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의현은 눈길을 거두며 의문을 털어냈다.“유진 씨한테 일이 생길 거라고 어떻게 알았어? 말도 마,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아주 사람 하나 찢어 죽일 기세였다니까. 쯧쯧, 불쌍하기도 하지.”강지찬은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유진이 떠난 방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의현은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명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우리가 일부러 그 한빈이라는 사람을 도발하면 정말 큰 건 하나 잡을 수 있을까?”한빈의 회사는 K그룹과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요 몇 년 간 공들여 운영한 덕에 어느 정도 이름은 있는 상태였다.강 씨 가문에게 찍힌 걸로도 모자라 강지찬이 자신의 약혼녀까지 범해버렸으니, 낯이란 낯은 다 깎였을 것이다.아마 강지찬이 죽도록 싫겠지.“진 씨가 그래도 수월하게 불어준 덕분이야. 재무 총괄이 장부를 위조했단 것쯤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뒤에서 봐주는 사람 없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조사해봤는데 작년에 와이프랑 아이를 다 해외에 내보냈대.”의현은 또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냈다.“셋째 삼촌이 얼마 전까지도 한빈이란 사람이랑 가깝게 지내던데. 에이프릴 홀에서 꼬박 이틀을 함께 있다가 나오는 걸 누군가가 봤대. 아무리 봐도 뭔가 있지 않아?”“그냥 도발만 해서는 안 되지. 더는 발악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어.”침묵을 지키던 지찬이 두 질문에 한꺼번에 대답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헛짓거리를 하려는 사람이 누군지, 나도 정말 궁금하네.”최의현은 갑자기 딴소리를 시작했다.“제일 불쌍한 건 유진 씨지. 그렇게 아름다운 분이 너랑 한빈 같은 쓰레기를 만나다니 말이야.”강지찬은 자신과 한빈을 동급으로 비교하는 의현이 못마땅했다. ‘어딜 비교하는 거지? 그래도 쓰레기라는 단어는 꽤 흥미로운데.’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차 돌려, 돌아갈 거야.”집 문 앞에 도착한 유진은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몸이 안 좋으신 엄마가 이런 유진의 모습을 보면 크게 놀라실 것이 뻔했다.정 씨 집안은 평범하기 그
유진은 결국 다른 방으로 바꾸지 못했다. 방 씨 아주머니 말로는 다른 남는 방이 없어서라고 했다.‘이 5층짜리 별장에 방이 없다고?’그래도 계속 살 곳이 아니니 일일이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도우미가 과일을 가져다주자 밖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젊은 여자애 같았다.‘강지찬에게 여자는 없다고 했는데, 왜 이 별장에 다른 여자가 있는 거지?그래, 소문에선 그 나쁜 놈이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했는데, 소문을 믿어선 안 되지.’유진은 문 옆에 선 채로 밖을 내다보자 핑크색 잠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베개를 들고 옆방으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뽀얗고 깜찍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오관이 스물도 채 안 돼 보이는 앳된 아이였다.“들어가겠다고요. 강지찬 침대에서 잘 거예요 꼭!”도련님이 자신의 안방에 다른 이가 들어오는 걸 싫어했기에 도우미들도 어찌할 줄 몰라 진땀을 뺐다.유진은 더는 구경할 마음이 없어 강지찬이 오늘 밤 그녀와 함께 프라임 홀로 가려 하는 이유를 고심했다.상식적으로 강지찬이 한빈을 풀어줬으니 둘 사이의 일은 이미 끝났어야 했다.하지만 오늘 밤 지찬이 하려는 행동은 순전히 한빈의 체면을 깎아버리려는 일이었다.왜 이렇게 하려고 하는 걸까? 무슨 목적이 있는 거지?그냥 그녀 대신 복수를 해주려는 걸까?유진은 자신이 그 정도의 존재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다섯 시가 되자 메이크업 팀이 도착했고 유진은 수많은 사람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거절할 틈도 없이 인형처럼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그녀가 방에서 나오자 지찬은 이미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여전히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이었다.꽤 격을 차리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넥타이도 없었고 옷깃의 단추를 두 개쯤 푼 채 탐스러운 속살을 살짝 내놓고 있었다.셔츠 소매를 걷고 있었지만 절대 손목에 걸려있는 가치가 서울 중심의 호화주택쯤 되는 명품 시계를 자랑할 의도는 없었다.K그룹의 사람들은 강 대표님이 어떤 회의에 참석하든 이런 옷차
유진의 등장은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처음 보는 화려한 모습이었다. 긴 드레스를 늘어뜨린 채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귀에 달린 태슬 귀걸이가 불빛 아래 반짝거렸고 남다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하지만 낯빛은 분노를 짓누르고 있는 듯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한빈은 순간 자신들이 나눈 대화를 유진이 들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다른 이가 손을 댄 여인을 그가 다시 품을 리는 없을 것이다.“여긴 왜 왔어?”한빈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딱딱하게 말했다.“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나가!”유진은 사람들을 한번 슥 훑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뗐다.“내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당사자가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진아 어떻게 왔어?”소희가 한빈 옆에 붙어서더니 웃으며 말했다.“오늘 너무 예쁘다.”‘이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 건 한빈이와 다시 잘해보려고 온 건가?’소희는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며 당장이라도 망가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유진은 소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한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내가 오면 안 돼? 오길 다행이지, 아니면 우리 사이 감정이 식었단 건 모를 뻔했잖아.”소희와 한패인 여자들이 큰 소리로 비웃어댔다.“한 대표님 찾으러 온 거야? 더 큰 동아줄을 찾아 떠난 줄 알았는데 왜 다시 돌아온 거야?”“맞아, 강지찬은? 왜, 한 번 놀더니 바로 버려진 거야?”유진은 이 추악한 여인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헛구역질이 났다.한빈은 유진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 채 증오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너랑은 이미 파혼했잖아. 돌아가, 쪽팔리게 하지 말고.”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한술 더 떠 한빈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어제 에이프릴 홀에서, 강지찬한테 널 풀어달라고 사정하다가, 브랜디를 두 병이나 마셨어.”한 발짝 더 다가가더니 한빈의 눈을 꼿꼿이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감정이 식은 지 오래됐다고? 나한테 강지찬을 찾아가
강지찬은 한 무리의 경호원을 대동하고는 등장부터 심상치 않은 기세였다. 그의 등장에 시끌벅적하던 룸이 갑자기 조용해졌다.한빈 옆에 앉았던 두 사람이 눈치껏 자리를 양보했다.“아이고 강 대표님 오셨어요? 이쪽으로 앉으시죠.”소파에는 원래 세 명이 앉아있었는데 둘이 일어서자 한빈 혼자 자리에 남아있었다.경호원들이 다가가더니 깍듯한 태도로 한빈에게 부탁했다.“죄송하지만 일어나주시죠.”강지찬이 아무와도 동석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한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강지찬이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그뿐만 아니라 이 룸에 있는 그 누구도 강지찬이 등장할 줄은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도대체 왜 온 걸까?한빈은 강지찬과 척을 지기는 싫었던 터라 공손한 자세로 자리를 안내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강 대표님께서 친히 방문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얼른 앉으시죠.”남자들은 다 이렇게 순식간에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건가?유진은 한빈의 아첨하는 표정이 거짓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만한 태도로 그녀를 짓밟던 사람이 자신의 아내를 뺏은 원수인 강지찬에게는 비굴한 태도를 보이다니.유진이 한빈에 대한 인상은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깟 남자가 자신이 순결과 7년의 청춘을 바쳐 사랑한 남자라니!그녀는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전혀 없음을 인정했다.강지찬은 정유진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그는 한 손으로 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리를 꼬며 모두에게 말했다.“아까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그렇게 시끌시끌했어요? 계속해요, 나도 듣게.”방금까지 흥에 겨워 소리를 높이던 사람들 모두 입을 꾹 닫았다. 모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은 표정이었다.의현도 자리를 찾아 앉으며 건들건들한 태도로 말했다.“아까 우리 유진 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요. 아, 한 대표님, 오늘 강 대표님이 친히 사과하러 오신 거에요.”그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또다시 경악했다.강
자신의 비즈니스 파트너들이 모두 강지찬에게 아부하러 모여들자 한빈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짐을 느꼈다.다 끝났다.그는 인제야 강지찬이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을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의도임을 알아챘다.“강 대표님...”자리에 사람이 많지만 않았더라면 한빈은 강지찬에게 무릎이라도 꿇을번했다.“저, 저...”목적을 달성했으니 강지찬은 더는 길게 있고 싶지 않았다.그는 한빈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유진을 껴안으며 고개를 숙여 물었다.“지루하지 않아요?”강지찬이 누구인가, 서울에서 그가 고개를 숙일 만 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유진은 그의 연기에 동조하듯 “네.”라고 대답했다.“더 있고 싶지 않아요.”강지찬은 그녀를 안아 일으켜 세우더니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그럼 집으로 돌아가요.”“집”이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진짜로 돌아갈 듯한 기분이었다.철저히 무시당한 한빈은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나가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보며 마음이 무너져내렸다.정말로 끝났다.강지찬 일행이 떠나자 모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핑계를 댔다.“미안하게 됐네요. 한 대표님, 아들 숙제를 봐줘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한 대표님, 노모가 몸이 안 좋으셔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합시다.”여자 손님들 역시 한 명도 빠짐없이 나가버렸고 시끌벅적하던 룸에는 곧 한빈과 소희 둘만 남았다.소희의 공들여 치장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저 배은망덕한 자식들!”텅 빈 연회장을 둘러보며 한빈은 소파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셔츠의 등판은 이미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프라임 홀을 나서자 강지찬이 유진을 놓아줬다.이젠 연극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갈 때였다.최의현이 정유진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며 웃었다.“아가씨, 이건 강 대표님의 보상입니다.”유진은 의현의 손에 들린 은행 카드를 쳐다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보상이요? 내 순결을 빼앗고 내 명성을 추락시킨 것에 대한 보상인가요? 아니면 오늘 당신들
유진은 몸에 휴대폰이고 지갑이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택시를 잡아 친구 집에 도착한 후 택시기사의 휴대전화를 빌려 조예원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나와달라고 부탁했다.예원은 유진의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보더니 빠른 속도로 택시비를 내며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오늘은 뭐야? 도망가는 신부야, 신데렐라야?”요즘 디자인 작업으로 바빠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유진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나 한빈이랑 헤어졌어.”예원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어?”엘리베이터에 들어서서야 정신을 차렸다.“왜? K그룹에 찍혀서 구치소에 있다며?”“나왔어.” 유진은 엘리베이터에 기댄 채 남 얘기하듯 건조하게 이야기했다.“내가 강지찬을 찾아갔고, 그 사람이랑 잤어.”예원이는 또다시 입을 떡 벌렸다.“...”‘강... 강지찬? 내가 아는 그 강지찬이 맞는 걸까?’조예원과 유진은 대학교 동창이었고 작년에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작업실을 함께 개업했다.작업실은 예원이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가끔 늦은 시각까지 야근할 때면 예원이네 집에서 잠을 잤으므로 이곳은 두 번째 집이나 다름없었다. 옷이며 생활용품이 모두 있었기에 문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이마의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조심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식탁에는 방금 쪄낸 만두가 놓여 있었다.이 만두는 지난번 유진의 엄마가 직접 빚어 얼려둔 것으로 야근하고 돌아올 때 간단하게 야식으로 먹으라고 챙겨준 것이었다.예원도 두뇌 회전이 빨랐던지라 앞뒤 얘기를 이어보더니 스스로 진실에 가까워졌다.“밥 안 먹었지?”마음이 아프면서도 한심해 보였다.“지금 네 모습 그대로 집에 가면 아저씨 아줌마가 마음 아파 못사실걸.”유진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마음 한쪽이 따뜻해짐을 느꼈다.“그래서 널 찾아온 거잖아.”“얼른 먹기나 해.” 예원은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절친에게 차마 소리를 지르지 못해 답답한 채로 꾹 참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 앞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정 교수네 딸 말이야,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던데 왜 이런대?”“겉보기에만 그렇겠지. 뒤에선 어떤 짓을 벌이고 다닐지 누가 알겠어.”“어머 쪽팔려라. 정 교수님이랑 이 선생 낯을 다 깎아 먹었겠네.”유진은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도 부모님의 명성에 자신이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역시 나쁜 일은 생각하는 대로 벌어진다더니.이때, 한빈 엄마의 목소리가 집 안에서 흘러나왔다.“... 당신들 대학교수가 딸 교육은 어떻게 시킨 거야? 밖에서 굴러온 남자랑 편 먹고 자기 예비 신랑을 해칠 궁리나 하고 있으니. 이런 악랄한 애는 우리 집에서 절대 못 받아들여! 선생은 무슨, 뒤통수 치는 법이나 가르치는 선생이면 모를가...”그 말에 유진은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부모에게까지 행패를 부리다니, 절대 참을 수 없었다.분노에 휩싸인 채 구경꾼들을 밀치며 문을 열고 들어오자 옆집 아주머니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테이블 위에 물컵과 약상자가 있는걸 보니 이미 약을 먹은 것 같았다.“유진이 왔니?” 옆집 아주머니가 구원투수를 발견한 듯 불렀다.알고 보니 한빈네 엄마만 온 것이 아니라 소희까지 함께 있었다.두 사람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니 우리 집에 찾아와 화풀이하며 본때를 보여주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한평생 글만 가르치고 얼굴을 붉혀본 적 없었던 아빠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계셨다.유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강지찬에서 이용당한 건 그러려니 했다. 둘 싸움에 고래등 터진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한빈에게 버림받아 파혼당한 것도 그러려니 했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하지만 부모님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평생 교편만 잡으시고 모두에게 선하신 분들이 자신 때문에 집까지 찾아온 사람들한테 치욕스럽게 모욕당하고 있다니!소희는 마
강지찬을 보자 한빈의 엄마와 소희 모두 입을 뗄 수가 없었다.한빈 엄마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으로 눈앞의 강지찬을 보자 너무 놀라 종아리에 쥐가 나버렸다.소희가 그녀를 부축하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강 대표님, 유진이 찾으러 오신 거죠? 대화 나누세요.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둘은 조금 전의 기세의 반도 못 편 채 강지찬의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복도가 좁아 강지찬의 긴 다리로 반을 차지하자 한빈의 엄마와 소희는 벽에 바싹 붙은 채로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유진이 남은 반쪽 꽃병을 들고 따라왔다.“거기서, 가지 마. 사과부터 해!”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한빈의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반드시 우리 엄마 아빠한테 사과해야 해, 그전엔 아무도 나갈 생각 하지 마!”한빈의 회사가 규모를 넓히기 시작한 뒤로 그 집 어미는 유진이네 집안을 업신여겼다. 유진의 부모님에게 말할 때도 항상 고고한 태도로 뭐라도 되는 양 굴었었다.전에는 유진이네 가족도 일일이 대꾸하기 싫어했다. 두 집안이 알게 된 지도 몇 년인데 서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뻔히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한빈의 엄마가 그녀를 모욕하는 것도 모자라 집까지 찾아와 자신의 부모까지 모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너 이...” 당장이라도 욕을 뱉으려던 한빈의 엄마는 곁눈질로 강지찬을 힐끗 보고는 ‘천박한 년’이라는 뒷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반나절 만에 한빈의 파트너들 모두 연락이 닿지 않았고 투자비 회수는 물론 연락을 끊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한빈이 힘들게 모아온 인맥과 자원들이 강지찬에게 척을 졌다는 이유만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그들 가족도 강지찬을 찾아가 난동을 부리지는 못하겠으니 어쩔 수 없이 모든 화를 유진이 가족에게 풀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강지찬의 등장은 예상도 못 했었다. 안 봐도 유진이 도와달라고 불렀을 게 뻔했다.이 천박한 년, 역시 강지찬과 붙어먹은 게 확실했다.강지찬은 재밌는 구경을 끝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