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우는 한번 고집을 피우면 끝이 없었다. 문제는 지금 정말 아파서 몸이 불편했다.박민정은 꾹 참고 아이를 달래주었다.그러나 박윤우는 포기하지 않았다.“엄마, 아저씨가 와서 우리랑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어.”“알았어. 그럼 아저씨 보고 오라고 할게. 그러니까 그만해.”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유남준은 아직 잠들지 않았고 서재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박민정은 살짝 미안한 듯 문을 두드렸다.유남준은 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쳐다봤다.“아직 안 끝났어요?”“거의 다 됐어. 왜?”유남준이 묻자 박민정은 용기를 내서 말했다.“이따가 일 다 끝나면 우리랑 같이 자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는 당장이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그래.”그제야 박민정은 방으로 돌아가서 박윤우에게 유남준이 이따가 곧 올 거라고 했다.원래는 적어도 30분 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하고 몇 분 만에 유남준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온 것이다.박윤우는 유남준을 보자마자 소리쳤다.“아저씨, 제가 자면서도 막 걸어 다닌다면서요? 오늘 밤에 제가 돌아다니지 못하게 안아줘요.”유남준은 긴 다리를 앞으로 내디디면서 침대로 가 누웠다.박윤우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면서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엄마도 나 안고 자. 되지?”“그래.”박민정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박윤우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잤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박윤우를 안아주다가 손이 닿았다.박윤우는 지금처럼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다.엄마와 아빠가 양쪽에서 자신을 안아주자 박윤우는 곧 잠들었다.박민정은 아직 자지 않았고 어두운 불빛을 통해 유남준의 상처 있는 얼굴을 보고는 만지려고 손을 막 들었다.그런데 유남준은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박민정의 손을 잡으면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안 잤어?”박민정은 흠칫했지만 손을 빼지 않고 말했다.“네.”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을 놓고 박윤우를 안아서 자신의 옆으
박예찬은 박윤우더러 일의 경과를 말해 보라고 했다.몇 분 후 자초지종을 다 들은 박예찬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가끔 보면 나쁜 것 같지는 않아.”“그렇지? 형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박윤우의 큰 눈동자에 기대가 가득했다.박예찬은 동의했다.“그래. 그런데 그게 뭘 의미하는데? 아저씨는 사람을 보내서 나를 구한 적도 있어.”그러자 박윤우는 살짝 실망했다.“그러니까 형은 아직 아빠를 받아주기 싫어?”박예찬은 또 한 번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엄마가 용서하면 나도 용서할 거야.”엄마가 고생하면서 그들을 키웠는데 유남준이 조금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엄마가 외국에서 혼자 겪었던 고생을 잊으면 안 된다.“그럼 그렇게 약속한 거다?”박윤우는 엄마가 다시 아빠를 사랑할 수 있도록 아빠를 천천히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박예찬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는 눈을 감고 좀 더 잤다. 그런데 김인우가 문을 열고 들어와 큰 책가방 하나를 던졌다.“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어린이집 가야지.”또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니...박예찬은 하마터면 자신이 유치원생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비몽사몽 일어나 옷을 입었다.김인우는 그런 박예찬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어른들이 말을 안 해도 혼자서 잘 일어나서 어린이집 갈 준비를 했던 박예찬이 이런 모습도 있다니.“어제 뭐 하러 갔길래 아직도 잠이 안 깬 거야?”박예찬은 당연히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별거 안 했어요.”박예찬이 그렇게 말할수록 김인우는 더 궁금했다.김인우는 직접 박예찬을 어린이집까지 데려다주고 전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근처에 많은 경호원까지 배치해 두었다.드디어 어린이집 문 앞에 도착했고 박예찬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멀리서 유지훈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봤다.박예찬이 차에서 내리자 유지훈이 즉시 뛰어와 훑어보더니 의심하면서 물었다.“네가 박예찬이야?”“내가 아니면 누군데?”박예찬은 어이가 없었다.이때 조동민도 다가와 말했다.“
집에 혼자 있던 박윤우는 심심해서 나갔다가 집 앞에서 유지훈과 다른 두 아이와 마주쳤다.유지훈은 유남준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박윤우를 보자마자 다급히 말했다.“박윤우, 너 할 수 있으면 나와 봐.”박윤우는 유지훈의 뒤에 있는 다른 두 아이를 보고 그들이 절대 자신과 얘기를 나누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박윤우는 멍청하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은 박윤우는 세 명은 말할 것도 없고 유지훈과 단둘이 붙어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야?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해?”박윤우는 유지훈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그러자 유지훈은 더욱 화가 났다.“너 이 새X, 감히 그런 눈으로 나를 봐?”그 말을 듣자 박윤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오늘 반드시 이 아이들을 혼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유지훈, 너 혼자 들어올 용기는 있어?”유지훈은 그 말을 듣고 눈앞에 있는 박윤우는 박예찬과 외모가 닮기만 했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무조건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없을 리가 있나?”유지훈은 뒤에 있는 두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는 돌아서서 유남준의 집으로 들어갔다.경비원은 유지훈이 박윤우와 아는 사이인 것 같아 들여보내 주었다.들어가자마자 유지훈은 주먹을 꽉 쥐고 박윤우를 향해 휘둘렀다.그러나 박윤우가 피하며 말했다.“여기는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싸우기 불편해. 우리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유지훈은 그 말에 동의했다. 만약 경비원이 자신이 박윤우를 때리는 것을 보면 무조건 박윤우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유지훈은 박윤우를 따라 정원에 있는 조산으로 걸어갔다.조산은 크기가 커서 네다섯 살짜리 아이 두 명이 그쪽으로 걸어가자 곧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박윤우는 유지훈이 이렇게 속이기 쉬운 줄 몰랐다. 그는 속도를 높여 계속 주위를 돌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훈은 머리가 어지러웠고 어느새 앞에 있던 박윤우가 보이지 않았다.“어디 갔어? 박윤우?”유지훈이 소리쳐 물었지만 조산 안의 소리만 들려왔다.유지훈은 여기저기
박윤우는 유지훈이 지금까지 조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멍청하지.반면에 박민정은 의아해했다.“두 분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저희가 어떻게 알아요?”아들이 사라진 데다가 설에 유씨 가문에서 아버님이 유남준네를 편애하던 것이 떠오르자 최현아는 박민정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우리 지훈이가 오늘 어린이집 끝나고 여기로 왔는데 친구 말로는 지금까지 안 나왔다던데, 그럼 내가 여기로 찾아오지 어디를 가겠어?”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지훈이를 본 적 없어요.”“네가 못 봤다면 못 본 거야?”최현아는 같이 온 부하에게 지시했다.“지금 당장 찾아봐. 여기를 싹 뒤집어 놓더라도 우리 지훈이 찾아내.”“네.”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 저녁에 유남준의 집을 뒤지면서 심지어 위층에 있는 침실까지 들어갔다.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최현아 씨, 적당히 해요. 이건 무단침입이에요.”최현아는 유남준이 없는 것을 보고 박민정을 눈에 두지도 않았다. 하이힐을 신은 채 앞으로 걸어가서 말했다.“적당히 안 하면 어쩔 건데? 넌 못 듣고 유남준은 앞을 못 보는데 뭘 할 수 있어? 전에 너희가 내 남편을 잡았다고 우쭐거리지 마. 그때 내 남편이 실수하지 않았다면 유남준이 감히 내 남편을 건드릴 수 있었겠어?”유성혁은 헛기침 한 번 하고 박민정에게 말했다.“박민정, 내 아들 내놔. 아니면 너희 다 혼날 줄 알아.”박민정은 눈앞에 있는 막무가내인 두 사람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휴대폰을 들고 경찰에 신고하려던 찰나, 유성혁이 재빠르게 박민정의 손에서 휴대폰을 뺏어서 땅에 던졌다.“빨리 내 아들 내놔!”유성혁은 박민정에게 손을 대려고 했는데 이때 밖에서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즉시 들어와서 박민정과 박윤우를 지켰다.유성혁은 그 경호원들을 보고 갑자기 멈칫했다.유성혁도 사람들을 데려왔지만 유남준의 부하들과 비하면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최현아는 그들이 데려온 사람이 박민정네 사람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유
박민정은 임신한 몸으로 최현아를 차다가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는데 다행히 경호원이 잡아 줬다.최현아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차이자 평소의 자태는 내려놓고 손을 뻗어 박민정과 싸우려 했다.하지만 다행히 경호원들이 막아섰다.유성혁이 데려온 사람들이 두원 별장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보다 실력이 못했지만 그래도 사람 수가 많아서 박민정은 아이를 데리고 쉽게 나갈 수가 없었다.바로 이때 누군가가 온몸이 얼어붙고 얼굴이 시퍼레진 유지훈을 안고 걸어왔다.“사모님, 조산 쪽에서 지훈 도련님을 찾았습니다.”유지훈은 추위에 얼어서 모양새가 엉망이었다.최현아는 박민정과 박윤우를 신경 쓸 새도 없이 유지훈에게 뛰어갔다.“아들, 괜찮아?”유지훈은 벌벌 떨며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최현아는 겨우 몇 글자만 들을 수 있었다.“다 그... 새X 때문이야...”최현아는 박민정에게 따지고 싶었다.하지만 박민정과 박윤우는 이미 차에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유성혁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젠장! 할아버지가 오시면 무조건 나서주시라고 말씀드려야겠어.”두 아이는 차례로 병원에 보내졌다.유명훈은 병원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먼저 도착해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연이어 왔다.최현아는 울면서 유명훈에게 유지훈이 박윤우 때문에 갇히게 된 경과를 말하면서 너무 추워 몸이 다 얼었다고 했다.“할아버지, 우리 지훈이 지금 말도 못 해요. 그러니까 무조건 우리 지훈이 대신 그 사람들 혼내 주셔야 해요. 지훈이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옆에서 자랐는데 저 애는 유씨 가문의 핏줄이 맞는지 장담도 못 하잖아요.”박민정은 복도에 앉아 있으면서 박윤우를 걱정하느라 최현아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유명훈은 늘 유지훈을 걱정했다. 전에 몇 번 말썽을 피워서 혼냈었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증손주는 유지훈이었다.최현아의 말대로 유명훈의 마음속에서 유지훈이 박윤우처럼 똑똑하고 철 들지는 못했지만 늘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남다른 감정이 있었다.“알았어. 내가 꼭 지
유성혁의 말을 듣자 유명훈의 표정이 급격히 변하면서 박민정을 쳐다봤다.“진짜야?”박민정은 유명훈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면서도 전혀 겁내지 않았다.“윤우가 유씨 가문의 증손주가 아니면 공평한 대우도 못 받나요?”최현아는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누구 애인지도 모르는 새X를 감히 우리 지훈이랑 비교해?”‘새X’라는 두 글자는 박민정을 완전히 화 나게 만들었다.박민정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최현아를 쳐다봤다.최현아는 그 모습을 보고 자기가 차였던 것이 떠올라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뭘 째려봐? 내가 틀린 말 했어? 만약 우리 지훈이가 잘못되면 너랑 네 아들은 목숨으로 갚아야 할 거야!”박민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이때 어디선가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약 내 아들이 잘못되면요?”모두 고개를 돌려 보자 유남준이 사람들을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유남준은 선두에 서서 긴 다리를 뻗으며 곧 그들 앞에 다가왔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최현아와 유성혁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유명훈은 유남준이 온 것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남준아, 성혁이 말로는 윤우가 네 아이가 아니라고 하더구나.”유성혁은 유명훈이 자기가 말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찔렸다.하지만 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이 차분했다.“할아버지, 윤우가 제 아들이 맞는지 아닌지 제가 모르겠어요?”유명훈은 자료 한 웅큼을 들고 조금 전 유성혁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유남준에게 들려주었다.“남준아, 날짜가 맞지 않아. 너 박민정에게 속은 거야.”유성혁이 옆에서 말했다.유남준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성혁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최현아는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유남준이 자신한테 어떻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언성을 높였다.“남준아, 아까 박민정이 발로 나를 차기까지 했어. 너 절대 가만히 있으면 안 돼.”그러자 유남준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자신에게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제 와이프는 지금 임신한 상태예요
“확인 결과 윤우는 대표님의 친자가 맞습니다. 3 가지 검사 결과 전부 다 똑같이 나왔어요.”서다희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유남준에게 말했다.친자가 맞았다!그렇다면 박예찬과 박윤우는 전부 유남준의 자식이다.평온했던 눈빛에 충격이 가득했다.박민정은 그의 아이들을 데리고 5년 동안 사라졌던 것이다.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무슨 일인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계속해서 박민정과 박윤우를 비난하려고 했다.유남준이 서다희에게 말했다.“친자 확인 결과서 갖고 와.”친자확인이라니?!모두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박민정조차도 믿기지 않았다.도대체 언제 사람을 시켜 친자 확인 검사를 했단 말인가?박민정은 유남준이 전에도 친자 확인 검사를 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다.유명훈은 검사 결과를 받았고 고영란도 건네받았다.두 사람은 결과 보고서에 박윤우가 유남준의 친자임이 99퍼센트인 것을 보고 차가웠던 표정이 바뀌었다.“윤우가 우리 유씨 가문의 자식이 맞았네.”고영란이 웃으며 말했다.옆에 있던 유성혁과 최현아는 듣고도 믿지 않았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시간이 맞지 않은데.”최현아가 덧붙였다.“그 결과 보고서 가짜 아니에요?”서다희는 어이가 없었다.“제가 병원 세 군데를 찾아서 의뢰했으니 결과가 조작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 박민정이 5년 동안 사라지기까지 했는데 친자 확인 결과서를 조작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죠.”박민정은 머릿속에 온통 유남준이 두 아이가 그의 친자식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로 가득 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성혁은 최현아의 말에 맞장구쳤다.“남준아, 너 설마 네가 속았다는 걸 감추려고 결과를 조작한 건 아니지?”만약 유남준이 앞이 보였다면 당장 유성혁에게 주먹을 날렸을 것이다.사실 고영란도 남이 한 친자 확인 검사를 믿지 못했다.마침 이때 휴대폰이 울렸고 고영란은 발신자가 비서인 것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이것도 친자 확인 검사에 관한 내용이었다.고
“다행히 아이가 제때 병원으로 보내져서 생명의 위험은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자주 검사 받아야 할 거예요. 아니면 동상 후유증이 남거든요.”의사가 말했다.최현아는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최현아와 유성혁은 서둘러 아이를 보러 병실로 갔다.박민정은 의사가 박윤우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선생님, 제 아들 윤우는 어떻게 됐나요?”그런데 의사가 한숨을 쉬었다.“윤우 군은 백혈병입니다. 요즘 병세가 악화하여 입원해서 관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병세가 악화했다니...박민정은 자신이 그것도 몰랐다는 것에 충격받았다. 엄마로서 자격 미달인 것 같았다.고영란과 유명훈은 의사를 붙잡고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물었다.“우리 윤우가 백혈병이라고요?”“가족분들인데 이제 아신 거예요?”의사가 되물었다.고영란은 충격에 아무 말도 못 했다.그들은 박윤우와 유지훈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박윤우의 몸에는 의료 기기들이 붙어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박민정과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엄마, 나 진짜 지훈이 때리지 않았어.”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엄마는 윤우를 믿어. 말하지 말고 쉬어.”고영란도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윤우야, 할머니도 증조할아버지도 다 너를 믿어, 지훈이가 먼저 찾아간 거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할머니가 다 해결해 줄게.”박윤우는 갑자기 나타난 할머니 때문에 낯설어서 고개를 돌렸다.그러자 고영란은 난감했지만 여전히 손자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 같았다.두 아이에게 큰 문제가 없자 유명훈은 유남우더러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곧이어 그는 박민정과 고영란을 불러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유명훈은 지팡이로 바닥을 치며 말했다.“민정아, 너 어떻게 아이를 데리고 5년이나 사라질 수 있어? 게다가 아이가 이렇게 심각한 병에 걸렸는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거야?”박민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영란은 유난히 화가 났다.“네가 임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