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어쩜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 있어?”주나연이 비아냥거리듯 말을 쏟아냈다.“예전에 그렇게 죽네 사네 난리 치면서 이혼하겠다고 굴더니, 우리 집안 사람들 체면까지 다 깎아놓고는 이제 와서 또 쪼르르 붙어? 할머니도 안 계시니까 이제 기댈 사람 없다고 생각해서 급하게 다리라도 붙잡으러 돌아온 거 아냐?”“누나.”주민혁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목구멍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압도적인 기세가 실려 있었다.“여자는 시집가면 외부인이나 다름없어.”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순간적으로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훑어보았다.“누나는 주씨 가문 일에 끼어들 자격 없다고.”그 한마디가 돌덩이처럼 주나연의 입을 막아버렸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단단히 틀어막힌 느낌이었다.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감정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은 주민혁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하고 싶은 말이 전부 목에 걸려버렸다.결국 주나연은 발을 한 번 세게 굴러대고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경찰 왔어.”주선웅이 마침내 사포에 긁힌 듯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는 주민혁을 바라보며 물었다.“네가 신고한 거야?”주민혁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무슨 이견이라도 있어?”“아버지가 많이 화나셨어.”집안의 망신스러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주기훈에게는 무엇보다 체면이 제일 중요했으니 말이다.주민혁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막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주선웅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지더니 최수빈에게 시선이 꽂혔다.“수빈아, 나랑 잠깐 가자. 할 말이 있어.”이에 최수빈의 발걸음이 멈췄고 주민혁은 뒤돌아 그녀를 한 번 바라봤다.여러 번 주선웅과 거리를 두라고 했던 주민혁의 말이 떠올라 최수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러다 주민혁이 낮게 말했다.“괜찮아.”주선웅은 냉소를 흘렸다.그렇게 주선웅은 복도를 걸어가다 끝에서 방향을
최수빈은 잠시 말을 멈췄다.시선이 주민혁의 다친 손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다시 그의 얼굴로 올라왔다.“늘 나를 밖으로 밀어내고 일이 생기면 혼자서만 감당하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민혁 씨를 믿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했다.“이럴 때일수록 나를 배제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주민혁 역시 움직임을 멈추며 최수빈을 바라보았다.짙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 깊숙한 곳에 마치 돌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잔잔한 파문이 번졌다.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지만 끝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거실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고 식기 세척기에서 울리는 낮은 진동음만이 공간을 채웠다.물러설 기색 하나 없이 최수빈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그 눈빛에는 단 하나의 분명한 요구만이 담겨 있었다.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와 함께 마주하고 싶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그때, 주예린이 인형을 안은 채 방에서 나왔다. 정적이 감도는 분위기에 긴장감이 느껴졌는지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아이의 시선이 최수빈에게서 다시 주민혁에게로 오갔다.작은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지만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최수빈 곁으로 다가와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최수빈은 고개를 숙여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손끝으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긴장도 조금 풀렸다.주민혁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가 다시 최수빈에게 멈췄다.그는 오래도록 침묵했다. 어찌나 오래 걸렸는지 최수빈은 자신이 또다시 거절당할 거라 생각할 정도였다.그러다 주민혁은 낮고도 아주 짧게 한마디를 흘렸다.“응. 가자.”그는 몸을 돌려 차 키를 집어 들었다.목소리에는 감정이 거의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최수빈의 동행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최수빈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예린의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현관에서 신발을 갈
“그런데...”주예린은 식탁보를 손가락으로 꼬며 망설이다가 말했다.“아침에 보니까 붕대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옆에서 말없이 정리를 하던 최수빈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손을 멈췄다.주민혁은 손에 들고 있던 휴지를 내려놓고 다치지 않은 왼손을 뻗었다. 그렇게 잠깐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아이의 머리카락은 고운 비단처럼 부드러웠다.“이제 피 안 나니까 예린이 걱정 안 해도 돼.”그의 손끝은 거칠었다. 오랫동안 펜을 쥐며 생긴 얇은 굳은살이 느껴진 것이었다.그 손이 두피에 닿자 주예린은 순간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아빠가 먼저 이렇게 다가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 말이다.주예린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긴장되어 있던 입가도 조금 전보다는 훨씬 풀려 있었고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용기를 낸 아이는 자기 그릇에 있던 호박 조각 하나를 내밀어 주민혁의 앞에 놓았다.“이 호박 달아요. 한번 드셔보세요.”주민혁은 그 작은 호박 조각을 보다가 다시 딸의 반짝이는 눈을 바라보았다.가슴 안쪽이 무언가에 살짝 부딪힌 듯 시큰하면서도 따뜻해졌다.곧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숟가락으로 그 호박을 떠 천천히 입에 넣었다.새 숟가락을 들고 다가오던 최수빈은 그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더니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딸이 그와 더 많이 가까워지는 게 과연 좋은 일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 일인지 최수빈은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딸아이가 기뻐하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최수빈은 잠시 눈을 감았다.‘어쩌면 막지 말아야 할지도 몰라.’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예린 앞에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신도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그날 저녁 식사는 세 사람이 함께한 식사 자리 중에서도 유난히 평온했고 끝까지 별다른 마찰이 없었다.식사가 끝날 즈음, 거실의 테이블 위에 놓인 주민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그는 왼손으로 미간을 한 번 문지르다 소리를 듣고 잠시 멈춘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수빈은 주민혁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들이키더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의사 선생님 말 좀 듣고 푹 쉬어요.”이 말에 주민혁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깊은 연못에 가라앉은 먹물처럼 짙어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그렇게 몇 초간 최수빈을 바라보던 그는 가볍게 목젖을 움직이며 말했다.“지금 나 걱정하는 거야?”그러나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최수빈은 담담하게 답했다.“지금은... 너무 일찍 죽지만 말았으면 해서요.”아직 확인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고 그것들은 결국 주민혁의 입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주민혁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목소리 역시 차분했다.“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일 좀 처리하는 거야. 죽을 일은 없어.”최수빈의 시선이 주민혁의 오른손에 멈췄다.여러 번 다쳤던,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는 손이었다.“그래도 상처는 문제 될 수 있어요.”이미 정해진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평온했다.“감염되면 입원해야 하고 그러면 시간만 더 지체돼요.”주민혁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그때, 계단 쪽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곧 주예린이 문가에 서서 말했다.“엄마, 배고파요.”막 잠에서 깬 아이 특유의 콧소리가 섞인 부드럽고 말랑한 목소리였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려 딸을 보고는 다가가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그래.”그렇게 최수빈은 주방으로 향했고 주예린은 곧장 그 뒤를 따라갔다.잠시 생각하던 주민혁도 결국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별다른 행동도 없이 그는 그저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주예린은 슬쩍 소파 쪽에 앉은 주민혁을 훔쳐보았다.아이는 어릴 때부터 늘 주민혁의 퇴근을 기다리고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아빠를 본 적이 크게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가 있는 것이었다. 기쁘기보다는 설명하기 힘든 답답함이 가슴에 쌓였다.아빠의 얼굴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입술은 굳게 다
그런데 발걸음이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듯 거실 옆에 늘 잠겨 있던 그 방으로 향했다.최수빈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방은 크지 않았지만 놀랄 만큼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벽 한쪽에는 책장이 놓여 있었는데 책은 한 권도 없고 대신 자잘한 소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그중에 모서리가 깨진 토끼 모양의 도자기가 하나 있었는데 대학 시절 야시장에서 고리 던지기로 따냈던 것이었다. 나중에 실수로 떨어뜨려 깨졌고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물건이었다.누렇게 바랜 노트 한 권, 그 안에는 그녀의 엉성한 낙서가 남아 있었다. 삐뚤삐뚤하게 두 사람을 그려 놓고 옆에는 ‘주 대표님과 사모님’이라고 적은 것이었다.그리고 오래된 액자 하나, 그 안에는 최수빈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높게 묶은 포니테일, 흰 셔츠 차림에 작은 호랑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모습...그들이 처음 만났을 무렵 찍은 사진이었다.최수빈의 숨이 턱 막혔다.몇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서야 이 방 전체가 거의 그녀의 흔적으로 채워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책장 맨 위에는 그녀가 매년 생일마다 받았던 선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주민혁이 준 것도 있었고 그녀가 스스로 샀던 것도 있었다.이미 오래전에 버려졌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곳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벽에는 그녀가 무심코 붙여두었던 포스트잇들마저 그대로 붙어 있었다.[민혁 씨, 오늘도 또 지각.][짜증남.]그리고 그중 하나에는 빨간 펜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그런데 사실 웃을 때는 꽤 잘생김.]방 안쪽의 장식장은 열려 있었고 그 안에는 온통 그녀의 사진뿐이었다.풋풋했던 학생 시절부터, 그와 결혼한 뒤의 모든 순간들까지...심지어 몇 장은 최수빈이 잠든 사이 찍힌 사진이었다. 미간은 살짝 찌푸렸음에도 옅게 미소를 띤 모습이었다.사진 아래에는 메모 한 장이 눌려 있었는데 바로 힘 있게 눌러 쓴 주민혁의 필체였다.[수빈이가 인상을 찌푸릴 때는 진짜로 화가 난 것.]최수빈은 그 사
원래는 이번 주말에 장례식을 치르기로 되어 있었다.하지만 며칠 전 저택 쪽에서 큰 화재가 나면서 집안은 말 그대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예정대로 진행할 거야.”주민혁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고 그 안에는 묘한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할머니는 생전에 이런 걸 특히 중요하게 여기셨어. 마지막 길만큼은 편안하게 보내드려야지.”최수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가 조용히 말했다.“나도 갈게요.”이에 주민혁은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봤다.노을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내려앉아 눈동자 깊숙한 곳의 감정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망설임, 갈등, 그리고 주민혁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다정함 같은 것들을 말이다.그 순간 그는 문득 강지안의 말이 전부 허튼소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곧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준비할게.”비서에게 모든 걸 맡겨 쓸데없는 사람이나 일들이 더는 최수빈을 번거롭게 하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최수빈은 ‘네’ 하고 짧게 답한 뒤, 먹을 걸 챙기러 가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손목이 붙잡힌 것이다.주민혁의 손은 차가웠다.손끝에는 얇은 굳은살이 느껴졌고 힘은 세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그렇게 뒤를 돌아본 최수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주민혁의 눈동자와 마주쳤다.“최수빈.”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강지안이 네게 무슨 말을 했든 난 네가 동정 때문에 내 곁에 머물거나, 그 말 때문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건 원하지 않아.”그러다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아주 조금 나약한 목소리로 말했다.“날 미워해도 돼. 화를 내도 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도 되지만 억지로 감정을 눌러가며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난 네 동정 필요 없거든.”그는 한 번에 파도처럼 덮쳐오는 감정이 얼마나 버거운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런 걸 최수빈만큼은 겪지 않기를 바랐다.이 말을 들은 최수빈은 갑자기 무언가에 심장이 쏘인 것처럼 움찔하며 아파졌다.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