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추경은의 미소는 약간 어색해 보였다.그녀는 몇 걸음 물러서면서 고영란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이런 추경은의 모습은 박민정도 처음 본 것이었다.유남준을 본 추경은은 항상 달려들어 애교를 부리지 않았던가?그런데 유남우에게는 왜 이렇게 거리를 두는 것일까?“남우야, 네가 왜 왔어?”고영란이 다가오며 의아해했다.“형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와봤어요.”“아, 남준이는 여기 없고 해운 별장에 있어.”고영란은 또 박윤우에게 말했다.“윤우야, 빨리 삼촌께 인사드려야지.”박윤우는 유남우를 몇 번 본 적 있지만 왠지 이 남자가 무겁게 느껴졌다.“삼촌, 안녕하세요”박윤우는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넸다.“그래.”유남우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숙이더니 사탕을 꺼내 박윤우에게 건넸다.“삼촌이 윤우에게 줄 선물이 없네. 오늘 밥 먹고 챙긴 사탕밖에 없어.”분명 유남우는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지만 박윤우의 눈에는 그의 주위에 검은 안개가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박윤우은 단순히 직감이 예리한 정도가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의 주위에 엷은 빛이 감도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핑크색이나 금색의 빛이 맴돌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그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박민정과 고영란처럼 말이다.반대로 추경은처럼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 주위에는 차가운 파란색이나 청록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하지만 박윤우는 평소처럼 집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남우 주위에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퍼져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박윤우는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사탕을 받아 들고 고영란 옆에 섰다.그는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예전에 박예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박예찬은 여러 서적들을 통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발견했다.어릴 때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박윤우는 방으로 달려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오늘 어떤 사람의 몸에서 검은빛이 나는 걸 봤어. 너무 무서웠어.”박윤
전에 박윤우는 유남우와 가까이 있은 적이 거의 없었다.가까이 있었다고 해도 그에게서 검은 안개를 느끼지 못했지만 오늘은 확실히 보였다.“집에서 조심하고 있어. 나 지금 비행기 타야 하니까 이따가 다시 얘기하자.”“알겠어.”박윤우는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창밖을 보니 유남우가 여전히 밖에서 박윤정, 고영란과 이야기하고 있었다.멀리서도 유남우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보이는 것 같아 무섭게 느껴졌다.밖에서.고영란은 유남우를 보더니 박윤우가 방송을 했던 일을 떠올렸다.어떻게 어린아이를 돈을 벌게 할 수 있지?“민정아, 너 요즘 별로 하는 일도 없는데 남우를 따라 회사에서 경험 좀 쌓아보는 게 어때? 그래야 수입도 좀 늘어나지 않겠어? 하루에 3, 4시간만 일해도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 애들한테도 무리 안 갈 거야.”박민정과 유남준이 해외로 떠난 후로 고영란은 이미 이 일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박민정은 조금 놀랐다.전에 고영란은 그녀가 밖에서 일하는 걸 항상 반대했었다.귀도 잘 안 들리는 며느리가 나가서 일하면 유씨 가문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말이다.그런데 지금은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뀐 거지?“어머님, 전 가끔 작곡을 하기도 해요.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에요.”박민정이 대답했다.사람은 변하는 법이다.박민정이 예전에 직장을 다닐 때, 고영란은 그녀가 밖에서 일하는 걸 싫어했다.하지만 지금은 직업이 없다고 하니 편히 집에서 쉬고 있는 그녀가 꼴 보기 싫은 모양이다.“작곡?”고영란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네가 작곡을 한다고?”일반 사람에게도 작곡은 쉽지 않은 법이다. 더구나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작곡을 할 수 있단 말인가?“그냥 취미로 하는 거지, 전문가는 아니에요.”“그럼 회사 다니는 게 낫겠다.”고영란은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남준이도 회사로 보낼 생각이야. 잘 보이지 않으니까 네가 옆에서 도와주는 게 좋지 않겠어? 남준이한테 그렇게 하라고 연락할게..”박민정이 돌아온 이후, 그녀가 예전처럼
추경은은 꿍꿍이가 많았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은 아니었다.그걸 알아챈 박민정은 추경은이 생각보다 상대하기 훨씬 수월한 존재라는 걸 느꼈다.“나 좀 쉬어야겠어요.”“그래요, 방해하지 않을게요.”추경은은 원래 박민정에게 많이 자면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유앤케이로 데려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정원에서 잠시 산책한 후 다시 앉아 휴식을 취했다.멀리서 추경은이 어디선가 큰 가방을 가져와 별장에 있는 가정부와 경비원들에게 뭔가를 나누어주고 있었다.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추경은을 박민정은 그저 조용히 지켜봤다.몇 개의 선물로 매수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많은 선물로도 쉽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박민정은 추경은의 행동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책을 보며 악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추경은은 가끔 박민정을 쳐다봤다.그녀가 자신의 행동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 심지어 별장 사람들과 함께 나가서 식사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그녀는 서다희에게도 메시지를 보내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스케줄을 확인한 서다희는 모레 저녁 9시 이후에 시간이 된다고 알려주었다.추경은은 곧바로 서다희와 모레 저녁 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서다희는 별장 사람들과는 달리 유남준의 최측근이었다. 유남준과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한 사람으로 박민정보다 유남준 옆에 더 오래 있었을 것이다.서다희를 사로잡으면 분명 유남준에게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저녁 식사 시간에 추경은은 무심코 휴대폰을 식탁에 올려놓았다.박민정은 자리에 앉자마자 문자 알림 소리를 들었다.무의식적으로 추경은의 휴대폰 화면을 보게 되었는데 ‘다희 오빠’로부터 온 메시지였다.[알겠어요. 그럼 모레 9시 반에 시즌 레스토랑에서 봐요.]박민정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의 문자를 훔쳐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추경은이 서다희를 저장한 호칭, 그리고 모레 9시 시즌 레스토랑에서 보기로 한 문자를 보며 박민정은 고개
최근 정수미는 비즈니스를 하러 다시 진주에 왔다.윤소현은 지금 그녀와 함께 식사 중이었다.그녀에게 음식을 집어주고 물을 따라주고는 말했다.“엄마, 많이 드세요.”“그래.”정수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 평화로운 순간에 전화벨 소리로부터 방해를 받게 되었다.윤소현은 전화를 받으려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한수민인 걸 발견하고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하지만 윤소현은 실수로 전화를 끊는 대신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가방에 넣어둔 상태라 한수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누구야?”정수미가 물었다.“왜 안 받아?”“스팸 전화예요.”윤소현이 대답했다.윤소현이 계속 대답하지 않자 한수민은 전화를 끊고 다시 걸려다가 정수미와 윤소현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스팸 전화?’윤소현이 버튼을 잘못 누른 걸 깨달은 한수민은 두 사람의 대화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정수미와 있을 때 윤소현이 어떤 모습인지,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엄마, 푸아그라 엄청 맛있어요. 제가 미리 주문해서 공수해 온 거예요.”“그래.”정수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한 입 먹었다.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소현아, 한수민이 암에 걸렸다면서?”“네, 자궁경부암 말기예요. 의사가 2년도 못 살 거라고 했어요.”윤소현이 바로 대답했다.정수미가 한수민을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윤소현은 이어서 말했다.“자업자득이죠. 예전에 엄마에게서 아빠를 빼앗아 갔으니 이렇게 암에 걸린 거 아니에요.”윤소현은 한수민이 자기가 한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정수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소현아, 기억해. 한수민이 내게서 윤석후를 빼앗은 게 아니라, 한수민이 내가 쓰다 버린 윤석후를 찾아간 거야. 알겠어?”정수미는 정씨 가문 사람들을 대충 속이기 위해 윤석후와 결혼한 것이었다. 게다가 윤석후는 다루기 쉬웠다.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지만 정수미는 여전히 윤석후의 배신을 증오했다.“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엄마, 한수민 같은 여자가 엄마
“소현아, 엄마가 그렇게도 싫어?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어?”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 한수민이 행여나 남에게도 들릴까 봐 소리를 한껏 낮춘 채 물었다.그 소리는 유난히 무거웠고 한없이 가라앉았다.늘 자랑으로 생각하면서 애지중지 여겼던 딸이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마지노선을 잃은 채 생모의 기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양모에게 그러한 심한 말을 했으니 말이다.생모가 싫다면서, 생모가 역겹다면서, 생모가 죽었으면 좋겠다면서.어쩌면 그 심한 말을 직접 듣고 나서야 한수민은 전에 박민정에게 했었던 그 말들이 얼마나 고약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엄마, 오해마세요.”윤소현은 다급히 이리저리 둘러대기 시작했다.“조금 전에는 정수미가 여기에 있어서 그런 거예요. 엄마도 아시잖아요, 정수미가 엄마가 싫어한다는 것 말이에요.”“그냥 정수미한테 좀 잘 보이고 싶어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요.”“제가 조금 전에 한 말들은 그냥 잊으세요. 정수미가 아니라 엄마야말로 제 친엄마인데, 당연히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거짓말을 합리화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윤소현의 말에 한수민은 믿지도 않았다.한수민은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내가 정말로 정수미보다 중요한 거 맞지?”“그럼요.”“그럼, 정수미한테 가서 내가 네 친엄마라고 내가 널 낳은 거라고 말해.”한수민이 말했다.그 말에 눈동자가 크게 일렁인 윤소현은 속으로 한수민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미친 거 아니야?’“엄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엄마 친딸이라는 사실을 정수미가 알게 된다면 정씨 가문의 모든 유산을 저한테 물려주겠어요?”한수민은 핸드폰을 꼭 움켜쥐었다.“그 재산이 중요한 거야 아니면 네 엄마인 내가 더 중요한 거야?”“그럼, 이렇게 하면 안 될까요? 정수미 유언 남기고 거의 죽어갈 때쯤에 사실을 말해주면 안 될까요?”“걔가 죽기 전에 나부터 죽을 것 같아서 그래!”윤소현에게 실망한 대로 한 한수민이다.“정수미한테 말할 용기가 없으면 내가 직접 할게.”그러나 그
“유언 상속을 무효로 만든다고 한들 큰 의미 없어요. 아빠가 이미 윤씨 가문의 재산을 따로 옮겨 버렸잖아요. 박민정이 상속하게 될 재산도 얼마 되지 않을 거예요.”한소민의 말을 듣고서 윤소현은 순간 흥미를 잃어버렸다.계속 자기 생각을 내뱉으려고 했던 한수민은 윤소현의 반응을 보고서 덩달아 흥미를 잃게 되었다.“그러네. 정씨 가문에 비하면 그 돈은 새 발의 피나 다름없는 거였네.”“엄마, 특별한 일 없으시면 앞으로 저 찾지 말아 주세요.”말믈 마치고 윤소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다른 이들에게 욕을 먹게 될까 봐 걱정되어서인지 아니면 한수민을 찾아온 사실을 정수미가 알게 될까 봐 두려웠는지 다급해 보였다.윤소현은 수표 한 장을 옆에 있는 간병인에게 주면서 말했다.“이거 받으세요. 이번 달 식사 비용, 병원 비용 그리고 아주머니 월급이에요.”돈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간병인은 바로 수표를 건네받았지만 윤소현이 떠나고 나서야 금액을 확인했다.600만 원이 적혀 있는 수표를 보고서 간병인은 혀를 내둘렀다.“600만 원밖에 없는데요? 사모님 병원 비용으로 모두 지급한다고 하더라도 부족할 거예요.”한수민은 이곳에 하루라도 입원해 있으면 몇십만 원이 들기 일쑤이다.여러 가지 약물치료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600만 원?”한수민 역시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간병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제가 보기엔 전번에 왔었던 그 따님이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으시더니 인제 알겠어요?”간병인은 요즘 도도하기 그지없었던 한수민의 모습이 예전과 달리 많이 사라짐을 발견하게 되었다.생사 앞에서 그 누구든 이처럼 약한 법이다.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결국 자연의 법칙을 어길 수 없으니 말이다.간병인은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사모님, 조금 전에 따님과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그랬어요?”그 질문을 듣게 된 한수민은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아 눈 한번 딱 감기로 결정했다.“다
박민정은 간병인이 보내준 주소대로 차를 몰고 목적지로 향했다.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민기에게 함께 따라와 달라고 부탁도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도착할 때쯤, 박민정은 환자복을 입은 한수민이 엉클어진 머리를 한 채 초췌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허둥지둥거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부잣집 사모님의 도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많이 아파 보였다.박민정은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이곳은 정씨 가문의 계열 회사였다.‘왜 여기로 오신 걸까?’박민정은 간병인에게 도착했다고 알리지 않고 핸드폰 네트워크도 잠시 꺼두었다.그렇게 하면 한쪽 곁에 있는 간병인은 박민정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된다.모든 걸 마치고 박민정은 차에서 내려 제법 은밀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한수민은 여기 이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회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비원에게 가로막혀 버렸다.자기 앞길을 막고 있는 경비원에게 한수민은 언성을 높였다.“정수미보고 당장 나오라고 해!”경비원은 자기 회사 대표의 이름 석 자를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큰 소리로 부르고 있는 한수민을 보고서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렸다.“누구십니까? 누구시길래 감히 우리 정 대표님 이름 석 자를 부르시면서 언성을 높이시는 거죠?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꺼지시기 바랍니다.”밀려드는 통증으로 이마에 땀이 흥건해진 한수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사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정수미한테 한수민이 찾아왔다고 전해. 내 이름을 듣게 되면 무조건 나오게 되어 있어.”하지만 경비원은 그 말을 전해주려고 하지 않았다.“당장 꺼져! 확 밖으로 던져버리기 전에!”간병인 역시 한수민을 말리기 시작했다.“사모님, 그만 하세요. 왜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이러시는 거예요.”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경비원들도 하나둘씩 다가와 한수민을 둘러싸기 시작했다.간병인은 슬슬 두렵기 시작했지만, 한수민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나한테 손대도 상관없어. 근데 그거 알아? 나 암 말기 환자야. 앞으로 콩밥 먹고 살고 싶으면 얼마든지 덤벼.”그 말에 경비원들은
“정수미 씨, 다름이 아니라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실은 그동안 자기 딸로 키워왔던 소현이는 내...”“아주머니, 헛소리하지 마시죠.”윤소현은 바로 나서서 한수민의 말을 끊어버렸다.‘아주머니?’남다른 호칭에 한수민은 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하지만 구미가 당긴 정수미는 윤소현을 말리면서 계속 물었다.“소현아, 괜찮아. 무엇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저 사람이 너에 대해서 뭐라고 하든 엄마는 우리 소현이 믿어.”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네.”자기가 배 아파 낳은 딸이 다른 여자에게 엄마라고 부르면서 다정하게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토록 아이러니할 수가 없었다.한수민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정수미 씨, 잘 들어요. 윤소현, 우리 소현이 내 친딸이에요.”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정수미는 귀신이라도 본 듯했다.윤소현에 관해 결코 좋지 않은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이토록 어안이 벙벙해지는 사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생각지도 못했다.“한수민 씨, 장난도 정도껏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소현이는 나랑 소현이 아빠가 복지센터로 가서 직접 데리고 온 아이라고요. 근데 어떻게 우리 소현이가 그쪽 딸이란 말이죠?”늘 한수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정수미는 그녀와 두 눈을 마주하고 얘기를 해 본 적도 없다.그러나 지금 한수민이 자기를 속인 거라고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 자신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해줬으면 했다.윤소현 역시 한수민에게 눈짓을 보내며 얼른 다른 거짓말로 둘러대기를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한수민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차갑게 웃으며 아랑곳하지 않았다.“흥! 비즈니스 여왕이라고 불리던 정수미 씨, 설마 그동안 애지중지 키워온 자식이 누구 배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키운 거예요?”“소현이는 나랑 석후 사이에서 생긴 아이예요.”“석후랑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요.”충격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수미는 그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그러나 그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