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심각한 일이 터졌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에리 이야기였다.박민정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남준 씨, 나 못 믿죠? 에리가 왔다는 소식 듣고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 보면 말이에요.”유남준은 그녀를 품 안에 더 꽉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내가 자신이 없는 거야.”‘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남준 씨조차 이렇게 흔들리게 만드는 걸 보니 에리의 존재감이 정말 엄청나긴 한가 보다.’박민정은 남편의 등을 토닥이며 담담하게 위로했다.“알았어요, 아무 일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애초에 나랑 에리는 다른 세계 사람이에요. 그 애가 젊고 잘생기긴 했지만 나도 내 주제를 잘 안다고요.”그러나 위로랍시고 던진 그 말에 유남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지금 이게 위로인가? 결국 나보다 에리가 더 잘생겼단 얘기잖아.’게다가 그녀가 에리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라니, 유남준은 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예전 같았다면 이런 배우 하나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 유남준의 마음은 달랐다. 박민정에 대한 애정이 깊어질수록 젊고 인기 많은 에리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상황은 그에게 불안을 주었다.마침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부부가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박예찬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슬쩍 시선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지만 박윤우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이 자신이 온 줄도 모르는 틈을 타 조용히 다가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갑자기 아이의 존재를 알아챈 박민정이 깜짝 놀라 물었다.“윤우야, 너 언제 돌아왔어? 여긴 언제부터 있었던 거니?”박윤우는 한숨을 길게 쉬며 투덜댔다.“엄마는 정말 나한테 관심이 없어. 나랑 형은 벌써 오래전에 돌아왔거든요? 내가 두 분이 껴안고 있는 걸 본 시간이...”아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아마 다섯 손가락을 열 번은 꼽았을 정도로 길었을걸?”박민정
그녀의 말을 들은 에리는 눈가에 쓴웃음을 흘렸다.“알아.”그는 어딘가 허전한 표정을 지었다.“난 그냥 너에게 설명하고 싶었을 뿐이야.”에리는 속으로 박민정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오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헛된 희망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앞으로 이런 설명을 나에게 하지 마. 나는 전혀 관심 없으니까.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야. 만약 정말 신경 써야 할 게 있다면 네가 회사 이미지를 훼손했을 때야. 그땐 너도 설명이 필요할 거야.”에리는 그녀의 차가운 말투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 다시 한번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지만 그는 배우답게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하...내가 자꾸 폐만 끼치는구먼.”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다른 일 없으면 들어갈게.”박민정이 말했다.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박민정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에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진 곳을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녀가 떠난 후 그의 기사가 천천히 차를 몰고 그의 곁으로 왔다.“대표님.”“응.”에리는 대답한 후 차 문을 열고 차에 탔다.“어디로 모실까요?”“회사로 가자.”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에리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때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 왔다.에리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간신히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세요?”“너와 그 여자 연예인 이야기가 사실이니? 엄마가 들었는데, 결혼도 했었고 애도 있는 사람이며?”조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왜 하필 그런 여자를...”에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건 미친 짓이야.”에리는 부모님에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 순간 그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엄마, 아빠가 전에 제가 결혼만 하면 상대방이 남자만 아니면 뭐든 괜찮다고 하셨잖아요.”조미연은 말
박민정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진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결혼했어요. 상대는 대기업 대표였는데 잘해주지 않아 이혼했대요.”이현기가 물었다.“그럼 에리 부모님이 허락할까요?”곧이어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저렇게 잘생긴 에리가 뭐 어떤 여자를 못 만나서, 왜 하필 결혼 경력에 애까지 있는 여자를 선택했을까요?”“그게 진짜 사랑인가 보죠.”진서연과 이현기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수다를 이어갔다.박민정은 그들 옆에서 그들의 수다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마침내 집에 도착했다.박민정은 멀리서 누군가 패딩을 입고 마스크를 한 채 대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몸매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에리 씨?”진서연이 제일 먼저 그를 알아보았다.“왜 여기 온 거죠?”박민정도 의문스러운 표정이었다.이현기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진서연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보스 찾으러 온 거 아니에요?”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 내려가 보자.”차 소리가 들리자 몸을 돌린 에리는 차에서 내리는 박민정과 진서연의 모습을 보았다.운전기사인 이현기는 그 자리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차를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 눈에 띄어 어쩔 수 없이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가야 했다.박민정과 진서연은 에리를 향해 걸어갔다.“에리 씨,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진서연이 물었다.일 년 만에 다시 만난 에리는 약간의 수염을 길렀다. 영화를 위해 꽤 터프한 이미지로 변신해 있었다.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그 이미지는 무너져버렸다.“서연 씨, 민정 선생님, 오랜만이에요”“오랜만이에요 에리 씨,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볼 뻔했어요.”진서연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에리는 웃으면서 말했다.“그래요? 이게 다 일 때문이에요.”진서연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 순간 에리의 시선이 박민정에게로 향했다.“민정 선생님,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진서연도 눈치껏 자기 집으로 돌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박민정은 진서연을 탓하지 않고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어?”진서연은 박민정을 한쪽으로 끌어당겼다.“차에 가서 말해요.”“그래.”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차에 오른 후 히터가 작동했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전에 민기 씨가 얘기했어요. 아이는 약점이 될 수 있으니 원치 않는다고.”박민정은 이제야 비로소 이해했다,“그렇다면 미리 피임했어야지. 이미 임신한 상황에서 아이를 지운다면 네 몸도 상할 거야.”진서연은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이건 민기 씨 탓 아니에요. 정말이에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이는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어떻게 민기 씨 탓이 아니라는 거야?”진서연은 말을 덧붙였다.“지난달에 제가 민기 씨를 찾아갔을 때 누군가 그에게 몰래 약을 탔어요. 그래서 결국...”그 말이 끝나자 박민정의 눈빛에 출렁이던 분노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박민정은 줄곧 정민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나쁜 남자라서 진서연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이미 벌어진 이상 어쩔 수 없어, 민기 씨에게 말해서 뭐라고 하는지 봐.”진서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박민정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보스, 제발 부탁이에요. 이 일을 절대 민기 씨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박민정은 마지막으로 임신 사실을 숨겨 달라는 부탁을 받은 건 조하랑 때였던 게 떠올랐다.그녀는 또다시 임신 사실을 숨겨달라는 부탁을 받을 줄은 몰랐다.“비밀은 지켜줄게.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어. 민기 씨에게 알리는 게 좋을 거야·둘이 함께 이 일을 해결해야 해.”진서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예요.”“어떻게 처리하겠다는 거야? 정말 아이를 포기할 생각인 거야?”박민정은 진서연의 눈빛에서 그녀가 아이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
진서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아직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얼마 전 진서연은 정민기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그때 진서연은 정민기의 가문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됐다.일부 친척들은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었다.정민기는 그녀의 안전을 보장한 뒤 혹시 모를 사고 방지를 위해 그녀를 박민정 곁으로 돌려보냈다.“아이고, 너 정말…”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진서연이 낄낄대며 웃어넘겼다.조금 전 강재민이 청소하는 사진을 올린 유주아는 이번에 그가 직접 만든 음식 사진을 올리며 글을 추가했다.[우리 집 아줌마가 하는 음식보다 훨씬 더 맛있어요.]박민정은 평범한 가정식인 것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역시 사랑만 있으면 물만 마셔도 배부르다니까.”진서연은 사진을 보고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토할 것만 같았다.“으엑!”참을 수 없었던 진서연은 휴지를 움켜쥐고 휴지통으로 달려가 토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한참을 토한 뒤 속이 조금 나아진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모르겠어요. 요 며칠 계속 속이 울렁거려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 문득 생각이 스쳤다.“서연이 너 혹시 임신한 거 아니야?”진서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네?”박민정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번 달 생리는 했어?”진서연이 고개를 저었다.“일주일이나 늦었는데도 안 왔어요.”그녀의 눈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설마 진짜로 임신한 거야?”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진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약을 먹었는데.”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박민정은 그녀의 이상한 모습을 눈치채고 물었다.“서연아, 무슨 일 있어?”정신을 차린 진서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아무
그녀의 말을 들은 강재민이 대답했다.“일찍 나가서 더 큰 집을 알아봤어요. 깊이 잠들어 있길래 차마 깨우지 못했어요. 주아 씨가 일어나기 전에 집안 물건을 정리해 새로 구한 집으로 옮기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유주아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눌려있던 돌이 확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이 바보 멍청이! 왜 저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저는...저는...”“주아 씨는 뭐라고 생각했어요?”강재민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유주아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줄 알았다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별일 아니에요.”“그래요. 배고플 텐데 아침 먹어요.”말을 마친 강재민은 아침을 차려왔다.“언제 깨어날지 몰라 아침을 전기밥솥에 보온시켰어요. 지금도 따뜻해요. 한번 어떤지 봐봐요. 안되면 다시 가서 사 올게요.”유주아는 그가 사 온 고기만두를 한입 베어 물고 그에게 물었다.“이거 서대문에서 사 온 거예요?”“네.”강재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유주아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서대문은 여기에서 꽤 먼 거리에 있었다.게다가 그 만두 가게는 매일 한정 수량만 판매하기에 일찍 가야만 살 수 있었다.“고마워요.”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근데 어제 이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잖아요.”강재민이 말했다.“안 돼요. 이미 주아 씨를 너무 힘들게 했는데 더 이상 힘들게 하면 안 돼요.”강재민은 남자로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좋은 삶을 주고 싶었다.비록 최고는 주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다.유주아는 그 말을 듣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재민 씨는 바보예요. 전 전혀 힘들지 않아요. 같이 이사 준비해요.”강재민이 말렸으나 유주아는 고집을 부리며 꼭 같이 집 안 정리를 하겠다고 했다.물건을 함께 정리하고 옮기다 보니 어느새 집 안이 깔끔하게 정리됐다.강재민이 새로 구한 집은 예전에 살던 곳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아파트단지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