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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사랑할 수 없는

작가: 소라닌
last update 게시일: 2026-08-10 11:00:12

쌀쌀한 아침 바람이 코끝에 맺히며, 가을이 무릇 깊어졌다.

사실 서현에게 계절은 흑백사진 같은 것이었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것이었던 오래된 흑백사진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지음은 가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가을은 보석함 같아.’

‘보석함?’

‘응, 하나씩 꺼내서 보답하는 계절이거든. 저기 저만치 높아진 하늘이 무대고, 나는 거기 서서 빨갛게 익은 내 심장을 꺼내서 던지는 거야. 내 혼신을 받쳐서 발을 내딛고, 내 숨을 다해서 반드시 이겨야 해. 그렇게 증명하고 보답하는 계절.’

새파란 하늘을 그렇게나 한참 올려다본 게 언제였을까. 지음을 따라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 날, 지음은 그렇게 자신의 가을 그리고 보석함에 대한 이야길 해주었다.

그때는 그저 근사하게만 들렸는데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야구’를 제대로 알게 되고 나서야 야구 선수에게 ‘가을’이 얼마나 벅차면서도 버거운지, 고대하면서도 고단한지, 환희로우면서도 처절한 것이었는지를 느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그렇게 찬란한 그의 가을 하늘을 따라 올려다볼 땐, 내가 주워 든 흑백사진에도 푸른 잉크가 배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버지의 신발이 현관에 보인 순간, 모든 것이 착각일 뿐이었다. 내 흑백사진은 결국 흑백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방 안 구석에 쪼그려 앉은 서현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핸드폰 너머로 번져오는 온전하고 따뜻한 지음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서현아.

한 번만 더 이기면 본인의 팀이 한국시리즈에 간다며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지음이 조용히 서현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 서현이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서현의 시야로 들어오는 방 안은 빛이 피해 간 듯 어둠만이 깔려있었고, 찢겨 엉망이 된 옷가지들 사이로 가위와 깨진 컵 조각들이 서늘하게 늘어져 있었다.

한동안 어딜 다녀온 건지, 엉망이 된 몰골로 친엄마를 찾으며 온 집안을 다 때려 부순 정신 나간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또다시 서현에게 퍼부은 그 여자의 흔적이었다.

“진짜 멋있네, 강지음.”

서현은 정말로 축하해주고 응원해 주고 싶은데…지음의 목소리에 자꾸만 울음이 삐져나오려 해서 마음만큼 호응을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지음이 서운해 하나 싶어 겨우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물기 어린 서현의 목소리에 지음의 목소리가 짐짓 더 낮게 깔렸다.

―…마서현…너 지금 울지?

지음의 물음에 서현이 다시 고개를 묻고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서현의 검고 긴 머리칼이 멍든 무릎을 따라 흘러내렸다. 마구 잘려나간 머리칼들이 바닥으로 힘없이 흩어졌다.

―너 왜 내 말 안 들어. 우리 집에 가 있으랬잖아.

나는 그때…….

“…가면? 가면 뭐가 달라져?”

아무래도 나를 사랑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뭐? 서현아…!

“…미안, 그만 끊을래.”

―잠깐, 잠깐만. 내가 지금 갈게. 응?

애절한 그의 목소리를 매정하게 던져버렸다. 나둥그러진 핸드폰 화면이 까맣게 변해버렸다.

그의 환희와 열기가 나로 인해 식었다. 내가 그의 행복을 망쳐버렸다.

역시…나는 이런 나를 사랑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켠 핸드폰에는 지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문자들이 수두룩하게 쌓여있었다.

새벽 세 시 반에 도착한 마지막 문자까지 읽었을 땐,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서현아, 계속 기다리다가 오피스텔로 왔어. 이따 아침에 다시 집 앞으로 갈게. 정말 너무 보고 싶다. 너 얼굴 봐야 나 훈련 할 수 있을 것 같아. 얼굴 보여 줄 거지?]

미쳤어. 강지음. 진짜 오면 어떻게 해.

아니지, 마서현, 이 나쁜 년아! 중요한 경기 있는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런데…그런데 있지…너무, 너무 보고 싶다. 강지음.

서현은 엉망이 된 머리를 질끈 묶고 손에 대충 잡히는 겉옷을 집어 들고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아버지는 술에 뻗어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고, 식탁 앞에 앉아 있던 그 여자가 소주병을 들다 놀란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술을? 저 여자가?

아버지 때문인지 일절 술만큼은 입에 대지 않던 여자였다.

그래서 더 지독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디 가니? 그 꼴로?”

그 여자는 물컵에 소주를 마저 따르며 취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 꼴로 만든 게 누군데. 상관 마세요.”

“너, 연애하니?”

짙은 술 냄새에 얼른 멀어지려던 서현의 발걸음이 움찔 하고 멈춰 섰다.

“…나 따라서 일 나가긴 죽어도 싫다길래, 무슨 대단한 일을 하려나 했는데. 연애질이라니, 기도 안 찬다, 얘. 되게 웃겨, 너”

서현은 비틀거리며 풀린 눈으로 저를 이죽거리는 그 여자를 그저 노려보았다. 그때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서현은 그제야 분한 고개를 돌려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너…!! 너, 네 엄마 어디 있는지 알지? 너랑 네 애비도 나 버리고 도망갈 거지!?”

발악하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찢겨 들려왔지만, 서현은 그저 입술을 당겨 물었다. 구겨진 운동화가 영 펴지지 않아 그대로 구겨 신고 얼른 문고리를 잡았을 때, ‘쨍그랑!’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너도 네 애비도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하, 누가 할 소리를.

“처음이네.”

서현이 조소하며 답했다.

“뭐?”

“이 집에서 들은 소리 중에 제일 내 마음 같은 말.”

서현은 서늘한 얼굴로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그 여자가 중얼거린 그 한마디를 제대로 들었다면―나는 절대 그 문을 열고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집 대문을 나섰지만, 지음이 보이지 않아 서현은 그의 오피스텔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얼얼한 다리가 몇 번이고 힘이 풀려 고꾸라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말해줘야 했다.

칠흑 같던 내 세상에 파란 하늘을 보여준 그에게, 거지 같은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그리고 나도 보고 싶었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아니…어쩌면 만나지 않으려고 기를 쓴 세월이 10년이었다. 그리고 기어코 10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오랜만이야. 마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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