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지원은 그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다.윤하경은 그의 표정을 보고 단박에 알아챘다.‘또 쓸데없는 상상을 하고 있구나.’“유호천 씨 찾으러 왔어요. 어디 있는지 안내해 줘요.”우지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분... 왜 찾으시려는 건가요? 비록 우리 대표님의 사촌이긴 해도 대표님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오히려...”“헛소리 그만해요.”윤하경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강현우는 그렇게 과묵한데, 왜 이런 애를 부하로 두는 건지...'.“우지원 씨. 저번에 한밤중에 저 불러내 놓고 빚졌다고 했던 거 기억하죠? 그런데 지금 이 정도도 못 도와주겠다는 건가요?”우지원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그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슬쩍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 문자를 보냈다.윤하경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 채 그를 따라갔다.‘헤븐'의 어두운 복도는 여전히 불길했지만 윤하경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우지원은 한 룸 앞에서 멈춰 섰다.“오늘 그분, 기분이 별로라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셨어요. 정말 들어가실 건가요?”“됐고, 그만 가요.”더는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아 윤하경은 단숨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어두운 조명 속, 술병과 담배꽁초가 널브러진 가운데 유호천이 홀로 앉아 있었다.그는 마치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손에 쥔 술병을 그대로 던졌다.그 술병은 정확히 윤하경을 향해 날아왔고 뒤따라 들어오던 우지원이 황급히 그녀를 끌어당겼다.우지원의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윤하경이 여기서 다치기라도 하면... 대표님이 날 어떻게 벌을 줄지 상상도 안 가네.’“여자분한테 이렇게 대하는 게 말이 됩니까?”유호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윤하경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아, 윤하경
방 안으로 들어온 건 바로 안현주였다.기세등등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던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훑어보며 비아냥댔다.“또 그 낯짝 두꺼운 친구 대신 고자질하러 온 거예요?”거칠고 모욕적인 말에 윤하경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말조심하세요.”“조심해야 할 건 그 여자죠. 당신 그 잘난 친구가 내 약혼자한테 기웃거리고 있는데, 내가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요?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당신네 쪽부터 조심시키세요.”윤하경은 이를 악물며 침착하게 대꾸했다.“안현주 씨. 당신이 지금까지 한 일들, 전부 불법이라는 거 알고 있죠?”하지만 안현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그래서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건데요?”그 뻔뻔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어오르는 걸 억누르며 윤하경이 낮게 말했다.“좋아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시죠.”그녀는 등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않아 안현주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를 붙들었다.“잠깐.”윤하경이 멈춰서서 돌아보는 순간, 안현주는 차가운 술을 윤하경의 얼굴에 그대로 끼얹었다.“강현우를 등에 업었다고 해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요. 그 사람, 그냥 잠깐의 호기심으로 당신한테 관심 보인 거예요.”안현주의 눈빛엔 조롱과 경멸이 가득했다.“강현우 씨 맞선녀가 벌써 경성에 도착했단 얘기 못 들었나 보죠? 얼마 안 가서, 당신도 버려지겠네요. 쓰레기처럼.”윤하경의 온몸은 술로 흠뻑 젖었다. 머리부터 가슴까지 흐르는 액체가 그녀의 자존심까지도 타고 흘러내렸다.모욕감에 치를 떨며 반격하려는 찰나, 그녀의 뒤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다가왔다.안현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지고 목소리가 엉겼다.“강...”그 순간,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현우가 등장했다.“말은 잘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더듬어요?”윤하경이 놀란 듯 뒤돌자, 그의 날카로운 턱선이 시야에 들어왔다.안현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식은땀을 흘렸다.‘혹시... 내가 한 말 전부 들은 건가?'그녀는 다급히 태세
갑작스러운 전개에 안현주가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두 명의 경호원이 한 명은 팔을, 한 명은 다리를 들어 그녀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안현주가 발버둥 치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내가 아니라고, 저 여자를 내쫓아야지!”우지원은 순간 안현주가 조금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한 걸음 다가가 말했다.“여기에서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에요.”“앞으로 다시는 여기 오지 마세요. 우리 헤븐은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 있지? 강현우가 윤하경을 내쫓을 거라고 생각하다니.’어떤 상황이 와도 강현우는 윤하경을 함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 자신에게도 침 뱉는 일이나 다름없었다.그때, 안현주가 마지막 악을 쓰며 외쳤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우지원은 짜증이 난 듯 서랍을 열어 실크 수건을 꺼내더니, 그녀의 입에 조용히 구겨 넣었다.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챈 윤하경은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강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서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건가요?”그녀의 질문에 강현우는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엔 무언가 날카롭고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한심하기로서.”“앞으로 또 이런 식으로 당하고 살 거면, 어디 가서 내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그 말만 남기고 그는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갔다.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비록 그가 나서지 않았어도 안현주를 가만두지 않았을 그녀였다.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줬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안 가? 여기서 유호천이랑 있을 거야?”윤하경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급히 그를 따라갔다.밖으로 나가면서 뒤돌아보니, 이 난리통에 유호천은 여전히 쿨쿨 자고 있었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문을 닫고 나섰다.그러나 밖으로 나서자 강현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여기서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지...’불안에 휩싸인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하얀 셔츠 아래로 윤하경의 긴 다리가 드러났다.고개를 숙여 자신을 내려다본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이만하면 괜찮겠지.”단정하게 셔츠 매무새를 고치고 방 밖으로 나오자 강현우는 이미 양복 재킷을 벗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긴 오른팔은 느슨하게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손가락으로 소파 가죽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 순간 윤하경의 몸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강현우의 표정은 좋지 않아 보였고 윤하경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 괜찮으면,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강현우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유호천을 찾아간 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괜히 화가 더 나기 전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하지만 강현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의 다리를 스쳐보더니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를 띠었다.“잠깐.”문을 열고 나가려던 윤하경은 그대로 멈춰 섰다.그녀는 뒤돌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더 하실 말 있으세요?”그녀는 침착하려 애썼지만 강현우의 눈빛은 점점 냉랭해졌고 손끝으로 오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윤하경은 꼼짝하지 않고 눈빛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냥 여기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내가 갈까, 그럼?”그 말에 그녀는 마지못해 그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은 마치 교무실에 불려 간 학생 같았다.가까이 다가오자 강현우의 시선이 그녀의 하얀 셔츠 너머로 스쳤다.백열등 아래, 셔츠 안 실루엣이 은근히 비쳐 보였다.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남자 유혹하는 법, 꽤 잘 아나 본데.”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윤하경은 얼굴이 이유 없이 화끈 달아올랐다.강현우의 셔츠 위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오늘 이 옷을 고른 건 단지 집에 돌아갈 때 입을 옷이 필요해서였을 뿐인데, 그의 농담 한마디에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황급히 일어서려 했다.“
“그래?”강현우의 낮은 목소리에 윤하경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세요.”그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고 손길은 이전보다 더 강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윤하경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작게 신음을 내며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진짜예요!”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다른 남자 얘기를 하니 기분이 좀 나쁘네.”그는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윤하경을 가볍게 안아 침대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순간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제서야 강현우의 진짜 의도를 눈치챘다.‘결국 이게 목적이었구나... 이 남자의 욕망은 도대체 줄어들 줄을 모르는 건가.’강현우가 천천히 몸을 숙이며 다가오자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아직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잖아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내 체력이 의심스러워서?”30분 후, 윤하경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아... 그냥 입 다물걸.’그녀는 지친 숨을 몰아쉬며 강현우에게 간신히 외쳤다.“제발... 그만...”하지만 돌아온 건 더욱 깊고 거친 움직임뿐이었다.지친 몸은 강현우의 집요함에 무너졌고 그녀는 결국 녹초가 되어 침대에 축 늘어졌다.반면 강현우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윤하경은 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강현우와 함께한 밤은 그녀에게 있어 전쟁과도 같았다.어쩌면... 전쟁보다 더 치열했을지도 몰랐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현우는 조용히 침대에 누운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시선을 거두고 문을 열었다.문 앞에는 우지원이 서 있었다.“대표님. 옷, 가져왔습니다.”강현우는 말없이 옷을 받아들었다.우지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이따 백화점에 사람을 보내서, 윤하경 씨 사이즈에 맞는 옷도 추가로 구매하겠습니다.”그는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듯 눈을
윤하경의 물음에 우지원은 잠시 망설였다.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저더러 문 앞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그 말에 윤하경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헤븐’을 나와 자신의 차에 오르자, 윤하경은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긴장이 풀린 듯 핸드폰을 꺼내보니 수많은 미확인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여러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 중, 가장 많은 건 다름 아닌 유 집사였다.[아가씨, 아직 밖이에요?][집에 난리가 났어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니까요.]윤하경은 눈썹을 찌푸리며 시동을 걸었다.집에 도착한 건 거의 정오 무렵이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유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아가씨! 어젯밤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그러다 문득 그녀의 목을 바라본 유 집사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어머, 어디서 주무셨길래 모기한테 그렇게 물리셨어요?”순간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목을 가렸다.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모기 물린 자국이 아니라, 전날 밤의 흔적이었다.‘샤워할 때 미리 봤더라면 파운데이션이라도 발랐을 텐데.’그녀는 얼버무리듯 말했다.“그보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던 게 무슨 뜻이에요? 설마 임수연이 죽은 건 아니겠죠?”‘안돼. 이제 복수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쉽게 끝나버리면 재미없지.’유 집사는 2층을 슬쩍 쳐다보더니 그녀를 조용히 구석으로 이끌었다.“어젯밤에 회장님께서 지하실로 내려가셨어요. 아가씨께서 저더러 그 여자의 상태를 계속 살피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뒤따라갔는데... 문밖에서도 여자의 비명이 들릴 정도였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려 있었다.“어떻게 고문한 건지... 그 소리, 아직도 귀에 맴돌아요.”유 집사는 평생 윤씨 집안에 충직하게 일해온 사람이었다.그녀가 겪어본 가장 큰 일이라 해봤자 임수연의 날 선 말투 정도였기에 어젯밤의 광경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윤하경은 예상치 못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눈앞의 광경에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숨을 헉 들이켰다.과거의 임수연은 비록 절세미인은 아니었지만 윤씨 가문의 재력을 등에 업고 기품 있는 척할 줄은 알았다.하지만 지금의 임수연은 그저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 한 마리 죽어가는 개에 불과했다.손과 발은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옷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원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본 윤하경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그건 희열과 만족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혐오감이었다.윤하경이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경호원을 바라봤다.“나가 있어.”싸늘한 목소리가 울리자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임수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났다.그녀의 두 눈은 마치 원귀처럼 이글거렸고 윤하경을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이 개년아! 감히 여길 와?”임수연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어디를 크게 다친 건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그런 그녀를 향한 윤하경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 눈엔 동정도 연민도 없었다.과거의 윤하경은 길고양이 한 마리만 봐도 마음 아파하던 따뜻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인간을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임수연이 이를 갈며 발버둥 쳤지만 윤하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 눈빛에 오히려 임수연이 움찔했다.“너, 날 비웃으려고 온 거야?”윤하경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맞아요.”“널 죽여버릴 거야!”임수연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기어오르려 했고 그 모습은 마치 다리가 부러진 짐승 같았다.“당신도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겠죠?”임수연은 대답 대신 이를 갈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다 너 때문이야... 다 네년 때문이라고!”그 악다구니에 윤하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당신 스스로 자초한 일이에요.”그녀는 차분하게 대꾸하며 손에 든 약병을 흔들었다.“살고 싶으면, 나한테 빌어요.”임수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독기 어린 눈빛이 번뜩이며 침을 뱉었다.
어젯밤, 윤수철의 고문에 이미 만신창이가 된 임수연은 윤하경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비명을 질렀다.“윤하경, 넌 제명에 못 죽을 거야!”윤하경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제명에 못 죽을 거라고? 글쎄...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죽을지는 두고 봐야죠.”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그 작은 얼굴에 비치는 건 오로지 혐오감뿐이었다.“당신은 평생을 계산하고 꾸며가며 살아왔죠. 근데 결국은 이런 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에서 이렇게 죽어가는 꼴이라니. 비참하네요.”임수연은 몸을 떨며 윤하경을 노려봤다. 독기 어린 눈빛, 그러나 그 속엔 어딘가 흔들림이 있었다.“너... 뭐 알아낸 거야? 어서 말해, 뭘 알아낸 거냐고!”미친 듯이 소리치는 임수연에게 윤하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이윽고 윤하경은 손에 든 약을 경호원들에게 건네며 차갑게 말했다.“숨은 붙어 있게만 해.”“네, 아가씨.”경호원들이 움직이자 윤하경은 미련도 없이 지하실을 나섰다. 그리고 뒤로는 다시, 임수연의 비명이 메아리쳤다.“아가씨! 괜찮으세요?”유 집사가 달려왔다. 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었다.“네. 괜찮아요.”“그런 여자한테 괜히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가 걱정돼서...”윤하경은 대충 대답하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의자에 털썩 몸을 기대어 담뱃갑을 꺼냈다. 몇 번이나 라이터를 튕긴 끝에야 겨우 불이 붙었다.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천장을 올려다본 그녀의 눈에는 깊은 고요가 드리워졌다.윤하경은 방금까지 임수연을 그 자리에서 끝내버리고 싶었다.“그러면 나도 그 여자랑 다를 게 없어.”그녀는 낮게 속삭였다.“엄마, 나 너무 못된 걸까?”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고 방 안엔 그녀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그날 하루, 윤하경은 한 발짝도 방 밖을 나서지 않았다.한밤중.창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욕실 창 너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