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건우의 말은 의도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왜요, 오 대표님도 한번 해보고 싶으신가요?”순간 윤하경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어젯밤? 아가씨? 그럼 어젯밤, 강현우가 다른 여자랑 있었다는 말인가?’숨이 턱 막혔지만 곧 윤하경은 정신을 다잡았다. 애초에 그와 자신은 명확하게 서로 필요해서 얽힌 사이였을 뿐인데 자기가 이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긴 한가?윤하경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으며 애써 웃음을 되찾았지만 그 미소는 더 이상 진심이 담긴 웃음은 아니었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두 분 다 이렇게 기분이 좋으신데... 제가 구경 좀 하면 안 될까요? 한번 붙어보시는 건 어때요?”오건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좋죠. 강 대표님은 어떠신가요?”강현우도 짧게 웃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하게 오건우를 꿰뚫고 있었다.“오 대표님의 제안이라면 응하지 않을 수 없죠.”두 남자의 눈빛 사이에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그 기운을 느낀 윤하경은 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럼 말을 고르시죠. 하경 씨도 같이 가시죠?”오건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하경 씨의 안목이 남다르시던데 이번에도 도와주시면 제가 이기는 건 시간문제 아닐까요?”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운 좋게 한 번 맞힌 거예요. 이번엔 패스하겠습니다. 두 분 먼저 가세요. 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가볍게 입꼬리를 올린 뒤, 그녀는 조용히 돌아섰다.강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고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서 있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오건우가 익살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강현우는 눈빛이 차가워지며 피식 웃었다.“가시죠, 오 대표님.”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발을 옮겼다.윤하경은 혼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애초에 강현우와 어떤 미래가 있을 거란 기대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어젯밤 그가 다른 여자와 있었다는 걸 직접 들으니 가슴이 뻐
“쳇, 누가 알아.”“내 생각엔 강현우 쪽일 듯.”“그럼 난 오건우에 건다. 2천만. 뱅커는 누구?”“내가 할게!”그렇게 불과 몇 분 만에 현장에서 즉석 내기가 시작됐다.윤하경은 흘깃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두 남자의 승부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장난처럼 시작된 말타기였지만 지금은 마치 서로 절대 지지 않겠다는 오기처럼 느껴졌다.심지어 윤하경은 오건우의 말이 강현우 쪽으로 일부러 들이받으려는 걸 목격했다.그 순간, 심장이 목까지 뛰어올랐다.하지만 다행히도, 강현우는 노련하게 방향을 틀며 매끄럽게 피했고 오히려 더 빠르게 가속해 결승선을 향해 달려갔다.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강현우가 간신히 반 마신 정도 앞서고 있는 상황이고 결승선까진 이제 몇십 미터 남짓했다.윤하경의 손은 어느새 앞의 울타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10, 9, 8... 3, 2, 1!”“강현우가 이겼다!”“내가 이겼어!”강현우에게 걸었던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모두가 들떠 있었지만 윤하경은 오히려 그 순간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강현우가 이기든 지든,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강현우와 오건우가 말을 몰고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오건우가 먼저 말에서 내려 웃으며 말했다.“생각보다 강 대표님, 말도 잘 타시네요. 사업뿐만 아니라 말솜씨도 대단하신데요?”강현우도 말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지만 여전히 표정은 여유로웠다.“오 대표님도 만만치 않으셨죠.”윤하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강현우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축하한다고 짧게 말했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오 대표님, 오늘 계약 얘기하신다더니... 서명은 하실 건가요?”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오건우는 그녀의 바람을 무시하듯 시계를 보며 말했다.“마침 점심시간이네요. 밥 먹으면서 얘기하죠.”당장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는 엄연히
오건우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하경 씨, 너무 마음에 담지 마세요. 저는 그저 파트너 입장에서 선의로 조언한 것뿐입니다.”그 말에 윤하경은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마치 본인이 대단한 호의라도 베푼 사람인 양 굴다니.윤하경도 계약서를 받아 자기 이름을 또박또박 써넣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 대표님. 일과 관련된 부분은 저희 한빛 그룹에서 최선을 다해 협력할 겁니다.”그리고 살짝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조용히 덧붙였다.“하지만 그 외의 사적인 일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자신이 너무 나선 거 아니냐는 말을 에둘러 한 것이었지만 오건우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윤하경은 순간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마침 그때, 강현우가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고 말없이 자리에 앉아 윤하경을 바라봤다. 그 시선엔 도무지 무슨 감정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 오건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계약 세부 조율은 다음에 우리 팀끼리 별도로 회의 잡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시죠.”오건우가 나간 후, 윤하경도 자리를 뜨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손목을 확 낚아챘다.다음 순간, 그녀는 그대로 따뜻한 품에 안겨버렸고 그 품의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강현우였다.“놔요.”윤하경은 불쾌한 얼굴로 강현우를 올려다보며 말했고 강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물었다.“안 친하다고?”그제야 윤하경은, 아까 오건우와의 대화를 강현우가 문밖에서 들었단 걸 눈치챘다.그의 눈빛이 자신을 향해 매섭게 꽂히자, 괜히 눈길을 피하게 됐다.“그럼 말해봐. 내 몸 중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데가 어디야? 좋은 기회니까, 다시 자세히 알아보자고.”“...”윤하경은 말이 막혔다.강현우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이곳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강현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지만 윤하경은 미칠 듯이 창피했다.“놔요! 당장 내려놔요!”그녀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소리쳤다.이런 꼴을 남들이 보면 강현우는 바람기 많은 남자로 비칠 것이고 자신은 뭐가 될지 뻔했다.아무래도 아까 말이 너무 심했나 보다. 강현우는 얼굴이 새까맣게 굳어 있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거칠기 그지없었다.그녀를 차 뒷좌석에 던져 넣을 때는 문에 머리를 부딪칠 뻔했다.막 뭐라 하려던 찰나, 강현우가 그대로 따라 타더니 굳은 얼굴로 운전석의 민진혁에게 출발해라고 냉정하게 명령했다.윤하경은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강현우를 쳐다봤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의 차가운 분위기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고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잠시 후, 강현우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차 안은 곧 연기로 가득 찼다. 윤하경은 아무 생각 없이 숨을 들이쉬다가 그대로 기침이 터졌다.그녀의 그런 모습을 본 강현우는 뜻 모를 표정을 짓더니 느긋하게 웃었고 그 웃음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싫어?”그가 갑작스레 물었다.윤하경이 대답하기도 전에, 강현우가 불쑥 몸을 기울였다. 남자의 향수 냄새와 담배 연기가 뒤섞여 윤하경의 코를 파고들었다.그녀는 당황해서 몸을 움찔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에게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길고 날렵한 손가락으로 담배를 집은 채, 그는 갑자기 그녀의 입술을 물고 들어왔다.입 안 가득 밀려드는 담배 연기에 윤하경은 숨이 막혔다.기침을 하려 했지만 강현우는 놓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고 거칠게, 그녀의 입안을 훑었다.도저히 밀쳐낼 수도 없었고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강현우는 원래 이런 쪽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사람이었지만 이번엔 분명 어딘가 달랐다. 입술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분노, 감춰지지 않았다.“으응... 그만... 하...”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그녀의 거절을 막듯 입을 더 세게 눌렀고 오히려 도발처럼 느껴졌는지 더 격해
차고 안은 휑하고 조용했다. 그런 공간 속에서 남자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윤하경의 귓가를 울렸다. 그녀는 별생각도 없이 울컥한 감정으로 강현우의 어깨를 있는 힘껏 깨물었지만 바로 후회했다.강현우의 어깨는 말도 안 되게 단단했고 그가 아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이가 먼저 아팠다.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강현우는 전혀 조심성 없이 윤하경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침대 매트리스가 좋아서인지 다행히 아프진 않았다. 그런데도 괜히 억울한 감정이 올라와, 눈시울이 붉어졌다.이런 관계에서 자신과 강현우는 절대 평등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이 아팠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으며 비웃듯 말했다.“왜, 오건우한테 손 내밀고 나니까 이제 나랑 있는 게 서러워졌어?”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그 속에 담긴 위협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그런 사이 아니에요.”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촉촉한 눈으로 강현우를 바라봤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목을 한번 꿀꺽 삼켰다.“그래? 근데 왜 걘 너 입에서 내가 낯선 사람처럼 들리냐. 오건우, 마음에 들어? 다음은 그쪽 라인에 서보려고?”비아냥거리는 눈빛, 그녀를 조롱하는 말투.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결코 지지 않겠다는 듯 강현우를 노려봤다.“그런 적 없어요.”‘네가 다른 여자랑 밤을 보냈잖아. 왜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해?’하지만 그건 절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었다.이 불균형한 관계에서 강현우는 어떤 말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아니었다.기껏해야 키우는 어장 속의 한 마리 물고기일 뿐인 질투할 자격조차 없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턱을 더 세게 움켜쥐며 비꼬듯 말했다.“그래?”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그의 어조엔,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리고 바로, 또다시 입술이 덮쳐졌다.윤하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강현우는 한 손으로 그녀를 쉽게 끌어당겨 거리를 없앴다.“하지 마...”그녀의 미약한 저항은, 결국 아무 의미도 없었고 참다못한
강현우는 별다른 표정도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한번 흘겼다.“꺼져.”윤하경은 그의 차가운 눈빛에 숨이 턱 막혔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강현우는 벌써 성큼성큼 방을 나가버렸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하경은 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지만 그녀가 본 건 이미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뿐이었다.아직 방을 나가지 않은 민진혁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가며 혀를 찼다.“하경 씨, 진짜 간이 크시네요.”그 말은 아마도 아까 강현우를 깨문 일에 대한 것이겠지.윤하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말한... 어젯밤 그 여자, 무슨 일이었어요?”민진혁은 걸음을 멈추다 말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누가 사장님 암살하라고 여자를 보냈는데 대표님이 한눈에 간파했죠. 그나저나 난 이만 가봐야겠어요. 대표님 기분 더 상하기 전에.”민진혁은 말을 끝내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남겨진 윤하경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결국 자신이 오해했던 거였다. 어젯밤에 있었던 그 일은 여자 문제가 아니라 암살 함정이었던 거다.빌어먹을 오건우가 얼핏 흘린 그 애매한 말투 때문에, 괜히 오해했다.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강현우는 이미 화가 단단히 난 눈치였고 이 상태로 두면 일이 더 꼬일 수 있었다.윤하경은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결국 마음이 심란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사과해야 하나...?’하지만 그 강한 자존심에 메시지 한 통으로는 통하지 않을 사람이다.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사이,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다.윤하경은 그냥 그대로 강현우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이대로 내버려뒀다간, 진짜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배달앱을 켜 이것저것 재료를 주문하고 영상을 보며 몇 가지 요리를 배워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하지만 저녁을 다 차려도 강현우는 돌아오지 않았다.늦을 줄은 알았지만 너무 늦는 게 마음에 걸려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엔
“그럼 말해보세요. 어떻게 해야 용서해 주실 건데요?”윤하경은 강현우라는 사람은 앙심 품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오늘 일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몰랐다.그런데 강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이래도 아직 화 안 풀리셨어요? 그럼... 한 번 깨물어보시는 건 어때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허, 역시 여자들은 변덕스럽다더니... 오늘 아주 제대로 봤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툭 던졌다.“가자. 나 올라가서 쉴 거니까.”강현우의 말투는 지나치게 차가웠다.윤하경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가 곧 스스로 이해했다.강현우 같은 자존심 강한 남자에게 그런 식으로 퇴짜를 놓았으니 지금쯤 쫓아내지 않는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강현우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올라갔다.윤하경은 한참을 서 있다가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천천히 뒤따라 계단을 올랐다.그의 방문은 닫히지 않은 채 열려 있었고 침대는 비어 있었고 욕실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가 샤워 중인 것 같았다.윤하경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옷을 벗은 후 욕실 문을 열었다.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고 강현우는 샤워기 아래에서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물줄기는 조각상 같은 그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며 은근히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는 윤하경이 다가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물소리가 커서였고 또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윤하경의 작고 따뜻한 몸이 그를 뒤에서 살짝 안았을 때야 그는 눈을 떴고 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오빠, 이제 화 좀 푸세요... 네?”윤하경의 말투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보통 남자라면 웬만해선 이겨내기 어려운 일부러 애교를 부리는 목소리였다.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그녀는 그 앞으로 돌아와 그를 올려다봤다.그보다 어깨 하나는 작은 키로 인해 자
욕망의 전장이 욕실에서 침대로 옮겨졌을 때 윤하경은 이미 기운이 다 빠져 있었다.처음에는 그럭저럭 응해주던 그녀였지만 나중엔 완전히 힘이 풀려버려서 강현우가 어떻게 하든 그냥 이불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사실 언제 끝났는지도 잘 몰랐다.다만 기억나는 건 뜨겁고 묵직한 몸이 밤새도록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렇게 지독하게 휘둘린 밤이었지만 오히려 그날 밤 윤하경은 유난히 편안하게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강현우보다 먼저 눈을 떴다.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를 돌아보려는 순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남자의 팔이 다시 허리를 감아 그녀를 끌어당겼다.강현우의 몸은 여전히 뜨겁고 묵직했다.딱히 움직인 것도 아닌데 그녀는 허리 뒤쪽에서 단단하게 눌려오는 감촉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곧이어, 강현우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움직이지 마.”그러자 윤하경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지금 이 상태에서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어젯밤의 2차전이 벌어질지도 몰랐다.그럴 기력은커녕 이미 온몸이 뻐근해서 제 몸 하나 가누기도 벅찼다.결국 그녀는 얌전히 강현우 품 안으로 몸을 더 말아 넣었다.꼼짝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안기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불안했다.‘진짜 화가 풀린 걸까?’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강현우가 드디어 깨어났다.몸을 움직이진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눈을 떴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끼자 윤하경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윤하경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났다.그런 그녀를 본 강현우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또 무슨 꿍꿍이야?”윤하경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대표님, 이제는... 화 안 나신 거죠?”그러자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윤하경의 턱을 잡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끝이 턱선을 따라 닿았고 그녀는 조금 아픈 듯 눈을 찌푸렸다.“아야...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