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철은 애초에 윤하경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그런데도 그녀가 소파에 앉아 자신을 추궁하는 모습에, 속에서부터 열불이 났다.“집에 돌아오면 먼저 어른께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디서 감히 이런 태도로 나를 대하는 거지?”윤수철은 화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 옆에서 임수연은 조용히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달래듯 말했다.“여보, 하경이가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괜히 화내지 말아요.”부드러운 목소리에,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 평소였다면 혹할 만한 모습이었겠지만 윤하경은 이미 수없이 속아온 터라 이제는 그 연기가 지겹기만 했다.연극을 보고 있느니 차라리 진짜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지켜볼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서류 한 장을 임수연 앞으로 내밀었다.“이 차용증,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요?”윤수철은 서류를 힐끗 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뭐야?”임수연의 입술이 살짝 떨렸지만 윤하경은 그녀의 표정을 보자마자 임수연이 이 일을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윤수철을 바라봤다.“여보, 나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모른다고요?”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살다 살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검은 글씨로 선명하게 당신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면 남몰래 남자라도 하나 키우느라 이 돈을 빌린 거예요?”임수연의 얼굴이 순간 새하얗게 질렸다.윤수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입 좀 다물어! 그렇게 무례하게 굴 거면 당장 나가!”“나가도 상관없어요.”윤하경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그 전에, 이 돈은 갚고 가세요. 이미 저쪽에서 공사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어요.”그러자 임수연은 깊은 한숨을 쉬며 애처롭게 윤수철을 바라봤다.“여보, 하경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정말 급한 일이 있는 게 아닐까요?”“마침 제 손에 좀
윤하경이 비꼬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급해하시는 걸 보니 제가 제대로 찌른 모양이네요?” 윤수철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았고 분노로 얼굴 근육이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윤하경은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우아한 자세로 다리를 꼬았다. “아줌마가 끝까지 아니라고 하신다면 뭐... 저야 상관없어요. 나중에 후회만 안 하시면 되겠네요.” 그녀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던졌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임수연은 속으로 불안해졌다.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정말 끝까지 발뺌하실 건가요?” 윤수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윤하경이 이렇게까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걸 보니 그녀가 허튼소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불안해진 그는 곧바로 임수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임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피하는 듯한 시선이 그녀의 불안을 드러냈고 윤하경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줌마,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문제 커져도 저한테 원망하지 마세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고 굳이 나서서 해결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 임수연의 손이 주먹 쥐듯이 살짝 떨렸다. 마침내 그녀는 참지 못하고 윤수철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보, 먼저 올라가서 좀 쉬어요. 괜히 하경이한테 화내지 말고요.” “꼴 좀 봐. 딸이라는 애가 아버지한테 인사 한마디 없이 와서 윽박지르기나 하고 있잖아!” 윤수철은 그녀의 말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약혼도 내팽개치더니 이제는 부모한테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놈을 내가 왜 자식으로 둬야 하는 거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격양되게 기침했다. 임수연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옆에서 부축했다. 그러면서도 슬쩍 눈짓으로
임수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힘껏 내던졌다. “엄마, 뭐 하는 거야?”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윤하연이 이 광경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임수연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곧장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아, 너 지금 가진 돈 얼마나 돼?” “돈?” 윤하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으며 머리를 굴렸다. “한... 2억 정도 남아 있을 거야.” “전부 나한테 보내. 급하게 쓸 일이 있어.” 윤하연은 순간 멍해졌다. 그건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그 돈을 모두 넘기면 한 달 용돈과 아버지가 가끔 주는 돈으로만 생활해야 한다. 단순한 부탁이 아니란 걸 직감한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엄마, 그동안 아빠한테 꽤 많이 받았잖아.” 별다른 감정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그것이 임수연의 신경을 제대로 건드렸다. 그녀는 화가 난 듯 다가와 손가락으로 윤하연의 이마를 톡톡 찌르며 쏘아붙였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해? 집안 살림에 돈이 안 드는 줄 알아? 좋은 옷, 좋은 가방, 좋은 차까지 다 해 줬잖아. 그런데 고작 이 돈 가지고 엄마한테 따지는 거야?” 이어 그녀는 한층 더 비꼬듯 말했다. “윤하경 봐. 혼자서 사업도 잘하고 능력 있게 살잖아. 넌 대체 왜 걔보다 나은 게 없어?” 그 말에 윤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차갑게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윤하경을 딸로 삼아.” 임수연은 그제야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닫고 다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야, 엄마가 말을 잘못했어. 그냥 홧김에 나온 말이야.” 그러나 윤하연은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윤하경, 두고 봐. 곧 네가 울 날이 올 테니까.” 그 말에 임수연의 눈이 반짝였다. “왜? 네가 뭔가 방법이 있어?” 하지만 윤하연은 그녀를 흘긋 쳐다보더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됐어. 돈은 이따가 보내 줄게.” 그렇게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윤하경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냥... 약한 여자 하나 건드려서 신나셨겠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상대방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오늘 회사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의 실수였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좋아요.” 윤하경은 일부러 생각하는 듯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내일 오후에는 시간이 날 것 같네요. 직접 찾아오세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후, 그녀는 곧장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나자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강현우의 이름을 빌려서 위세를 부렸는데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까? 오늘 그가 보였던 냉혹한 태도를 떠올리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때 문득, 낮에 강현우가 자신을 위해 강현석을 막아섰던 일이 떠올랐다. “아, 맞다!” 그녀는 스스로 머리를 한 대 쳤다. “기사님, 강한 그룹 대표님 댁으로 가 주세요.” 한 시간 뒤, 그녀는 초조한 마음으로 강현우의 저택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집사가 문을 열었고 집사는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보며 순간 멈칫했다. 이 집을 스스로 찾아오는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현우 씨 계시는가요? 오늘 도움을 많이 받아서 감사 인사드리러 왔어요.”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대표님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윤하경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불쾌한 기색 없이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사실, 낮의 일 이후로 강현우가 조금 무서워졌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서도 '이제 그와 거리를 두는 게 좋을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을 떠올리면 그럴 수 없었다. 강현석 같은 인간이 자신을 눈여겨봤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 만약 강현우의 보호가 없다면 그 사람이 또 무슨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뭘 말해도 강현우한테는 다르게 해석될 게 뻔했다. 정말이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지금 몸이 녹초가 된 것처럼 힘이 빠져 있었고 더 이상 강현우와 실랑이를 벌일 힘도 없었다. 게다가 강현우는 이런 일에 있어서 끝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다가는 정말 병원 신세를 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헤븐’에서 현우 씨가 좋아하시는 요리 몇 가지를 포장해 왔어요. 방금 만든 따끈따끈한 음식인데 내려가서 같이 드실래요?” 강현우가 흥미롭다는 듯 윤하경을 바라봤다. 눈앞의 여자는 분명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또 억지로라도 애교를 부려가며 자신을 달래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었다. “용감하네.” 툭 던진 말이었지만 윤하경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오늘 낮 ‘헤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강현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오늘 이후로 네가 도망갈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감히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네.” 그의 말에, 윤하경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찡긋했고 발끝을 들어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가볍게 속삭였다. “현우 씨 곁에 있으려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떻게 하면 강현우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지 감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지금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었다. 회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아무리 도망가고 싶어도, 지금은 참아야 했다. 강현우는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꽤 오랜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발끝을 세운 채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그때야 강현우가 낮게 코웃음을 쳤다. “계속 그렇게 잘 버텨봐.”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몸을 돌려 드레스룸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전처럼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내려가 있어.
윤하경은 정신을 다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그녀의 태도는 무심하면서도 위압적이었고 상대는 분위기에 눌려 감히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듯했다. “하경 씨, 저희가 준비한 작은 성의입니다.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대가 내민 것은 ‘선물’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한 장의 수표였다. 윤하경은 힐끗 내려다보았더니 금액은 6천만 원 즉 빌린 돈의 10%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이 정도면 나름 신경을 쓴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홀짝였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녀가 자기에게 따라주는 줄 알고 손을 뻗었다가 머쓱하게 손을 거두었다. 윤하경은 그를 향해 차갑게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뜻이죠?” 유수철은 그녀의 태도에 움찔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혹시 금액이 너무 적었나? 하긴 강현우와 같이 놀더니 이 정도 돈은...’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저희 대표님이 준비한 사과의 표시입니다.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말씀만 해주세요.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맞춰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윤하경은 심드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유 이사는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전 일은 없던 걸로 해주시는 겁니까?” “없던 일?” 윤하경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나요?” 유수철의 얼굴에 순간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보고 끝내는 게 상식인데 윤하경은 그런 방식으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통 같으면 벌써 화를 냈겠지만 상대가 윤하경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경성에서는 경찰보다 더 조심해야 할 사람이 바로 강현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유수철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럼 하경 씨는 어떻
사설탐정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사흘째 되는 날 오전이었다. 윤하경은 휴대전화 화면을 보며 천천히 눈을 좁혔다. “이거...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 애초에 임수연이 처절하게 몰락하기 전에 충분히 괴롭혀 줄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왔다. 그날 오후, 윤하경은 짐을 싸서 다시 윤씨 저택으로 들어갔고 마침 저녁 시간이어서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거실에서는 윤수철이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고 임수연은 곁에서 차를 우려내며 다정한 부부처럼 보였다. 윤하경은 캐리어를 끌고 들어서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아빠, 아줌마. 두 분 다 집에 계셨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거실의 분위기가 묘하게 얼어붙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고 윤하경을 바라봤다. 임수연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왔어? 하경아.” 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요? 제가 돌아오니까 불편하세요?” 임수연은 뭐라고 대꾸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불편하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입을 연 건 윤수철이었다. “며칠 전에는 아주 시원하게 나가더니 갑자기 돌아와서 뭘 하겠다는 거야?” 윤수철의 말에도 윤하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손을 잡아 흔들었다. “아빠,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집이 제 집인데 제가 안 돌아올 이유가 있나요?” 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어갔다. “사실 제가 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앞으로는 아빠한테 더 잘해야겠더라고요. 효도도 좀 하고요.” 물론 속으로는 ‘아주 제대로 된 한판을 벌여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해맑게 웃었다. 임수연은 그런 윤하경을 곁눈질하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여우 같은 계집애가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윤하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강현우를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대략 두세 달 정도 된 것 같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정말 슬슬 질릴 때가 됐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그에게 붙어 있는 여자들은 한 달을 넘기는 일조차 드물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내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두드려졌다. “하경 씨, 저녁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유 집사의 목소리였다. 윤하경은 빠르게 생각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금방 내려갈게요.” 거실로 내려가니 이미 저녁 식사가 시작된 상태였다. 윤수철과 임수연은 각자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녀를 기다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윤하경은 개의치 않고 익숙하게 제 자리에 앉았다. 식사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은근히 임수연을 향했다. 그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임수연은 약간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여보, 들으셨어요? 얼마 전에 이태준 회장의 아들, 이석훈 씨가 사고를 당했대요.” “이석훈? 무슨 사고?” 윤하경은 젓가락을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이석훈?' 그녀는 태연하게 갈비찜 한 점을 집어 들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임수연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차 사고가 났다는데 팔을 심하게 다쳤대요. 거의 못 쓰게 될 정도로 말이에요.” 그녀는 말을 멈추고 윤하경을 힐끔 쳐다봤다. 그 눈빛은 마치 '너랑 상관없는 일은 아니겠지?'라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윤하경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임수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하경 씨가 이석훈 씨와 있었던 일은 우리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이 기회에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또 나를 끌어들이네?’ 눈앞의 여자가 참으로 질기게도 물고 늘어진다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