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호: “어떻게 왔어?”윤하연: “나... 나는 그냥 오빠가 여기서 생일을 보낸다고 해서 보러 왔어.”밖은 잠시 조용해지더니 윤하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지호 오빠, 미안해. 내가 오빠랑 언니 방해한 거지? 진작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윤하경은 속으로 코웃음 치며 윤하연의 가식적인 모습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하지만 구지호는 이런 수법에 잘 넘어가는 타입이라 우울했던 얼굴이 좀 풀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상관없어.”윤하경은 듣고만 있으려니 아쉬워 아예 돌아서서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마침 윤하연이 구지호에게 다가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언니는 성격이 안 좋아. 그러니 언니한테 화내지 마.”그녀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것은 그 눈이었는데 사람을 볼 때 애처로워 보였다.그래서 구지호는 결국 넘어갔다. 윤하연이 알아서 굴러들어왔으니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는 곧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키스했다.곧 문밖에서 낯뜨거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두 사람은 정신없이 키스하다가 구지호는 아예 윤하연을 안아 들고 아까 그 스위트룸으로 갔다.“안 나가고 뭐 해? 현장 잡으러 안 가?”“아니, 아직 때가 일러요.”윤하경은 무심코 작게 대답하고는 흠칫했다.그리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구지호에게 복수할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하물며 그녀는 강현우와 친하지도 않았다.그녀는 약간 짜증스럽게 강현우를 돌아보았다. 예전엔 왜 그가 이렇게 말이 많은 걸 몰랐을까?남자의 아래로 드리워진 눈매는 깊고 날카로워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윤하경은 괜히 불편해져서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저 이만 가볼게요.”하지만 그녀는 결국 나가지 못했다. 곧 남자의 큰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휘감았던 것이다.“난 말로만 하는 감사는 별로 안 좋아해. 감사하려면 좀 성의를 보여야지.”윤하경은 남자가 말하는 성의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우는 구지
그런데 마침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아직 완전히 정신이 들지 않은 윤하경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윽...”그녀는 머리를 문지르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강현우를 바라보았다.남자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고 그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윤하경은 강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약간 고소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이마에 붉은 자국이 생겨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미간을 찌푸리며 간단히 세수를 한 뒤, 그녀는 옷을 입은 후 욕실을 나왔다.강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도 그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가방을 들고 문 앞에 도착해서 문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다시 멈춰 서서 문구멍으로 밖을 살짝 봤다.“약혼자와 마주칠까 봐 두려워? 아니면 약혼자가 네가 다른 남자 방에서 나오는 거 볼까 봐?”강현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그는 항상 그랬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괜찮은데 입만 열면 꼭 밉상이었다.윤하경은 그냥 무시하고 밖에 아무도 없나 확인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문 앞까지 나갔다가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강현우를 돌아봤다.“강 대표님, 우리 약속했던 시간 끝났어요.”지난번에 말했던 한 달의 시간이 이미 지났기에 윤하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일깨워주었다. 강현우는 진짜 미친놈 같아서 그녀는 그를 건드린 것을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한 달의 시간이 드디어 끝나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강현우가 무슨 짓을 벌여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까 봐 정말 걱정했을 것이다.그녀는 강현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갑기 그지없는 그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나갔다.결국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에 타려는 순간, 건물에서 익숙한 두 사람이 나오는 걸 보았다.그 모습에 윤하경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못 본 척 잽싸게 차에 올라탔다.액셀을 밟고 출발하는 순간, 윤하
“하경아, 드디어 강한 측에서 프로젝트 승인했다는 연락을 받았어. 우리 업무도 이제 완료된 거야. 앞으로는 실행만 남았어.”소지연은 그녀의 책상에 기대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아직 자리에 앉지도 못한 윤하경은 소지연의 말에 놀라 멍해졌다.“언제 연락받았어?”“오전에.”소지연은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게 최종본인데, 문제없으면 바로 실행에 착수하도록 지시할게.”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래.”클럽에서 나온 뒤로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 하지만 강현우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연락도 없었다.강현우는 역시 깔끔하게 끝내는 스타일이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기쁜 일인데, 왜 자꾸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느껴지는 걸까?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소지연은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윤 대표, 이제 프로젝트도 성사됐는데 우리 축하 파티해야지? 너도 알다시피 최근 직원들도 계획 수정하느라 정말 고생 많았잖아...”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다 같이 회식해. 영수증은 재무팀에 제출하고.”소지연은 눈을 깜빡였다.“넌 안가?”윤하경은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나는 안 갈게. 내가 없어야 더 편하게 놀 수 있을 거잖아.”소지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자신의 사무실을 나갔다.윤하경은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는데 강현우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온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윤하경은 자신의 머리가 이상해져서 술로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았다.온지우는 술친구로 제격이었다.온지우를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며칠 전 그가 사업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연락했기 때문이었다.그러니 겸사겸사 그 얘기도 할 수 있었다.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온지우는 다른 사람들이랑 별장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있었다.그녀를 보자 온지우가 손을 흔들었다.“하경아, 이리 와.”윤하경은 대꾸도 안 하고 술상에 가서 술 한 병을 집어 들고 온지우한테 갔다.“오늘 왜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노 코멘트.”결국 만취한 그녀를 온지우는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별장 대문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발을 헛디뎌 비틀거렸고 온지우는 재빨리 그녀를 잡아주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됐어, 나 혼자 올라갈 수 있어. 늦었으니까 가 봐.”온지우는 혀를 차며 농담조로 말했다.“쓰고 버리기냐?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고.”그는 원래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술에 잔뜩 취한 윤하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쾅 하고 문을 닫았다.온지우도 차를 타고 떠났다.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그 순간, 한 렌즈가 온지우가 윤하경을 부축하는 모습을 조용히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을.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윤하경은 늦게 일어났지만 누군가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누가 침대에 물을 부은 것이다. 방금 전까지 수백억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꿈을 꾸고 있던 그녀는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화가 나서 눈을 번쩍 뜨고 욕을 하려던 찰나, 윤수철의 분노에 찬 눈과 마주쳤다.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욕설을 꾹 참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아빠, 아침부터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그녀는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는 윤수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허 참, 네가 감히 나한테 묻는 거냐?”윤수철은 냉소를 띠며 태블릿을 집어 들어 윤하경에게 던졌다.방금 잠에서 깬 윤하경은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머리를 맞았다.“아...”이마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이게 뭔지 똑똑히 봐! 곧 약혼할 여자가 한밤중에 남자랑 붙어먹고 뉴스에까지 나오다니. 윤씨 가문의 체면 다 구겼잖아!”윤수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 윤하경한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윤하경은 욕을 참고 태블릿을 보더니 눈썹을 쓱 치켜올렸다.화면엔 지난밤 온지우가 그녀를 데려다주는 사진과 영상이 담겨 있었다.그냥 부축해준 것뿐인데 영상에선 마치 둘이 귓속말이라도 하는 듯 애매하
윤하경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딸을 팔아먹고도 저렇게 당당하다니, 윤수철도 참 대단했다. 뻔뻔함에 박수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그녀는 침대에 잠시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 가정부에게 말했다.“침구 좀 갈아주세요.”“알겠습니다.”가정부가 대답했다.윤하경은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머리를 말리고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구지호가 소파에 앉아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리고 윤수철은 옆에서 굽실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예전에 자신이 구지호한테 아양 떨 때보다 더 심했다.윤하경은 속으로 생각했다.‘요즘 한빛의 경기가 안 좋나 보네. 안 그랬으면 아빠가 이렇게까지 나한테 지호랑 결혼하라고 할 리가 없는데. 그것도 저렇게 아부 떨면서 말이야.’윤하경이 다가가자 구지호가 쳐다보며 말했다.“하경아, 어젯밤 일, 설명 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그도 온지우를 알고 있었고 둘이 친한 것도 알지만 어젯밤 영상은 너무 애매했다.그래서 속으로 좀 불쾌했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온지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윤하경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사과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그녀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구지호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뭘 어째. 기자들이 멋대로 쓴 건데. 믿고 싶으면 믿어.”그녀의 무관심한 태도에 구지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그때 윤수철이 나서서 윤하경에게 말했다.“지호에게 잘 설명해.”그러고는 구지호에게 아부하듯 웃으며 말했다.“지호야, 좋게좋게 얘기해. 하경이가 밖에서 함부로 할 애가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말을 마치고 그는 돌아서서 나갔다.거실에는 윤하경과 구지호만 남았다. 구지호는 화난 표정으로 그녀가 예전처럼 달래주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숙여 탁자 위의 사과를 집어 먹었다.그녀는 헐렁한 홈웨어를 입고 있었는데 몸을 숙이자 풍만한 가슴골이 드러났다. 구지호는 우연히 그녀의 아찔한
윤하경은 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가 해줄 수 있는 설명은 딱 하나, 지우랑 나 아무 사이 아니야.”다른 남자라면 다를 수 있겠지만.그녀는 생각하며 다시 말했다.“최근에 누구랑 사이가 안 좋아졌는지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나와 지우를 이용해서 기사를 쓴 건 널 망신 주려는 게 뻔하잖아?”윤하경은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경쟁사에서 벌인 일 아닐까? 이 정도 일로 이렇게까지 시끄러운 거 보면 누가 뒤에서 조작한 게 분명해.”사실 발가락으로 생각해 봐도 이 일이 윤하연과 무관할 리 없었다.분명 그녀가 자신을 밀어내고 구지호와 결혼하려는 속셈일 터였다. 그러니 구지호가 직접 조사해 윤하연의 짓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두 사람은 서로를 물어뜯게 될지도 모른다. 윤하연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은 곧 구지호와 구씨 가문의 체면에 먹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그렇게 생각하니 윤하경의 기분은 한결 좋아졌다.구지호는 쓰레기였지만 적어도 말귀는 알아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생각해 봐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윤하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나랑 지우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못 믿겠으면 조사해 보든가.”윤하경이 부드럽게 나오니 구지호의 화도 좀 풀렸다.그는 윤하경의 앞에 다가가 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너희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제대로 말했어야지. 언제부터 나한테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진 거야?”‘네가 하연과 키스하는 거 본 순간부터.’윤하경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구지호에게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랑 지우가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알면서 아침부터 와서 따지는 걸 보면 나를 못 믿는다는 거 아니겠어?”그녀의 빈정거리는 말에 구지호는 금방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예전에 그녀는 항상 구지호를 생각하고 그의 기분을 맞춰줬었다.하지만 머리 좀 식히고 보니 구지호 같은 남자를 쥐락펴락하는 건 완전
오늘은 소지연의 어머니 김미애의 수술 날이었기에 윤하경은 반드시 가야 했다.가는 길에 과일 바구니와 꽃바구니를 특별히 사 들고 병원에 도착해보니 소지연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혼자 수술실 앞에 초조하게 서 있었다.윤하경을 보자마자 소지연은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하경아, 나 무서워.”소지연은 다가와 윤하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수술 결과에 따라 모든 게 결정될 상황이었다.윤하경은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아, 아줌마는 운 좋은 분이니까 수술은 분명 성공할 거야. 걱정 마.”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녀도 이 수술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소지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윤하경은 그녀를 앉히고 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안에서 나왔다.“수술은 매우 성공적입니다. 하지만 환자분은 앞으로 휴식을 잘 취해야 하고 다시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소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눈물을 글썽인 채 연신 의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소지연과 함께 김미애를 병실에 데려다주고 난 뒤, 윤하경은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에는 항상 쓸쓸한 기운이 감돌아서 그녀는 싫었다.병상에 누워있는 김미애를 보니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떠올랐다.유명한 미인이었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병상에 누워 얼굴이 창백했던 모습 말이다.병실에서 나와 모퉁이를 도니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하지만 미처 엘리베이터를 타기도 전에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올린 후 손을 거두었다.그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 사람을 따라갔다.그 사람은 산부인과 앞에 도착하자 안으로 들어갔다. 윤하경은 바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산부인과 입구에서 문패를 올려다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이 일은 정말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이 산부인과에서 나왔다.윤하경은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하연이 그녀 옆에 섰
집에 돌아오니 윤수철은 정원에 앉아 있었다.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인상을 썼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 지호랑 좀 더 놀다 오지.”윤하경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참지 못하고 윤수철에게 빈정거렸다.“아빠, 요즘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윤수철은 차를 마시려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노려보았다.“너는 내가 잘되는 꼴은 못 보냐?”윤하경은 비웃듯 웃었다.“아니요. 아빠가 딸 팔아서 잘 먹고 잘살려고 그렇게 애쓰시는 걸 보니 회사가 곧 망하기라도 할 것 같아서요.”그녀의 독설은 여전했다.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수철은 분노에 차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윤하경에게 집어 던졌다.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 행동이 그저 부끄러움에 발끈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태연하게 허리를 굽혀 찻잔을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윤수철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이 다기 세트, 한 세트에 수백만은 할 텐데, 하나라도 깨지면 값어치가 떨어지잖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허리를 흔들며 요염하게 걸어갔다.윤수철은 이를 악물고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윤하경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잠깐만!”윤하경은 돌아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윤수철: “앉아 봐. 할 얘기가 있어.”사실 윤하경은 윤수철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실망할 대로 실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뭔가 꾹 참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졌다.그래서 그녀는 곧바로 윤수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에게 온순한 미소를 지었다.방금 그가 물건을 집어 던진 것에 대해서는 전혀 화난 기색이 없었다.“아빠, 무슨 일인데요?”윤수철은 잠시 말없이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고 그녀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다.윤하경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그가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그리고 그 일이 결코 작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윤수철이 찻잔을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