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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5화

Author: 금붕어
박하린은 결코 주민혁이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기게 두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평생 남자에게 기대지 않고 살아왔고 지금도 스스로 해결할 힘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민혁 오빠가 힘들면 도움을 청하라고 했어요.”

박하린은 눈빛을 곧게 세우며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 200억은 금방 메워 넣을 수 있을 거예요.”

최수빈은 511연구원 프로젝트를 마친 뒤 잠시 시간을 내어 천공으로 향했다.

예전만큼 바쁘지는 않았지만 남은 업무를 정리하는 건 자신의 몫이라 생각했다.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던 때, 육민성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박하린이 그 일억을 다 메웠대. 대신 이유강은 소환돼서 곧 구속될 거라던데.”

“당연하죠.”

최수빈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민항기 재료에까지 부실을 저질렀으니 자업자득이에요.”

육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사전에 꼼꼼히 조사해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우리도 휘말렸을 거야.”

최수빈은 손에 쥔 서류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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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안에는 따뜻한 바람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송미연은 조수석에 기대앉아 있었고 이마에 달라붙어 있던 젖은 머리카락도 어느새 절반쯤 말라 있었다.육민성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다녀와요. 저도 감기 걸리면 다음 날 아무것도 못 해서 힘들어요.”오랜 시간 쌓인 우정 덕분에, 그녀는 이미 육민성의 배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그의 다정함은 늘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편안하게 다가왔고 굳이 사양하거나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육민성은 짧게 대답하고는 문을 열고 다시 폭우 속으로 뛰어들었다.빗줄기는 은빛 실처럼 얽혀 그의 몸을 순식간에 덮쳤고 셔츠는 금세 흠뻑 젖어 등에 달라붙었다.송미연은 그가 길모퉁이의 약국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그러나 곧 졸음이 밀려왔다.어젯밤에는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뒤척이며 제대로 잠들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는 회의장에서의 소동까지 겪은 탓이었다. 긴장이 풀리자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래서 그녀는 자세를 조금 고쳐 앉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숨결은 점점 고르게 가라앉았지만 미간은 옅게 찌푸려져 있었다. 잠든 와중에도 무언가를 거부하듯 말이다.얼마 후, 감기약과 따뜻한 물을 들고 온 육민성의 눈앞에는 바로 이런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어두운 차 안 조명 아래, 잠든 송미연의 얼굴은 유난히 부드럽고 고요해 보였다. 평소의 당당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보기 드문 얌전한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혹여라도 그녀를 깨울까 봐, 육민성은 조심스럽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약과 물은 조수석 수납함에 넣어두고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다.운전에 집중하면서도 육민성은 가끔씩 곁눈질로 옆자리를 확인했다. 혹시라도 길이 울퉁불퉁해 그녀가 깨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겉으로는 자유롭고 거리낌 없어 보이는 송미연이지만 사실은 마음속에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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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려운은 곧장 주민혁의 곁으로 다가와 들고 있던 자료를 건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대표님, 관련 증거는 전부 확보했습니다. 임하은 씨의 당시 임신 검사 기록, 임명규 씨가 협력업체 관계자와 접촉하도록 지시한 일정 기록, 그리고 관련자들의 진술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어요.”주민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넘겨보지는 않고 이미 얼굴빛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는 임하은을 바라봤다.“임하은 씨, 계속해서 내 아이를 가졌다고 주장하시는데... 이 자료부터 확인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그는 려운에게 지시해 해당 자료를 정부 관계자들과 주요 기업 대표들에게 나눠 주게 했다. 그런 다음 직접 한 장의 임신 검사 보고서를 들어 올려 회의장을 향해 말했다.“이건 당시 임신 검사 기록입니다. 여기 기재된 수정 시점은... 임명규 씨가 임하은 씨를 특정 협력업체 관계자에게 접근시키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죠.”“거짓말이에요!”임하은의 목소리가 떨렸다.“그건 그냥 우연일 뿐이에요!”“우연이라고요?”주민혁이 비웃듯 짧게 웃고는 또 다른 자료를 들어 보였다.“이건 임하은 씨의 일정표입니다. 해당 기간 동안 그 협력업체 관계자와 여러 차례 만났고 밤새 돌아오지 않은 기록도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저는 해외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출입국 기록과 세미나 참석 기록이 모두 남아 있고요. 임하은 씨와 접촉할 여지는 애초에 없었습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회의장 전체를 한 번 훑어보았다.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냉소가 실려 있었다.“결론적으로, 임하은 씨가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그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닙니다. 임하은 씨의 아버지가 권력자에게 접근하기 위해 딸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일 뿐이죠. 임명규 씨는 이 사실이 드러나면 가문에 치명적일 걸 알았고 동시에 임하은 씨를 떠넘길 상대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시 외부에서 임하은 씨와 저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기에 그 틈을 이용해 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209화

    최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코 손끝에 힘을 주었다.임하은이 갑자기 꺼내든 이 이야기는, 사실 주민혁 역시 마음속으로는 계속 묻고 싶었지만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문제였다.다만 그녀에게는 애초에 그걸 물을 만한 명분이 없었다.주민혁의 시선이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임하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빛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늪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임하은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민혁 씨, 지금 민혁 씨의 마음이 온통 수빈 씨에게 가 있는 거 다 알아요. 수빈 씨를 감싸고 싶은 것도 알겠어요. 그래도... 나도 민혁 씨의 아이를 가졌던 사람이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어요? 단 한마디라도 내 편 안 들어줄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울먹임에 잠겨 있었고 처연하고 억울한 기색이 그대로 묻어났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충분히 동정할 만한 분위기였다.회의장 안에서는 다시금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졌다. 주민혁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조금씩 의심과 비난이 섞이기 시작했다.아이의 유산이 정말 최수빈과 관련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책임을 회피한 남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그의 평판에는 타격이 갈 수밖에 없었다.최수빈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임하은이 눈물까지 흘리며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분노보다는 어딘가 허탈할 정도로 차분한 감정만 남았다.그녀는 임하은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밀리지 않으면 감정에 기대고, 궁지에 몰리면 관계를 무기로 삼는다.다만 이렇게까지 비열한 방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주민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치 지금의 이야기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것처럼 분노도, 죄책감도 비치지 않았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송미연은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아니, 저 여자는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당장이라도 나서서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육민성이 옆에서 그녀를 붙잡았다.송미연이 고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1208화

    최수빈은 이미 임하은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이고, 이렇게 성급하게 밀어붙일 줄은 몰랐을 뿐이었다.주민혁이 임하은을 한 번 바라보며 짧게 물었다.“증거는요?”“증거요? 당연히 있죠.”임하은은 손에 쥔 USB를 들어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여기에는 최수빈 씨가 당시 심사위원에게 돈을 건넨 은행 이체 기록, 박하린 씨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공모한 대화 내역, 그리고 대회 관계자의 증언까지 전부 들어 있습니다.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기엔 충분한 자료들이에요.”임하은은 곧바로 USB를 직원에게 넘겨 대형 스크린에 띄우려 했다.그런데 그때, 최수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녀는 차분한 눈으로 임하은을 바라보며 살짝 비꼬는 듯한 기색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하은 씨, 그 증거가... 진짜라고 확신하세요?”“당연히 진짜죠.”임하은이 냉소를 지으며 받아쳤다.“이건 다 확실한 증거예요. 변명할 여지는 없을 겁니다.”직원이 USB를 받아 내용을 회의장 대형 스크린에 띄웠다.조작된 이체 내역, 앞뒤가 잘려나간 대화 캡처, 허점이 가득한 증언들이 하나씩 화면에 떠오르자 회의장은 다시 한번 크게 술렁였다.정부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미간을 찌푸렸고 업계 인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모두가 일제히 최수빈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하지만 최수빈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화면의 자료가 모두 재생될 때까지 기다린 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차분했지만 단호하고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임하은 씨가 말한 확실한 증거들은 전부 허점투성이입니다.”그녀는 스크린에 띄워진 이체 내역을 가리켰다.“이 돈이 뇌물이라면, 이체 시점은 왜 심사 종료 사흘 뒤죠? 이미 결과가 나온 뒤인데 어떻게 미리 심사위원을 매수했다는 건가요? 그리고 이 돈을 받았다는 심사위원은 당시 해외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출입국 기록과 세미나 참석 기록도 다 남아 있고요. 그 사람이 동시에 여기서 돈을 받았다는 건, 무슨 분신이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24화

    주민혁은 눈에 띄지 않게 멈칫했다.이토록 눈에 띄게 차가운 그녀의 눈빛은 처음이었다.예전에는 늘 그의 앞에서 밝고 열정적인 모습만 보여주던 여자가 요즘에는 싸늘한 태도로 성질을 부리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남매가 좀 싸울 수도 있지.”주민혁은 주예린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아?”최수빈은 차가운 표정으로 주예린을 품에 안았다.“둘은 이제 남매 아니에요.”“최수빈.”주민혁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도대체 무슨 심술을 부리는 거야?”최수빈은 콧방귀를 뀌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지금 그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42화

    어린이집.최수빈을 발견한 주예린은 눈을 반짝이며 얼른 그녀의 품에 뛰어들었다.“엄마, 오늘 왜 이렇게 예뻐요? 꼭 연예인 같아요!”“그래?”최수빈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오늘 그녀는 공을 들여 화장하고 하이힐까지 신었다. 그리고 지금은 질끈 묶었던 머리도 예쁘게 풀어두었다.이런 모습으로 어린이집 앞에 있었으니 학부모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예전의 그녀는 꾸미는 건 물론이고 시간도 에너지도 모두 아이들의 케어와 남편인 주민혁을 챙기는 데만 썼었다.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자신과 딸을 위해서만 살려고 하고 있다.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30화

    최수빈은 웃음이 났다.맞다.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다 안다고 번번이 박하린 모자에게 양보해야 하는 건가?“본인이 벌인 난장판은 알아서 수습해요.”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방금 육민성이 메시지를 보내 연구소에 긴급회의가 생겨서 오지 못한다고 했다. 같이 일하는 후배를 보내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괜히 신세 지기 싫어서 거절했다.그를 불러 행사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지금 보니 남은 행사는 이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그러니 그녀도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며 그들과 얽힐 이유가 없었다.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26화

    주예린은 마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진지하게 들었고 고개를 든 최수빈이 아이를 바라보았다.“잘 기억했어?”주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앳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 기억한 것 같아요.”...경기가 시작되고 주예린과 주시후가 함께 무대에 올랐다.최수빈은 무대 아래에 앉아 주예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녀가 말해준 내용을 아이가 어디까지 받아들였을까.하지만 최수빈은 아이가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길 기대하지 않았다.그녀가 설명한 원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한 일이기에 단상에서 그걸 적극 활용할 거란 기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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