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캠핑장에서 돌아온 날 밤, 지호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침대에 누웠다.
며칠째 이어진 병간호와 낯선 환경 때문이었는지,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따뜻한 이불을 끌어당겼는데도 어딘가 으슬으슬했다.
눈을 감자마자 잠은 금세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피곤해서 쓰러지듯 잠들었는데, 꿈속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와 장작 타는 냄새, 희미하게 들려오던 웃음소리까지 생생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휘웅이 있었다.
꿈속의 휘웅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밤인데도 이상하게 얼굴만 또렷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는 순간, 지호는 숨을 삼켰다.
곧이어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쌌고, 뜨거운 체온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
지호는 꿈이라는 것도 잊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
다음 순간, 지호는 이불을 걷어찬 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머리는 지끈거렸고, 얼굴은 뜨거웠다.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지호는 이마를 짚었다.
“...미쳤나 봐.”
그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분명 꿈이었다.
그런데 너무 생생했다.
휘웅의 손끝이 닿았던 감각도, 숨결도, 심지어 어렴풋한 향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지호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몸부림쳤다.
“아, 진짜 왜 이래.”
평생 남자친구 한 번 제대로 사귀어 본 적 없었다.
작가 지망생답게 대본 속에서는 여러 번 키스 장면을 써 봤지만, 정작 현실의 자신은 뽀뽀 한 번 해 본 적 없는 스무 살이었다.
그런데 키스하는 꿈이라니...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지호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다음 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지하철을 타는 내내 머릿속은 어젯밤의 꿈으로 가득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그 꿈이 조금도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선명해져 가고 있다는 거였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괜히 붉어 보였다.
'설마 진짜 음란마귀가 씐 건 아니겠지.'
지호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 화면만 만지작거렸다.
휘웅에게서 온 메시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도착하면 연락해.]
딱 한 줄.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문장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심장을 간질였다.
카페 문을 열자 먼저 와 있던 휘웅이 보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검은 니트 위로 걸친 회색 코트, 아무렇게나 넘긴 머리, 길게 뻗은 다리까지.
언제 봐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왔어?”
휘웅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네.”
지호는 괜히 어색해져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자리에 앉고 나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각했다.
휘웅이 컵을 들어 커피를 마실 때마다 자꾸만 시선이 입술로 향했다.
커피를 머금는 입술. 무표정하게 다물려 있는 입술. 가끔 피식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오늘따라 유독 눈에 들어왔다.
'미쳤다, 진짜.'
지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그쪽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왜?”
휘웅이 불쑥 물었다.
“네?”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잖아.”
“...누가요?”
“윤지호.”
너무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지호는 괜히 컵을 들어 올렸다.
“안 봤거든요.”
“그래?”
휘웅이 턱을 괸 채 웃었다.
분명 평소와 똑같은 말투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괜히 사람을 더 민망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지호는 괜히 창밖만 바라봤다.
그때 휘웅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캠핑은 어땠어?”
“...좋았죠.”
“그게 끝?”
“뭐가요.”
지호는 머뭇거렸다.
좋았다. 분명 좋았다.
하지만 왜 좋은지 설명하려고 하면 자꾸만 기억나지 않는 밤이 떠올랐다.
“그냥…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머리도 식히고.”
휘웅이 피식 웃었다.
지호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정작 자신이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어젯밤. 정확히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그리고 그 꿈.
그런데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순간, 휘웅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꽤 특별한 밤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지호의 손이 멈췄다.
“...특별한 밤이요?”
“응.”
휘웅은 여전히 느긋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너무 태연해서 더 수상했다.
“저는 술에 취해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
“...네.”
휘웅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럼 다행이네.”
“뭐가요?”
“혹시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줄 알고 걱정했거든.”
지호는 눈을 깜빡였다.
“기억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일이 있었어요?”
휘웅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대답보다 더 많은 걸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지호는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기억나는 건 모닥불과 밤공기뿐이었다.
결국 지호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기… 진짜로요.”
휘웅이 컵을 내려놓았다.
“응?”
“제가 어제 뭐 실수한 거 아니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휘웅은 그런 지호를 빤히 바라보더니, 아주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아, 진짜.”
지호가 얼굴을 붉히며 투덜거렸다.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
그 말에 휘웅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몸을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캠핑 가자.”
“...갑자기요?”
“응.”
“왜요?”
휘웅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때는 네가 안 잊어버릴 만큼 더 기억에 남는 추억 만들어 주려고.”
순간, 지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오, 오빠는 그런 말을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요?”
“내가?”
“네.”
휘웅은 웃으며 다시 커피를 마셨다.
붉은 입술이 컵에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지호는 또다시 괜히 그 입술만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는데, 꿈속에서조차 그 사람의 얼굴이 선명한 걸까.
창밖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다가오는 연말을 기다리며 들떠 있었고, 카페 창문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반짝였다.
하지만 지금 지호의 머릿속에는 캐럴도, 크리스마스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강휘웅.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그 밤뿐이었다.
유치원 정문 앞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도 어느덧 다섯 해가 흘러 있었다.색색의 풍선과 현수막이 걸린 마당에는, 새 옷을 차려입은 아이들과 그 손을 붙잡은 부모들로 가득했다.봄기운이 완연한 아침, 하늘은 유난히 맑고 청명했다.여기저기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부모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지호도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그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엄마, 저기 봐! 풍선이야!”지민이가 눈을 반짝이며 마당 한쪽을 가리켰다.다섯 살이 된 지민이는, 어느새 제법 또렷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서툴렀던 발음도, 이제는 제법 야무졌다.“그러네. 이따가 선생님이 나눠 주실 거야.”지호가 웃으며 지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줄지어 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바로 지민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큰 키. 동그랗고 맑은 눈. 오똑하게 솟은 콧날.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까지도.누가 봐도, 아빠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처음 지민이를 품에 안았을 때부터,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말하곤 했다.지나가던 다른 학부모들도, 지민이를 보며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많이 컸네.”옆에서 함께 걷던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목소리에는 뿌듯함과 약간의 서운함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이제 곧 아이 곁을 떠나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두고 와야 한다는 사실이, 어쩐지 아쉬운 눈치였다.그런 그의 모습이, 지호는 새삼 낯설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그러게. 벌써 다섯 살이라니.”지호도 감회에 젖은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처음 이 아이를 품에 안았던 순간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밤새 뒤척이던 신생아 시절, 열이 올라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들,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던 순간,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 주던 그날까지.그 하나하나가 지호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그 조그맣던 아기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 유치원에 입학하고 있었다.“선생님이랑 인사하고
시간은 다시 한 계절을 지나 흘러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임신 소식을 확인하기까지, 두 사람에게는 나름의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업실 책상 위, 휴대폰이 울린 건 오후 무렵이었다. 한창 원고 마감에 몰두하던 지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화면을 확인했다.낯선 번호였다. 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작가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전화를 건 사람은 20살 지호가 응모했던 단편 공모전 관계자였다. 지호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스무 살 무렵의 일이니,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왜 연락이 온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죄송한데, 어떤 일로…….”“그때 당선작이었던 「첫사랑」 있잖아요. 그 대본이, 이번에 영화로 제작하기로 확정됐어요.”지호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정말요? 그게, 진짜예요?”“네, 진짜예요. 제작사 쪽에서 원작자이신 작가님께 판권 계약 관련해서 곧 연락드릴 거예요. 축하드려요.”몇 마디 더 인사를 주고받은 뒤, 통화는 끝이 났다. 전화를 끊고도, 지호는 한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사실 오늘 오전에는 또 다른 일이 있었다.며칠째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지호는, 아침 일찍 병원을 다녀왔다.진료실에 들어서면서도 반신반의했는데, 의사가 건넨 소식에, 지호는 한참 동안 실감하지 못한 채 진료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작은 초음파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 나오는 길, 지호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떠 있었다.이 소식을 어떻게, 언제 전해야 할지, 지호는 병원을 나서면서부터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저녁에 조용히 이야기할지, 아니면 깜짝 놀래켜 줄지, 마음이 자꾸만 오락가락했다.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첫사랑」 소식이 겹쳐서 찾아온 것이었다.하루에 이렇게 큰 소식이 두 개나 겹치다니, 지호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
오후 일정 사이, 잠시 짬이 났다.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오전 내내 정신없이 흘러갔던 시간들이, 잠깐이나마 느슨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작은 유리 문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몇 년 전, 지호가 선물이라며 무심하게 건넸던 물건이었다.“이거 그냥 예뻐서 산 거야. 딱히 의미 없어.”그때 지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그 문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곤 했다. 별거 아닌 그 말 한마디도, 지호다운 무심한 다정함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값비싼 것도,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녀가 직접 골라 건넨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휴대폰을 들어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문득, 그녀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을 뿐이었다.[오늘 저녁 뭐 먹고 싶어?]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잠시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렇게 답장 하나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마저도, 요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이 났을 법한 순간인데, 지금은 오히려 그 기다림조차 여유롭게 느껴졌다.몇 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음... 아무거나? 근데 오늘 나 원고 잘 풀려서 기분 좋아!]이어서 이모티콘 몇 개가 따라왔다. 그는 그 짧은 메시지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화면 속 몇 글자만으로도, 오늘 그녀가 얼마나 신나 있을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하루가 한결 밝아지는 기분이었다.[잘됐네. 그럼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좋아!]짧은 대답 하나에 붙은 느낌표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오늘 저녁, 어느 식당으로 갈지 벌써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짧은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몇 년째 이렇게 사소한 것들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런 순간들이 새롭게 느껴졌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고, 결혼한 지도 어느덧 몇 해가 흘렀다.신혼 초의 어색함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일상만이 남아 있었다.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지호는 먼저 눈을 떴다.창밖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불에 남은 온기만이,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말해 주었다.지호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온기를 조금 더 느껴 보았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낮게 들려오고 있었다.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지호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섰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실루엣이, 주방 불빛 아래 어렴풋이 비쳤다.식탁 위에는 이미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토스트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매일 아침 이렇게 소박한 식사를 준비해 주는 손길이, 언제부터인가 지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 되어 있었다.접시 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가 유독 예쁘게 익어 있었다.“일어났어?”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 앞에 앉았다. 몇 년째 듣고 있는 목소리인데도, 아침마다 이렇게 듣는 게 여전히 좋았다.“오늘도 일찍 나가야 해?”“응,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서.”그가 짧게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겉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눈에 들어왔다.지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사소한 아침 풍경이 여전히 낯설고도 감사하게 느껴졌다.매일 반복되는 이 일상이, 지호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기적처럼 느껴지곤 했다.“다녀올게.”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가 말했다.“응, 조심히 다녀와.”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을 나갔다.문 앞에 선 그가 몸을 숙여, 지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손끝이 지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그 짧은 손길만으로도, 하루를 시작할 힘이 절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매일 반복되는 이 인사가, 지호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었다.현관문이
맑게 갠 어느 토요일, 웨딩홀 대기실 거울 앞에 선 지호는, 자신의 모습이 아직도 낯설게 느껴졌다.새하얀 드레스, 정성스럽게 올린 머리, 평소보다 훨씬 진하게 그려진 눈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오늘따라 유독 눈부셨다. 지호는 거울 속 자신을 향해 짧게 심호흡을 했다.“지호야, 너 진짜 예쁘다.”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유진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화사한 색의 하객 드레스를 입은 유진의 얼굴에도, 이미 감격이 가득했다. 손에는 작은 꽃다발까지 챙겨 온 상태였다. 뒤따라 들어온 동학도 헛기침을 하며 눈시울을 훔쳤다.“야, 너 우는 거야?”“아니거든?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동학이 애써 딴청을 피우자, 유진이 옆구리를 찌르며 웃었다. 십 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들의 이런 실없는 농담이, 오늘따라 유독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함께 걸어온 오랜 시간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떨려?”유진이 지호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응, 조금.”지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불안보다는 설렘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려 왔던 오늘이, 마침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그래도 좋아 보여. 진짜 행복해 보인다, 너.”동학이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지호는 그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늘 곁을 지켜 준 이 친구들이, 오늘도 이렇게 함께해 준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웨딩홀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환하게 밝혀진 홀 안으로 하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짧은 순간, 하객석 맨 뒤쪽 구석 자리로 시선이 스쳤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다른 하객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윤용석이었다.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먼발치에서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옅게 고개를
노을이 붉게 번지는 해변, 휘웅과 지호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녁 식사 자리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지호야!”휘웅의 부름에 지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휘웅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절박함이 스쳐 있었다. 지호는 이 순간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왜요.”담담한 지호의 목소리에, 휘웅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몇 주간, 아니 몇 년간 참아 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정작 입 밖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해변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그냥…… 궁금해서.”한참 만에야, 휘웅이 겨우 그렇게 말을 이었다. 말을 고르고 또 고르다, 결국 가장 단순한 문장 하나만 남았다.“우리, 이대로 괜찮은 건지.”지호는 잠시 말없이 휘웅을 바라봤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래도록 참아 왔던 말을 이제야 꺼낼 시간이라는 걸, 지호는 알고 있었다.“나, 대표님 덕분에 지난 십 년 동안 많이 성숙해졌어요.”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그리고 이제는, 그 십 년을 놓아주고 싶어요. 스무 살의 강휘웅이랑 윤지호는요.”휘웅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말을 직접 듣자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대신…….”지호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문장을 위해, 지호는 며칠 밤을 뒤척였다.“작가 윤지호랑, 대표 강휘웅으로. 이 드라마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요?”정적이 흘렀다. 파도 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휘웅은 그 말의 뜻을 천천히 곱씹었다. 이별을 고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청하는 말인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호의 눈빛만이,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진지해 보였다.“그 말은…….”휘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