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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최의현은 강지찬과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다. 최 씨네 가문은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고 의현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 모두가 학술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의현은 K그룹의 부대표이기도 했다.

한빈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에 K 그룹과 관계를 맺어볼까 싶어 의현을 공략해봤지만 하도 예측 못 할 성격에 몇 번의 시도에도 번번이 실패했다.

소희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

“의현 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앉으세요.”

한빈은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의현 씨, 제 사건은 그쪽 변호사께서 이미 끝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의현은 맨발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들이랑 상관없어요. 저분 모시러 온 거니까.”

유진은 자리에 멈칫했다.

피범벅이 된 얼굴과 똑같이 핏자국이 진 원피스를 보며 의현은 속으로 스읍 들숨을 쉬었다.

‘불쌍하기도 하지. 쯧쯧.’

한빈이 가족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의현이 유진을 향해 모시겠다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유진 아가씨, 갑시다. 강 대표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강지찬이 왜 정유진을 찾아온 거지? 설마 하룻밤 잤다고 못 잊은 거야?

순간 자신의 여자를 뺏긴 호구가 된 기분이었다.

‘강 대표님’이란 말에 유진의 몸이 눈에 띄게 떨렸다.

강지찬 이 쓰레기 같은 놈.

지금 이 상황 모두 그 자식 때문이었다. 왜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지?

휘청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가자 대문밖에 주차된 차에 역시나 강지찬이 앉아있었다.

이 나쁜 남자는 빳빳이 다림질해 주름 한 점 없는 고급 셔츠를 입은 채 눈앞의 엉망이 된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진이 죽일 기세로 차 문을 열었다.

지찬의 시선이 피가 흐르는 이마에 머물더니 한심하다는 말투로 입을 뗐다.

“약해 빠져서는.”

난리를 피우려던 유진은 말문이 턱 막혔다.

“...”

지찬이 말을 이었다. “먼저 병원부터 데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고마워한다고요?” 유진은 진짜 낯이 두껍다는 걸 처음으로 몸소 느낀 듯 받아쳤다.

“전 그냥 한빈이만 풀어달라 했지, 당신이랑 밤을 보내겠다곤 하지 않았어요!”

지찬은 그녀를 한 눈 보더니 대답했다.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약혼자만 풀어주면 뭐든 하겠다고. 당신 약혼남 이젠 아무 일도 없잖아요.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하!” 유진은 웃다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네요, 고마워해야겠어요. 제 순결도 빼앗고, 제 사랑도 망가뜨려 주셔서. 하룻밤 사이에 서울에서 제일 천한 여자로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하네요!”

지금껏 유진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무해하며 정직하고 밝은 여자라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눈앞의 이 남자와 같이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강지찬은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사랑을 망가뜨렸다고?

바보 같네.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어젯밤 나도 힘들었어요. 더군다나 당신 약혼자를 풀어준 건 나한테도 손실이 꽤 컸고요.”

유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말 미친 사람이네.’

이때 의현이 손에 하이힐 한 켤레를 든 채로 돌아왔고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유진 씨, 우리 대표님한테 고마워해야 할걸요. 아니면 저 집안사람들 중 누군가가 유진 씨를 잡아먹었을걸요.”

또 고마워해야 한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유진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정신을 못 차렸다.

“강지찬 당신은 사람도 아니에요!”

강지찬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내가 사람인지 아닌지, 당신도 잘 알 텐데?”

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병원으로 가는 길은 꽤 멀었지만 차 안에서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유진은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사건은 이미 발생했고 그녀 역시 끝까지 걸고넘어질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강지찬과 진행한 거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빈은...

한빈의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상처는 꽤 깊어 몇 바늘 꿰매고서야 처치가 끝났다.

병원에서 나온 뒤 강지찬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간단하게 병원에서 세수를 하고 난 유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툭 건드리면 무너질 모습이었지만 그마저도 인간이 아닌듯한 아름다움이었다.

“강지찬 씨, 이번 생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네요.” 유진이 입을 열었다.

곧게 뻗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찬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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