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까지만 해도 갑판은 관광객들로 북적였지만 지금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멀찍이서 윤하경은 강현우가 갑판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눈앞에 매달린 누군가를 담담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녀는 눈 부신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어 확인했더니 매달려 있는 건 다름 아닌, 강현석이었다.강현우의 등 뒤로는 용천수를 비롯해, 겉보기에 전투 능력이 상당해 보이는 남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역시...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던 거네.’“밖에선 강 대표가 무섭고 냉정하단 말 많더니 자기 친형한테까지 저럴 줄은 몰랐네. 근데 말이야, 강 대표 생각엔... 하경 씨 목숨 하나가, 네 친형이랑 바꿀 만큼 값어치가 있냐?”이명한의 비웃음 섞인 말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렸다.그 시선이 향한 곳엔, 윤하경이 붙잡혀 이명한에게 끌려오는 모습이 있었고 순간 강현우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갔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강현우는 태연하게 몸을 의자에 기대더니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느긋하게 말했다.“그래서 걔 하나로 너희 둘 목숨값이 해결될 거라 생각한 거냐?”강현우는 짙고 깊은 눈동자로 이명한을 째려보았고 이명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네가 어떤 놈인진 잘 알아. 네 형 목숨도 거리낌 없이 버리는 놈인데 하물며 나 같은 건 뭐 대수겠냐. 근데 말이야, 강현우. 나도 만만한 놈은 아니거든. 그동안 내가 너한테 어떤 더러운 일들까지 해줬는지, 기억 안 나냐? 이젠 됐어. 더는 못 하겠다.”이명한은 윤하경을 거칠게 끌어다가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댔다.“이제 선택해. 이 배, 내 앞으로 넘기고 끝내든가... 아니면 이 여자랑 나랑 여기서 같이 끝이야.”그 말에 윤하경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고 이명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봤다.“뭐가 웃겨?”“당신이요.”윤하경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강현우 같은 남자가 저 때문에 뭔가를 포기할 거라 생각하세요? 전 그냥 그 사람한텐 스트레스 풀 데가 필요해서 두는 여자예
“강현우, 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야?”이명한이 이를 갈며 소리치더니 갑자기 손에 든 총을 들어 강현우를 겨눴다.강현우가 눈을 살짝 좁히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옆에 서 있던 용천수가 재빠르게 손을 들어 총을 쐈다.탕! 탕!이명한의 총은 빗나갔지만 용천수의 총알은 정확히 이명한을 꿰뚫었다.그런데 그 총알은 이명한만 맞춘 게 아니었고 그 앞에 서 있던 윤하경도 함께 명중했다. 이명한을 맞추려면 당연히 먼저 앞에 있는 그녀를 지나야 했으니까.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벌어졌고 윤하경은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총에 맞고 말았다.그녀가 통증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을 땐, 어깨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고 있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순식간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그런 그를 향해 윤하경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의 표정은 분명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윤하경은 용천수가 강현우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명령하지 않았는데 감히 총을 쐈을 리가 없었다.통증이 너무 심해 더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고 총을 맞은 이명한은 여전히 윤하경을 놓지 않았다.오히려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더니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갑판 아래로 몸을 날렸다.순간, 차가운 바닷물이 그녀의 온몸을 덮쳤고 바로 그 순간, 강현우의 절규가 들렸다.“윤하경!”그녀는 비웃듯 속으로 중얼거렸다.‘이제 와서?’갑판 위에서 강현우는 그대로 난간을 넘어 바다로 뛰어들려 했지만 용천수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대표님! 지금 근처에 상어 떼 있습니다. 위험합니다!”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용천수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고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용천수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누가 총 쏘랬어.”용천수는 멍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저, 저는...”하지만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그대로 갑판에서 바다로 몸을 던졌다.“이제 어떻게 해요?”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당황하며 용천수를 바라봤고 잠시 숨을 골랐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리자, 강현우의 차갑고 날카로운 얼굴이 불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왜 당신이죠?”강현우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고 물이 아직도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그는 손에 나무꼬챙이를 들고 있었고 윤하경의 목소리를 들은 뒤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깼어? 내 얼굴 봐서 실망했냐?”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방금 전 총에 맞은 게 그의 사람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올라와 결국 말없이 몸을 돌려 다시 누웠다.강현우는 나무꼬챙이를 불가에 꽂았다. 그제야 윤하경은 그 위에 통통한 생선 두 마리가 꿰어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바다에 빠졌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는 시끄럽게 꼬르륵 소리를 냈고 윤하경은 민망한 듯 멈칫하더니 이내 등을 돌려 강현우에게서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몸을 옆으로 돌리자마자 어깨의 상처가 바닥에 눌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도록 이를 악물고 참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시 반듯이 누웠다.강현우는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댔다.“다행이네. 열은 없어.”동굴 안은 희미한 불빛만이 깜박이고 있었고 강현우는 빛을 등지고 서 있었기에 그의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총을 쏘라 해놓고 왜 구한 거예요?”윤하경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바다에 빠지기 직전, 그녀는 이미 죽을 준비가 돼 있었다. 엄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윤수철에게 사랑받은 기억도 없다. 어쩌면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고 오히려 윤수철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이 거슬릴 일 없다고 기뻐할지도 몰랐다.그런데도 운명은 그녀를 이렇게 다시 살려놓았다.그리고 그 손길의 주인이 강현우라는 건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그 사람이, 대체 왜 바다로 뛰어든 걸까.생각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찰나, 강현우의
윤하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지금 여기가 어디죠?”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무인도.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몰라.”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그, 그럼 현우 씨 사람들은 우리 위치를 알아낼 수는 있어요?”강현우는 고개를 한 번 더 저으며 불가에 장작을 덧댔다.“모르지.”그의 말은 너무도 담담했고 전혀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마치 진짜로 바캉스를 즐기러 온 사람처럼 여유롭기까지 했다.그때, 어깨의 상처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스치며 올라왔고 윤하경은 옷깃을 살짝 젖혀 확인했다가 그제야 알게 되었다.이미 상처는 붕대로 감겨 있었고 그 붕대는 다름 아닌 강현우의 흰 셔츠를 찢어 만든 것이었다.윤하경은 몸에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말라 있었고 속옷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 말인즉, 강현우가 그녀의 젖은 옷을 갈아입히며 말려준 것이다.그 순간 떠오른 장면에 얼굴이 달아오르며 울컥했다.“현우 씨가 제 옷 벗긴 거예요?”강현우가 다가와, 짙은 눈매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한쪽 들어 올렸다.“여기서 나 말고 누가 있겠어?”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냥 눈을 감고 자버리자고 생각했는데 강현우가 그녀에게 외투를 걸쳐줬다.그리고 다음 순간, 강현우가 바로 옆에 누웠다.남자의 체온이 너무 가까웠고 숨결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가 눕는 순간, 윤하경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긴장되어 굳어버렸고 조심스럽게 몸을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움직이면 피 나. 과다 출혈로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누워.”강현우는 여전히 무심한 말투였지만 윤하경은 그의 말 속에서 미묘한 걱정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그녀는 결국 다시 누웠지만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다. 밖에선 거센 바람과 폭우, 번개가 이어졌고 그 소리를 듣다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현우 씨.”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우리 여기서 죽는 거 아니죠?”유람선에서 떨어질 때, 주변에 어떤 섬도 보이지 않았고 여기가
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가, 강현우의 눈이 살짝 붉게 충혈된 걸 보고서야 자신이 꿈꿨다는 걸 알아차렸다.강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악몽 꿨어?”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고 익숙하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열은 내렸네.”그러곤 침대 옆 버튼을 눌렀다. 곧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와 윤하경의 상태를 점검했고 진료를 마친 뒤 강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강 대표님, 하경 씨의 열은 다 내렸습니다. 상처 부위만 잘 관리해 주시면 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강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도 마침내 꿈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고 말을 꺼내기도 전, 병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대표님,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들어오시랍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바쁘다고 전해.”그러자 문밖에서 우지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이번에도 안 오시면 박씨 가문과의 혼인을 본인이 직접 발표하시겠다고 하십니다.”그 말에 강현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고 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창가에는 햇살이 반짝였고 나뭇잎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강현우는 잠시 시선을 떨구더니 조용히 말했다.“여기서 잘 있어. 금방 올게.”윤하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강현우는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윤하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박씨 가문과의 혼인이라니 이제 정말 나를 놓아주는 걸까.’강현우가 떠난 병실엔 그녀의 숨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고요함은 오히려 두려울 정도였다.그때, 병실 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우지원은 슬쩍 웃었다.“혹시... 배고프실까 봐 주방에 부탁해서 삼계탕 준비했어요.”윤하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우지원은 조심스럽게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정성스럽게 놓고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단지 삼계
윤하경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말끝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명확했다.우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멈칫하다가 결국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더는 붙잡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제가 너무 무례했네요. 솔직히 말해서 저라도 누가 총을 겨눴다면 그렇게 용서 못 했을 거예요. 이건 강 대표님이 직접 주방에 부탁해서 끓인 거예요. 깨어나면 꼭 먹이랬거든요. 그래도... 조금만 드시고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윤하경은 여전히 창밖만 바라봤고 삼계탕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강씨 저택.강현우가 도착했을 때, 거실 중앙에 앉아 있던 강호석은 지팡이를 손에 짚은 채 무표정하게 그를 맞이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들것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강현석이 누워 있었다.강호석이 입을 떼기도 전에, 강현우가 먼저 능청스럽게 소리를 냈다.“어이쿠, 이게 누구야? 둘째 형님 아니셔? 형, 누워 있는 모습이 아주 예술인데? 얼굴도 안 보여서 못 알아볼 뻔했네.”붕대에 칭칭 감겨 눈만 간신히 드러난 강현석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입을 열 힘조차 없는 상태라, 겨우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으로 강호석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뿐이었다.강호석은 무겁게 지팡이로 카펫을 내려치며 단호하게 외쳤다.“닥쳐라.”그러고는 붉어진 눈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네가 이런 소리 할 처지냐? 네 형 저 모양 된 거, 네 짓이지?”강현우는 두 손을 천천히 들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소파에 털썩 앉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를 뗐다.“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오히려 형이 어디서 굴러떨어졌나 보죠.”그 얄미운 표정에 강호석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고 수염마저 부들부들 떨렸다.“좋아, 사람 불러와.”곧 거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강현석의 수하로 보이는 그 남자는 긴장한 눈으로 강현우와 강호석 사이를 오갔다.“너, 똑바로 말해. 이 자식이
강현우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시선을 돌려 강호석을 바라봤다.“할아버지, 둘째 형은 좀 단단히 가르치셔야 할 것 같네요.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강호석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출입문 앞에 다다랐을 때, 강현우는 한 발짝 멈춰서더니 고개를 다시 돌렸다.“그리고요, 할아버지. 앞으로 결혼으로 저를 협박하지 마세요. 제 허락 없이는, 아무리 여자를 제 침대에 집어넣는다 해도 전 똑같이 다시 내쫓을 겁니다.”그 말투는 존댓말이었지만 말 속의 단 한 마디도 상대를 존중하는 기색은 없었다.오히려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속을 뒤집는 칼날 같았다.강호석은 분노로 떨리는 손을 들어 강현우를 가리켰지만 강현우는 그 손끝조차 외면한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콜록, 콜록!”그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안쪽에서 강호석의 격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우는 걸음을 멈칫했지만 이내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강호석의 집을 빠져나오던 길, 멀리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어머니 한선아였다.한선아는 그를 보자마자 다급히 달려왔다.“너... 너 또 네 할아버지 화나게 한 거 아니지? 아까 하인들 말로는 강현석 돌아왔을 때 어찌나 화가 나 있던지... 너랑 연관돼 있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강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엄마랑은 상관없어요. 별일 없으면 엄마는 그냥 엄마 별장에 계세요. 본가엔 너무 자주 오지 마시고요.”“내가 이 집에 안 오면 누가 널 챙기냐?” 한선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겉으론 조용해 보여도, 이 집 안에 뭔 속셈 없는 사람이 있겠어? 내가 안 지켜보면 넌 그 인간들한테 뼈도 못 추려. 너희 아버지 때도 그랬고.”“됐어요.”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곧게 바라보았다.“더 하실 말씀 없으면 전 가보겠습니다. 할 일 남았어요.”그 말에 한선아는 말문을 닫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강현우의 팔을 붙
강현우는 박소희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잔뜩 기대가 담겨 있었지만 그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기대를 박살 냈다.“바빠요.”말을 툭 던지더니 한선아가 뭐라고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뜰을 빠져나갔다.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향할 때쯤, 그는 예상치 못하게 박소희가 따라온 걸 보고 잠깐 멈칫했다.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가 윤하경과 겹쳐 보이는 순간, 그는 눈을 찌푸렸다.박소희는 숨을 몰아쉬며 조수석 문을 확 열고 들어앉았다.강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무표정하게 말했다.“내려.”“싫어.” 박소희는 억지로 입술을 꾹 다물며 버텼다.“강현우, 나도 박씨 가문 딸이야. 널 위해 많이 변했다고!”그녀가 말한 ‘변화’란, 옷차림부터 말투까지 전부 윤하경을 따라 하기 시작한 걸 의미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훑어보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안 내릴 거야?”박소희는 오히려 더 강하게 안전벨트를 매며 버텼다.“안 간다니까? 이모가 오늘은 너랑 꼭 저녁 같이 먹으라고 했어.”강현우는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좋아.”다음 순간, 차는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도로 위를 질주했다.박소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라 안전벨트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좀 천천히 가면 안 돼?”하지만 강현우가 그녀 말을 들을 리 없었다.그는 오히려 더 깊게 액셀을 밟았고 차는 도로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라타며 시속 200km를 훌쩍 넘어섰다.박소희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안 돼! 너무 빨라! 세워! 멈춰!”강현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빛조차 미동이 없었다.속도는 멈출 기미 없이 계속 올라가고 박소희는 입을 틀어막은 채 얼굴이 창백해졌다.차 안에서 토할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이 남자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 필사적으로 참았다.강현우는 옆에서 숨죽이는 박소희의 모습을 흘끗 보더니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며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마침내 도로 한켠에 차를 세우자, 박소희는 그대로 문을 열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