳았어요?”잔뜩 긴장하던 한수민의 신경이 그제야 느슨해졌다.그녀의 차갑고 화려한 얼굴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널 낳지 않았을 거야. 네가 태어난 건 실수였어!”박민정은 이 대답을 수없이 들었고, 더 이상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가슴은 설명할 수 없이 아팠다.어쩌면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모성애를 너무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박민정은 한수민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제가 선택할 수 있다면 저도 당신 딸이 되고 싶지 않아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한수민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두 손을 꽉 쥐었다.그 순간 윤소현이 다가왔다.“엄마, 무슨 얘기 했어요?”한수민은 박민정에게 보였던 차가움은 온데간데없고 다정한 모습만 남았다.“아무것도 아니야.”“엄마 박민정 안 좋아해요?” 윤소현은 조금 궁금했다, 이 세상에 딸을 사랑하지 않는 친엄마는 없지 않나?친엄마인 정수미는 해외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약혼식 날에 꼭 오겠다고 했다.게다가 정씨 집안의 사업 지분을 나눠줄 거라는 말도 했다.“걔 얘기는 하지도 마. 걔만 아니었어도 난 지금도 유명한 무용수가 됐을 거고, 이렇게 추락하지도 않았을 거야.” 한수민이 차갑게 말하자 윤소현은 이해한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유씨 가문 저택.박민정이 먼저 돌아와 차에서 내리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유남우가 보였다.큰 키에 비정상적으로 하얀 얼굴, 유남준과 똑같이 깊은 눈동자는 온화하고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다 샀어? 널 힘들게 한 건 아니지?”유남우가 앞으로 걸어오자 박민정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서서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소현 씨랑 엄마는 뒤차에 있어요.”어쨌든 윤소현은 유남우 미래의 아내였으니 당연히 박민정은 유남우 앞에서 그녀에 대해
박민정은 유남우를 부축해 그가 머무는 곳으로 데려다준 후 돌아갔다.거실에 막 들어섰을 때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이렇게 추운 날, 실내에 난방조차 켜져 있지 않은 것이 놀라웠다.그녀가 재킷을 꼭 껴입고 들어갔을 때, 잘생긴 얼굴로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유남준이 보였다.기억을 잃은 이후 박민정은 유남우의 이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왜 난방 안 켰어요, 안 추워요?” 박민정이 묻자 소리를 따라 유남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이렇게 열기가 넘치는데 어떻게 추울 수가 있어?”잔뜩 비꼬는 그의 말에 박민정은 더욱 의아했다. “무슨 말이에요, 무슨 열기요?”유남준은 박민정이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척할 줄은 몰랐다.누굴 바보로 아나!그는 더 말하지 않고 바로 사진 더미를 꺼내 그녀를 향해 던졌다.사방에는 박민정과 유남우가 다정하게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유남준은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소리는 들을 수는 있었고 사진을 찍은 것도 박민정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사진을 본 박민정은 처음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유남준에게 다가가 물었다.“사람 보내서 몰래 나 찍었어요?”그동안 유남준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어이가 없었다.“지금 몰래 찍은 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그의 두 눈에 담긴 초점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안 그러면 박민정은 그가 앞 못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유남우는 내 동생이고 네 시댁 식구야. 다른 사람 다 놔두고 걔를 찾아?”유남준은 차가운 말을 뱉자마자 다시금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그는 박민정이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을 찾지 않기를 바랐다.짜악-크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그의 얼굴을 세게 때렸다.유남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거렸고, 박민정이 얼마나 큰 힘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었다.“병이 도져서 잠깐 부축해 준 것뿐인데 내가 뭘 찾아요? 그렇
다음 날 이른 아침, 집안의 도우미들이 소파에서 자고 있는 유남준을 처음 본 것은 그때였다.유남준은 소리를 듣고 곧바로 눈을 떴다.“민정아.”“도련님, 저예요, 사모님께서는 아직 안 깨셨어요.”도우미가 대답했다.유남준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알겠으니 이만 나가요. 요즘은 내가 부르기 전까지 안 와도 됩니다.”신림현에 살면서 도우미가 너무 많은 것을 싫어했던 유남준이었다.“네.”도우미는 조심스럽게 나가서 문을 닫았다.유남준은 깨어난 후 잠기가 달아나 박민정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박민정은 임신 후 매일 늦잠을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어제 윤소현과 함께 오후 물건 고르느라 동행한 탓에 오늘 일어나 보니 벌써 오전 열 시였다.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중 음식 냄새가 났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보이지 않자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고, 부엌 불 앞에서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이는 그가 보였다.유남준은 사업적으로 뛰어나고 피아노도 잘 치지만 딱 하나, 요리만 못했다.박민정은 그가 몇 번이나 손이 델 뻔한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내가 할게요.”하지만 유남준의 큰 몸은 비킬 생각이 없었다.“걱정 마, 밖에서 사 온 건데 그냥 데우면 돼.”그는 박민정이 자신의 요리가 서툴러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설명했다.어쩐지 요리도 못하는 사람이 오늘은 웬일로 성공했다 싶었다.“그럼 손 데지 않게 조심해요.”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인지라 박민정은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사이드 테이블로 가서 기다렸다.그녀는 유남준의 바삐 움직이면서도 어딘가 어색한 뒷모습을 보며 전에 이지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유남준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음식을 차려주었다고 했다.심지어 그녀가 SNS에 올린 사진에서는 마치 요리사가 한 것 같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하지만 최근 유남준과 함께 지내면서 그가 정말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이지원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유남준은 이미 모든 음식을 식탁에
진서연은 박민정에게 회사의 최근 경영 상황을 보고했다. “보스, 이 기세라면 머지않아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 돌아오세요? 에리가 얼마 전에 저한테 찾아와서 만나 뵙고 다른 곡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에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돌 가수에 혼혈이고, 특히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다.진서연은 매번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이제 곧 새해인데 다음 해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박민정이 답하자 진서연은 조금 아쉬운 듯했다.“알았어요, 그럼 제가 말씀드릴게요.”“그래.”박민정은 진서연과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사실 회사의 업무는 대부분 직원들이 처리하기 때문에 그녀는 대충 파악만 하면 된다.집이 너무 썰렁해서 TV를 켜고 몇 개의 채널을 돌리던 박민정의 시선이 갑자기 연예 뉴스에 고정됐다.한동안 보이지 않던 이지원이 카메라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는 모습이 방송 화면에 잡혔다.“여기 계신 팬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의 사생활 영상으로 인해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저에 대한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렸어요. 여러분의 이해를 바라는 대신 제가 더 많은 작품을 통해 저를 아끼는 여러분께 보답하고 싶어요. ...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꼭 사람 제대로 보고 쓰레기 같은 남자는 믿지 마세요. 안 그러면 결국 당하는 건…”이지원의 마지막 말로 모든 잘못을 남자들에게 돌렸다.사람들은 그녀가 남의 가정을 파탄 낸 것도 잊은 채 그저 영상이 유출된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는 듯했다.온라인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는 서서히 늘어났다.박민정은 묵묵히 지켜보면서 세상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연예계는 정말 어디까지 밑바닥인지 알 수 없었고 연예인이 무슨 짓을 해도 인터넷에 있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있었다.유남준이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을 때 박민정은 이미 TV를 끈 뒤였다.그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이지원에 대한 일이 생각나지 않은
방 안은 또다시 정적이 흘렀고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김인우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형수, 갖고 싶은 건 말만 하면 내가 지금 가서 사줄게.”세상에 공짜가 없고, 하늘에서 떡이 그냥 떨어질 리가 없었다.박민정은 김인우가 분명 좋은 의도가 아니라고 느꼈다.“아니요, 나도 직접 살 돈이 있어요.”김인우는 조금 당황한 듯 말문이 막혔다.“남준아, 뭐 필요한 거 있어?”유남준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할 말 있어?”김인우는 열정적인 자신과 다르게 시큰둥한 두 사람을 보며 화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할 일 없으면 와서 같이 놀면 안 돼?”어제 고영란은 박민정에게 오늘도 약혼식장을 어떻게 꾸몄는지 확인하러 가자고 했고, 그녀는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이 나가자마자 유남준은 김인우에게 아니꼬운 얼굴로 말했다.“할 일 없으면 돌아가.”“남준아, 너 그러면 나 속상하다? 차 한 잔도 대접 안 해줘?”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고, 김인우는 거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김인우는 막 도착한 터라 금방 떠나고 싶지 않아 소파에 앉아 혼자 TV를 켰다.TV에서 뉴스가 재생되자 그는 울고 있는 이지원의 모습을 보았다.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다.“남준이가 저 여자 정신병원에 보내지 않았나, 대체 언제 나온 거야?”그는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시간 줄 테니 오늘 내로 이지원 내 눈앞에 데려와.”두 시간도 되지 않아 이지원은 다시 진주 정신병원으로 돌아왔고, 검은 눈가리개가 벗겨지자 눈앞이 다시 또렷해졌다.이지원은 자신이 있는 곳이 낯익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동공이 급격히 작아졌다.“난 미치지 않았어, 빨리 날 내보내 줘!”그녀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병실 문이 열리자 외부의 강렬한 빛이 들어왔고, 김인우가 구두를 신은 채 불빛을 등지고 그녀에게 걸어왔다.사실 박민정보다 이지원을 더 미워
김인우가 나간 후, 방 안은 이지원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그 사람들이 떠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이지원은 상처로 뒤덮인 피 웅덩이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쓰러졌다.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왜 좋은 건 다 박민정이 가져가는지, 왜 자기는 자신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녀가 누리는 걸 누릴 수 없는 건지.심하게 다친 이지원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김인우의 부하들은 이지원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일부러 힘들게 만든 것이다.그녀는 고통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얼마나 지났을까, 곧 기절하려는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이지원은 본능적으로 빌었다.“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남자가 반짝이는 가죽 구두를 신고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이지원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머리를 조아렸다.“인우 오빠,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내가 이렇게 빌게.”“이지원, 나야.” 마침내 눈앞에 있던 남자가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지원은 행동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준 오빠, 오빠는...”차마 눈이 멀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말했다.“전 유남준이 아니라 유남우입니다. 저번에 만난 적 있는데요.”그때 이지원은 그를 유남준이라고 생각했다.이지원 역시 눈앞의 남자가 유남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방금 알아차렸다.“남준 오빠 쌍둥이 동생이에요?”“네.”“나한테 원하는 게 뭐죠?”유남우 역시 박민정을 돕기 위해 자신을 처리하러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우리 거래하는 건 어때요?” 유남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이지원은 유남우의 온화한 태도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그를 두려워했다.“무슨 거래요?”김인우의 표적이 되어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그녀는 지금 상황보다 더 나쁜 거래는 없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이 유남준을 떠나도록 도와주면 당신을 구해줄게요.” 유남우는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밝혔다.이지원은 유남우가 왜 이런
“걱정 마세요. 제 아이는 유씨 가문에 들이지 않을 테니. 가능하다면 유남준 씨를 설득해서 빨리 이혼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고영란은 다시 한번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걱정 마, 남준이가 기억을 되찾으면 내가 이혼하라고 설득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고영란은 박예찬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그녀는 하던 일도 멈추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고영란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박민정 곁을 떠나자 윤소현은 다가와 짐짓 살가운 척 물었다.“괜찮아?”한편으로는 박민정의 입에서 미래의 시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사람들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괜찮아요.”그런데 박민정이 딱 한 마디로 대답할 줄이야.윤소현은 굴하지 않고 물었다.“아줌마랑 친해지기 어렵지?”“잘 모르겠어요.” 박민정은 단호하게 말했다.윤소현은 그녀가 자신에게 그렇게 냉정할 줄은 몰랐기에 더 가식 떨지 않았다.“박민정, 난 곧 남우 씨와 결혼할 거고 앞으로 유씨 가문은 남우 씨 손에 들어올 텐데 조금 더 나를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어?”박민정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말했다.“전 정말 고 여사님에 대해서는 몰라요. 유남우 씨와 결혼할 사이면 궁금한 것도 그 분께 물어보면 될 것 같네요.”윤소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유남우에게 물어본 적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유남우는 겉으로는 상냥해도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유남우가 왜 자신과 약혼을 하겠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민정으로부터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윤소현은 유남우를 찾으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우를 보게 됐다.유남우의 훤칠한 키가 사람들속에서 눈에 띄었고, 그는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윤소현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꽃꽂이를 하고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나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유남우의 시선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유남준의 눈만 괜찮았으면 유성혁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박민정에게 치근덕거리지 못했을 것이다.사실 박민정이 처음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결혼식장에서 박민정에게 첫눈에 반했다.보기 드물게 너무 예쁜 여자였다.결혼을 하니까 오히려 다른 느낌이 있었다.“유 선생님, 자중하세요.”박민정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부끄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유성혁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지금의 유남준은 폐인이야. 당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몰래 내 여자가 된다면 내가 잘해줄게.”박민정은 정말 유씨 가문에 약혼식 준비 중에 사촌의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할 괴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어 그냥 자리를 떴다.그러나 유성혁은 굴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가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며 손을 대기 시작했다.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박민정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팔을 뿌리쳤다.“저리 가요!”유성혁은 순간적으로 화를 냈다.“어디서 깨끗한 척이야? 내가 좋아해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안 그러면 평생 유남준 그 폐인이랑 살아야 하잖아!”이 소동으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다.그중에는 도우미도 있었고 먼 친척들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구경만 할 뿐 도와주지 않았다.이제 유씨 가문의 실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유성혁은 아들이 있는 유일한 세대였고 어르신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그에게 밉보이면 국물도 없이 쫓겨날 것이다.여자인 박민정은 당연히 유성혁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몇 번을 거듭한 끝에 결국 그에게 제압당했다.박민정은 이런 상황이 가장 두려웠다. 게다가 모두가 보는 앞이었지만 다들 구경만 할 뿐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유남우도 일이 있어서 부름을 받고 나갔고 유씨 가문으로 오는 거라 정민기를 데려올 수도 없었다.술을 마신 유성혁은 주변에 나서서 박민정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자 더욱 대담하게 굴었고 곧바로 박민정의 옷으로 손을 뻗었다.박민정의 옷이 찢어지려는 순간, 여러 사람이 사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