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가면의 집〉 촬영이 반환점을 돈 걸 기념해, 제작진 회식이 잡혔다.휘웅은 처음부터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대표라는 직함으로 그 자리에 나타나는 순간,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작가에게 소개하려 들 게 뻔했다. 아직 얼굴 한 번 정식으로 마주하지 못한, 아니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대였다.그래서 그는 사무실에 남았다. 서류를 뒤적이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정작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휴대폰이 울린 건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유경훈이었다.“대표님, 지금 뭐 하세요?”“일 좀 보고 있는데.”“아니, 요즘 너무 무관심하신 거 아니에요? 촬영장에도 안 나오시고, 회의에도 안 들어오시고. 저희끼리 이상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니까요.”휘웅은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오늘 회식도 안 오세요? 작가님 인사시켜 드리려고 자리까지 마련했는데.”“…나중에 하지.”“나중에 언제요. 자꾸 미루시니까.”유경훈은 못마땅한 투로 말을 이었다.“근데 이 작가님도 먼저 가신다고 하시네요. 원래 이런 자리 오래 못 계시는 분이라. 좀 더 일찍 오시지 그러셨어요.”그 말에 휘웅의 손이 잠시 멈췄다.'먼저 간다고.'그렇다면, 지금 가도 마주칠 일은 없을 거였다.“…금방 갈게.”휘웅은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킷을 챙겨 입으며, 스스로도 이 조급함이 어디서 오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회식 장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지호가 나오고 있었다.휘웅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늦추고 건물 모퉁이에 몸을 붙였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지호 옆에는 진섭이 있었다. 그는 도로변까지 따라 나와, 잡아 둔 택시 문을 손수 열어 주고 있었다.“그냥 저랑 같이 가요.”진섭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됐어요. 더 먹고 가요.”지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주조연급 배우가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일찍 빠지면 어떡해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그런 거 신경 안 써요.”“저는 신경 쓰여요.”지호
촬영장 분위기가 유난히 어수선한 아침이었다.극 중 아버지의 정부 역할을 맡은 젊은 배우, 하윤이 촬영장으로 오던 길에 봉변을 당했다는 소식이 스태프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매번 다니는 촬영장 진입로 근처에 누군가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다가, 하윤의 차가 지나가는 순간을 노려 계란을 던졌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창문이 닫혀 있어 다친 곳은 없었지만, 놀란 마음에 화장까지 다시 받고 와야 했다.쉬는 시간, 스태프들이 모닝커피를 손에 든 채 그 이야기로 웃음 섞인 잡담을 나눴다.“그러니까 그럴 만도 하지.”한 스태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가정 있는 남자를 꼬셔 낸 여우 같은 년 역할을 너무 잘 소화하셔서 그래요. 방송 보면 저도 얄미워 죽겠던데.”“맞아요, 맞아. 나도 어제 편집본 보다가 진짜 한 대 때리고 싶었다니까.”다른 스태프가 맞장구를 쳤다.“근데 드라마니까 망정이지, 진짜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 같아요. 사람 심리가 그렇잖아요.”“하긴, 그건 그래.”웃음 섞인 대화였다. 누구를 겨냥한 말도 아니었다. 그저 잘 만든 캐릭터에 대한 감상 정도였다.그런데 그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 대본을 손에 든 채 서 있던 송경숙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아무도 그녀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들 하윤을, 정확히는 하윤이 연기하는 캐릭터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송경숙의 귀에는 그 문장 하나하나가 다른 방향에서 날아와 박혔다.'가정 있는 남자를 꼬셔 낸 여우 같은 년.''진짜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송경숙은 대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표정만큼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몇십 년을 카메라 앞에서 살아온 사람다운 반사적인 자기 통제였다.“경숙 씨, 커피 하나 드릴까요?”지나가던 스태프가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아, 아니에요. 괜찮아요.”송경숙은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들렸지만, 스스로도 그 대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는 걸 알았
첫 촬영일 아침, 스태프들 사이에서 잠깐 술렁임이 일었다.“이 씬, 언제 추가된 거예요?”조연출이 수정된 페이지를 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대본에는 없던 장면이었다.남편이 이혼을 종용하다 아내의 뺨을 때리고, 그 바람에 테이블 위 물건들이 쓸려 나가며 액자가 깨지는 장면. 새벽 다섯 시에 전달된 수정본이었다.“작가님이 어젯밤에 새로 보내셨대요.”누군가의 대답에 조연출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다시 스태프들을 불러 모았다.촬영장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대본이 촬영 직전까지 수정되는 것도, 그 이유를 굳이 캐묻지 않는 것도.다만 남편 역을 맡은 배우만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새 대본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이거 실제로 손이 닿아야 되는 거예요, 아니면 액션만 크게 잡을까요?”그가 조심스럽게 묻자, 감독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살짝만 닿게. 위험하지 않게, 하지만 진짜처럼 보이게.”지호는 모니터 뒤편, 스태프들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오늘은 유난히 일찍 나왔다. 자신이 써넣은 그 장면이 실제로 어떻게 찍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다.세트장은 지호의 옛집 거실과 놀랄 만큼 비슷하게 꾸며져 있었다.물론 미술팀이 대본을 보고 만든 공간일 뿐, 실제로 그 집을 알 리는 없었다.그런데도 소파의 위치,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까지 어딘가 낯익어서, 지호는 세트장에 들어설 때마다 잠깐씩 숨이 막혔다.벽지 색깔도, 테이블 다리 모양도 전혀 다른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휘웅이었다. 제작사 대표라는 직함이 있으니 첫 촬영일에 얼굴을 비추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스태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그는 카메라 각도를 확인하는 척하며 계속 지호 쪽을 살폈다.지호는 그런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애초에 알아챌 여지가 없었다.지호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면 습관처럼 시선을 낮추거나 한곳에만 고정했다.여러 사람의
내일이면 첫 촬영이었다.지호는 노트북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내일부터 촬영이야. 정신 똑바로 차리자.'몇 달을 준비해 온 일이었다. 대본은 이미 완성됐고, 캐스팅도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실제로 그 장면들이 화면 위에 펼쳐지는 걸 지켜보는 일뿐이었다.그런데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지호는 침대에 누워 몇 번이나 뒤척였다.눈을 감으면 내일 스케줄이 떠올랐고, 스케줄을 떠올리면 다시 잠이 달아났다. 결국 몸을 일으켜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눕고, 또 뒤척이기를 반복했다.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벽에 희미한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낮게 이어지는 방 안에서, 지호는 그 희미한 빛줄기를 바라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내일이면 몇 달간 준비해 온 모든 것이 실제 화면으로 태어난다. 그 사실이 설레면서도 동시에 무섭게 느껴졌다.뒤척이던 지호는 결국 자정을 훌쩍 넘기고서야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그리고 꿈을 꿨다.익숙한 거실이었다. 깨진 액자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테이블 위에는 낯익은 서류 뭉치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종이 위에 굵게 박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이혼 합의서.십 년도 더 지난 그날이었다. 지호는 꿈속에서도 그 냄새를, 그 공기를, 그 적막을 그대로 느꼈다.엄마에게 달려가 어깨를 흔들던 자신의 손끝까지 생생했다.그날의 거실 온도,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오후의 빛깔, 발밑에서 바스러지던 유리 조각의 감촉까지도 하나하나 되살아났다.그런데 문득, 낯선 생각이 스쳤다.'엄마가…… 맞았던가?'기억이 흐릿했다. 분명 쓰러져 있었다. 분명 울고 있었다.그런데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지호는 자신할 수 없었다.맞아서 쓰러진 건지, 그냥 주저앉은 건지. 스무 살, 정확히 그날이었다.휘웅과 사귀기로 한 바로 그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이었는데도, 정작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 중 몇몇은 너무 여러 번 다
첫 촬영을 사흘 앞둔 날, 의상 피팅이 있었다.지호는 원래 이런 자리에는 잘 나가지 않았다. 대본만 넘기면 그만이었고, 배우들의 옷차림이나 소품까지 일일이 확인하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여겨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의상팀에서 배우들의 실루엣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지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가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 누가 오는지,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스튜디오는 강남 어느 골목의 낡은 건물 3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지호는 괜히 숨이 찼다. 고작 3층인데도 유난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쪽에서는 이미 몇몇 배우들이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재봉틀 소리와 옷걸이 부딪히는 소리, 스태프들이 오가며 나누는 대화 소리가 뒤섞여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지호는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손에 쥔 대본을 몇 번이고 폈다 접었다 했지만, 정작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리고 그 순간, 문이 열렸다.송경숙이었다.화면 밖에서 보는 얼굴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텔레비전이 유난히 예쁘게 담아내는 얼굴이 아니라, 실제로도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자세가 흐트러짐 없는 사람이었다. 지호는 어릴 때부터 저 얼굴을 셀 수 없이 봐 왔다. 드라마 속에서, 광고 속에서, 그리고 훨씬 더 오래전, 자신의 집 거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그 시절 지호는 그저 어린애였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저 사람이 화려하고 아름답다고만 생각했지, 저 얼굴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어 놓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실제로 서 있었다.지호는 순간 숨을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화가 나는 건지, 긴장이 되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스스로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꽉 움켜쥔 채, 지호는 애써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다.“작가님이시죠?”송경숙이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목소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라고, 분명히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다.그런데도 휘웅은 결국 미팅이 열리는 건물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회의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지호가 나오는 걸 먼발치에서 한 번이라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스스로도 우스운 변명이라는 걸 알았지만, 몸은 이미 그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건물 로비 근처, 눈에 띄지 않을 만한 자리에 서서 휘웅은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지호가 나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그 배우,진섭이 옆에 있었다. 두 사람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차에 올라탔고, 휘웅은 저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갔다.멀리서 지켜본 지호는, 그가 알던 어떤 모습과도 달랐다.밝게 웃고 있었다. 진섭이 무슨 말을 했는지, 지호가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이 차창 너머로 보였다.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다시 무언가 대꾸하는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유진과 동학이 말했던, 10년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던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휘웅은 혼란스러웠다.분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지호는 자신을 철저히 외면했다.시선 한 번 주지 않았고, 목소리에는 온기가 없었다.그건 유진과 동학이 말했던,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온 사람의 얼굴과 정확히 일치했다.그런데 오늘, 진섭과 함께 있는 지호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그냥, 여느 서른 초반의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잘 웃고, 편안해 보이고,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이는 얼굴.'뭐가 진짜야.'세 개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자꾸 어긋났다. 갓 스물 사랑에 빠진 얼굴. 10년을 갇혀 지냈다는 얼굴. 그리고 지금, 저렇게 편안하게 웃고 있는 얼굴.휘웅은 자신도 모르게 차를 몰아 그 뒤를 쫓았다. 얼마 가지 않아 차가 어느 골목 앞에서 멈췄고, 두 사람은 작은 치킨집으로 들어갔다.휘웅은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채, 불 켜진 유리창 너머를 오래도록 지켜봤다. 치킨과 맥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지호가 뭔가에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