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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겨울이 오기 전

작가: 지호
last update 게시일: 2026-07-27 06:30:46

퇴원 수속을 마친 은주를 부축해 병원을 나서는 길은 유난히 무거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사람들로 북적이던 병원 복도는 어느새 평온을 되찾아 있었다. 하지만 지호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창밖만 바라봤다. 차창 밖으로 겨울 초입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지만, 은주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지호는 몇 번이고 말을 걸어 보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집에 도착하자, 오랫동안 비어 있던 거실 특유의 냉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었다.

지호는 엄마의 외투를 받아 걸어 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먼저 좀 쉬어. 따뜻한 물 받아 놓을게.”

은주는 희미하게 고개만 끄덕인 채 소파 끝에 앉았다.

예전 같으면 텔레비전이라도 틀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은주는 리모컨을 집어 들 힘조차 없어 보였다.

욕실에 물을 받던 지호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엄마.”

은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 사실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서 상 받았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호는 괜히 웃어 보이려 애썼다.

“대상이래.”

“...그래?”

작게 돌아온 대답이었다.

지호는 애써 밝은 척 말을 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로 만들어질 수도 있대.”

은주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다시 힘없이 시선을 떨궜다.

“축하해, 지호야.”

분명 축하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꿈꾸던 일이었다.

대학에 들어온 뒤 밤을 새워 가며 써 내려간 대본이 방송국 공모전에 당선됐고, 실제 드라마 제작 이야기까지 오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작가라는 말이 낯설었다.

드라마 제작 회의도, 대본 리딩도, 인터뷰도 전부 부담스럽기만 했다.

엄마는 여전히 무너져 있었고, 아빠를 향한 분노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지호는 가족이 무너진 자리 한가운데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런 지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휘웅이었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지호의 집에 들렀다.

은주가 약을 챙겨 먹었는지 확인하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 주고, 가끔은 저녁거리를 사 오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지호는 그런 휘웅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 있었다.

유진과 동학 역시 그런 지호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야, 윤지호.”

유진이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요즘 너무 우울해. 이렇게 계속 집에만 있으면 안 돼.”

지호는 소파에 기대앉은 채 힘없이 웃었다.

“나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거든?”

옆에 있던 동학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바람이라도 좀 쐬자. 형도 계속 너 걱정하잖아.”

지호는 무심코 맞은편을 바라봤다.

휘웅은 아무 말 없이 물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눈빛만큼은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네 사람은 초겨울 캠핑장으로 향하게 됐다.

산속 공기는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

유진과 동학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텐트를 치고 장작을 피웠다.

휘웅도 옆에서 묵묵히 일을 거들었지만, 지호는 모닥불 앞 의자에 앉은 채 한참 동안 불꽃만 바라봤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번져 갔다.

고기 굽는 냄새와 차가운 밤공기가 뒤섞였다.

유진은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 했고, 동학도 시시한 농담을 던졌지만, 지호는 제대로 웃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호는 조용히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한 잔. 그리고 또 한 잔.

“야, 너 술 원래 이렇게 잘 마셨냐?”

유진이 놀란 듯 물었지만,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운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수록 가슴속에 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결국 참아 왔던 말들이 터져 나왔다.

“나… 모르겠어.”

지호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작가 같은 거, 못 할 것 같아.”

휘웅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냥 다 싫어.”

지호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것도 싫고, 인터뷰하는 것도 싫고…. 다 부담스러워.”

그녀는 한숨처럼 웃었다.

“엄마는 아직 저런데, 나 혼자 잘된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유진과 동학이 조용히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잠시 뒤, 동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장작 좀 더 가져오자.”

“어? 어, 그래.”

유진도 아무렇지 않은 척 따라 일어났다.

순식간에 남겨진 건 지호와 휘웅, 둘뿐이었다.

휘웅은 지호 앞에 놓인 술잔을 조용히 치웠다.

“그만 마셔.”

“나 안 취했어요.”

“취했어.”

“아니거든요?”

휘웅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 깨게 산책하자."

캠핑장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지호는 몇 걸음 걷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휘웅이 자연스럽게 팔을 잡아 세웠다.

“봐. 취했다니까.”

“안 취했다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에는 이미 술기운이 묻어 있었다.

둘은 가까운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사람들 웃는 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다 지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처음엔 사랑했겠지.”

휘웅이 고개를 돌렸다.

지호는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결국 이렇게 됐잖아.”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없어.”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다.

“다 변하는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지호는 천천히 휘웅을 돌아봤다.

붉게 젖은 눈이었다.

“오빠도 언젠가는 변할 거야.”

휘웅의 표정이 굳었다.

지호는 술김에 내뱉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다 떠나잖아.”

“...지호야.”

“아니야?”

지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세상에 영원한 게 어디 있어.”

휘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상처받았다는 게 얼굴에 드러났다.

그는 누구보다 지호를 좋아했고,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지호가 무너질 때마다 곁을 지켰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지호는 자신의 마음까지 한꺼번에 밀어내고 있었다.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미안. 나 먼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팔목이 붙잡혔다.

“지호야.”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지호가 천천히 돌아섰다.

휘웅은 그녀를 붙잡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안 그래.”

지호의 눈이 흔들렸다.

휘웅은 천천히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의 목소리만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

“나는 안 변해.”

순간, 지호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휘웅이 그녀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단호한 품이었다.

지호는 처음에는 굳어 있었지만, 이내 힘없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차가운 겨울밤이었다.

하지만 휘웅의 품만은 따뜻했다.

“네 아버지가 어땠는지, 네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도 다 알아.”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근데 그걸 나까지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지는 마.”

지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모든 시간이 휘웅에게는 진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지호는, 그 마음마저 한순간에 부정하고 있었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함부로 정하지 마.”

순간, 지호의 눈가가 붉어졌다.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휘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지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차가운 손끝이 뺨을 스치자, 지호는 숨을 삼켰다.

“오빠…”

떨리는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휘웅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너무 조심스러워서, 지호는 처음에는 그게 정말 키스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사이로 닿은 입술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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