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찬은 한 무리의 경호원을 대동하고는 등장부터 심상치 않은 기세였다. 그의 등장에 시끌벅적하던 룸이 갑자기 조용해졌다.한빈 옆에 앉았던 두 사람이 눈치껏 자리를 양보했다.“아이고 강 대표님 오셨어요? 이쪽으로 앉으시죠.”소파에는 원래 세 명이 앉아있었는데 둘이 일어서자 한빈 혼자 자리에 남아있었다.경호원들이 다가가더니 깍듯한 태도로 한빈에게 부탁했다.“죄송하지만 일어나주시죠.”강지찬이 아무와도 동석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한빈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강지찬이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그뿐만 아니라 이 룸에 있는 그 누구도 강지찬이 등장할 줄은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도대체 왜 온 걸까?한빈은 강지찬과 척을 지기는 싫었던 터라 공손한 자세로 자리를 안내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강 대표님께서 친히 방문해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얼른 앉으시죠.”남자들은 다 이렇게 순식간에 얼굴을 바꿀 수 있는 건가?유진은 한빈의 아첨하는 표정이 거짓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만한 태도로 그녀를 짓밟던 사람이 자신의 아내를 뺏은 원수인 강지찬에게는 비굴한 태도를 보이다니.유진이 한빈에 대한 인상은 또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깟 남자가 자신이 순결과 7년의 청춘을 바쳐 사랑한 남자라니!그녀는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전혀 없음을 인정했다.강지찬은 정유진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그는 한 손으로 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리를 꼬며 모두에게 말했다.“아까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그렇게 시끌시끌했어요? 계속해요, 나도 듣게.”방금까지 흥에 겨워 소리를 높이던 사람들 모두 입을 꾹 닫았다. 모두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은 표정이었다.의현도 자리를 찾아 앉으며 건들건들한 태도로 말했다.“아까 우리 유진 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요. 아, 한 대표님, 오늘 강 대표님이 친히 사과하러 오신 거에요.”그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또다시 경악했다.강
자신의 비즈니스 파트너들이 모두 강지찬에게 아부하러 모여들자 한빈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짐을 느꼈다.다 끝났다.그는 인제야 강지찬이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을뿐만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으려는 의도임을 알아챘다.“강 대표님...”자리에 사람이 많지만 않았더라면 한빈은 강지찬에게 무릎이라도 꿇을번했다.“저, 저...”목적을 달성했으니 강지찬은 더는 길게 있고 싶지 않았다.그는 한빈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유진을 껴안으며 고개를 숙여 물었다.“지루하지 않아요?”강지찬이 누구인가, 서울에서 그가 고개를 숙일 만 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유진은 그의 연기에 동조하듯 “네.”라고 대답했다.“더 있고 싶지 않아요.”강지찬은 그녀를 안아 일으켜 세우더니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그럼 집으로 돌아가요.”“집”이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 마치 진짜로 돌아갈 듯한 기분이었다.철저히 무시당한 한빈은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나가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보며 마음이 무너져내렸다.정말로 끝났다.강지찬 일행이 떠나자 모두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 핑계를 댔다.“미안하게 됐네요. 한 대표님, 아들 숙제를 봐줘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한 대표님, 노모가 몸이 안 좋으셔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합시다.”여자 손님들 역시 한 명도 빠짐없이 나가버렸고 시끌벅적하던 룸에는 곧 한빈과 소희 둘만 남았다.소희의 공들여 치장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저 배은망덕한 자식들!”텅 빈 연회장을 둘러보며 한빈은 소파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셔츠의 등판은 이미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프라임 홀을 나서자 강지찬이 유진을 놓아줬다.이젠 연극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갈 때였다.최의현이 정유진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며 웃었다.“아가씨, 이건 강 대표님의 보상입니다.”유진은 의현의 손에 들린 은행 카드를 쳐다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보상이요? 내 순결을 빼앗고 내 명성을 추락시킨 것에 대한 보상인가요? 아니면 오늘 당신들
유진은 몸에 휴대폰이고 지갑이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택시를 잡아 친구 집에 도착한 후 택시기사의 휴대전화를 빌려 조예원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나와달라고 부탁했다.예원은 유진의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보더니 빠른 속도로 택시비를 내며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오늘은 뭐야? 도망가는 신부야, 신데렐라야?”요즘 디자인 작업으로 바빠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유진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나 한빈이랑 헤어졌어.”예원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어?”엘리베이터에 들어서서야 정신을 차렸다.“왜? K그룹에 찍혀서 구치소에 있다며?”“나왔어.” 유진은 엘리베이터에 기댄 채 남 얘기하듯 건조하게 이야기했다.“내가 강지찬을 찾아갔고, 그 사람이랑 잤어.”예원이는 또다시 입을 떡 벌렸다.“...”‘강... 강지찬? 내가 아는 그 강지찬이 맞는 걸까?’조예원과 유진은 대학교 동창이었고 작년에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작업실을 함께 개업했다.작업실은 예원이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가끔 늦은 시각까지 야근할 때면 예원이네 집에서 잠을 잤으므로 이곳은 두 번째 집이나 다름없었다. 옷이며 생활용품이 모두 있었기에 문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이마의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조심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식탁에는 방금 쪄낸 만두가 놓여 있었다.이 만두는 지난번 유진의 엄마가 직접 빚어 얼려둔 것으로 야근하고 돌아올 때 간단하게 야식으로 먹으라고 챙겨준 것이었다.예원도 두뇌 회전이 빨랐던지라 앞뒤 얘기를 이어보더니 스스로 진실에 가까워졌다.“밥 안 먹었지?”마음이 아프면서도 한심해 보였다.“지금 네 모습 그대로 집에 가면 아저씨 아줌마가 마음 아파 못사실걸.”유진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마음 한쪽이 따뜻해짐을 느꼈다.“그래서 널 찾아온 거잖아.”“얼른 먹기나 해.” 예원은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절친에게 차마 소리를 지르지 못해 답답한 채로 꾹 참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 앞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정 교수네 딸 말이야,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던데 왜 이런대?”“겉보기에만 그렇겠지. 뒤에선 어떤 짓을 벌이고 다닐지 누가 알겠어.”“어머 쪽팔려라. 정 교수님이랑 이 선생 낯을 다 깎아 먹었겠네.”유진은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도 부모님의 명성에 자신이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역시 나쁜 일은 생각하는 대로 벌어진다더니.이때, 한빈 엄마의 목소리가 집 안에서 흘러나왔다.“... 당신들 대학교수가 딸 교육은 어떻게 시킨 거야? 밖에서 굴러온 남자랑 편 먹고 자기 예비 신랑을 해칠 궁리나 하고 있으니. 이런 악랄한 애는 우리 집에서 절대 못 받아들여! 선생은 무슨, 뒤통수 치는 법이나 가르치는 선생이면 모를가...”그 말에 유진은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부모에게까지 행패를 부리다니, 절대 참을 수 없었다.분노에 휩싸인 채 구경꾼들을 밀치며 문을 열고 들어오자 옆집 아주머니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테이블 위에 물컵과 약상자가 있는걸 보니 이미 약을 먹은 것 같았다.“유진이 왔니?” 옆집 아주머니가 구원투수를 발견한 듯 불렀다.알고 보니 한빈네 엄마만 온 것이 아니라 소희까지 함께 있었다.두 사람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니 우리 집에 찾아와 화풀이하며 본때를 보여주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한평생 글만 가르치고 얼굴을 붉혀본 적 없었던 아빠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계셨다.유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강지찬에서 이용당한 건 그러려니 했다. 둘 싸움에 고래등 터진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한빈에게 버림받아 파혼당한 것도 그러려니 했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하지만 부모님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평생 교편만 잡으시고 모두에게 선하신 분들이 자신 때문에 집까지 찾아온 사람들한테 치욕스럽게 모욕당하고 있다니!소희는 마
강지찬을 보자 한빈의 엄마와 소희 모두 입을 뗄 수가 없었다.한빈 엄마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으로 눈앞의 강지찬을 보자 너무 놀라 종아리에 쥐가 나버렸다.소희가 그녀를 부축하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강 대표님, 유진이 찾으러 오신 거죠? 대화 나누세요.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둘은 조금 전의 기세의 반도 못 편 채 강지찬의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복도가 좁아 강지찬의 긴 다리로 반을 차지하자 한빈의 엄마와 소희는 벽에 바싹 붙은 채로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유진이 남은 반쪽 꽃병을 들고 따라왔다.“거기서, 가지 마. 사과부터 해!”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한빈의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반드시 우리 엄마 아빠한테 사과해야 해, 그전엔 아무도 나갈 생각 하지 마!”한빈의 회사가 규모를 넓히기 시작한 뒤로 그 집 어미는 유진이네 집안을 업신여겼다. 유진의 부모님에게 말할 때도 항상 고고한 태도로 뭐라도 되는 양 굴었었다.전에는 유진이네 가족도 일일이 대꾸하기 싫어했다. 두 집안이 알게 된 지도 몇 년인데 서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뻔히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한빈의 엄마가 그녀를 모욕하는 것도 모자라 집까지 찾아와 자신의 부모까지 모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너 이...” 당장이라도 욕을 뱉으려던 한빈의 엄마는 곁눈질로 강지찬을 힐끗 보고는 ‘천박한 년’이라는 뒷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반나절 만에 한빈의 파트너들 모두 연락이 닿지 않았고 투자비 회수는 물론 연락을 끊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한빈이 힘들게 모아온 인맥과 자원들이 강지찬에게 척을 졌다는 이유만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그들 가족도 강지찬을 찾아가 난동을 부리지는 못하겠으니 어쩔 수 없이 모든 화를 유진이 가족에게 풀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강지찬의 등장은 예상도 못 했었다. 안 봐도 유진이 도와달라고 불렀을 게 뻔했다.이 천박한 년, 역시 강지찬과 붙어먹은 게 확실했다.강지찬은 재밌는 구경을 끝냈다는
유진은 아버지의 말에 입을 꾹 닫은 채 베란다에서 빗자루를 들고 와 깨진 도자기를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 아빠, 먼저 데려다주고 와서 다시 설명해드릴게요.”정명학은 강지찬을 힐끗 쳐다봤고 지찬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뵙죠.”문이 닫히고 나서야 유진은 길게 숨을 토해냈다.강지찬은 그런 유진을 빤히 지켜보면서 알면 알수록 더 흥미로운 여자라고 생각했다.잠깐 전의 독기 가득한 모습은 만약 한빈엄마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면 진짜로 꽃병으로 찔러버릴 기세였다.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한없이 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선을 넘는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었다.“뭘 봐요?”유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오늘 화장을 하지 않아 희고 깨끗한 얼굴에 약간의 위태로움마저 비쳤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단호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강지찬이 먼저 들어갔고 도발하듯 유진을 쳐다보며 물었다.“들어오기 겁나요?”유진은 이렇게 된 마당에 뭐가 겁나냐고 생각했다. 전에 일들은 둘째치고 오늘 그의 등장은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한빈엄마에게 시달려야 했을지 몰랐다.그녀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자마자 강지찬이 확 그녀를 덮쳐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었다.유진의 턱을 살짝 잡은 채 흥미롭게 물어오는 지찬이였다.“아깐 좋았죠?”유진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폭발할 뻔했다.“이거 놔요, 뭐 하는 거예요?”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부드럽고도 매끈한 촉감에 지찬은 그날 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목소리도 알게 모르게 살짝 갈라져 있었다.“아까 좋았냐고요, 대답해요.”“미쳤어요?” 한빈엄마가 사과한 일을 말하는 것인데 말투는 왜 둘 사이의 말 못 할 일을 얘기하는 듯 야릇하게 깔고 있는지 몰랐다.강지찬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나만 따라오면, 계속 좋게 해줄게요.”“...” 유진은 뭐라 답하면 좋을지 몰랐다. 미친 것이 분명했다. 여색을 즐
유진이 집으로 돌아오자 옆집 아주머니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부모님이 소파에 앉아계셨고 테이블에는 물 세 잔이 놓여있었다.이 상황을 유진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제대로 이야기해 보자는 뜻이었다.감출 생각도 없었던지라 평온한 말투로 한빈과 강지찬의 일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다.엄마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고 아빠는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난 괜찮아요. 이것 좀 봐요, 괜찮잖아요?”유진은 엄마 아빠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임을 알았기에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웃으며 말했다.“지금이라도 한빈이 이런 사람인지 아는 게 결혼 후에 아는 것보다 훨씬 낫죠. 슬퍼하지 마세요, 전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정명학이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강지찬은?”부모님이 한평생 쌓아온 명성이 자신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에 유진은 자책했다.“죄송해요. 엄마 아빠, 제가 불효자식이에요. 그 탓에 부모님까지 이런 꼴을 당하게 하고...”유진은 굳게 약속했다. “저랑 강지찬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앞으로 다신 만날 일 없을 거예요.”정명학과 이명자는 이미 말을 끝낸 듯 유진의 이런 태도에 크게 안도했다.“그래, 그 남자 무슨 꿍꿍이인지 예상할 수가 없더구나. 엮이지 않는게 좋겠어. 더군다나 그 집 배경이면 우리랑 천지 차이인데 엄마 아빠는 딴 건 다 필요 없어, 너만 행복하면 돼.”정명학은 격조가 있는 아버지였다.“이웃집에서 뭐라고 떠들든 듣지 않으면 그만이지. 우린 우리의 삶을 살면 돼.”유진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엄마 아빠는 항상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왔고 전부터 한빈의 엄마한테 불만이 있었어도 유진의 체면을 생각해 왈가왈부하지 않았었다.부모님에게 어떻게 파혼 소식을 알려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빈엄마의 난리 통에 모든 것이 스르르 매듭이 풀려버렸다.한빈과 헤어졌단 말에 부모님도 한 시름 놓았을 것이다, 드디어 앞으로 그 집 어미한테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유진은 엄마를 방으로 모셔다드
회의가 끝난 후, 최의현은 강지찬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갔다.“한빈이라는 자식 말이야, 이틀째 회사에도 안 나오고 집에 처박혀서 아예 외출 자체를 안 한다네?”최의현은 손으로 표창을 돌리며 말했다.“그 회사 요즘 매일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소희라는 여자가 혼자 대처하고 있대.”여기까지 말한 최의현은 혀를 내둘렀다.“사내자식이 여자를 앞세우다니, 쯧.”강지찬은 그날 밤 정유진의 풋풋함과 피로 물든 침대 시트를 떠올리며 눈썹을 치켜올렸다.“확실히 남자 아니야.”그는 자세를 바꾸고 어색하게 마른기침을 해댔다.“끝났어?”최의현은 손에 들고 있던 표창을 내던졌고, 표창은 마침 과녁에 꽂혔다.“아, 맞다. 둘째 돌아온다며?”강지찬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응.”최의현은 의자를 사무용 책상 앞으로 끌어당긴 후 엉덩이를 붙이더니 탁자를 두드렸다.“제발 맞서 싸우지 좀 마. 너 밖에서 소문 어떻게 난 줄 알아?”강지찬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고, 묻기도 귀찮았다.최의현은 하는 수 없이 계속 말했다.“다들 네가 강지현을 거지 같은 곳으로 쫓아버렸다고 생각한다고. 환경도 열악하고 의료 수준도 한계가 있어서 더 늦으면 정말 그곳에서 죽을지도 몰라.”“풉.”강지찬은 차갑게 웃었다.영감이 며칠째 밥 먹으러 오라고 한 이유도 바로 강지현 때문이다.요즘 정유진은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주로 이명자의 옆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명자는 현기증과 고혈압이 심각해 그녀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명자와 함께 장 보러 갔다가 이웃을 마주쳤는데 멀리에서도 “교수”와 “외간 남자”라는 말이 똑똑히 들려왔다.정유진은 이명자에게서 팔을 풀고 돌아서서 활짝 웃으며 두 여자를 바라봤다.“아주머니, 따님이 외도로 사생아를 낳은 사건은 끝났어요?”“그리고 아주머니네 손자는 연애하다가 학생을 임신시켰...... 교육 좀 잘하셔야겠어요.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서야.”정유진은 일부러 큰 소리로 쩌렁쩌렁 말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