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아빠가 대화 나눌 때 들었어. 지원 이모는 예전에 할머니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어서 삼촌이랑 맺어진 거라고.”유지훈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예전에 내 두 눈으로 직접 삼촌이 지원 이모를 밀쳐내는 모습을 봤어.”박예찬은 원래 유지훈의 입에서 유씨 가문에 관한 일을 알고 싶었을 뿐인데 뜻밖에도 자기 쓰레기 아빠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더 조사해야 안다.“보이는 대로 말하면 안 돼.”보이는 대로 말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박예찬이 아직도 자신을 못 믿는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이번 주말은 할아버지 생신이라 지원 이모도 올 거야. 나도 아빠 엄마랑 같이 가야하거든. 못 믿겠으면 같이 가자.”기회가 손쉽게 찾아왔다.“좋아, 네 말이 맞다면 내가 믿을게, 그리고 내가 잘 먹고 잘살 수 있게 만들어 준다면.”유지훈은 단번에 승낙했다.어쨌든, 그도 손해 볼 일은 없었다.이번에 유씨 가문의 옛 저택에 가면 그도 이지원, 이 나쁜 여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마음먹었다.자기 아버지를 뺏앗으면 그만이지, 감히 엄마의 작품까지 뺏앗다니!괘씸한 여자!주말이 되자 박민정은 일찌감치 전용차를 타고 조하랑네 집으로 갔다.가는 길에.그녀는 밖에서 내리는 큰비를 보며 멍때렸다.이때 운전기사가 말을 걸어 왔다.“예전에 연 선생님도 차를 타면 민정 씨처럼 창밖을 내다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그리고 어떤 여자아이도 이렇게 창밖에 비가 오는 걸 좋아했다면서 비 오면 근심 걱정이 날아간다고 했다고 자주 외웠어요.”“이제 보니 그 여자아이가 당신이었군요.”박민정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네요.”박민정도 세상이 참 좁다고 생각했다.드디어 조하랑의 별장에 도착했다.오늘 박예찬이 일찍 하원했다.조하랑과 박예찬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민정아, 어서 들어와, 나와 예찬이는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두 사람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만 보았다.“그래.”박민정은
박민정이 그녀의 말에 감동했다.“하랑아, 너무 고마워.”“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말자. 지난번에 나 대신 소개팅까지 나가줬는데 이번에도 네가 좀 막아줘.”조하랑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연회 자리다.예전에 출국하기 전에도 조하랑의 아버지는 그녀를 데리고 각종 연회에 참가했다.그 집보다 돈 많고 세력 있는 사위를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그녀는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그래.”조하랑은 그녀에게 힘을 불어넣어 줬다. “이번에는 반드시 유남준 그 멍청한 남자를 손에 넣어보자고! 그의 아이를 가지면 더 좋고!”“응.”저번에 성공할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쉬웠다...내일 그녀는 잘 계획해야 한다.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박민정이 조하랑에게 물었다.“내일 어르신의 생신인데 당연히 이지원도 오겠지?”“분명 유씨 가문에게 잘 보일 좋은 기회인데 그 여자가 놓칠 리가 없겠지?”조하랑이 대답했다.박민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이번에 가서 이지원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자.”이튿날.박예찬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유씨 가문 어르신의 생신 잔치는 오전 10시부터 시작한다.박예찬이 이렇게 일찍 일어난 원인은 첫째는 박민정에게 들킬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초대한 사람이 바로 유지훈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박민정은 친구에게 주라면서 선물 상자까지 준비했다.하지만 박민정은 박예찬이 말한 친구가 유씨 가문의 장손 유지훈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박예찬도 감히 그녀에게 말하지 못했는데, 만약 그녀가 알았다면 틀림없이 못 가게 했을 것이다.그래서 박예찬은 반 친구들의 이름 중 아무 이름을 골라 대충 둘러댔다.박예찬과 유지훈은 유치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얼마 후, 길쭉한 링컨 한 대가 박예찬 앞에 멈춰 섰는데 그를 더욱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차 문이 열리자 유지훈이 으스대며 물었다."너희 집에는 이런 차가 없지?”박예찬은 냉큼 아부했다.“응,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차가 겨우 몇억짜리야.”유지훈은 그를 자신의 곁
박예찬은 보던 걸 멈추고 대충 대답했다.“응.”유지훈은 그가 여전히 믿지 않는 것 같아 계속 말을 이었다.“지금 바로 손님을 접대하는 로비로 갈 테니 두고 봐. 내가 반드시 증명해 보일게.”“가자.”지금 이 순간, 손님을 접대하는 로비는 아직 한창 준비 중이었다.고영란은 할아버지의 며느리로서 그를 보살피고 있었다.“이번 어르신의 생신 잔치는 모든 곳에 신경 써.”그녀는 꽃꽂이를 가지치기하며 집사에게 당부했다."그리고 괜찮은 아가씨가 있으면 나한테 바로 알려줘.”4~5년이 지나도록 이지원은 유남준의 아이를 낳지 못했다.하여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다."네."집사가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마침 두 꼬마를 보았다.“지훈 도련님.”그가 유지훈을 부르자 유지훈은 그에게 손사래를 쳤다.그러자 집사는 바로 알아듣고 자리를 떴다.고영란은 처음부터 이 조카손자가 아니꼬웠다. 매번 그를 볼 때마다 겉치레로 남에게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또한 자기 친손자도 아니었다.그녀는 짜증 나서 그에게 다른 곳에 가서 놀라고 말하려다가 갑자기 시선이 멈췄다. 고영란은 멍하니 유지훈 옆에 있는 귀여운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단지 멀리서 보았을 뿐인데 그녀는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저 아이는 왜 저렇게 유남준의 어린 시절과 똑 닮았을까?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하인을 불러들였다.“가서 지훈이와 저 아이를 데려와.”“네.”고영란은 손에 든 꽃을 화병에 꽂지 않고 옆에 그대로 뒀다.박예찬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이곳에 왔는데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자기 친할머니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예전에 엄마를 괴롭혔던 그 사람.하인이 두 사람을 불렀다.이때 유지훈이 박예찬에게 소개했다.“저분이 삼촌의 어머니, 즉 이모할머니셔.”“응.”두 아이가 다가왔는데 고영란은 시종일관 박예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너무 닮았던 것이다.유남준의 어렸을 때와 거의 판박이 수준이었다.박예찬은 예민한
그는 경계하는 척 하며 말했다."할머니, 선생님께서 다른 집안 가정사를 함부로 묻는 건 예의 바른 게 아니라고 했어요."고영란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그제야 물은 게 너무 많다는 것을 의식했다.하지만 눈앞의 이 아이는 정말 똑똑했다.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을 경계할 줄 아는 걸 보니 말이다."미안해. 할머니가 잘못했어."그녀는 손을 들어 박예찬의 머리를 만지려고 했다.하지만 아이는 그녀의 손을 피했고 고영란의 손은 허공에 경직되어 있었다.곁에 있던 유지훈은 평소 자신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던 이모할머니가 박예찬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자 조금 불쾌했다."이모할머니, 저 예찬이와 함께 다른 곳에도 가봐야 해요. 그러니까 먼저 가볼게요."고영란은 계속 말릴 수 없었다."그래,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놀아. 필요한 거 있으면 날 부르고."두 아이가 간 후 고영란은 여전히 직성이 풀리지 않아 결국 비서를 불렀다."시간 있을 때 이 아이의 신분 좀 조사해 봐요. 특히 부모를요.""네."이 아이는 정말 유남준이 어릴 때와 너무 닮았다.만약 그에게 아이가 있다면 분명 박예찬과 같이 생겼을 거다."아, 맞다. 남준이 왔어요?"비서는 시간을 한 눈 본 후 대답했다."연회가 시작되기까지 한 시간이나 있으니 아마 대표님께서는 오시는 길일 겁니다."고영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온 후 꼭 그더러 연회장의 아가씨들을 주의해 보라고 할 것이다.아들이 얼른 여자를 만나 자신에게 손자를 만들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한편 박민정과 조하랑은 연회에 참가하기 전 드레스를 고르러 갔다.두 사람 모두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냥 평범하고 심플한 드레스를 골랐다.하지만 심플할 수록 박민정의 아름다움을 돋보였다.조하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우와, 너 진짜 예쁘다.""다른 사람은 옷이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데 넌 옷을 더 우아하게 만드네."박민정은 활짝 웃었는데 더 매력있었다.사실 조하랑의 외모도 나쁘지 않았다.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후진했다.차창이 내려가자, 유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을 끄고 박민정을 보았다.오늘 그녀는 아이보리 색의 등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하얀 피부를 더 돋보였다.유남준의 눈동자엔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하지만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녀와 조하랑이 탄 차가 유씨 본가에 도착했을 때 경호원이 이미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오랜만이야.”그는 웃는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대답했다.“그러게요. 오랜만이에요.”“타.”유남준은 더 말하지 않았고 박민정도 사양하지 않고 그의 곁에 앉았다.“날 찾아온 거야?”다른 사람들은 이 길을 전혀 몰랐다. 오직 그의 기사만이 차를 몰고 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요.”박민정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했다.유남준은 이 말을 듣자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그는 기사에게 말했다.“먼저 내 방으로 가요.”유남준이 말한 건 그가 본가에서 살고 있는 방이었다.“네.”박민정은 아직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유남준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기억을 찾고 싶다면 먼저 우리 신혼 방부터 가봐야 해.”두 사람의 신혼 방은 원래 두원 별장에 있었다. 하지만 결혼한 날엔 본가 쪽에서 보냈다.유남준의 방은 전처럼 단일한 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방에 들어간 후, 그는 박민정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먼저 슈트 재킷을 벗었고 그다음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박민정은 놀라 멍해 있었다.그녀의 몸은 조금 경직되었다.유남준이 왜 이러는지 잘 몰라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그는 여유 있게 박민정을 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이미 빨개진 것을 발견했다.유남준은 일부러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왜 날 보지 못해?”“기억 찾고 싶다며.”남자의 뜨거운 시선은 그녀를 위로부터 아래까지 훑었다.박민정은 얼굴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원래 그녀는 유남준을 꼬시려고 했는데 지금은 왜 조금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목소리는 허스키했다.그 자신만 알고 있었다. 계속 눌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말이다.하지만 박민정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었다. 그녀가 도대체 뭘 하려는 지 알아야 했으니까.박민정은 멈칫하더니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싫어요?”유남준은 이제야 그녀에게 목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갑자기 말을 돌렸다.“뭘 오해한 거 아니야? 난 방금 네가 기억을 되찾도록 도왔을 뿐이야.”“오늘은 이만하자. 연회에 참석해야 해.”박민정의 안색은 별로 졸지 않았다.적어서 육, 칠 분 입을 맞추었는데 다 그녀를 갖고 논 거였다니.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손을 그의 몸에서 뗐다.유남준은 먼저 옷을 갈아입은 후 그녀와 함께 연회장에 갔다....연회엔 김인우와 그의 할아버지인 김훈도 함께 참석했다.김훈은 다른 가장들과 같은 마음이었다. 이 기회를 빌어 김인우에게 좋은 아내를 골라주고 싶었다.김인우는 할아버지를 이기지 못해 연회에 참석했다. 그는 먼저 어르신에게 생신 축하 인사를 올린 후 김훈의 명령하에 강제적으로 스무 명의 여자들을 만나봐야 했다.“오늘 말을 안 들으면 집에서 나가! 난 너 같이 못난 손자 없다.”김훈은 손자를 꾸짖었다.“나이가 몇인데 아내도 찾지 못하다니, 정말 우리 집안에 먹칠을 하는구나!”김인우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그는 여자가 부족했던 적이 없었으니까.“알겠어요.”할아버지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의 심장병이 발작할까 봐 두려웠다.의사는 절대 화를 내면 안 된다고 했다. 화가 심장에 해로우니까.김훈은 또 요란하게 차려입은 이지원을 보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는 잊지 않고 손자에게 경고했다.“잘 기억해 둬. 이 이지원만은 안 돼!”김훈은 사람을 보는 눈이 대단했다.몇 년 전에 이지원이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는 것을 조사해 냈었다. 그리고 지금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가 아주 많은 여우였다.“걱정하지 마세요.”김인우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박민정이라는 것을 안 후부터 이지원에게 조
이지원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다리를 안고 있는 아이를 보았는데 눈동자엔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티를 내지 않고 허리를 굽혀 웃으며 말했다.“응, 나야.”“꼬마야, 너 왜 혼자 여기 있어? 부모님은?”그녀는 눈앞의 아이를 자세히 보았다. 아이의 오관은 입체적이었고 큰 눈은 사람을 홀릴 정도였다.딱 보아도 아이의 부모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박예찬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지원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줌마가 제 아빠를 뺏었다면서요? 저한테 아빠를 돌려주실 수 있어요?”이지원의 몸은 순간 경직되었다.주위의 재벌 집 사모님들은 이 소리를 듣고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눈동자엔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들은 남자를 통해 지위를 올리려는 연예인을 가장 싫어했다.“정말 파렴치하네!”“유 대표님을 가졌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지. 어떻게 다른 남자를 꼬셔?”“이러니까 유 대표님이 이 여자랑 결혼하지 않았지. 그냥 갖고 놀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이지원은 멘탈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간신히 화를 참고 웅크리고 앉아 박예찬을 바라보며 말했다.“꼬마야,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난 널 모르고 네 아빠도 몰라.”이렇게 말한 후, 그녀는 다시 박예찬에게 다가가 두 손을 아이의 어깨에 놓고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나쁜 놈, 계속 헛소리했다간 물고기 먹이로 바다에 던져버릴 거야!”이지원은 박예찬이 그저 평범한 아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연기가 그렇게 좋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일 초 후, 아이는 그녀의 손을 힘껏 치더니 울먹이며 말했다.“아줌마,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물고기 먹이로 절 바다에 던지지 말아 주세요...”이지원은 정말 아이의 입을 막고 싶었다.“아니에요...저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어요...”그녀는 급하게 해명했다.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다. 어쩔 수 없이 여자를 만나야 했던 김인우도 이곳을 보았다.그는 첫눈에 아이를 알아보았다.
“네.”우선 이 나쁜 놈을 기진맥진하게 만들 것이다.어쨌든 지금 어르신의 생일 파티가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니 소란을 피울 수 없었다.김인우는 지금 시간이 많았다....한편 유남준과 박민정은 선후로 연회장에 도착했다.박민정은 유씨 집안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 유남준이 들어간 후에야 들어갔다.유남준은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까 해프닝을 겪고 이지원은 어렵게 연회장에 있는 기자를 매수했다.유남준이 온 걸 보자 그녀는 얼른 상태를 조절하고 다가갔다.“오빠, 연회도 이미 시작했고 다들 어르신께 축하 인사를 드리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 나 오빠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유남준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한 일을 보고하는 버릇이 없었다.그래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다음엔 기다리지 마.”이지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들어오는 박민정을 본 후 뭔가 깨달았다.이지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유남준이 오자마자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을 앗아갔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유씨 집안의 젊은 대표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고영란은 아들이 무척 자랑스러웠다.유남준은 우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하얀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있으나 눈만은 밝은 어르신에게 생신 축하한다는 인사를 올렸다.이지원도 이 기회를 빌어 상류 사회에서 자신을 내세우고 싶었다.“할아버지, 저도 오늘 선물을 갖고 왔어요.”어르신은 비록 이지원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고영란처럼 손자가 하루빨리 결혼하기를 바랐다.게다가 며칠 전 이지원이 쓴 노래는 그녀가 얼굴만 반지르르한 게 아님을 증명했다.그래서 그는 이지원이 주는 선물을 묵묵히 받았다.그녀는 빛깔이 엄청 좋은 연옥을 선물했다.이런 물건은 재벌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받았으니 이지원이 이미 유씨 집안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했다.박민정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면서 그들의 의논 소리를 들었다.“정말 오리가 백조로 되었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