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호는 그제야 비로소 뒤늦게 강현우가 함께 있는 걸 알아챘다. 그러자 술에 취해 있던 그는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강현우, 또 너야?”강현우는 구지호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구지호, 정말 일편단심이네.”구지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금까지도 윤하경과 강현우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윤하경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누구나 다 알았으니까.그는 일어나서 강현우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강현우, 꺼져. 이건 나랑 윤하경 사이의 일이야.”“오? 그래?” 강현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의 얼굴은 본래도 잘 생겼는데 웃을 때마다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구지호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윤하경과 이미...” 그는 일부러 말을 끊고 남은 부분은 구지호가 알아서 생각하게 놔두었다.그러자 구지호의 얼굴이 변했고 그는 윤하경과 강현우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윤하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하경아, 저 자식 말이 맞아?”윤하경은 입술을 꽉 물고 강현우의 손을 잡았다.다행히 강현우도 거부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구지호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너는 가도 돼.”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주저 없이 그를 쫓아냈다. 구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은 갑자기 커지면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듯, 그의 시선이 강현우 손목의 점에 고정됐다.그 점은 너무나도 눈에 띄었고 누구든지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구지호는 갑자기 전에 윤하경이 올린 사진에서 그 남자의 손에 같은 점이 있었음을 깨달았다.그때는 그저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일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 그 증거가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손을 들고 윤하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너랑 강현우는 이미 사귀고 있었던 거야?”윤하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전 남자 친구인 너한테 보고해야 해?”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고 구지호는 그녀의 무심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한 번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별일 없어요."사실 그녀는 궁금했다.사람들은 모두 강현우를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관심하고 일이 끝나면 그 사람과 다시는 엮이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전 처음 강현우를 알았을 때도, 그런 점이 눈에 띄었고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강현우는 조금 달라 보였다.그의 표정에서 예전처럼 무심한 감정 말고도 조금은 따뜻한 면이 보였고 그래서 윤하경은 그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그게 그가 여전히 냉정한 사람이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은 인간적인 면이 보인다고 할까?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강현우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그때 강현우가 그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윤하경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리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 뭐 마실래요? 차 아니면 커피?"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윤하경은 손을 들어 물건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발을 헛디뎌서 균형을 잃었다.“아!” 그녀는 거의 넘어질 뻔했지만 그 순간 강현우의 손이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 윤하경은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대신 강현우의 넥타이를 움켜잡았다.강현우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허둥대며 그만 두 사람은 바닥에 넘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강현우는 재빠르게 반응해 그녀의 머리가 바닥에 닿기 전에 손을 댔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넘어졌고 윤하경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강현우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나갔고 그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강현우가 그녀의 눈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언제까지 쳐다볼래? 차라리 다 벗고 보여줄까?”그의 목소리는 낮고 약간은 농담 섞인 톤이었다.윤하경은 얼굴이 빨개지며 일어날 기회를 찾았다. “아, 그게 아니라... 정말 아니에요, 진짜.”그녀는 당황하면서 강현우를 밀어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꿈쩍도 하지 않
윤하경은 말이 없었다.하지만 다행히도, 그때 강현우가 일어나서 그녀를 품에 안고 소파에 눕혀 놓았다.“나 일이 있어. 구지호는 집에 보냈어. 이제 집에서 편히 쉬어. 그럼 난 먼저 갈게.”불과 몇십 초 사이에, 강현우는 다시 그 차가운, 고상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치 방금 전에 그랬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윤하경은 정신을 차리고 그가 돌아서려 할 때 말했다.“아까 고마웠어요.”그 말은 진심이었다. 만약 강현우가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오늘 자신은 아마 구지호를 떼어내지 못했을 거다.강현우는 문손잡이를 잡고 돌아보며 차가운 눈빛에 약간의 조롱이 섞인 채로 말했다.“난 말로 고맙다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그 말이 끝나자 그는 몸을 돌려 우아하게 떠났다.윤하경은 크게 한숨을 쉬고 눈을 굴렸다. 생각해 보면 강현우도 구지호 못지않게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다.며칠 후, 윤하경은 아버지 윤수철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집으로 와.”그 전화를 받으니 예상한 대로였고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갔다.집에 도착했을 때, 윤수철은 거실에 없었고 그 대신, 임수연이 있었다. 그녀는 윤하경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마치 윤하경이 자기한테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보였다.윤하경은 그 표정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아줌마, 윤하연은 어디 있어요? 왜 안 보이죠?”그녀는 지금 윤하연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윤하연은 지금 모든 걸 잃었고 이 순간 그녀와 임수연은 아마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거다. 윤하경은 그 아픔을 더 느끼게 하고 싶어서 일부러 물었다.임수연은 윤하경의 웃는 얼굴을 보고 더 화가 나서 말없이 눈을 돌렸다.윤하경은 그런 임수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윤수철은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계단을 오르던 중, 윤하경은 하얀 옷을 입은 윤하연이 계단에 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윤하경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휘청거렸고 손잡이를 잡으며 애써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윤하연을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리며
“유 집사, 유 집사! 빨리 하연이를 침대에 눕혀.”유 집사가 부름을 듣고 급히 올라왔을 때 임수연은 이미 윤하연을 일으켜 세운 상태였다.윤하경이 뒤돌아보니 유 집사는 임수연과 함께 윤하연을 부축하고 방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윤하경은 유 집사의 얼굴에 검은 멍이 있는 걸 눈치채고 얼굴을 찡그리며 걸음을 재촉했다.“유 집사, 얼굴에 그게 뭐예요?”유 집사는 잠깐 멈칫하며 본능적으로 임수연을 바라봤다.“아, 그게... 실수로 부딪혔어요.”유 집사의 목소리는 작은 데다 뭔가 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윤하경은 쉽게 넘어가지 않고 비웃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변명이야? 그럼 그 부딪힌 자리라도 보여줘. 이 정도 멍이 들었다면 손톱자국도 나지 않았을까?”유 집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고 자신이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였다.그런데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임수연을 쳐다보며 물었다.“그럼. 아줌마는 뭐라 설명해 줄래요?”임수연은 원래 약간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윤하경이 이렇게 말하자 오히려 당당하게 목을 빳빳이 세우며 말했다.“윤하경, 뭐야? 네가 말하려는 게 뭔데?”“내가 때렸다고?”“너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네 동생을 두고 뭐 하는 거야? 전혀 신경 안 쓰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걱정하는 거야? 양심도 없어?”임수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윤하경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여자는 정말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네. 윤하연이 문제가 터지고 구지호에게 강제로 유산 당한 이후로 임수연의 윤하경에 대한 불만은 폭발적이었다. 게다가 윤하경이 모든 일이 계획된 거라며 이제 그 여유 있던 모습을 더는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양심이 뭐? 너 같은 사람이랑 지금 양심을 얘기해?”윤하경이 냉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 집사는 점점 더 분위기가 긴장되는 걸 느끼고 급히 말렸다.“하경 씨, 저는 괜찮아요. 제 일로 부인과 싸우지 말아 주세요.”“닥쳐!”임수연은 유 집사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넌
윤하경은 신경 쓸 것 없이 소파에 푹 앉으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에요? 빨리 말해요. 나 친구랑 술 마실 약속 있어요.”윤하경은 언제나 윤수철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기분을 깨고 말을 건네곤 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윤수철의 얼굴은 다시 한층 더 어두워졌다.“여자가 술 마시고 클럽 가고 그게 어떻게 된 거야? 너 그게 말이 돼?”그는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너는 왜 그렇게 자꾸 밖으로만 나가는 거야? 그냥 네 동생처럼 집에서 조용히 있으면 안 돼?”윤하경은 손톱을 보며 대답도 하지 않고 잠시 웃었다.“저보고 쟤를 따라 배우라고요? 형부 침대에 올라가서 임신까지 하고 결국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꼴을요?”윤수철은 윤하경의 말에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들며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런 후 서류를 집어 들고 다가갔다.“이건 뭐예요?”윤수철이 가져온 서류를 보고 살펴보던 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고작 15%요? 제가 지난번에 제대로 말한 게 아니었나요? 아니면 아빠가 잘못 들은 거겠죠. 전 그 정도 얘기한 적 없어요.”윤수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15%는 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야. 그렇게 많은 걸 주면 내 자리는 어디 있어? 내가 아버지로서 너한테 명령을 들어야 하나?”윤수철은 마치 윤하경의 요구가 너무 지나친 것처럼 얘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윤하경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아직 결정을 못 내리신 거 같네요. 그럼 전 먼저 가겠습니다. 결정되면 연락하세요.”윤하경의 선은 20%였다. 윤수철이 15%로 넘기려고 하는 건 너무 쉽게 생각한 거였다.윤하경이 돌아서려는데 윤수철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윤하경, 정말 이 회사 망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 그게 네 어머니의 마음도 담긴 일이잖아.”“제 엄마 얘기하지 마세요.”“왜? 얘기 안 하면 그게 없어지는 줄 알아?”“윤하경, 너의 이기적인 행동 때문에 회사가 망하면
윤수철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고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분명히 연기 같은 건 아니었다.윤하경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괜찮으세요?”윤수철은 숨을 크게 쉬며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가방을 내려놓고 그의 서랍을 열어보며 물었다.“약은 어디 있어요?”그러자 윤수철은 반사적으로 서랍을 바로 닫았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며 그를 쳐다봤다.그렇게 상태가 심각한데도 왜 서랍을 열지 못하게 하는 걸까? 혹시 서랍 안에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걸까? 윤하경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서랍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윤수철은 자신이 직접 옷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어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잠시 후, 가슴을 쓰다듬으며 숨을 고른 뒤 윤하경을 쳐다보며 말했다.“꺼져.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윤하경은 그의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제 큰 위험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가방을 들고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다.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때 윤하연의 방에서 나온 임수연을 마주쳤다.윤하경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방향을 돌려 임수연과 윤수철의 침실로 들어갔다.임수연은 윤하경이 그쪽으로 향하자 급히 뒤따랐다.“윤하경, 도대체 뭐 하는 거야?”윤하경은 대답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고 방 안에는 임수연이 모은 명품 가방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이 가방들은 임수연이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샀을 것이다. 그녀는 자주 남들에게 돈을 과시하려는 성향이 강했다.윤하경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가격이 꽤 비싼 듯한 고급스러움을 느끼며 잠시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임수연이 다가왔고 윤하경은 그 가방을 손에 쥔 채 그 자리에서 바로 찢어버리기 시작했다.임수연은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며 소리쳤다.“윤하경, 너 미쳤어?”윤하경은 찢어진 가방을 바닥에 던지며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이거 다 우리 아빠 회삿돈으로 샀잖아요.”임수연은 화가 나서 눈이
윤하경이 떠난 후 임수연은 눈앞에 완전히 형태를 잃어버린 가방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그녀는 두 손을 꽉 쥐고 손톱이 거의 살에 박힐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제야 자신이 너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윤하경, 너 기다려. 두고 보자.”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그때 마침 유 집사가 식당 옆에서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모습을 봤다. 임수연은 이를 살짝 물며 다가갔다.“너...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널 봐준다고 해서 너까지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반드시 이 집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알게 해줄 거야.”그녀는 유 집사의 귀에 대고 말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최근 임수연의 일은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윤하경에게서 무언가를 못 하니 그녀는 결국 유 집사에게 화풀이하기로 했다.유 집사는 익숙한 듯 얼굴에 특별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사모님, 별일 없으시면 그러면 저는 보신탕을 준비하겠습니다.”임수연은 코를 훌쩍이며 비꼬듯 말했다.“가서 나에게 보신탕 한 그릇 가져와. 남편에게 전달해 줄 거니까.”“네, 사모님.”유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규칙적으로 대답하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유 집사는 손에 보신탕이 담긴 쟁반을 들고나왔다.임수연은 차가운 얼굴로 그것을 받아 들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윤수철의 서재 앞에 도착했을 때 임수연은 손을 들어 문을 가볍게 두드린 후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윤수철은 책상에 앉아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그는 피곤해 보였고 표정이 우울하게 처져 있었다.임수연은 그 모습을 보고 짧은 미소를 지었다.‘아, 역시 또 윤하경에게 괴롭힘을 당한 거네.’임수연은 살짝 눈썹을 올리고 천천히 걸어갔다.“여보, 내가 유 집사에게 특별히 보신탕을 끓여왔으니까 한번 마셔봐요.”윤수철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어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넌 왜 왔어? 별로 입맛이 없어. 나가
윤수철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임수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지만 우리 하경이는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을 거예요. 이태임 씨 말도 맞아요. 구씨 집안과 약혼했던 사이라 결혼 문제는 좀 어려운 상황일 것 같네요... 하지만 이름도 없는 가문의 아들과 결혼할 순 없죠. 그럼 하경이가 너무 아까워요.”임수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윤수철이 나름대로 이해하게 놔두었다. 윤하경은 앞으로 경성에서 좋은 결혼 상대를 찾기는 어려울 거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말이다.그런데 그 말속에는 윤하경과 구지호를 갈라놓은 진짜 원인인 윤하경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윤수철은 약간 고민에 빠진 듯 미간을 찌푸렸고 임수연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이제 그만 얘기해요. 하경이는 절대 동의하지 않겠죠.”그리고 임수연은 테이블에 있는 국을 뜨며 말했다.“그냥 조금 마셔봐요. 이게 정말 좋은 거예요.”윤수철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이 없었다.“정말, 이태임 씨가 그렇게 얘기했다고?”윤수철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하경이의 결혼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준다고? 구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그렇다고 하더군요.”임수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태임 씨는 정말 온화한 사람이라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그리고 임수연은 잠시 말을 멈추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렇지만 하경이가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가 노력해도 소용없겠죠.”윤수철은 잠시 표정을 찡그리며 국을 내려놓고 큰 소리로 말했다.“나는 걔 아버지야. 하경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결국 내 말을 들어야 해. 그래, 그럼 다시 한번 이태임 씨에게 얘기해 보자.”임수연은 윤수철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이 일이 확실하게 진행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석훈은 서울에서 유명한 불량배로, 덩치도 크고 얼굴은 별로였다. 게다가 머리도 조금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폭력적인 성향도 있다고 들었다.경성의 명문 집안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