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스무살의 나는 그때……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서현!”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보며 뛰어오는 저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든 나를 한눈에 알아보는 저 남자, 강지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뛰어오네, 저 바보 진짜.”
서현의 집 앞 골목, 모자를 훌렁 벗어 던지고, 어깨에 메고 있던 짐 가방을 바닥에 휙 버려둔 채 어느덧 한달음에 제 앞으로 달려온 지음은 자신의 커다란 품 안으로 서현의 몸을 가득히 밀어 넣었다.
캄캄한 골목 귀퉁이에 놓인 가로등의 파리한 불빛 아래로 두 사람은 한 몸인 듯 엉겨 붙었다. 지음은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서현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서현은 숨이 컥 하고 막혀 와도 금세 피실피실 웃음이 삐져나왔다.
숨이 막혀도 좋은 행복이란 것을 오직 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언젠가, 내가 견뎌 온 모든 상처보다 더 큰 고통으로 돌아올 줄도 모르고.
그렇게 나는 그의 사랑을 온몸으로 마다하지 않았다.
“악, 숨 막혀. 켁”
“하, 미안해. 너무 좋아서. 보니까 너무 좋아서. 땀 냄새 많이 나지?”
여린 서현의 몸을 조심히 떨어트려 놓고는 유니폼 냄새를 맡으며 바보처럼 웃는 지음이었다.
“흙냄새나. 얼마나 구른 거야.”
“구르다니. 슬라이딩. 내 슬라이딩 죽여주는 거 알지.”
“투수가 슬라이딩을 왜 하냐.”
“오? 야구 바보가 언제 이렇게 컸어?”
서현이 입술을 삐족이며 놀리듯 킬킬거리고 있는 지음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시즌 중에 올라오는 거 안 힘들어? 이러고 금방 또 가야 하잖아. 그냥 푹 쉬지…”
“일주일 만에 보는데, 그런 말이 나와? 가지 말라고 꼭 엉겨 붙어야지.”
“…경기 보러 못 가서 미안.”
“아냐, 내가 멀리 있어서 미안해.”
지음은 고등학생 무렵 이미 발군의 실력으로 전국구 투수로 불렸고, 지명 1순위로 프로구단에 입단했다.
20세에 1군 데뷔를 하고, 첫 경기에 7이닝 무실점이라는 순조로운 시작과 더불어 21세에 첫 선발승을 거두면서 자연스럽게 ‘괴물 투수’ 타이틀을 달았다.
그 이후로도 큰 기복 없는 경기력을 꾸준히 선보이며 팀 내 믿음직한 선발 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니까 스물셋, 강지음은 제법 유명하고 꽤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려서 친할머니와 둘이 살았던 지음은 야구를 위해 서울에 있는 학교로 홀로 진학을 했고, 혼자였지만 언제나 남들보다 먼저, 남들보다 늦게까지 훈련에만 매진했다.
프로에 입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이 아니면 할머니를 보러 강원도에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아니 그게 전부였던 지음이었다.
그런 지음에게 ‘마서현’이라는 새로운 세상은, 실로 우주에 가까웠다.
할머니에게 야구 말고도 자랑할 게 생긴 것도,
서현이 보고 싶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때마다 더 미친 듯이 달리고, 쉴 새 없이 공을 던지며 야구를 더 사랑하게 된 것도—
서현이라는 세상을 품고 사랑이라는 우주를 유영하게 되면서부터였으니까.
“오늘 우리 집에서 같이 자자.”
지음이 서현의 손을 꼭 잡고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잠도 못 자고 새벽에 그냥 갈 거면서.”
“내일은 아침 훈련 안 가도 돼! 새벽마다 훈련 진짜, 진짜 많이 해서, 감독님이 허락해 주셨어!”
“진짜?”
“응! 그리고 내가 가서 맛있는 것도 해줄게. 일주일 새 폭 말랐어, 너.”
“오빠 너는 쫌만 안 보면 꼭 안 본 새 말랐다 그러더라.”
“나 보고 싶다고 밥 안 먹고 그러지 좀 마.”
“유치하게. 그런 말이 듣고 싶어?”
“응! 그리고 좀 든든히 먹여야 밤새 괴롭히지.”
“와. 만나면 나 많이 먹이는 이유가 그거였어?”
“안 그러면 힘들다고 자꾸 도망가잖아. 나는 이틀도 안 자고 할 수 있는-.”
지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귓불이 벌겋게 달아오른 서현이 지음의 팔을 연신 때렸다.
“말도 안 돼. 변태. 첨엔 변태 아니라더니 완전 변태야!”
“정확히는 나쁜 놈 아니고, 사기꾼 아니라고 했을걸?!”
서현과 지음은 연신 시시덕거리며 꿀이라도 발랐는지 손을 꼭 맞잡은 채 사거리를 지나 무지개 떡집 옆 골목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누군가 집요한 눈빛으로 오랫동안 좇았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그 끈질긴 시선도 옅어졌다.
“너 좀 많이 마신 것 같다. 괜찮냐?”제법 서늘해진 밤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문 정우가 지음을 보며 물었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지음은 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조용히 내뱉으며 답했다.“형은, 형은 괜찮아?”지음이 흐릿한 눈을 들어 정우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아효.”정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쪼그려 앉아 라이터를 몇 번 칙칙거리다 담뱃불을 붙였다.“엄마가 너 보고 가서 좋단다. 가는 길도 좋다고 말하는 양반 잘 보내주면 된 거지, 뭐.”“갑자기 확 안 좋아지신 것 같아. 몇 해 전만 해도 정정하셨던 것 같은데.”정우의 입가에서 흰 연기가 커다랗게 번져나갔다.“내가 은퇴해서 그런가. 그때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우신 거 아냐?”“형이 엄마 자랑이었잖아.”“이혼하고, 툭하면 경기 말아먹고, 부상까지 당한 놈이 뭔 자랑이냐.”정우가 피식 웃었다.“그러니까 아들보다 네가 더 좋았던갑다.”정우가 씁쓸한 웃음을 연기처럼 흘려보냈다. 지음도 희미하게 웃었다.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번지는 담배 연기에 술기운이 다시 얼굴을 달궜다.“지음아, 고맙다.”지음은 고개를 젖혀 눈을 감으며 풀어진 목소리로 답했다.“엄마 없어도 형 보러 자주 올게.”“남자 둘이서 징그럽게 무슨.”정우의 말에 지음이 픽 웃자, 정우가 담배를 끄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음을 팔로 툭 치며 물었다.“너 진짜 여자 없냐. 왜 그러고 사냐.”“형이랑 둘이 살면 되겠다.”정우가 지음에게서 휙 떨어지며 몸서리치는 시늉을 했다.“미친, 나는 재혼할 거야. 나는 여자 만날 거라고.”“배신자.”“진짜 미친놈일세.”“그래, 배신자랑 미친놈. 잘 어울리잖아”지음의 너스레에 푸석한 얼굴을 저으며 웃던 정우가 짐짓 조심스러운 투로 입을 열었다.“너…그때 만나던 친구는……소식 모르냐?”“누구?”“뭘 누구야, 인마.”정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너한테 여자가 걔 말고 있기나 했어?”정우가 손에 들고 있던 새 담배를 만지작거리자 지음이 얼른
"여보세요."―목소리가 왜 그래?대뜸 제 목소리에 의구심을 품는 지음의 말에 서현의 굳어 있던 입매가 자연스레 벌어졌다.“제 목소리가 용건은 아니실 텐데요.”―그게 용건인데. 현재 내 작품에 키를 쥐고 있으신 분인데."별 이상 없습니다. 다음 용건은요."―내 짐은 잘 도착했지?서현은 제 집 거실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그의 캐리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괜히 주변 눈치를 한번 살피곤 목소리를 낮췄다."그런 걸 왜 내 집에-."―응, 잘 도착했구나.“당장 와서 가져가.”서현이 이를 꾹 깨물며 낮게 속삭였지만, 지음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목소리였다.―당장 가고 싶은데, 아쉽게도 주말에나 갈 것 같아. 기획안이랑 트리트먼트는 메일로 틈틈이 보내둘게.누가 아쉬워.지음의 말에 서현의 눈동자가 책상 위 작은 캘린더로 향했다.주말이면…이틀이나 더 남았네.잠깐, ‘이틀이나’라니?!서현이 퍼뜩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굳이 전화로 보고 안 하셔도 되는데요. 알겠으니 메일 주세요.”―서현아.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던 서현을 지음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붙잡았다.방금 전까지 떠올린 과거의 흔적들은 분명 턱끝까지 차오른 검은 파도 같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지음이 제 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한마디에, 짙게 일렁이던 파도가 걷혔다. 코끝으로는 한여름 밤의 진득한 풀내음마저 번져오는 것 같았다.“……”―컵라면 말고 밥.“……밥?”―밥 먹으라고.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몸 한구석이 간질거렸다.그놈의 밥.잘 먹고 지냈다고 해도, 서현만 보면 안 본 새 또 말랐다며 어떻게든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 들던 사람.투박하고 따뜻했던, 지음만의 애정 표현.“…알아서 잘합니다.”서현은 잠기려는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더 무슨 말을 들을까 봐 전화를 휙 끊어버렸다.주말에 오든가 말든가.내가 밥을 먹든가 말든가.서현은 아무렇게나 내려둔 핸드폰을 한참 내려다보며, 주문처럼 되뇌었다.그러든가 말든가!*[알아서 잘합니다.]매정하게
동거.동거라니!그 맹랑한 두 글자가 며칠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정작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당분간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다며 짐만 덜렁 보내 놓고 사라졌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거실 한편을 차지한 그의 검은색 캐리어와 사흘째 어색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대리님!”모니터 앞에서 머리칼을 움켜쥐고 있던 서현이 화들짝 몸을 들썩였다. 고개를 들자 파티션 너머에서 채연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앗, 놀라셨어요? 자리에서부터 불렀는데 답이 없으셔서.”채연이 미안한 얼굴로 파티션을 살짝 문지르며 말했다. 서현이 손사래를 치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순간, 맞은편에서 주승이 벌떡 일어났다.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대리니이이임…”“주승 씨는 또 왜…”“…저 까일 것 같아요.”서현이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자, 채연이 파티션에 팔과 고개를 기대며 나지막하게 덧붙였다.“홍연지 아나운서요.”다시 등장한 그 이름에 서현의 입안이 바싹 말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애서 표정을 감췄다.“왜, 뭐가 잘 안돼?”“제 기획이 다 본인의 색이랑 맞지 않는 것 같대요…”“시작할 땐 원래 다 그래. 조금씩 맞춰가면 되니까, 괜찬-.”“대리님이 필요하대요.”여전히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주승이 말을 대뜸 잘랐다.내가 필요하다고?서현의 숨이 아주 잠깐 멈췄다.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아, 주승님…새치기! 제가 먼저라구요.”채연이 못마땅한 얼굴로 끼어들었다.“채연씨, 나 지금 진짜 까이게 생겼다니까…!”“자, 자. 둘 다 그만.”서현은 저를 두고 진지하게 줄다리기를 하려는 두 사람 사이로 손을 화급하게 휘저으며 채연에게 먼저 달래는 투로 물었다.“일단 채연 씨부터. 무슨 일이야?”“저 강 작가님께 보낼 메일 초안이랑 콘셉트별 도서 리스트 정리한 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권 팀장이 본인 휴가가 끝나기 전까지 처리해 두라고 신
집 안 한편에 놓인 작은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선뜻 먼저 입을 떼는 이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만 바라보고 있었다.서현이 결국 종이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지음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서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서현은 계약서를 한 번 더 훑어본 뒤 짧게 숨을 내뱉었다“여기에 내가 사인하면, 우리 회사 계약서에도 사인하는 거지?”“그렇지.”“그럼…”망설이는 듯한 서현을 보며 지음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여섯.”겨우 입을 뗀 서현이 펜을 손에 쥔 채 또박또박 말했다.“갑과 을은 ‘수면’이 외에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지음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행위?”“말 그대로”서현이 지음을 똑바로 바라봤다.“잠을 자는 행위 말고는 그 어떤 행위 무엇도 절.대.로 하지 않는 거야.”서현은 단호하다 못해 결연해 보였다.“좋아, 추가할게.”지음은 여전히 미소를 늘어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그리고?”말간 얼굴로 되묻는 지음을 보며 서현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왔어? 늦었네?”축축해진 눈가를 슥 닦아내고 다시 봐도 눈앞에 서있는 건 지음이 맞았다.“뭐야?”서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되묻는 순간, 옥상 난간에 송이송이 매달려 있던 알전구가 하나둘 반짝이며 불을 밝혔다.전 주인이 걸어두고 간 전구였다. 대체 저런 낭만은 어디서 오는 건지. 저런 거라도 걸어둬야 삭막한 처지가 좀 나아 보이는 건가 싶어 성가시고 꼴 보기 싫었는데.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불빛이 지음의 등 뒤로 번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삭막한 현실은 사라지고 새삼 달라 보였다.운치…라는 게 이런 건가.아니, 아니면 혹시 그냥 헛것인가?그런데 그 현실감 없는 비주얼이 정말로 제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또 울었어?”다정하게 내려앉은 그 목소리에 서현은 다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꾹 눌러 삼켰다.“뭐냐고. 왜 여기 있어?”서현은 지음의 손을 살짝 치우며 눈가를 다시 한번 훔쳤다.“나 좀 재워줘.”“뭐?”지음은 자신을 쏘아보는 서현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전히 매서운 눈초리가 따라붙자 이번에는 평상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와, 좋다.”지음의 머리칼이 바람결에 사락거렸다. 눈을 감은 채 느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모습에 서현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친구 아니라고.”홍연지, 그 여자가 문제였던 건가?“아, 그래? 미안해. 동창이라길래.”“선배가 왜 미안해. 그냥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나도 오늘 보고 알았어. 주승 씨랑 작업하게 된 거.”“아, 그럼 너도 놀랐겠구나.”서현이 고개를 들어 건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너도? 선배는 왜?”건하가 ‘아차!’ 싶어 순간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다행히 신호가 바뀌었다. 건하는 얼른 액셀을 밟으며 얼버무릴 말을 골랐다.“그, 뭐야. 아나운서라니까…놀란 거지 나는.”서현은 잠시 건하를 바라보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거워진 서현의 숨결에 건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연지는 서현과 초,중,고 동창이었다. 오래된 동네에서 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건 서로의 담벼락 안 집안 사정을 너도 알고 쟤도 아는 일이 된다는 뜻이었다.누구 엄마가 집을 나갔다더라, 누구네 아빠가 반장 집에서 나오는 걸 봤다더라, 쟤네 집에 빚이 얼마라더라.아이들에게 집안 이야기는 금세 소문이 됐다.연지는 그 많은 이야깃거리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아이였다.집이 얼마나 잘 사는지, 부모가 얼마나 잘났는지, 그 집 자식이 딸 하나인데 연예인 뺨치게 예쁘고 공부도 잘한다며 동네에서 유명 인사나 다름없었다.반면 서현에게 따라붙은 이야기는 정반대였다.엄마가 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