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지호는 휘웅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뜨거운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며칠 동안 억지로 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병실의 차가운 공기, 새벽마다 울리던 심전도 소리, 정신을 잃은 듯 누워 있는 엄마의 얼굴,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이혼 서류를 들먹이던 아빠의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뒤엉켜 지호를 짓눌렀다.
휘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고, 괜찮냐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지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릴 뿐이었다.
지호는 그의 옷깃을 꽉 움켜쥔 채 울음을 삼키려 했지만, 그럴수록 눈물은 더 쏟아졌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울음 사이로 겨우 흘러나온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괜찮아.”
휘웅이 낮게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지호는 결국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목은 따끔거렸고, 눈가는 부어 있었다. 지호는 뒤늦게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고개를 숙였다.
휘웅은 그런 지호를 그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지호는 떨리는 숨을 한 번 삼킨 뒤 겨우 입을 열었다.
“엄마가…… 많이 아프세요.”
휘웅의 표정이 굳어졌다.
“많이 안 좋으셔?”
지호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병원에 계세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또 욱신거렸다.
지난 이틀 동안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병실 침대 위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호는 그런 엄마 곁을 지키며 밤을 꼬박 새웠다. 의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간호사가 몇 번이나 병실을 오갔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단 하나였다.
엄마가 눈을 감고 누워 있던 모습.
그리고 아버지가 전화 너머로 건넨 싸늘한 목소리.
휘웅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지호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신의 쪽으로 조금 더 바짝 붙였다.
휘웅의 어깨에 기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호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마자 쏟아진 잠이었다. 마지막 기억은 휘웅의 어깨와 체온,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받쳐 주던 그의 품이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지호의 집으로 들어와 있었다.
지호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현관문을 어떻게 열었는지, 언제 신발을 벗었는지, 언제 소파에 앉았는지.
정신을 차려 보니, 휘웅이 주방에서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오빠.”
“응.”
“나…….”
지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무섭다고 해야 할지. 힘들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울고 싶다고 해야 할지.
그런 지호를 바라보던 휘웅이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아무 말 안 해도 돼.”
지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오빠, 안 가요?”
지호가 힘없이 묻자, 휘웅이 돌아봤다.
“너 지금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
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지 않았다.
엄마가 없는 집은 낯설었고, 거실 한구석에 남아 있는 깨진 액자의 흔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던 걸까.
휘웅은 더 묻지 않았다.
“가서 좀 자.”
“잠 안 올 것 같은데.”
“그래도 자야 해.”
지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눕힌 순간, 긴장이 풀린 몸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잠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눈꺼풀은 계속 감겼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문틈 사이로 보이던 휘웅의 뒷모습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눈을 떴을 때, 창문 사이로 희미하게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지호는 멍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자신이 어디 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어젯밤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다.
엄마. 병원. 이혼. 그리고 휘웅.
지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갔다.
식탁 위에는 따뜻하게 데워 먹으라는 메모와 함께 간단한 아침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충전기에 연결된 휴대폰이 반짝이고 있었다.
휴대폰을 집어들자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대부분은 유진이었다.
'너 어디야?'
'전화 좀 받아.'
'걱정돼.'
짧은 문장들이 화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휘웅의 부재중 전화도 여러 통 남아 있었다.
지호는 한참 동안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마지막 메시지를 열었다.
[밥 챙겨 먹고 병원 가.]
평소처럼 짧고 담담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한 줄이 가슴을 울렸다.
그제야 배고픔이 밀려왔다.
지호는 식탁에 앉아 휘웅이 준비해 둔 아침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따뜻한 국 한 숟갈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여전히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은 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지호는 조용히 엄마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엄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 왔어.”
희미한 숨소리만 병실 안을 맴돌았다.
지호는 엄마를 몇 번이고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호의 가슴 한구석에서 서서히 분노가 차올랐다.
아버지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고, 손을 잡아 준 적도 없었다.
집 안에 있어도 늘 멀리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결국.
가족을 이렇게 무너뜨린 것도 그 사람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병실 밖 복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가는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였다.
지호가 고개를 든 순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유진의 이름이 떠 있었다.
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지 못한 채 휴대폰만 내려다봤다.
복도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누군가 왔다가 돌아간 것처럼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게 오갔다.
하지만 병실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첫 촬영일 아침, 스태프들 사이에서 잠깐 술렁임이 일었다.“이 씬, 언제 추가된 거예요?”조연출이 수정된 페이지를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대본에는 없던 장면이었다.남편이 이혼을 종용하다 아내의 뺨을 때리고, 그 바람에 테이블 위 물건들이 쓸려 나가며 액자가 깨지는 장면. 새벽 다섯 시에 전달된 수정본이었다.“작가님이 어젯밤에 새로 보내셨대요.”누군가의 대답에 조연출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다시 스태프들을 불러 모았다.촬영장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대본이 촬영 직전까지 수정되는 것도, 그 이유를 굳이 캐묻지 않는 것도.다만 남편 역을 맡은 배우만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새 대본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이거 실제로 손이 닿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면 액션만 크게 잡을까요?”그가 조심스럽게 묻자, 감독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살짝만 닿게. 위험하지 않게, 하지만 진짜처럼 보이게.”지호는 모니터 뒤편, 스태프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오늘은 유난히 일찍 나왔다. 자신이 써넣은 그 장면이 실제로 어떻게 찍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세트장은 지호의 옛집 거실과 놀랄 만큼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물론 미술팀이 대본을 보고 만든 공간일 뿐, 실제로 그 집을 알 리는 없었다.그런데도 소파의 위치,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까지 어딘가 낯익어서, 지호는 세트장에 들어설 때마다 잠깐씩 숨이 막혔다.벽지 색깔도, 테이블 다리 모양도 전혀 다른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휘웅이었다. 제작사 대표라는 직함이 있으니 첫 촬영일에 얼굴을 비추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스태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그는 카메라 각도를 확인하는 척하며 계속 지호 쪽을 살폈다.지호는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애초에 알아챌 여지가 없었다.지호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면 습관처럼 시선을 낮추거나 한곳에만 고정했다.여러 사람의
내일이면 첫 촬영이었다.지호는 노트북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내일부터 촬영이야. 정신 똑바로 차리자.'몇 달을 준비해 온 일이었다. 대본은 이미 완성됐고, 캐스팅도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실제로 그 장면들이 화면 위에 펼쳐지는 걸 지켜보는 일뿐이었다.그런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지호는 침대에 누워 몇 번이나 뒤척였다.눈을 감으면 내일 스케줄이 떠올랐고, 스케줄을 떠올리면 다시 잠이 달아났다. 결국 몸을 일으켜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눕고, 또 뒤척이기를 반복했다.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벽에 희미한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이어지는 방 안에서, 지호는 그 희미한 빛줄기를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내일이면 몇 달간 준비해 온 모든 것이 실제 화면으로 태어난다. 그 사실이 설레면서도 동시에 무섭게 느껴졌다.뒤척이던 지호는 결국 자정을 훌쩍 넘기고서야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그리고 꿈을 꿨다.익숙한 거실이었다. 깨진 액자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낯익은 서류 뭉치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종이 위에 굵게 박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이혼 합의서.십 년도 더 지난 그날이었다. 지호는 꿈속에서도 그 냄새를, 그 공기를, 그 적막을 그대로 느꼈다.엄마에게 달려가 어깨를 흔들던 자신의 손끝까지 생생했다.그날의 거실 온도,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오후의 빛깔, 발밑에서 바스러지던 유리 조각의 감촉까지도 하나하나 되살아났다.그런데 문득, 낯선 생각이 스쳤다.'엄마가…… 맞았던가?'기억이 흐릿했다. 분명 쓰러져 있었다. 분명 울고 있었다.그런데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지호는 자신할 수 없었다.맞아서 쓰러진 건지, 그냥 주저앉은 건지. 스무 살, 정확히 그날이었다.휘웅과 사귀기로 한 바로 그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었는데도, 정작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 중 몇몇은 너무 여러 번 다
첫 촬영을 사흘 앞둔 날, 의상 피팅이 있었다.지호는 원래 이런 자리에는 잘 나가지 않았다. 대본만 넘기면 그만이었고, 배우들의 옷차림이나 소품까지 일일이 확인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여겨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의상팀에서 배우들의 실루엣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지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가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 누가 오는지,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스튜디오는 강남 어느 골목의 낡은 건물 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지호는 괜히 숨이 찼다. 고작 3층인데도 유난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쪽에서는 이미 몇몇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재봉틀 소리와 옷걸이 부딪히는 소리, 스태프들이 오가며 나누는 대화 소리가 뒤섞여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지호는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손에 쥔 대본을 몇 번이고 폈다 접었다 했지만, 정작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렸다.송경숙이었다.화면 밖에서 보는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텔레비전이 유난히 예쁘게 담아내는 얼굴이 아니라, 실제로도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자세가 흐트러짐 없는 사람이었다. 지호는 어릴 때부터 저 얼굴을 셀 수 없이 봐 왔다. 드라마 속에서, 광고 속에서, 그리고 훨씬 더 오래전, 자신의 집 거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그 시절 지호는 그저 어린애였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저 사람이 화려하고 아름답다고만 생각했지, 저 얼굴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실제로 서 있었다.지호는 순간 숨을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화가 나는 건지, 긴장이 되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꽉 움켜쥔 채, 지호는 애써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다.“작가님이시죠?”송경숙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목소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분명히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다.그런데도 휘웅은 결국 미팅이 열리는 건물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회의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지호가 나오는 걸 먼발치에서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스스로도 우스운 변명이라는 걸 알았지만, 몸은 이미 그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건물 로비 근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자리에 서서 휘웅은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지호가 나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그 배우,진섭이 옆에 있었다. 두 사람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차에 올라탔고, 휘웅은 저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갔다.멀리서 지켜본 지호는, 그가 알던 어떤 모습과도 달랐다.밝게 웃고 있었다. 진섭이 무슨 말을 했는지, 지호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이 차창 너머로 보였다.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다시 무언가 대꾸하는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유진과 동학이 말했던, 10년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던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휘웅은 혼란스러웠다.분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지호는 자신을 철저히 외면했다.시선 한 번 주지 않았고, 목소리에는 온기가 없었다.그건 유진과 동학이 말했던,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의 얼굴과 정확히 일치했다.그런데 오늘, 진섭과 함께 있는 지호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그냥, 여느 서른 초반의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잘 웃고, 편안해 보이고,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이는 얼굴.'뭐가 진짜야.'세 개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자꾸 어긋났다. 갓 스물 사랑에 빠진 얼굴. 10년을 갇혀 지냈다는 얼굴. 그리고 지금, 저렇게 편안하게 웃고 있는 얼굴.휘웅은 자신도 모르게 차를 몰아 그 뒤를 쫓았다. 얼마 가지 않아 차가 어느 골목 앞에서 멈췄고, 두 사람은 작은 치킨집으로 들어갔다.휘웅은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채, 불 켜진 유리창 너머를 오래도록 지켜봤다. 치킨과 맥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지호가 뭔가에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
오늘은 스케줄이 없다며, 진섭이 먼저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저 오늘 완전 한가해요. 데려다드릴게요.""저 혼자 갈 수 있는데.""저도 혼자 있을 수 있어요. 근데 안 그러고 싶어서 그래요."능청스러운 대답에 지호는 결국 거절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지호의 오피스텔에서 약속 장소인 강남 사거리까지는 차로 삼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하지만 진섭의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는 그 시간이 삼십 분이 아니라 삼 분처럼 느껴질 만큼 즐거웠다.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가요를 진섭이 따라 부르다가 음정을 심하게 놓쳐서 지호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신호 대기 중에는 지난주 드라마 오디션에서 있었던 웃긴 에피소드를 늘어놓기도 했다.지호는 그 시간이 편안했다."긴장돼요?""조금요.""괜찮아요. 저번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때는 스태프한테 쫓겨날 뻔했잖아요.""그 얘기 좀 그만해요."지호가 눈을 흘기자 진섭이 크게 웃었다.그렇게 도착한 미팅 장소는 회의실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넓고 조용했다.이미 감독과 CP, 몇몇 스태프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지호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였지만, 다행히 예전만큼 낯설지는 않았다. 몇 번 마주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자리에 앉자, 감독이 먼저 가볍게 말을 붙였다."작가님, 제작은 정말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어요. 저는 솔직히 송경숙 배우는 캐스팅은 안 될 줄 알았거든요.""그러게요."옆에서 유경훈 CP도 거들었다."한물간 배우 취급받는 것도 싫어하실 텐데, 의외로 쉽게 오케이 하셨더라고요.대표님이 직접 만나서 설득하셨다고 하던데, 그 자리에서 뭐라고 하셨는지 저도 궁금하다니까요.""두 분이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렇게 빨리 마음을 돌리셨을까요."감독도 궁금한 듯 말을 보탰다. 다른 스태프 하나가 웃으며 끼어들었다."대표님이 워낙 진심이시니까요. 저희 회의 준비하는 것만 봐도 알잖아요, 이 작품에 얼마나 공을 들이시는지."지호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
휘웅은 며칠 전부터 송경숙의 출연 이력을 다시 훑어보고 있었다. 오래 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잊힌 배우는 아니었다. 무대 위에 오래 서 본 사람, 한 번쯤 전성기를 지나고도 쉽게 무너지지 않은 사람. 이번 작품의 부잣집 사모님 역할에는 그런 얼굴이 필요했다.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은 끊임없이 무너지는 사람. 남편의 외도와 집안의 균열, 재산 싸움과 이혼 소송까지 견뎌야 하는 인물. 그저 안쓰러운 피해자로만 소비되면 안 됐다. 버티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얼굴. 휘웅은 그게 송경숙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직접 만나기로 했다. 캐스팅 제안서만 보내는 방식으로는 부족했다. 이 인물은, 말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는 배우였다.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카페에 도착한 휘웅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메뉴판을 펼쳐 보지도 않은 채, 손가락만 테이블 위에 가볍게 올려둔 채였다. 카페 안은 조용했다. 늦은 오후의 빛이 유리창을 타고 번졌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 대화에만 잠겨 있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오늘의 자리를 더 분명하게 만들고 있었다.잠시 뒤 문이 열렸다. 휘웅이 고개를 들자, 검은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린 송경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단정했고, 생각보다 더 또렷한 인상이었다. 오랜만에 카메라 앞이 아니라도 여전히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늦지 않았죠?”경숙이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는 가볍게 던진 것 같았지만, 그 안에는 익숙한 여유와 거리감이 함께 있었다. 쉽게 허락하지도, 쉽게 무너지지도 않을 사람의 태도였다.휘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아닙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경숙은 그를 한 번 훑어보더니 맞은편에 앉았다.“대표님이 직접 나오셔서 밥까지 사주신다는데, 안 올 수가 없더라고요.”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말은 꽤 정확했다. 직접 나온다는 건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그만큼 설득할 의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경숙은 그런 계산을 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