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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늘 혼자이기도 하고

Author: 연월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6 18:23:25

구름 말은 다시 높이 올라갔다. 이번엔 한양을 벗어나 산 너머로. 인왕산 봉우리를 스치듯 넘자 그 너머로 끝없는 구름의 바다가 펼쳐졌다. 달빛이 그 위에 쏟아져, 구름이 은빛 물결처럼 일렁였다.

구름 말이 그 물결 위를 달렸다. 발굽이 닿을 때마다 은빛 물보라가 일어났다가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이현 나리."

"말해라."

"이 말, 나리 닮았소."

허리를 감은 팔이 아주 잠깐 굳었다.

“어디가.”

"희고, 크고, 말이 없고." 가영이 갈기를 손가락으로 살살 빗었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리고 엄청 빠른데, 하나도 안 무섭소."

뒤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바람 소리만 났다. 그런데 허리를 감은 팔에 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

가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나리는 이런 하늘을 매일 보시오?"

“매일 본다.”

"좋겠소."

"좋지 않다."

"왜?"

한참 만에 대답이 왔다.

"매일 보면 감흥이 없다. 늘 혼자이기도 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걸 수백 번, 수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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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마몽(天馬夢) -백마가 꿈길을 건너오면   32화 늘 혼자이기도 하고

    구름 말은 다시 높이 올라갔다. 이번엔 한양을 벗어나 산 너머로. 인왕산 봉우리를 스치듯 넘자 그 너머로 끝없는 구름의 바다가 펼쳐졌다. 달빛이 그 위에 쏟아져, 구름이 은빛 물결처럼 일렁였다.구름 말이 그 물결 위를 달렸다. 발굽이 닿을 때마다 은빛 물보라가 일어났다가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이현 나리.""말해라.""이 말, 나리 닮았소."허리를 감은 팔이 아주 잠깐 굳었다.“어디가.”"희고, 크고, 말이 없고." 가영이 갈기를 손가락으로 살살 빗었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리고 엄청 빠른데, 하나도 안 무섭소."뒤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바람 소리만 났다. 그런데 허리를 감은 팔에 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가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나리는 이런 하늘을 매일 보시오?"“매일 본다.”"좋겠소.""좋지 않다.""왜?"한참 만에 대답이 왔다."매일 보면 감흥이 없다. 늘 혼자이기도 하고."이렇게 아름다운 걸 수백 번, 수천 번 보았어도 늘 혼자라면... 이 사람이 왜 그렇게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그럼 이제 나랑 보면 되잖소."등 뒤의 숨이 멈췄다.가영은 말해 놓고 제 입을 막았다. 생각도 안하고 너무 쉽게 말을 내 뱉은 듯하여 순간 흠짓했다."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꿈에서. 꿈에서라도. 심심하면 같이 보자는 말이오."“그래.”짧은 대답 한 마디가 구름 바다 위로 쏟아지는 달빛보다 환하게 들렸다.동쪽 하늘이 아주 엷게 물들기 시작했다.구름 말의 발굽이 조금씩 투명해졌다. 갈기 끝이 새벽빛에 녹아들었다. 꿈이 끝나 가고 있었다."가야하오?""가야 한다."허리를 감은 팔이 천천히 풀렸다. 가영은 그 팔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그가 있었다. 흰 머리칼을 바람에 풀어 날리고, 은빛 도포 자락을 새벽빛에 적신 채. 장터의 선비도, 천사루의 주인도 아닌, 처음 꿈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눈이 웃고 있었

  • 천마몽(天馬夢) -백마가 꿈길을 건너오면   31화 구름

    "이현인지 저현인지, 나쁜 놈."가영은 천장에 대고 말했다. 오늘로 엿새째였다.천사루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꿈에서 다 따지겠다고, 안 오면 찾아가겠다고 온 한양이 듣게 외쳤는데. 그날 밤도, 그다음 날 밤도, 그 사내는 오지 않았다.찾아가지도 못했다. 그날 이후 어머니가 가영의 신발을 감춰 버렸다. 분이는 문 앞에서 잠을 잤고 막동이는 담장 아래 장독대를 다 치워 버렸다."모른 척하는 데 도가 텄어. 장에서도 모른 척, 천사루에서도 모른 척. 꿈에도 안 나타나시겠다 이거지?."가영은 베개 밑에서 은빛 풀잎을 꺼냈다. 엿새 동안 만지작거린 탓에 끝이 조금 해져 있었다. 그래도 시들지는 않았다. 겨울 한복판인데."그래 놓고 언니 혼례 사흘 남은 건 어떻게 알았대."풀잎에 대고 따졌다. 풀잎은 대답하지 않았다."키만 멀대같이 커서. 얼굴만 반반하면 다야!! 목 아프게."반반한 게 아니라 아주 고왔다. 가영은 속으로 고쳐 말했다가,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화가 나서 이불을 걷어찼다.“하나도 안 보고 싶어.”거짓말이었다. 풀잎을 도로 베개 밑에 넣고 돌아누웠다. 창호지 너머로 달이 희었다. 하늘에 구름이 길게 걸려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또 말처럼 생겼다."너도 미워."구름한테까지 화를 내고 나니 그제야 조금 후련했다. 가영은 눈을 감았다. 오늘은 말을 세지 않았다.바람 소리가 났다.가영은 눈을 떴다. 발밑이 푹신했다. 이불인가 했는데 이불이 아니었다. 희고, 부드럽고, 손을 대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구름이었다.그리고 그 구름은 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갈기가 바람에 길게 흩날렸는데, 갈기 끝이 실처럼 풀려 밤하늘로 녹아들었다. 가영은 그 등 위에 앉아 있었다.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숨이 멎었다.한양이었다. 저 아래, 아주 멀리. 집집마다 켜진 등잔불이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청계천이 은빛 실처럼 흘렀고, 남산과 인왕산이 검은 비단 주름처럼 도성을 감싸 안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진짜 별이 있었다

  • 천마몽(天馬夢) -백마가 꿈길을 건너오면   30화 꿈에라도

    연화의 꿈은 좁았다. 꽃밭도, 바다도, 신방도 아니었다. 낮은 천장 아래 작은 방 하나였다. 바닥에는 옷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비단, 무명, 모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방 한가운데에 연화가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한 벌을 다 하면, 옷감 더미에서 또 한 벌이 저절로 미끄러져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 또 바늘을 꽂았다. 쉬지 않고. 고개도 들지 않고. 호준은 문턱에 서서 그 광경을 보았다. 신부들의 꿈은 늘 아름다웠다. 혼례를 앞둔 처자들은 꿈에서라도 꽃을 피우고, 비단을 펼치고, 바다를 불렀다. 그런데 이 처자의 꿈에는 바늘과 옷감뿐이었다. 그는 늘 하던 대로 했다. 손짓 한 번에 방 안의 등잔이 푸른빛으로 바뀌었다. 옷감 더미가 녹아내리며 비단 금침이 되었다. 천장이 열리며 은하수가 쏟아졌다. 연화의 손이 멈췄다. 그녀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갸름한 얼굴에 눈이 깊었다. 지친 눈이었다. 스물두 살이라기엔 너무 풍파에 쪄들은 맥없는 눈빛을 가진 여인이었다. . 연화가 호준을 보았다. 하지만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귀신이십니까? 아니면.. 도깨비?” 호준은 늘 준비해 두었던 웃음을 지었다. 늘 그렇듯 다정하고, 능청스러운. "놀라지 마시오 귀신도 도깨비도 아니니까. 아마...도깨비 스승 쯤?" "놀라지 않았습니다." 연화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늘을 들었다. 손에는 아직 옷감 한 자락이 남아 있었다. 금침으로 녹아내리지 않은, 하얀 무명 한 폭.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열흘 뒤면 쉰여덟 먹은 사내한테 가는 몸인걸요. 귀신이든 요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시어요." 바늘이 무명을 뚫고 지나갔다. 한 땀. 두 땀. 호준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수백 년 동안 그는 수많은 여인들을 만났다. 놀라는 여인, 두려워하는 여인, 홀린 듯 다가오는 여인.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눈빛은 처음이었다. “무엇을 짓고 있소?” "수의(壽衣)요." "수의?"

  • 천마몽(天馬夢) -백마가 꿈길을 건너오면   29화.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구할 수가 없는 거지

    남산 아래 비탈진 골목 끝에 기와 반쯤 내려앉은 집이 하나 있었다.대문은 있었는데 문짝이 없었다. 땔감으로 쓴 지 두 해째였다. 담장에는 호박 덩굴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호박은 진작 따 먹고 잎만 남아 있었다.사랑방에서 낭랑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왔다."자왈, 군자는 먹는 데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하는 데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안방 문지방 앞에 앉아 바느질을 하던 연화의 어머니가 바늘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배부름을 구하지 않는 게 아니라 구할 수가 없는 거지.""어머니.""내가 틀린 말 했니?"연화는 대답하지 않고 어머니가 놓은 옷감을 받아 들었다. 이웃 대갓집 마님 치마였다. 오늘 밤까지 단을 다 둘러야 품삯 쌀 두 되를 받을 수 있었다.윤연화. 스물두 살.한때는 이 집도 대문에 문짝이 달려 있었다. 할아버지가 정승 댁 사돈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연화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고, 지금 이 집에 남은 건 아버지의 책 백여 권과 아버지의 자존심, 그리고 과거만 붙으면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남동생의 꿈이 전부였다."누님."건넌방에서 남동생 연우가 고개를 내밀었다. 열아홉, 얼굴이 해쓱했다."먹 좀 남은 거 있소? 다 떨어져서.""어제 산 거 벌써?""글씨 연습을 하다 보니..."연화는 반짇고리 바닥에 감춰 둔 엽전 몇 닢을 꺼내 동생 손에 쥐여 주었다. 바늘 끝으로 한 땀 한 땀 모은 돈이었다. 연우가 미안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과거 붙으면 누님한테 비단 치마 백 벌 해 드리리다.""백 벌은 필요 없고, 붙기나 해."중매쟁이 박 할멈이 그 집 문짝 없는 대문을 넘은 것은 그날 오후였다.할멈은 소매를 연신 더듬으며 들어왔다. 종이를 잃어버린 뒤로 생긴 버릇이었다.요즘은 종이가 수시로 사라져 되도록이면 머리속으로 외우려고 노력은 하지만 가끔 짝을 잘못 찾아 낭패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틀림이 없다. 아니 틀릴 수가 없다."아이고, 연화 어미. 좋은 자리가 났소."어머니의 바늘이 멈

  • 천마몽(天馬夢) -백마가 꿈길을 건너오면   28화 선영이 시집 가는 날

    혼례 날 아침은 맑았다.그리고 첫 번째 사고는 해 뜨기 전에 일어났다."아씨! 아씨이이!"분이의 비명이 별당을 울렸다. 가영이 부엌에서 밤새 찐 떡 시루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시루 한쪽이 움푹 꺼져 있었다."간 보는 거야.""간을 반 시루나 보세요?""언니 시집가는 떡이잖아. 맛이 없으면 안 되잖아.""그럼 맛은요?"“좋아.”하는 수 없이 떡은 새로 쪄야 했다.두 번째 사고는 언니 단장할 때였다.수모가 선영의 얼굴에 분을 바르고 연지곤지를 찍는 동안, 가영은 언니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혼례 날 아침 신부 곁에 있어야 한다며 밀고 들어온 것이었다."언니.""응.""어젯밤에 꿈 꿨어?"선영이 고개를 갸웃했다."꿈? 글쎄……. 꾼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안 나."가영은 언니를 빤히 보았다. 이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꿈 얘기만 나오면 홍시처럼 붉어지던 언니였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눈이 조금 부어 있는데, 왜 부었는지 본인도 모르는 얼굴이었다."언니, 그 검은…….""아가씨, 움직이지 마시오!"수모의 손이 미끄러졌다. 곤지가 이마 한가운데가 아니라 왼쪽 눈썹 위에 찍혔다. 그것도 크게.방 안이 조용해졌다.“가영아!!! 너 정말!!”"내가 안 그랬어! 수모 할멈이 그랬어!""아가씨가 갑자기 말을 거시니까 그렇지요!"곤지를 지우고 다시 찍는 데 반 시진이 걸렸다. 그동안 가영은 방 구석에서 손을 들고 서 있었다.세 번째 사고는 전안례였다.신랑이 흰 말을 타고 골목 어귀에 나타나자 동네가 떠들썩해졌다. 기럭아범이 붉은 보자기에 싼 나무 기러기를 품에 안고 앞장섰다. 구경꾼들 틈에 가영도 있었다. 정확히는 담장 위에."아씨! 거기서 내려오세요! 오늘은 제발!""신랑 얼굴 좀 다시 보려고 그래.""보셨잖아요, 저번에!""그때는 담장 너머로 봤지. 정면에서는 못 봤어."신랑이 말에서 내렸다. 이번엔 등자에 발이 걸리지 않았다. 대신 내리면서 고개를 들다가, 담장 위의 가영과 정

  • 천마몽(天馬夢) -백마가 꿈길을 건너오면   27화. 열흘째

    혼례 전날, 진 참판 댁은 해가 지고 나서도 잠들 줄을 몰랐다.안채 부엌에서는 밤새 떡 찌는 김이 올랐고, 사랑채에서는 아버지가 예단 목록을 세 번째 확인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언니 방에 들어가 활옷을 펼쳐 놓고 또 한 번 동정을 매만졌다."이제 자거라. 내일 신부 눈이 부으면 안 된다.""예, 어머니."어머니가 나가고, 선영은 등잔불을 끄지 않은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병풍에 걸린 활옷의 연꽃 수가 불빛에 흔들렸다.열흘째 밤이었다. 마지막 밤.선영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누가 말해 준 적은 없었다. 그래도 알았다. 꿈속의 사내가 처음부터, 혼례를 치르면 끝이라고 했으니까.등잔불을 껐다. 이번엔 문고리에 숟가락을 꽂지 않았다. 가영이 오든 말든, 이제 상관없었다.지붕 위.호준은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늘 들어가기 전에 부채를 탁탁 치며 오늘은 어떤 꿈으로 꾸밀까 떠들던 입이 꾹 다물려 있었다. 호준은 오늘따라 마음이 허전했다.이현이 도포 소매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맹파에게서 받아 온 것이었다. 맑은 물 아홉에 탕 하나."마지막이다.""알고 있소."호준이 호리병을 받아 들었다. 손바닥 위에서 한참 굴리다가, 품에 넣었다."나리.""말해라."“아니오. 꿈이나 열어 주시오.”이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창호지 문에 손을 댔다. 흰빛이 스며들었다.꿈은 처음 만난 날의 꽃밭이었다.선영이 혼수로 놓은 수가 모두 꽃이 되어 피어 있던, 첫날 밤의 그 정원. 모란이 흐드러지고, 수 놓인 나비들이 낮게 날았다. 다만 꽃잎 끝이 아주 조금씩 바래 있었다. 열흘 동안 피어 있던 꽃들이 이제 질 때를 아는 것처럼.선영은 모란 덤불 앞에 서 있었다. 활옷이 아니라 평소 입던 쪽빛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다.호준이 걸어왔다. 물에서 솟지도, 안개를 가르지도 않았다. 꽃밭 저편에서 그냥 걸어왔다. 사모관대도, 풀어헤친 도포도 아니었다. 장터에서 입었던 단정한 옥빛 도포였다. 앞섶이 반듯하게 여며져 있었다."오늘은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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