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우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시선을 돌려 강호석을 바라봤다.“할아버지, 둘째 형은 좀 단단히 가르치셔야 할 것 같네요.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강호석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출입문 앞에 다다랐을 때, 강현우는 한 발짝 멈춰서더니 고개를 다시 돌렸다.“그리고요, 할아버지. 앞으로 결혼으로 저를 협박하지 마세요. 제 허락 없이는, 아무리 여자를 제 침대에 집어넣는다 해도 전 똑같이 다시 내쫓을 겁니다.”그 말투는 존댓말이었지만 말 속의 단 한 마디도 상대를 존중하는 기색은 없었다.오히려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속을 뒤집는 칼날 같았다.강호석은 분노로 떨리는 손을 들어 강현우를 가리켰지만 강현우는 그 손끝조차 외면한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콜록, 콜록!”그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안쪽에서 강호석의 격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우는 걸음을 멈칫했지만 이내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강호석의 집을 빠져나오던 길, 멀리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어머니 한선아였다.한선아는 그를 보자마자 다급히 달려왔다.“너... 너 또 네 할아버지 화나게 한 거 아니지? 아까 하인들 말로는 강현석 돌아왔을 때 어찌나 화가 나 있던지... 너랑 연관돼 있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강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엄마랑은 상관없어요. 별일 없으면 엄마는 그냥 엄마 별장에 계세요. 본가엔 너무 자주 오지 마시고요.”“내가 이 집에 안 오면 누가 널 챙기냐?” 한선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겉으론 조용해 보여도, 이 집 안에 뭔 속셈 없는 사람이 있겠어? 내가 안 지켜보면 넌 그 인간들한테 뼈도 못 추려. 너희 아버지 때도 그랬고.”“됐어요.”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곧게 바라보았다.“더 하실 말씀 없으면 전 가보겠습니다. 할 일 남았어요.”그 말에 한선아는 말문을 닫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강현우의 팔을 붙
강현우는 박소희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잔뜩 기대가 담겨 있었지만 그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기대를 박살 냈다.“바빠요.”말을 툭 던지더니 한선아가 뭐라고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뜰을 빠져나갔다.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향할 때쯤, 그는 예상치 못하게 박소희가 따라온 걸 보고 잠깐 멈칫했다.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가 윤하경과 겹쳐 보이는 순간, 그는 눈을 찌푸렸다.박소희는 숨을 몰아쉬며 조수석 문을 확 열고 들어앉았다.강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무표정하게 말했다.“내려.”“싫어.” 박소희는 억지로 입술을 꾹 다물며 버텼다.“강현우, 나도 박씨 가문 딸이야. 널 위해 많이 변했다고!”그녀가 말한 ‘변화’란, 옷차림부터 말투까지 전부 윤하경을 따라 하기 시작한 걸 의미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훑어보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안 내릴 거야?”박소희는 오히려 더 강하게 안전벨트를 매며 버텼다.“안 간다니까? 이모가 오늘은 너랑 꼭 저녁 같이 먹으라고 했어.”강현우는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좋아.”다음 순간, 차는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도로 위를 질주했다.박소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라 안전벨트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좀 천천히 가면 안 돼?”하지만 강현우가 그녀 말을 들을 리 없었다.그는 오히려 더 깊게 액셀을 밟았고 차는 도로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라타며 시속 200km를 훌쩍 넘어섰다.박소희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안 돼! 너무 빨라! 세워! 멈춰!”강현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빛조차 미동이 없었다.속도는 멈출 기미 없이 계속 올라가고 박소희는 입을 틀어막은 채 얼굴이 창백해졌다.차 안에서 토할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이 남자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 필사적으로 참았다.강현우는 옆에서 숨죽이는 박소희의 모습을 흘끗 보더니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며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마침내 도로 한켠에 차를 세우자, 박소희는 그대로 문을 열
강현우는 윤하경 눈에 비친 당황한 기색을 보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상처 상태 좀 보려는 거야. 의사 말로는 오늘 약을 갈아줘야 한대. 내가 지금 뭘 하려는 줄 알았는데?”“...”‘괜히 머쓱해지는 건 또 뭐지?’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억지를 부리듯 말했다.“나야... 당연히 그거 보려고 그러는 거 알죠.”“그래?”강현우는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렸고 그 눈빛에 윤하경은 괜히 더 불편해졌다.강현우의 표정은 명백했다. 방금 자기가 보여준 반응이 얼마나 오해였는지, 대놓고 비웃는 눈빛.윤하경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그런 건... 원래 의사가 해주는 게 더 낫지 않나요?”“의사?”강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물어봐. 이 병원에서 누가 감히 네 약을 갈아주겠나.”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맞다. 여긴 강현우의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수술까지 직접 시켜놓은 판에, 약 바꾸는 걸 남한테 맡길 리가 없고 게다가 자신이 지금 ‘그의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상, 감히 강현우를 거스를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알겠어요.”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작 대답하곤, 체념한 듯 감싸고 있던 담요를 내려놓았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옆눈질로 흘깃 보더니 얌전히 순순히 따르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셔츠 단추를 풀었다.그의 손끝이 마지막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자, 윤하경은 어깨의 통증에 그대로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더니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낮게 신음이 흘렀다.강현우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고손놀림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바꿨다.하지만 피범벅이 되어 살점에 달라붙은 붕대를 떼어내는 순간, 윤하경의 얼굴은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창백해졌다.원래 피부가 하얀 데다, 평소에도 어깨가 드러나는 슬립 원피스를 즐겨 입던 윤하경.하지만 지금은 붉은 핏자국과 상처들로 뒤덮인 어깨가 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강현우는 잠시 그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약통을 챙겨왔
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강현우의 위압적인 기세에 입을 열었다.강현우는 그제야 미간을 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이고. 착해라.”칭찬처럼 들리지만 꼭 반려동물을 다루듯 한 말투였다.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며 말했다.“그만하셔도 돼요. 혼자 먹을게요.”하지만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흘깃 보더니 다시 죽을 떠서 그녀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그 한 숟가락으로 그의 대답은 충분했다.이 공간에서 그녀는 그저 보호를 받는 입장이었고 더는 고집부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윤하경은 묵묵히 한입, 또 한입 죽을 삼켰다.속이 좀 채워지자,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고 강현우를 향한 눈빛에 살짝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강현우는 그 시선을 느끼고 죽 그릇을 내려놓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왜 그렇게 봐?”“아, 아니에요.”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강현우 같은 사람에게서 이렇게 정성껏 챙김을 받을 줄은 몰랐다.늘 남을 깔보는 듯한 싸늘한 얼굴, 세상 모든 게 다 귀찮다는 태도, 그런 남자가, 이렇게 다정할 줄이야.하지만 윤하경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이건 분명 자신을 유람선에 데려간 건 죄책감이고 이 모든 건 그저 ‘미안함’에서 비롯된 거러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은 찰나, 밖에서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분명히 말했을 텐데. 방해하지 말라고.”그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문 너머,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다시 누군가의 간절한 음성이 들려왔다.“강 대표님, 제발... 용천수한테 기회를 한 번만 주세요.”노한성의 목소리에 윤하경은 순간 시선을 돌려 강현우를 바라봤다.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고 굳게 다문 턱선이 꽤 날카롭게 드러났다.“대표님, 용천수 지금 거의 숨만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대로 두면 정말 죽습니다. 제발... 지난 세월 대표님 곁에서 충성했던 걸 생각해 주세요.”“나가.”강현우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고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윤하경의 말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너, 용천수를 위해서 나서는 거야?”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그 사람 상태가 어떤지, 제가 직접 보고 싶어요.”그녀는 조심스레 강현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가도 될까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꽤 오랜 침묵 끝에 입술을 누르고 말했다.“정말?”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는 입꼬리를 얕게 누르며 말했다.“좋아. 하지만 나중에 울어도, 책임은 못 져.”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그 순간엔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곧, 예전에 구지호가 끌려 들어갔던 그 방에 발을 들이고서야 강현우의 말뜻을 완전히 깨달았다.이미 최악의 상황을 마음속으로 그려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피투성이가 된 채 고문당한 용천수의 모습은 구지호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고 무의식적으로 강현우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엔, 어느새 두려움이 번지고 있었다.그녀는 사실 노한성이 말한 고통이 어느 정도는 과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래도 용천수는 강현우의 직속 아니었나, 설마 여기까지 했을까 했는데 지금 보니 노한성의 말엔 과장이 없었다.온몸엔 성한 곳이 하나도 없고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였고 윤하경과 강현우가 방에 들어왔는데도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만약 가슴이 미세하게나마 오르내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문득, 강현우가 예전에 배신하면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땐 그냥 으름장인 줄 알았지만 지금은 농담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만약 자신이 그를 배신한다면 이렇게 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걸.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에 얹은 손끝으로 그 떨림을 느꼈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래서 내가 오지 말랬잖아.”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조용히 숨을 들
“넌 참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을 살리더라.”강현우가 말하자 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내리깔고 단호하게 말했다.“전, 사람 살린 적 없어요. 그냥 복수했을 뿐이에요.”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용천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한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윤하경은 원수를 반드시 갚는 사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은혜 역시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노한성이 끝까지 자신이 숨은 위치를 말하지 않고 죽을 각오까지 했던 일은 분명 윤하경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오늘,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서서 용천수를 위해 부탁했다면 그녀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쉽게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우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돌아서려던 강현우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저기...”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저...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지내면 안 될까요?”몸이 다친 상태라서인지 이번엔 강현우가 유난히 인내심이 있었다.“그래? 그럼 어디서 지내고 싶은데?”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제... 원래 살던 아파트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어깨를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몸 상태로 거기 가겠다고? 죽고 싶은 거야?”말은 안 했지만 뉘앙스는 절대 안 된다는 뜻이었다.다친 몸으로 혼자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질 사람도 없으니까.강현우의 거절에 윤하경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그런 모습을 본 강현우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꼭 여기 아니어도 되긴 해.”그 말에 윤하경의 눈이 반짝이며 되살아났다.“정말요?”“응.”강현우는 짧게 대답한 뒤, 말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서 들어 올렸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윤하경은 깜짝 놀라 그의 목을 급히 감싸며 물었다.“어디 가는 거예요?”“여기 싫다고 했잖아.”말을 마친 강현우는 그녀를 안고 차고로 내려갔고 차에 태워 어딘가로 향했다.윤하경은 그가 아파트로 데려다주는 줄 알고 기대했지만 도착한 곳은 예전에 잠
“여보세요.”어두운 밤이라 그런지, 강현우의 목소리에 묻은 그 차가움이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그 여자가 돌아오기 싫대? 난 지금 자리를 뜰 수가 없어.”윤하경은 그 말을 들으며 강현우가 자신을 힐끗 쳐다보는 걸 느꼈고 눈을 살짝 뜬 채 상황을 살펴보다, 바로 다시 감아버렸다. 괜히 들은 척도 못 할 상황인데 마치 남의 전화 몰래 엿들은 것처럼 괜히 민망해졌다.어둠 속에서 강현우는 단단히 이를 악물었고 날카롭게 뻗은 턱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한참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짧게 말했다.“잘 지켜봐. 그래.”전화를 끊은 강현우는 다시 이불 안으로 돌아왔지만 윤하경은 그가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고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예 다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윤하경도 눈을 천천히 떴다.‘꽤 중요한 일이었나 보네.’강현우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좀처럼 속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 이토록 신경을 쓰는 모습은 드문 일이었다.그만큼 이번 일은 심상치 않다는 뜻이었지만 그건 그녀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강현우가 방을 떠난 뒤, 묘하게 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오히려 윤하경은 더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눈을 뜨자 창가 틈새로 햇살이 살며시 비집고 들어왔다. 시간이 꽤 지나 있었고 그녀가 일어나려 할 때쯤, 강현우가 방으로 들어왔고 깊은 눈빛을 머금은 그는 곧장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며칠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워야 해. 여기서 널 돌볼 사람은 미리 배치해 뒀어. 무슨 일 있으면 우지원한테 연락해.”윤하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고 일 보러 가세요.”강현우는 이를 살짝 악물더니 낮게 말했다.“나 보고 싶으면 전화해도 돼.”“...”윤하경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방해 안 할게요.”그 말에 강현우는 눈빛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하녀가 식사를 들고 들어오자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현우 씨가 이번에 며칠 자리를 비우게 돼서요, 제가 대신 하경 씨를 돌보러 왔어요.”송시안의 말투는 참 진심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방금 전, 윤하경은 송시안이 자신을 훑어보던 날카롭고 계산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그것만 아니었어도, 송시안이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윤하경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바쁘신데 이렇게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하네요, 시안 씨. 그런데 전 정말 괜찮아요. 현우 씨에게도 전해주세요. 돌봐줄 사람 필요 없다고요.”그렇게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송시안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그녀는 수년 동안 강현우 곁을 맴도는 수많은 여자를 봐왔지만 이렇게 오래, 그리고 깊숙이 그의 곁에 머문 여자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별장까지 따로 마련해줄 정도라니.송시안은 고개를 돌려 저택을 한 번 쓱 훑었다. 그 눈빛엔 잠깐 스쳐 지나간 복잡한 감정이 있었고 곧 다시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돌아왔다.“하경 씨가 아무리 거절하셔도, 현우 씨 성격 아시잖아요. 한 번 정한 건 절대 안 바꾸는 사람이라...”그 말투만 보면 두 사람이 꽤 친밀한 사이라는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무섭기도 하고 기막히기도 하지.송시안과 강현우의 관계는 단순한 인연이 아니라는 걸 윤하경도 느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그렇다면 편하게 하세요.”송시안은 그 평온한 반응에 뭔가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하경 씨는... 궁금하지 않으세요?”꽃을 보고 있던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뭐가요? 제가요. 혹시 저랑 현우 씨 사이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전혀요.” 윤하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시안 씨가 그 얘기 하시려는 거라면 전 굳이 듣고 싶지 않아요.”그건 그녀의 진심이었다.애초에 자기와 강현우는 시작조차 불가능한 사이였다. 그러니 송시안과 무슨 관계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그 말은 듣는 사람에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