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며칠 뒤, 전에 서현이 담당했던 강은하 작가의 성공적인 출간 기념 파티가 작게 열렸다. 여러모로 벌써 반응이 좋아 기분 좋게 열린 파티였다. 말이 파티지 그냥 거나하게 술 좀 먹는 회식 자리였다.
“강 작가님은 이연 작가 본 적 있다고요?”
“아, 이거 나만의 비밀인데. 썰 좀 풀어줘요?”
은하가 새침한 표정으로 빈 술잔을 들었다. 은하의 제스처에 기획팀이고 마케팅팀이고 직원들이 들뜬 함성을 지르며 술을 따라주려고 난리였다.
건하가 이연 작가 이야기에 슬쩍 서현을 바라보았다. 서현은 애써 무감한 얼굴로 소주를 들이켰지만, 사실 서현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간 섭외에 능하다면 능했던 것 같은데, 이 인간은 도대체가 컨택 할 방도가 없었다.
전 담당자들에게 부탁도 해보았지만, 계약 당시에만 쓰는 번호가 따로 있어서 현재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오피셜로 뜬 메일주소로도 여러 번 메일 전송을 했지만, 전혀 답이 없다며 함께 난감해할 뿐이었다.
당연히 서현의 메일에도 답은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다른 메일들은 열어보지도 않았다면, 서현이 보낸 메일은 ‘읽음’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일단 이연 작가가 성별조차도 소문이 많았잖아요? 뭐 일단 남자는 확실하구요. 키는…어, 거의 우리 윤 대표님이랑 비슷한 것 같다. 188cm? 맞죠, 대표님?”
건하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 윤 대표님은 누가 봐도 딱 도련님 상이잖아요? 희고 곱고…뭐 그런? 여기서 잘생긴 사람이 우리 대표님밖에 없어서 내가 자꾸 대표님이랑 비교를 하네. 아무튼! 이연 작가는 그런 곱상한 스타일은 아니에요.”
술기운과 분위기에 업 된 채 톤이 높아진 은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직원들 모두가 집중한 채 웅성거렸다. ‘잘 생겼냐. 결혼했냐.’ 등 여직원들이 추임새처럼 질문을 던져댔다.
“뭐랄까. 좀 거칠고 섹시한? 잘생긴 건 말도 못 하고. 몸은 거의 운동선수. 피지컬이…미쳤어. 그 비주얼로 왜 작가를 하나 몰라. 아하하항”
남자 직원들은 반칙 아니냐, 그럴 리가 없다며, 강 작가의 다음 소설 남자주인공 상상하는 중 아니냐며 애써 부정했고, 여자 직원들은 마치 소녀 팬들처럼 ‘꺄악’ 거리며 신나 했다.
“뭐, 실은 나도 우연히, 정말 우연히 봤었는데 마주쳤을 땐 이연 작가인 줄은 전혀 몰랐었어요. 연예인인가 싶을 정도로 아우라가 좀 있어서 그냥 기억에 남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이연 작가라고…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니까.”
“어디서 보셨는데요?”
이야기가 마무리될 즈음, 조용히 있던 서현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남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서현인지라 직원들이 좀 놀란 얼굴로 서현에게 시선을 모았다. 은하도 의외라는 표정이었지만, 흔쾌히 답을 해주었다.
“아, 그게…지금 생각해도 의외긴 한데, 야구장이었어.”
‘야구’라는 단어에 서현의 눈동자가 여리게 떨렸다.
“뭐 소문에 레이저스 팬이라는 얘기가 있긴 했는데, 진짠가 봐.”
“아…그래요?”
“그러고 보니까, 멀리서 보면 야구 선수인 줄 착각할 것 같아. 피지컬이 너무 좋아서.”
서현의 얼굴이 설핏 어두워지자, 건하가 이제 그만하고 거국적으로 건배나 하자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이에 서현도 얼른 표정을 감추며 잔을 들었고, 그날은 오랜만에 술을 정말 많이 마셨던 것 같다.
정말 많이. 술이 내가 되고 내가 술이 되는 ‘술아일체’의 경지랄까.
그래서일까, 눈앞에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이 얼굴이 왜 그 얼굴로 보일까.
“오랜만이야. 마서현.”
10년 동안 꿈에도 한번 안 나오고, 아무리 술에 취해있어도 헛것으로도 나타나지 않던 그 얼굴. 그리고 이 목소리.
그래, 이제 꿈에는 좀 나올 수 있잖아. 10년인데.
“안 본 새에 더 말랐네.”
10년 만에 봐도 또 그 소리네. 웃겨…
“오빠 너는…하나도 안 변했네. 진짜 웃긴다…이제야 꿈에 나오네. 내 첫사랑”
내 첫사랑, 강지음.
내가 망가트린 내 첫사랑…그래도 이건 꿈이니까. 괜찮아. 괜찮지…?
그렇게 10년 만의 재회를 이룬 꿈속에서 서현은 지음과 함께 밤을 보냈다.
10년 전, 처음 만난 그날보다 더 격하고 뜨겁게.
그러나 아득했던 밤이 지난 다음 날 아침, 서현이 무거운 눈을 떴을 때…제 옆에 누워있는 얼굴을 보고 그대로 혼이 나갈 뻔했다.
이게 뭐야. 이 얼굴이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설마, 어젯밤이, 그게…그게 꿈이 아니라고?!
몇 년 후,내리쬐는 햇볕이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구는 한여름이었다. 쨍쨍 울어대는 매미 소리 위로 해맑은 아이의 웃음소리가 겹쳐 들렸다.“맴!맴! 까하하항”“맴맴이가 그렇게 재밌어?”횡단보도 앞에 선 작은 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며 연신 까르륵거렸다.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삐져나온 햇빛이 아이의 얼굴 위로 드리우자, 엄마의 손이 얼른 아이의 눈가에 그늘을 만들어주었다.“눈부시다, 그치?”“반짝반짝 예뻐!”“우리 아들은 여름을 많~이 좋아하네.”“아빠!”“응?”“아빠야!”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엄마의 시선이 향했다.횡단보도 건너편.유난히 키가 큰 남자가 긴 팔을 휘휘 젓고 있었다.“그러게, 아빠네.”곧, 신호등의 색깔이 바뀌었다.남자를 바라보던 여자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아빠한테 빨리 갈까?”“응!”여자는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아이의 작은 보폭에 맞춰 총총 뛰기 시작했다.“꺄아하하하하”아이가 좋은지 소리 내어 웃어댔고, 그런 아이의 모습에 여자도 웃음이 터졌다.
지음의 책 《마음의 자리》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다. 그 이후 국내에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멜로 영화의 부활을 알리듯 영화화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덕분에 서현의 하루하루는 늘 바쁘게 흘러갔다.작고 소중한 출판사 ‘마음의 숲’은 이제 대작을 만들어낸 출판사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아…또다…”서현은 코 밑을 적시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에에? 팀장님 또!!”프린터기에서 서류를 받아오던 채연이 서현을 보며 소리쳤다.모니터에 고정되어 있던 서현의 고개가 그제야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얼른 코에 휴지를 가져다 대는 서현의 손. 흰 휴지는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요즘 들어 몸이 조금 무거웠다. 코피도 잦아졌고, 심한 날에는 눈앞이 핑 돌기도 했다.하지만 서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일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 보다 했고, 무엇보다 일에 재미가 붙은 지금의 생활이 싫지 않았다.“팀장님, 진짜…그러다 쓰러지시면 큰일 나요. 강 작가님이 우리 가만 안 둘걸요.”채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서현에게 다가와 휴지를 더 뽑아 건넸다.“뭐야? 마서현 또 야? 코피?!”2층에서 내려오던 권지혁 실장이 서현을 발견하곤 익숙하게 놀라며 물었다.&ldq
다시 1년 뒤, 마음의 숲 출판사 안.“팀장님! 퇴근 안 하세요?”오늘의 야근 동지였던 주승이 먼저 일어서며 서현에게 물었다. 서현은 대답 없이 손만 뻗어 휘휘 흔들었다.“정말 불편하게 하시네…저녁 드실 거 사다 드릴까요?”“아니. 지금 참았다가 야식 먹을 거야. 얼른 가.”주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저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곧 서현의 비명이 들렸다.“아아아아악!”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난 서현은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그녀는 엉터리로 묶은 머리를 덜렁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문을 열고 나오자, 툭.툭……툭툭툭.난데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현의 잔발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굵어지는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그러다 마당을 가로지르던 서현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출판사 마당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서현의 눈에는 어느새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1년 전, 봄.지음과 강원도에서 웨딩 촬영을 마친 후, 두 사람은 바로 이곳 ‘마음의 숲’에서 결혼식을 올렸었다. 출판사 직원들과 함께 작은 파티처럼 치른 결혼식이었다.새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햇빛 사이로 달큰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토록 아름다운 날, 초대
그리고 그날 새벽.엎드려 잠든 서현의 머리 위로 익숙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서현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우리 서현이, 깼어?”그녀의 미몽을 틔우는 지음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서현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등을 기댄 채 비스듬히 앉아 있던 지음이 말간 얼굴로 빙글 웃어 보였다.“강지음!!”“쉬잇. 병원 사람들 다 깨우려고?”1인실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서현은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살폈다. 지음은 그런 그녀를 보며 키득거렸다.서현은 목소리를 조금 낮춰 다급하게 물었다.“다 잔 거야? 몸은 어때. 응? 사람이 무슨 일주일을 넘게 자…! 진짜…,”“그러게…미안해.”“아니야. 아니야. 진짜 잘했어. 잘했어, 강지음….”서현은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아빠를 피해 있는 힘껏 달아나 경찰서 앞에 주저 앉아 있던 날. 바보처럼 도망친 자신을 바라보며, 지음은 잘했다고 말해주었다.이번에는 서현도 그 말을 돌려주고 싶었다.“…서현아.”“응. 말해. 다 얘기해.”
1년 전, 병원 응급실 안.“선배.”서현은 이대로 보내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건하의 뒷모습을 불러 세웠다. 돌아선 건하는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해 웃어 보였다.“이대로 그냥 가려고?”서현의 물음에 건하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는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답했다.“응, 곧 뉴스에 나올 것 같아서 도망가려고 그랬지.”“그건 그거고.”따라오라는 듯 단호한 얼굴로 건하를 지나쳐 걸어가는 서현을, 건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따라갔다.응급실 빈 베드에 걸터앉은 건하의 이마에는 작은 밴드 하나가 붙어 있었다. 서현은 그런 건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오늘은 괜찮을지 몰라도 좀 지나면 여기저기 아플 수 있어. 내일이라도 병원 다시 가 봐.”“그래, 그럴게.”“그리고.”건하가 고개를 들어 서현을 올려다봤다.“언제 올 거야?”“응?”“권 팀장님, 그만두겠다고 난리셔. 윤건하가 자기한테 사기쳤다고.”건하는 픽 웃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곧 좋
“…선배?”―서현아, 너 어디야. 내가 그리로 갈게.“왜 오빠 전화를 선배가 받는지 얘기를 해줘야지.”당황함에 떨리던 서현의 목소리가 서서히 불안으로 바뀌었다.―그래, 얘기해 줄 거니까…어디야.“오빠한테 무슨 일 있구나.”그때, 서현의 핸드폰에 알림음이 울렸다.흔들리는 시야를 붙잡고 화면을 확인하자 주승이 보낸 기사 링크가 떠 있었다.[속보] ‘마음의 자리’ 강지음 작가, 라디오 스케줄 후 귀가길 교통사고서현의 손에 들려있던 편의점 봉지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건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서현아, 내가 금방 데리러 갈게.“…선배.”―응.“내가 가요. 갈 수 있어. 그런데…,”서현은 급하게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짓눌리는 듯한 고통에 얼굴을 구겼다. 꺼내려던 말이 가시가 되어 제 목구멍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혹시 오빠가…잘못…―…서현아, 다 괜찮아.그 순간 들려온 건하의 ‘괜찮아’라는 말에 서현의 입에선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