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러고 나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봤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마음 정리되면, 언제든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됐을 때 다시 나한테 와서 얘기해요.”이 말을 끝으로 그녀는 주예린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주예린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주민혁을 한 번 돌아봤다. 큰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끝내 참지 못하고 또르르 떨어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최수빈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문이 조용히 닫혔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되듯 주민혁이 밤낮으로 떠올리던 두 사람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주민혁은 아까의 자세 그대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뜨겁게 달아오른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서 흘러내려 이불 위로 떨어지며 진한 얼룩이 번졌다....최수빈은 주예린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주예린의 표정은 밝지 않았고 기분 역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이러한 딸의 상태를 느낀 최수빈은 몸을 낮춰 살며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엄마가 말했잖아. 아빠는 네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을 거라고.”그녀는 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랑 같이 놀러 다니고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 계속했지?”주예린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아빠가 큰 잘못을 많이 했으니까 엄마가 아빠랑 같이 살지 않는 거겠죠. 전 엄마랑 같이 사는 게 좋아요. 그냥... 다른 친구들은 다 아빠가 있어서 조금 부러웠어요.”말끝이 떨렸고 아이는 감정을 꾹 누르며 애써 버티고 있었다.최수빈은 그런 딸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아무리 더 보살피고 더 채워주려 해도 아빠의 빈자리는 대신해줄 수 없었다.결국 주예린이 마음속으로 바라던 존재는, 바로 주민혁이라는 차갑고도 먼 아빠였기 때문이다.“오늘 그 사람 보고 나니까 마음속에 답이 조금 생겼어요.”주예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아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내 아빠가 저런 모습이면 안 될 것 같아요.”아이는 최수빈을 올려다보
주민혁의 심장이 세게 한 번 뛰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저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들어오세요.”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최수빈의 모습이었다.그녀는 소박한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얼굴빛은 다소 창백했으며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그리고 최수빈의 곁에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또 하나의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주예린이였다.이혼 후, 최수빈이 주예린을 데리고 주민혁을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주민혁은 목이 무언가에 막힌 듯,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밀려왔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그저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 속에서 진득한 감정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최수빈은 병상에 누워 있는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병실 안에 있음에도 여전히 차갑고 냉담한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그녀는 생각했다. 이번에 벌어진 모든 일의 흐름이 전생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전생에서는 이 시점에 주민혁에게 어떤 병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었다. 그의 몸은 늘 건강해 보였으니 말이다.‘내가 전생에 너무 많은 걸 놓치고 있었던 걸까?’주민혁의 시선이 최수빈에게 머무르더니 서늘한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밥은 먹었어?”이런 아무 의미도 없는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았기에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러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주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민혁 씨,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도 아직 나한테 숨길 생각이에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거예요?”모든 일이 빙빙 돌고 돌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만 잔뜩 남아 있었다.그리고 최수빈이 모르는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대부분을 주민혁은 알고 있었다.주민혁은 짙어진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네가 날 보러 올 줄은 몰랐어.”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숨을 고르며 말했다.“난 그냥... 답이 필요해서 온 거예요.”하지만 이 질문
“나는 원래 감정에 휘둘려 괜히 고집부리는 사람이 아니야.”주민혁의 목소리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고 서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하지만 딱 하나,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게 있지.”주선웅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이미 이 정도로 맞서고 난 뒤인데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다.“혹시... 수빈이 말하는 거야?”병실 안의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주민혁은 대답하지 않았고 주선웅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도, 감정도 없이 고요하고 냉담한 빛만이 깔려 있었다.그러다 주선웅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그래서였구나.”그는 주민혁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난 네가 정말로 아무것에도 관심 없는 줄 알았어. 그런데 결국 인정하는구나. 수빈이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주민혁도 피식 비웃었다.‘형, 위선 떠는 것도 이제는 끝이야.’어떤 일들은 굳이 인정할 필요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그 자체로 이미 거기에 존재하는 것들이기에 뼛속에 새겨진 낙인처럼 아무리 가리고 덮어도 지워지지 않는다.그렇다, 주민혁은 그 흔적들을 지울 수 없었다.주선웅은 충분히 웃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가볍게 정리했다.“회복은 꽤 된 모양이네. 나랑 이런 거 두고 다툴 힘도 남아 있고. 마음속에 답이 있다니까 더 방해하지는 않을게.”그렇게 주선웅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 문가에서 멈춰 서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한 번 바라보았다.“다만 조심해. 가끔은 너무 꽉 움켜쥐면 오히려 더 쉽게 잃게 되는 법이니까. 알아서 판단하라고.”문이 조용히 닫혔다. 주선웅의 시선과 함께 숨 막히게 위선적인 공기 또한 함께 사라졌다.려운은 곧바로 무거운 표정을 한 채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대표님, 방금 저 말은... 이미 약점을 잡았다는 뜻 아닌가요? 이제 어떡하죠? 분명 최수빈 씨 쪽으로 먼저 움직일 텐데...”주민혁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인정하든 안 하든 형은 이미 다 알고 있었
그들은 이제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기에 최수빈은 더 이상 주민혁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주민혁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깨어나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밀려왔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불쾌한 냄새였다.그가 손을 들더니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려운.”방금 잠에서 깬 듯한 쉰 목소리였다.곁에 있는 접이식 침대에 기대어 졸고 있던 려운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깨어나셨어요? 몸 상태는 괜찮으세요? 의사 선생님 바로 부를까요?”“괜찮아.”천천히 눈을 뜬 주민혁의 시선이 곧장 침대 머리맡을 스치듯 지나갔다.“노트북.”그러자 려운이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방금 깨어나셨잖아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지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한답니다. 그러니까 일은... 더군다나 강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정말 이번에는 안 봐준다고요.”강지안은 유난히 화가 나 있었다.환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의사로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걸 이번에 절감한 것이다.심지어 그녀는 주민혁이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난관이라고까지 말했었다.“내가 노트북 가져오라 했지.”주민혁은 말끝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여전히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오래도록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특유의 위압감이 스며 있었다.그는 려운이 걱정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지금은 무리하지 말라는 말, 혹여 또 쓰러질까 염려하는 그 마음 전부 다 읽고 있었다.하지만 주민혁의 전쟁터는 병상이 아니었다.판을 이미 깔아놓았고 말들도 움직이고 있었기에 잠시의 방심조차 허락되지 않는 국면이었다.려운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안 구석에 놓인 서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전원을 켜자 스크린 불빛이 주민혁의 얼굴에 닿았고 그 순간 그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환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예리한 시선을 가진 냉철한 남자가 되살아났다.그가 손가락을 움직여 키보드를 누르려는 찰나, 병실 문이 조심
“아까 그 말, 대체 뭘 보고 하는 말이에요?”최수빈이 주민혁을 똑바로 바라봤다.“한두 번도 아니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나랑 선웅 오빠를 그런 식으로 모욕할 필요는 없어요. 처음에 내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부터 그랬잖아요. 나를 깔보고 나랑 예린이까지 무시하고... 민혁 씨는 본인이 먼저 다가왔는데 내가 받아주지 않으니까 자존심이 상한 거겠죠. 그래서 내 마음속에 선웅 오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최수빈의 표정이 차가웠다.“여기 공식 행사장이고 난 민혁 씨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요. 우리 둘 사이의 사적인 일, 더는 여기서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요.”주민혁은 말없이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모습을 바라봤다.표정은 차갑고 냉랭했다.“여기가 대화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라는 건 인정해. 그럼 나랑 같이 가자.”수많은 시선이 쏠린 가운데 주민혁은 최수빈의 손을 잡아끌며 자리를 뜨려 했다. 그 순간, 주선웅이 갑자기 몸을 휘청거렸다.최수빈은 애초에 주민혁을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그는 늘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강압적이었고 상대에게 어떤 여지도 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사적인 자리에서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이번에도 다를 게 없었기에 더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최수빈은 있는 힘껏 주민혁의 손을 뿌리쳤는데 그 동작이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이렇게 쉽게 그의 손을 떼어낼 수 있다는 것에 그녀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주민혁은 원래 힘이 센 사람이었고 그가 놓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었던 기억이 더 많았다.세게 뿌리쳐진 탓에 주민혁은 연달아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순간, 시야가 어둡게 흐려지더니 현기증이 다시 몰려오며 눈앞의 최수빈은 초점 없이 겹쳐 보였다.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통제 밖으로 벗어나려 하고 있다는 것을, 몸이 경고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이제는 정말로 버틸 수가 없었다. 몸이 크게 흔들리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어 갔다.오랫동안 눌러두고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말
행사장 안.최수빈은 행사장 객석에 앉아 무대 위 인사의 각종 발표를 듣고 있었고 옆자리에는 주선웅이 앉아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주민혁의 얼굴은 유난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현장 스태프가 자리를 안내하자 주민혁은 안내를 받아 그쪽으로 이동했다.무대 위 발표에 집중하고 있던 찰나, 최수빈은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는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이 장면을 본 강지안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또 그 사람이네.’주민혁이 약도 안 먹고 일도 제쳐두고 하는 것은 모두 눈앞의 이 여자 때문이었다.최수빈은 주민혁이 온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형이랑 원래부터 사이가 좋더니 이제는 회의도 같이 다니네.”남자의 목소리는 한껏 잠겨 있었지만 말투는 느릿하고 차분했다.“지금 나한테 말한 거예요?”주민혁이 말했다.“내가 아는 최수빈이 둘은 아니잖아?”최수빈은 입꼬리를 씩 올릴 뿐, 차갑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옆에 있던 주선웅은 주민혁이 온 걸 보고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주민혁이 신경 쓰는 사람이 최수빈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아차린 일이었다.“민혁아, 여기 온다고 왜 미리 말 안 했어? 같이 오면 좋았잖아, 괜히 따로 와서...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또 한 소리 들을 텐데.”이를 들었음에도 주민혁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눈동자는 검고 깊었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유난히 냉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주선웅은 반응이 없자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어차피 최수빈만 이 자리에 있으면 주민혁을 부르는 건 너무도 쉽고 단순한 일이었으니 말이다.회의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교류하기 시작했다.최수빈은 주선웅과 함께 다른 쪽으로 이동해 또 다른 협력 건을 논의하려 했다.플라잉 테크와는 이미 깊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지금은 주선웅이 그 업무를 맡고 있었다.플라잉 테크가 은산시에 분사를 두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업무 왕래는 더 잦아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