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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크리스마스이브

作者: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30 06:09:16

크리스마스이브의 명동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화려했다.

거리 곳곳에 걸린 전구들이 반짝였고, 쇼윈도마다 커다란 리본과 금빛 장식들이 빼곡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사람 키의 몇 배는 되는 거대한 트리가 세워져 있었고, 캐럴 소리가 겨울 공기를 타고 천천히 번져 나갔다.

지호는 명동성당 앞 난간에 기대 선 채 목도리를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원래는 네 사람이 함께하기로 한 자리였다.

며칠 전, 유진이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야,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에만 있을 거야? 우리 더블 데이트하자!”

동학과 휘웅, 그리고 자신까지. 당연히 네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은 이미 십 분이나 지났는데도 유진과 동학은 보이지 않았다.

지호는 몇 번째인지 모를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 순간이었다.

멀리 인파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코트에 회색 목도리를 두른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유난히 큰 키 때문인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단번에 눈에 띄었다.

강휘웅이었다.

“많이 기다렸어?”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호는 괜히 목도리 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그래?”

휘웅은 짧게 웃었다.

그 웃음 하나에 괜히 심장이 간질거렸다.

지호는 애써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유진이랑 동학 오빠는 아직도 안 왔네요.”

휘웅이 손목시계를 힐끗 내려다봤다.

“안 오나 보지.”

“설마요.”

지호는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곧장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어디야? 우리 벌써 만났는데.]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지호는 아무 생각 없이 메시지를 열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휘웅 오빠가 오늘은 둘이 있고 싶다고 우리 오지 말랬어.]

[잘 놀고 와. 괜히 전화하지 말고.]

“…뭐야?”

당황한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옆에 서 있던 휘웅이 자연스럽게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지호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오빠, 진짜예요?”

“뭐가?”

“유진이랑 동학 오빠 안 오는 거요.”

휘웅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응.”

“왜요?”

“둘이 있으면 안 돼?”

너무 담담하게 묻는 바람에 오히려 지호가 더 당황했다.

휘웅은 그런 지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표정이 꼭 속은 사람 같다.”

“…조금요.”

“실망했어?”

“그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는 지호를 보며 휘웅이 낮게 웃었다.

“다행이네.”

그 한마디에 괜히 얼굴이 뜨거워졌다.

둘은 명동 골목 안쪽의 작은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조명 아래 놓인 작은 트리와 창가에 걸린 장식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더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지호는 자꾸만 휘웅을 의식했다.

그가 물을 따라줄 때. 아무렇지 않게 접시를 자신의 쪽으로 밀어줄 때. 가끔씩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빨라졌다.

“왜 그렇게 봐?”

휘웅이 물었다.

“내가 언제요?”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잖아.”

“안 쳐다봤거든요.”

“그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지호는 괜히 포크만 만지작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잘생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표정 하나, 말 한마디에 하루 기분이 흔들렸다.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명동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거리는 더 화려해졌다.

커다란 트리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캐럴을 흥얼거리며 지나가는 연인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반짝이는 조명들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지호는 광장 중앙에 세워진 트리를 올려다봤다.

“예쁘다….”

무심코 중얼거리자, 옆에서 휘웅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휘웅이 손을 뻗었다.

“…어?”

목도리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휘웅은 아무 말 없이 목도리를 다시 감아 주었다.

차가운 손끝이 목선을 스쳤다.

“추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지호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조금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휘웅이 갑자기 장갑을 벗었다.

“껴.”

“네?”

“손 차갑잖아.”

“오빠는요?”

“난 괜찮아.”

지호가 망설이자 휘웅이 직접 장갑을 손에 쥐여 주었다.

커다란 장갑 안에는 아직 그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지호는 괜히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몇 걸음쯤 걸었을까.

문득 손등 위로 익숙한 온기가 겹쳐졌다.

휘웅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람 많으니까.”

변명처럼 덧붙인 말이 조금 우스웠다.

지호는 작게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온기만으로 충분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거리의 불빛도 하나둘 꺼져 갔다.

지호는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었다.

손을 잡은 채 걷는 속도는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이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 앞 골목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휘웅이 걸음을 멈췄다.

지호도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섰다.

낡은 가로등 아래로 희미한 불빛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겨울 공기 사이로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다 왔네.”

지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휘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표정도 아니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지호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왜 그렇게 봐요?”

한참 만에 겨우 물었다.

휘웅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냥.”

익숙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다르게 들렸다.

휘웅이 한 걸음 다가왔다.

좁아진 거리만큼 심장 소리가 커졌다.

“오늘 즐거웠어?”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

“진짜요.”

“다행이다.”

짧게 웃은 휘웅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따뜻한 손바닥이 차가운 볼을 덮었다.

지호는 그 손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휘웅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

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 위에 닿았다.

짧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한꺼번에 깨어났다.

차가운 밤공기. 타들어 가던 장작 냄새. 술기운에 흐려졌던 시야.

그리고.. 캠핑장에서의 그날 밤.

자신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조각들이 순식간에 이어졌다.

휘웅의 품. 자신을 붙잡던 손. 그리고 분명히 닿았던 입술.

지호는 놀란 눈으로 휘웅을 올려다봤다.

휘웅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웃고 있었다.

“기억났어?”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휘웅은 한동안 그런 지호를 바라봤다.

조급함과 조심스러움이 묘하게 섞인 눈빛이었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 기억 못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지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

휘웅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기댔다.

“이제는 좀 알겠어?”

“…….”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지호는 대답 대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겹쳐졌다.

멀리서 캐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지호는 그날 밤,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강휘웅은 이미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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