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민여진은 침대에서 내려왔다.몹시 갈증이 났다. 그녀는 옷장에서 아무 겉옷이나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을 마셨다. 이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진성의 발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민여진은 입을 열었다.“서원 씨 맞아요?”밖에 있던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민여진 씨,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저는 서원이 아니라 상우입니다.”“상우?”남자는 황급히 자신을 소개했다.“저는 대표님 밑에서 서원과 함께 일하는 경호원입니다. 예전에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상우는 말하면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예전에 민여진이 못생기고 눈도 멀었다고 비웃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어젯밤에 있었던 일로 그녀가 박진성의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민여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상책이었다.민여진도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냉대했던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그저 상우의 말에 미간을 잠시 찡그렸을 뿐이었다.“서원 씨는요? 그 사람이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상우가 말했다.“별일은 아닙니다. 아침에 서원이가 와서 민여진 씨가 뒤뜰 창고에 갇힌 걸 알고 박 대표님 명령을 어기고 구해 드렸습니다. 그 때문에 박 대표님이 다른 곳으로 보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민여진 씨를 모시겠습니다.”그리고 상우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근데 서원이도 정말 안됐어요. 도박장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엉망진창이고 힘든 곳이거든요. 민여진 씨를 구하려다 앞으로 고생 좀 하게 생겼습니다...”민여진 씨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그녀는 자신이 운이 좋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서원이 박진성의 명령을 어기고 그녀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서원은 그 일 때문에 박진성의 처벌을 받아 힘들고 고된 곳으로 보내졌다...박진성의 횡포에 그녀의 심장은 떨렸다. 그에게 거역하는 사람은 누구도 좋은 결말을
박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민여진, 착각하지 마.”“그럼 아닌가요... 서원 씨가 당신의 명령을 어기고 창고에서 저를 구해 줬다고 벌준 거잖아요?”민여진은 씁쓸하게 웃었다.‘어째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은 결말을 맞지 못하는 걸까.’“당신 생각엔 내가 죽어야 마땅했겠죠? 그렇죠”“민여진!”박진성은 차갑게 소리쳤다. 검은 눈동자에 냉기가 서렸다.“네가 죽든 말든 나랑 상관없고 서원이가 도박장에 보내진 것과도 상관없는 일이야. 그놈은 그냥 제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니까!”민여진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돌아오게 해 주세요, 진성 씨. 제가 잘못했어요.”누군가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그녀에겐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제가 구출된 게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창고에 가겠어요. 열흘이고 보름이고 가둬 두세요!”박진성은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민여진의 턱을 움켜쥐었다. 민여진은 아픔에 뒷걸음질 치다 난간에 등을 기댔다. 박진성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서원을 보낸 가장 큰 이유는 서원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여진의 곁에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를 둘 수는 없었다.그런데 민여진이 이렇게 애원하며 매달릴 줄은 몰랐다. 심지어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창고에 다시 돌아가겠다고까지 하다니.“언제부터 그놈이랑 그렇게 친해졌지? 그놈 때문에 죽을 각오까지 하는 거야? 창고에 열흘, 보름 갇히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나 해? 네 몸으로 거기 하루도 못 버텨!”민여진은 아픔에 몸을 떨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아요.”“알면서...”박진성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기더니 싸늘한 기운이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는 민여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걸다니, 설마 너 서원 그놈을 사랑하는 거야?”그 말이 튀어나오자 박진성의 심장은 쥐어짜는 듯 아팠다. 민여진 또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사랑?’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랑이란 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미 사랑을 포기한
민여진은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난 그런 적...”“채연이가 너 때문에 지금까지 방에 틀어박혀서 밥도 안 먹고 있는데 아직도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박진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차가운 눈빛을 내뿜었다.“서원이를 돌려보내 달라고? 좋아. 채연이가 널 용서하면 모든 걸 없던 일로 해 주지.”‘채연에게 용서를 빌라고?’민여진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망고를 죽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라니. 더 큰 문제는 문채연은 기회를 잡았으니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박진성은 차갑게 비웃었다.“어때? 네 서원이를 돌려받고 싶어?”그는 ‘네 서원이’라는 말로 민여진을 조롱했다.민여진은 솟아오르는 설움을 삼켰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마음은 여전히 아팠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 고통 따위가 대수일까?“좋아요. 당신이 약속만 지킨다면 채연에게 용서를 빌게요.”박진성의 검은 눈동자에 순간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며 문 앞에 서 있는 상우에게 말했다.“다섯 시에 채연이네 별장으로 데려다줘. 채연이가 용서할 때까지 데려오지 마.”상우는 박진성이 이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평소 감정 표현에 절제가 있던 박진성이었다. 진심으로 화가 났을 때조차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였기에 상우는 민여진의 존재가 더욱 궁금해졌다.‘그녀는 대체 박진성의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단 말인가. 문채연조차 박진성에게 이 정도의 영향을 못 미치는데.’다섯 시에 데려다주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10분 정도 차이가 났다.상우는 민여진을 차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으며 중얼거렸다.“대표님은 왜 굳이 저한테 민여진 씨를 따로 모셔다주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본인도 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 되잖아요?”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그의 말을 어렴풋이 듣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당연히 그녀와 같은 차에 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잠깐의 십여 분조차도.차
민여진은 잠시 멍해졌다. 가정부의 말투에서 박진성과 문채연이 한 방에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박진성이 문채연과 함께 자고 나서 자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억지로 역겨움을 참으며 물었다.“진성 씨는 언제 나오나요?”가정부는 웃으며 대답했다.“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박 대표님 마음이시죠. 한두 시간이면 나오시지 않을까요?”상우는 가정부의 이상한 말투에 불편함을 느끼고 바로 말했다.“그럼 저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민여진 씨는 어제 추위에 떨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찬 바람을 쐬면 안 돼요. 거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가정부는 표정을 바꾸더니 억지웃음을 지었다.“죄송하지만 채연 씨의 허락 없이는 손님을 거실로 안내할 수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현관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곧 박 대표님이 내려오실 수도 있잖아요.”“무슨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분은 민여진 씨인데!”가정부는 다시 한번 말했다.“죄송합니다.”상우가 또 말하려 했지만 민여진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녀는 이미 깨달았다. 더 이상 따져 봐야 의미 없다는 것을. 문채연을 화나게 하면 결과는 더욱 참혹해질 뿐이었다.“괜찮아요. 여기서 기다릴게요.”상우는 투박한 목소리로 이것이 단순한 가정부의 횡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했다.“무슨 여기서 기다려요? 민여진 씨, 이제 방금 깨어나서 물도 몇 모금 못 마셨잖아요. 일단 차에 가서 앉아 있다가 대표님이 내려오시면 그때 들어가요.”민여진은 입술을 옅게 끌어올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가정부에게 물었다.“여기서 박 대표님이 내려오실 때까지 기다리면 문채연 씨를 만날 수 있나요?”가정부가 대답했다.“여기서 기다리시면 제가 알려 드리겠습니다.”“알겠습니다.”민여진은 심호흡을 하고 현관 앞에 똑바로 섰다.다행히 저녁 무렵이라 해가 거의 져서 햇볕은 강하지 않았지만 따라오는 찬바람은 매서웠다. 바람이 민여진의 바짓단
“민여진 씨는 당신의 아내니까 그 어떤 상처를 받아도 괜찮다는 거잖아요... 그럼 나랑 그 여자는 뭐가 다르죠? 단지 민여진이 당신의 첫 여자라는 이유 때문인가요?”박진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대답하지 못했다.민여진과 함께 있을 때는 편안했지만 문채연의 손길에는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다.아마도 유부남인 자신이 문채연과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해서일 것이다.“별생각 다 하네.”결국 박진성은 이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하지만 문채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허리를 더욱 세게 붙잡았다.“어떻게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진성 씨, 당신은 민여진은 되는데 왜 저는 안 돼요?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했는데도 연인처럼 스킨십 한 번 한 적 없잖아요. 저더러 민여진에게 당신을 빼앗기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는 건가요?”문채연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박진성은 몸을 굳힌 채 그녀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바라봤다. 문채연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진성 씨, 오늘은 많이 바라지 않을게요. 천천히 시작하더라도 키스만이라도 한번 해 주면 안 돼요?”울먹이며 말을 마친 문채연의 눈빛이 스치듯 변했다. 그녀는 민여진처럼 못생긴 여자에게 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박진성이 자신을 거부하는 이유는 더 좋은 여자를 만나 보지 못했고 그의 결벽증 때문일 것이다.그가 자신을 안으면 민여진이 얼마나 형편없는 여자인지 알게 될 것이고 자신에게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박진성은 깊은 갈등에 휩싸였다. 거절하려 했지만 문채연을 보자 차마 거절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문채연은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기에 그녀를 울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게다가 민여진 때문에, 자신 때문에 그녀의 삶이 이렇게 망가졌다.“난...”그가 한마디밖에 하지 못했는데 목소리는 곧 멈춰 버렸다.문채연은 미소를 감추고 발꿈치를 들어 올려 부드러운 입술을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댔던 것이다. 박진성의 입술에 닿기 직전, 그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웅웅거리
이렇게나 진지한 박진성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면 큰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상우는 긴장감에 경직된 표정으로 다급히 물었다.“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누가 방해를 해서 말이야, 사고가 좀 났대. 사람들이 다쳤다는데 서원이도 다친 것 같아. 상태가 좀 심각해 보여.”말로는 조금 심각하다고 했지만 실제 상황은 더 심각할 게 분명했다.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상우가 다급히 차 문을 열었고, 박진성도 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손을 뻗은 민여진이 그의 팔을 꽉 붙잡고 물었다.“박진성, 누가 다쳤다고? 서원 씨 다쳤어? 어딜 다쳤는데!”민여진의 창백한 얼굴은 추위 때문인지, 방금 박진성의 말에 놀라서인지 알 수 없었다.그런 민여진의 얼굴을 보는 박진성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힘을 주어 억지로 뿌리치며 말했다.“너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지금은 어떻게 채연이한테 용서를 구할 지나 잘 생각해 놔.”민여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알겠어, 그럴게. 하지만 지금 나한테는 서원 씨 안전도 중요해. 무슨 상황인지는 알려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원이가 그렇게 걱정돼?”박성진이 헛웃음을 지었다.“지금 다친 사람이 서원이가 아니라 나였으면, 너는 기뻐서 박수나 치고 있겠지?”그 말에 민여진은 고개를 푹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민여진의 반응은 박성진에게 그저 무언의 동의로만 느껴져 가슴께가 묵직하게 아려왔다. 그는 짜증 섞인 손길로 민여진의 손을 홱 뿌리치며 말했다.“안 죽어! 하지만 네가 일 처리를 똑바로 못 하는 순간 말이 달라지겠지.”박성진은 협박에 가까운 말만 남긴 후, 매정하게 차에 올라탔다.상우는 비웃음 섞인 박성진의 말에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곧바로 차를 출발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바람이 쌩쌩 부는 야외에 홀로 남겨진 민여진의 머릿속에는 협박에 가까운 박성진의 말만 계속 맴돌았다. 서원은 박성진
민여진의 초점 없는 두 눈은 공허했지만 표정은 아주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하인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뭐... 뭐요! 자기 혼자 자빠져놓고 왜 째려봐요? 그쪽이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하인은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보였다. 민여진은 얼굴에 묻어있는 물을 닦아낸 후, 다시 물을 뜨러 갔다.물을 뜨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두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점점 심해져만 갔다. 양동이의 손잡이 끈이 손을 꽉 조이는 바람에 민여진의 손에는 어느새 피가 맺혀 있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튀는 찬물은 상처를 자극해 고통을 배로 만들어 주었다.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하인은 세제를 가져와 피 맺힌 민여진의 손 위에 부어버렸다. 그녀의 사악한 미소에는 의기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봐요! 빨래할 줄 아는 거 맞아요? 세제도 안 쓰면서, 무슨 빨래를 하겠다는 거예요?”“악!”민여진의 눈이 순간적으로 빨개졌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을 찬물에 담갔지만 그럴수록 수천 개의 칼날이 손을 도려대는 듯한 고통만 계속해서 밀려왔다.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아팠다.극도의 고통에 민여진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제야 하인은 만족스러운 듯 비웃으며 세제를 내팽개치고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민여진은 깨끗한 물로 손을 씻어낸 후에야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녀는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애써 참아내며 이를 악물고 빨래를 이어나갔다.빨래가 거의 끝날 때쯤에는 손에 아무런 감각이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깨끗이 씻은 옷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문채연은 이미 식사를 시작한 상태였고, 하인 몇몇이 옆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문채연은 두 팔이 빨갛게 언 채 안으로 들어선 민여진의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한숨을 푹 내쉬었다.“원래는 조금 더 빨리 끝내고 가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하도 굼떠서 말이죠.”뒤이어 문채연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빨래를 세 시간이나 하면 어떡
“필요 없어요.”민여진은 바로 거절했다.“채연 씨, 제가 뭘 더 해야 저를 용서해줄 수 있을까요? 얘기해주세요.”하인이 와사비와 고춧가루로만 만들어진 비빔밥을 들고 오자 문채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굳이 다른 걸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이것만 다 먹으면 용서해줄게요.”민여진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정말 그거면 돼요?”“네, 간단하죠.”먼 곳에서부터 와사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저 눈 꼭 감고 먹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난다는 생각에 민여진은 마음을 다잡았다.“네, 주세요.”민여진이 손을 뻗어 그릇을 받으려던 그때, 하인은 그녀의 손이 아닌 바닥에 그릇을 내려놓았다.문채연은 거만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여진 씨, 여기엔 여진 씨 자리도 없고 식기도 없거든요. 바닥에 엎드려서 입으로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죠?”‘뭐라고?’문채연의 말에 민여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문채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바닥에 엎드려 입으로 먹으라니. 개처럼 먹으라는 뜻이었다.굴욕적이기 그지없었다. 수치심이 순식간에 민여진의 온몸을 감쌌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쥔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문채연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왜 그래요? 설마 싫어요? 여진 씨, 여진 씨가 여기에 왜 왔는지 잊으면 안 되죠. 나도 진성 씨가 여진 씨를 왜 갑자기 나한테 보낸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약점이 잡힌 거겠죠? 그러니까 세 시간 동안 빨래를 했을 거 아냐? 이젠 그냥 바닥에 엎드려서 밥만 먹으면 다 끝난다는데, 여기서 그만둘 거예요?”‘그러게, 정말 여기서 그만둘 건가? 바닥에 엎드려서 밥만 먹으면 다 끝나는데. 그럼 서원 씨도 안전할 수 있을 거야.’민여진의 자존심 따위는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모욕이라면 박진성에게서 항상 받아왔다. 민여진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박진성의 입에서 ‘말 안 듣는 개새끼’라는 말을 들어왔다.가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다시 뜬 민여진의 공허한 눈에는 슬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