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다음 날 아침, 지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지끈거리는 숙취와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었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낯설지 않은 천장이었다. 어젯밤 유진과 함께 텐트에 들어와 잠들었던 기억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의 기억이 통째로 잘려 나간 것처럼 흐릿했다.
지호는 눈을 감은 채 이마를 꾹 눌렀다.
머리가 무거웠다.
텐트 천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아침 공기가 차갑게 뺨을 스쳤다. 멀리서 새 우는 소리와 누군가 장작을 정리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분명 어젯밤까지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유진이 떠들고, 동학이 웃고, 휘웅은 맞은편에서 조용히 술잔을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는 마치 누군가 가위로 잘라낸 것처럼 비어 있었다.
'내가 어제 뭐라고 했더라.'
떠올리려 할수록 머릿속은 더욱 하얘졌다.
엄마 이야기. 아빠 이야기. 그리고 술기운을 빌려 쏟아냈던 서툰 진심들.
어렴풋이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지호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지호는 무심코 손끝으로 아랫입술을 만졌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뭐야….”
작게 중얼거린 지호는 괜히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텐트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캠핑장은 막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유진은 패딩을 껴입은 채 버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라면 물을 올리고 있었고, 동학은 옆에서 의자와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 윤지호! 드디어 일어났네?”
유진이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너 어제 완전 뻗었잖아.”
지호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많이 마셨어?”
“많이 마셨지.”
동학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괜찮더니 갑자기 훅 가더라.”
“야, 나 창피한 짓 한 건 아니지?”
유진은 일부러 고민하는 척 턱을 괴었다.
“음….”
“뭐야, 왜 그래?”
“농담이야.”
유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좀 울고, 좀 취하고, 좀 힘들어했지.”
지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닿았다.
휘웅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코펠에 물을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검은 후드 위에 회색 패딩을 대충 걸친 차림이었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앉은 옆모습은 평소처럼 차분했고, 특별히 달라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인지 모르게 시선이 자꾸만 그쪽으로 향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놓고 온 사람처럼.
그때, 휘웅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일어났네.”
낮고 잠긴 목소리였다.
“네.”
지호는 괜히 어색해져 짧게 대답했다.
휘웅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종이컵 하나를 지호 쪽으로 내밀 뿐이었다.
“마셔.”
따뜻한 꿀물이 담겨 있었다.
“고마워요.”
종이컵을 받아 든 지호는 뜨거운 온기에 손끝을 녹였다.
그런데 꿀물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휘웅의 얼굴이었다.
그는 분명 평소와 똑같았다.
그런데 왜인지 오늘은 자꾸만 눈을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을 더 오래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지호는 괜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진짜 이상한 소리 했나…?'
아침을 먹는 내내 묘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유진은 전날 동학이 장작을 잘못 패서 손에 물집이 잡혔다는 이야기로 한참을 놀렸고, 동학은 억울하다는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지호도 웃었을 이야기였다.
그런데 오늘은 자꾸만 의식이 다른 곳으로 흘렀다.
휘웅이었다.
그가 컵을 들어 물을 마실 때. 라면을 퍼 줄 때. 무거운 아이스박스를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릴 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게 더 낯설었다.
“왜 그렇게 봐?”
갑자기 들려온 유진의 목소리에 지호가 화들짝 놀랐다.
“뭘?”
“아까부터 멍하니 있길래.”
“아니거든.”
지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유진은 그런 지호를 수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곧 동학과 다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반면 휘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멀리 앉아 묵묵히 캠핑 장비를 정리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호는 그 침묵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
점심 무렵, 네 사람은 캠핑장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짐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휘웅은 늘 그렇듯 가장 무거운 짐부터 먼저 들었다.
텐트를 접고, 의자를 정리하고, 트렁크를 채우는 동안 지호는 몇 번이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게 오히려 지호를 더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동학과 유진은 뒷좌석에 타자마자 금세 잠들었다.
차가 캠핑장을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자 창밖으로 겨울 풍경이 천천히 흘러갔다.
차 안에는 라디오 소리만 작게 울렸다.
지호는 괜히 창밖만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의 장면 하나가 아주 희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모닥불. 차가운 공기. 그리고….
“...지호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네?”
휘웅은 앞만 바라본 채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제.”
그 한마디에 지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끝이 저도 모르게 움켜쥐어졌다.
“어제… 많이 취했더라.”
“...아.”
지호는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죄송해요.”
“왜 네가 미안해.”
“민폐 끼쳤을까 봐.”
휘웅은 작게 웃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운 뒤,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았어.”
짧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지호는 이유도 없이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괜찮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알고 싶으면서도 묻기가 두려웠다.
“정말요?”
지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휘웅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응.”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생각보다.”
초록불이 켜지고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대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귀 끝까지 붉게 물든 얼굴. 이유를 모르는 두근거림. 그리고 어젯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
분명 머리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지호는 더 이상 휘웅을 예전처럼 바라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휘웅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심장이 한 박자씩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대표님.”문이 열리며 유경훈이 서류를 든 채 들어왔다. 노크는 했지만,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마저 밀고 들어온 참이었다. 그는 방 안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었다.“윤지호 작가는 언제 만나실 거예요?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윤지호?”송경숙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유경훈이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봤다. 여전히 방 안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한 얼굴이었다.“…네, 저희 작가님이요. 왜 그러세요?”송경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낮게 되뇌었다.“윤지호.”입 안에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굴렸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어디서 들었는지, 처음엔 떠오르지 않았다.마치 오래된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고 잊고 있던 물건을 다시 꺼내려는 것처럼, 기억이 손끝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윤지호…… 윤지호……”그러다, 순간.머릿속에서 뭔가가 번쩍였다.“아……!”송경숙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 여자 작가, 이름이 윤지호였어요?”유경훈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는데요. 왜 그러세요, 대표님도 그렇고 두 분 다 왜 그러세요.”송경숙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허공 어딘가에 고정된 채, 빠르게 과거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윤. 지호.그 성.그리고 그 나이.지금 이 드라마 속 딸 캐릭터의 나이와, 그날 이후 흘러간 세월을 더해 보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나이였다.“…윤용석.”송경숙이 낮게 중얼거렸다.“윤용석 사장. 그 사람 딸 이름이…… 지호였지.”정확히 기억났다. 오래전, 아직 결혼 얘기가 오가기도 전에, 윤용석의 입에서 몇 번 스치듯 나왔던 이름이었다.딸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 무심하게 흘리듯 말했었다.'지호가 요즘 학교 다니느라 바쁜가 보더라고
촬영이 끝나자마자, 송경숙은 대본을 챙겨 들고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매니저가 뒤따라오며 다음 스케줄을 물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먼저 가. 나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갈 데가 있어.”“어디를요? 오늘 스케줄 다 끝난 거 아니에요?”“상관없어. 나 혼자 갈게.”매니저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챘지만, 더 캐묻지 못했다. 송경숙은 그대로 자신의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운전대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조수석에 던져 둔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봐도, 그 장면은 변하지 않았다. 이혼 서류. 마르지 않은 잉크. 서둘러 잡힌 결혼 날짜.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떼어 온 것 같은 문장들.제작사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안에도, 송경숙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누가 알고 있었을까. 어떻게 알았을까.'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기획하고, 자신을 그렇게까지 공들여 캐스팅했던 사람.대표실 앞에 도착했을 때, 송경숙은 망설이지 않았다.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비서가 다급하게 뒤따라 들어오며 말렸지만, 송경숙은 이미 휘웅의 집무실 한가운데까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뒤였다. 화장은 이미 반쯤 지워져 있었고, 두 눈에는 붉은 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촬영장에서 곧장 달려온 게 분명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막았는데——”“괜찮아요. 나가 보세요.”휘웅은 서류에서 시선을 든 채 침착하게 말했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자, 집무실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송경숙의 손에는 구겨진 대본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성큼 다가와, 그 대본을 책상 위로 거칠게 집어 던졌다. 종이가 흩어지며 몇 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이거.”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이거 누구 아이디어예요?”휘웅은 던져진 대본을 잠시 내려다봤다. 겉으로는 동요하지 않은 얼굴
송경숙은 원래 그날 촬영이 없었다.며칠 전 뺨을 맞는 장면을 찍은 뒤로, 붓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메이크업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라 후속 장면 몇 개가 통째로 미뤄졌고, 오늘에서야 붓기가 겨우 자연스러워 보일 만큼 빠졌다. 매니저에게서 "오늘 오후에 추가 촬영 있으시대요"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송경숙은 별다른 생각 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촬영장에서는 흔한 일이었다.도착한 촬영장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오늘은 단독 씬 두어 개만 찍는 날이라 스태프도 많지 않았다. 송경숙은 대기 의자에 앉아 조연출이 건넨 사이드를 받아 들었다.“오늘은 이 씬부터 갈게요. 짧은데 감정은 좀 세게 가야 돼서요.”조연출이 가볍게 설명을 덧붙이고는 다른 배우 쪽으로 걸어갔다.송경숙은 대본을 펼쳤다.몇 줄 읽지 않아, 손끝이 조금씩 굳어 갔다.장면은 짧았다. 극 중 남편이 아직 이혼 서류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에 재혼 소식을 흘리는 장면. 결혼 날짜까지 서둘러 잡아 버리는 장면. 아내 역의 배우는 그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무너져 내리는 얼굴을 연기해야 했다.'…이거.'송경숙은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혼 서류. 잉크도 마르기 전. 재혼 발표. 서둘러 잡힌 결혼 날짜.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정확히, 자신이 겪었던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저질렀던 일이었다. 윤용석과의 결혼을 서두르며, 이혼 절차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사부터 터뜨렸던 그날의 선택. 그 세세한 순서까지도, 대본은 마치 그날의 일지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처럼 정확했다.우연이라기엔 지나쳤다.세상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순서까지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누군가 실제로 그 일을 알고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디테일이었다.송경숙의 머릿속에서 지난 몇 주간의 조각들이 순식간에 다시 맞춰지기 시작했다.처음 이 배역을 제안받았을 때부터 이상했다. 한물간 배우 취급을 받던 자신에게, 젊은 대표
“진섭 씨, 인사하세요. 저희 대표님이세요!”유경훈의 목소리가 룸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진섭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밖에서, 아무 이유 없이 시비를 걸던 그 남자가 대표라니. 그것도 이 작품을 만들고 있는 제작사의, 다름 아닌 대표.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만 몰랐다는 듯이. 진섭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안녕하십니까.”목소리에서 티가 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스스로도 어색한 게 느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굳는 것도 그대로 느껴졌다.“강휘웅입니다.”휘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 골목에서 던지던 말투와는 완전히 다른, 정중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였다. 표정도, 자세도, 방금 전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매끄러웠다.“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번 작품, 진섭 씨 연기 덕분에 훨씬 살아난다고들 하던데.”너무나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방금 전까지 “작가 꼬봉이냐”며 비아냥거리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진섭은 그 손을 맞잡으며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이 사람, 진짜 뭐지.'겉으로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몇 분 전만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시비를 걸던 사람이, 지금은 방송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감사합니다. 저도 대표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좀처럼 얼굴 뵙기 힘드시다고.”에둘러 던진 말이었다. 조금 전 골목에서의 일을 은근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휘웅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요즘 좀 바빴어요. 이제라도 이렇게 인사드리네요.”태연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 태연함이 더 얄미웠다. 진섭은 순간 이 남자가 정말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주변 스태프들은 두 사람의 인사를 흐뭇하게 지켜보며 술잔을 권했다.“자자, 두 분 첫 만남인데 한잔하셔야죠!”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술잔을 들었다. 진섭과 휘웅도 마주 앉아 잔을
가면의 집〉 촬영이 반환점을 돈 걸 기념해, 제작진 회식이 잡혔다.휘웅은 처음부터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대표라는 직함으로 그 자리에 나타나는 순간,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작가에게 소개하려 들 게 뻔했다. 아직 얼굴 한 번 정식으로 마주하지 못한, 아니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대였다.그래서 그는 사무실에 남았다. 서류를 뒤적이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정작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휴대폰이 울린 건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유경훈이었다.“대표님, 지금 뭐 하세요?”“일 좀 보고 있는데.”“아니, 요즘 너무 무관심하신 거 아니에요? 촬영장에도 안 나오시고, 회의에도 안 들어오시고. 저희끼리 이상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니까요.”휘웅은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오늘 회식도 안 오세요? 작가님 인사시켜 드리려고 자리까지 마련했는데.”“…나중에 하지.”“나중에 언제요. 자꾸 미루시니까.”유경훈은 못마땅한 투로 말을 이었다.“근데 이 작가님도 먼저 가신다고 하시네요. 원래 이런 자리 오래 못 계시는 분이라. 좀 더 일찍 오시지 그러셨어요.”그 말에 휘웅의 손이 잠시 멈췄다.'먼저 간다고.'그렇다면, 지금 가도 마주칠 일은 없을 거였다.“…금방 갈게.”휘웅은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킷을 챙겨 입으며, 스스로도 이 조급함이 어디서 오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회식 장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지호가 나오고 있었다.휘웅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추고 건물 모퉁이에 몸을 붙였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지호 옆에는 진섭이 있었다. 그는 도로변까지 따라 나와, 잡아 둔 택시 문을 손수 열어 주고 있었다.“그냥 저랑 같이 가요.”진섭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됐어요. 더 먹고 가요.”지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주조연급 배우가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일찍 빠지면 어떡해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그런 거 신경 안 써요.”“저는 신경 쓰여요.”지호
촬영장 분위기가 유난히 어수선한 아침이었다.극 중 아버지의 정부 역할을 맡은 젊은 배우, 하윤이 촬영장으로 오던 길에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이 스태프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매번 다니는 촬영장 진입로 근처에 누군가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다가, 하윤의 차가 지나가는 순간을 노려 계란을 던졌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창문이 닫혀 있어 다친 곳은 없었지만, 놀란 마음에 화장까지 다시 받고 와야 했다.쉬는 시간, 스태프들이 모닝커피를 손에 든 채 그 이야기로 웃음 섞인 잡담을 나눴다.“그러니까 그럴 만도 하지.”한 스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가정 있는 남자를 꼬셔 낸 여우 같은 년 역할을 너무 잘 소화하셔서 그래요. 방송 보면 저도 얄미워 죽겠던데.”“맞아요, 맞아. 나도 어제 편집본 보다가 진짜 한 대 때리고 싶었다니까.”다른 스태프가 맞장구를 쳤다.“근데 드라마니까 망정이지, 진짜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사람 심리가 그렇잖아요.”“하긴, 그건 그래.”웃음 섞인 대화였다. 누구를 겨냥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잘 만든 캐릭터에 대한 감상 정도였다.그런데 그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 대본을 손에 든 채 서 있던 송경숙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아무도 그녀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들 하윤을, 정확히는 하윤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송경숙의 귀에는 그 문장 하나하나가 다른 방향에서 날아와 박혔다.'가정 있는 남자를 꼬셔 낸 여우 같은 년.''진짜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송경숙은 대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표정만큼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몇십 년을 카메라 앞에서 살아온 사람다운 반사적인 자기 통제였다.“경숙 씨, 커피 하나 드릴까요?”지나가던 스태프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아, 아니에요. 괜찮아요.”송경숙은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들렸지만, 스스로도 그 대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는 걸 알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