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화는 말을 마치고 다시 조현준에게 눈빛을 보냈다.대충 상황을 눈치챈 조현준이 망설이고 있던 민여진에게 웃으며 말했다.“여진아, 우리 엄마는 걱정하지 마. 엄마는 바느질도 하셔야 하고, 이런 공연 같은 거에는 원래 관심이 없으셔. 그냥 우리끼리 다녀오자. 너도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잠깐 바람도 쐬고 기분 전환도 해야지.”조현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공연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은 그냥 지루하다고만 느끼는 것이었다. 조인화가 함께 간다고 해도 공연 내내 시간 낭비라고만 느낄 것 같았다.“그래요. 그럼 저랑 오빠 먼저 갔다 올게요.”“그래.”조인화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문을 닫으며 말했다.“늦게 와도 돼!”문이 닫히자 조현준은 멋쩍게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우리 엄마가 원래 저래. 괜히 혼자 흥분해서 저러는 거야. 말도 막 하는 것 같아도 다른 뜻은 없어. 그냥 너 혼자 두면 외로워할까 봐 그러는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나도 알아요.”민여진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가볍게 웃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생각해보니 이 집에서 지내는 동안, 예전보다 웃음이 훨씬 많아진 것 같았다.심장 한쪽은 이미 누군가 때문에 산산조각이 나 버려 제대로 뛰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민여진은 조현준의 팔에 가볍게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오페라가 열린다는 교회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직원이 나와 둘을 정해진 자리까지 안내해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연이 시작되었다.배우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조현준이 낮게 귓속말로 물었다.“이상한 것 같지 않아?”“뭐가요?”“우리 마을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해도 거의 다 영화가 다였잖아. 사람들이 다 쉽게 볼 수 있는 게 영화니까. 그런데 이런 오페라는 처음이잖아.”민여진도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런
하지만 지금 반사적으로 느껴지는 고통과 증오는 결코 거짓된 게 아니었다.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는 민여진에 조현준은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야?”“아니요.”민여진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순간적으로 나와버린 대답에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속에서부터 느껴지는 거북함을 애써 억누르고 웃어 보였다.“좀 의외예요. 오빠가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거든요. 지금 내 상황도 그렇고, 사람 만날 기회도 거의 없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상하죠.”“정말?”조현준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조심스레 민여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대 위에서는 여전히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조현준은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며 물었다.“그럼, 여진아. 나는 안 될까?”갑작스러운 고백에 얼어붙은 민여진이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조현준이 말을 이어나갔다.“조금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너 좋아했어. 네가 너무 멋있었고, 그때의 나한테 너는 햇살 같은 존재였거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한테 끌리더라. 하지만 너는 너무 어렸고, 어린 애를 좋아한다는 게 부끄러워서 어떻게든 잊어보려고 공부만 하고 살았거든. 그 덕분에 명문대도 입학했고, 집도 떠났으니까 널 좋아하던 그 감정도 없애보려고 했었어. 그렇게 마음을 다 접은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네 이름을 다시 듣는 순간, 다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어. 그때 알았지. 난 아직 널 잊은 게 아니구나.”“그동안 연애도 몇 번 해봤지. 그런데 잘 안 됐어. 사람들이 다 그러더라. 나한테서는 연애에 대한 간절함이 없어 보인다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널 만나니까 조금은 알 것 같아.”조현준은 조심스레 의자 팔걸이에 걸쳐져 있던 민여진의 손을 감쌌다. 조금의 힘도 들어가지 않은 그 스킨십은 민여진에게 충분히 도망칠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이렇게 다시 만난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데. 여진아, 너만 괜찮다면 나랑 만나볼래?”머릿속이 백지장
“네.”민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현준이 다시 돌아왔다.“여진아.”그의 말투는 조금 전과 달리 어딘가 진지하면서도 긴장되어 있었다.“급히 회사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무슨 일인데요?”조현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내가 맡은 프로젝트에 갑자기 문제가 생겼나 봐. 내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지금 당장 가 봐야 해. 더 늦어지면 타고 갈만한 기차도 없어서.”“아... 네.”민여진은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었지만 회사 일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럼 얼른 가 봐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조금 있으면 이모가 데리러 와 줄 거예요.”조현준은 숨을 들이쉬더니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민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여진아, 방금 내가 했던 말은 네가 진짜 거절하기 전까지 항상 유효해. 난 너랑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고, 널 지켜주고, 아껴주고 싶어. 단순히 우리 엄마나 영미 이모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래. 그동안 잘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금방 돌아올 거야. 그때는... 네 대답이 듣고 싶어.”민여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현준은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급히 자리를 떴다.그의 발걸음과 목소리에서는 다급함이 여실히 느껴졌다.민여진의 이마에는 조금 전, 조현준의 입술에서 전해진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느낌이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이 어딘가 당황스러웠다.‘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일까?’‘정말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걸까?’박진성이 떠오르자 무거운 마음에 심장이 다시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그가 남기고 간 상처가 너무 깊고 커서 어떠한 감정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조현준이라면 민여진도 싫지 않았다. 어쩌면 하늘이 그녀를 박진성에게서 벗어나게 도와준 이유가 새 삶을 시작해보라는 계시일지도 몰랐다.가만히 생각에 잠
남자는 민여진을 발견하자마자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전에 찾아뵀던 조씨 가문의 여진 씨 아니신가요?”민여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겁에 질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시우가 방금 부른 그 이름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임재윤? 그게 누구지?’상황을 파악한 진시우가 가볍게 웃으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진 씨. 설마 제 친구 때문에 놀라셨나요? 말을 못 하는 애라서 의사 표현이 제대로 안 됐을 겁니다. 그걸로 오해도 많이 받거든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세요.”‘말을 못 한다고?’민여진이 잠시 멍한 표현을 지었다.‘이 남자가 정말 말을 못 한다고? 그렇다면... 정말 박진성이 아닌 거네?’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자 민여진은 조금씩 평정심을 되찾았다.만약 그가 정말 박진성이었다면 벌써 자신을 어딘가로 끌고 가 결박하고 협박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뺨을 맞았을 때도 아무 반격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그런데 왜...”민여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갑자기 제 이마를 막 문질렀단 말이에요. 그것도 엄청 세게.”그녀는 남자가 자신에게 한 납득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설명을 원했다.진시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임재윤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에 남아 있는 먼지를 가리키며 인상을 구겼다.“그랬구나.”진시우가 피식 웃었다.“여진 씨 얼굴에 뭐가 묻어 있어서 닦아주려고 했었나 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얘가 무술을 하던 애라 숫기가 없어서 손길이 조금 거칠었을 수도 있어요. 평소엔 백스테이지에만 있는 애거든요.”‘무술을 했다고?’잠시 멍하니 있던 민여진이 뒤늦게 이마를 문질렀다. 생각해보니 이마가 아팠던 이유는 그의 소매에 달려 있던 단추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임재윤이 아무 말도 없이 민여진의 이마를 닦았던 이유는 그가 말을 못 하는 실어증
“아이고…”조인화의 표정이 어딘가 굳어있었다.“방금 통화할 때 목소리가 엄청 급하더라.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아닐 거예요.”민여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현준 오빠는 그냥 기차 막차 놓칠까 봐 급하게 간 거죠. 여긴 공항도 없는 지역이니까요. 별일 없을 거예요. 일 끝나는 대로 돌아온다고 했어요.”“그렇다면 다행이지.”조인화는 그제야 미소를 되찾았다. 그녀는 민여진의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들어가며 슬쩍 물었다.“공연은 어땠어? 재밌었어?”“네, 좋았어요.”민여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사실 오페라는 앞부분밖에 제대로 못 들었다.“그럼 너랑 현준이는?”“네?”뒤늦게 반응한 민여진이 다시 물었다.“저랑 현준 오빠가 왜요?”조인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현준이가 가기 전에 나한테 전화하면서 너 좀 잘 챙겨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하더라. 너랑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못 데려가서 아쉬운 그 목소리가 너무 잘 들렸어. 내가 엄마인데, 그걸 모르겠어? 걔 아직도 너한테 마음 있어. 안 봐도 뻔하지, 뭐.”머릿속이 복잡해진 민여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저… 이모. 우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도 생각해볼게요.”“그래!”조인화가 눈을 반짝이더니 활짝 웃으며 민여진의 손을 꼭 잡았다.“생각 얼마든지 해봐!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이모고, 현준이도 네 오빠야. 그러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민여진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고 답답했다.오늘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그녀는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특히 조금 전, 박진성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던 남자의 등장은 민여진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민여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박진성이 정말 자신을 찾아내면 어떻게 해야 할까?그녀가 물에 빠졌던 그 사건도 아직 완벽히 해결된 게 아니었다.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후에야 민여진은 침대에 누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
민여진의 마음이 흔들렸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오빠... 난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민여진은 자신이 조현준의 관심과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감옥까지 다녀온 전과자에, 못생기고 앞도 보이지 않는 장애인인 것도 모자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그 자체였다. 지금 막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는 조현준에게 자신은 그저 방해만 될 뿐이었다.조현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여진아, 너 스스로를 너무 낮게 평가하지 마. 네가 방금 했던 그 말은, 내 말을 부정하는 거랑 똑같아.”민여진은 또다시 침묵을 유지했다. 조현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마침 네가 제일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 안 그랬으면 예전의 그 빛나던 네가 나를 봐주기나 했을까?”한때 민여진은 말 그대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어도 똑똑한 머리 덕에 성적도 뛰어났고 명문대 진학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또래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감히 조현준이 넘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입술을 꽉 깨문 민여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현준 오빠, 난 오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괜히 오빠한테 방해가 되는 것도 싫고...”“여진아, 내가 그랬잖아. 나한테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조현준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여진아, 너 동진까지 올 수 있어?”갑작스러운 제안에 민여진이 멍해졌다. 하지만 조현준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우리 엄마도 아직까지는 건강하시지만, 몇 년만 더 지나면 나도 엄마 혼자 둘 수 없을 거야. 나도 이제 동진에서 자리 잡았고, 때가 되면 모셔올 생각인데 너만 괜찮다면... 같이 와 줄래? 그래야 너도 같이 챙기지.”‘낯선 도시로 가야 할까?’민여진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그러던 중, 돌 하나가 날아와 민여진의 머리를 정통으로 내리쳤다. 갑자기 몰려오는 극심한 고통에 민여진은 손을 들어 머리를 만져보았다. 손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얼얼한 고통이 이마 전체에 서서히 퍼지고 있던 그때, 아이들은 여전히 깔깔거리며 떠들고 있었다.“안에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네? 눈만 멀었지, 귀도 먼 건 아니잖아. 설마 쫄아서 안에 숨어 있는 거야? 아니면 돌 더 맞고 싶어서 숨어 있는 거야?”곧이어 수십 개의 돌덩이들이 연달아 마당 안으로 날아들었다. 모든 돌이 그녀를 맞진 않았지만, 몇 개는 몸에 제대로 부딪혀 꽤 아팠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더는 참을 수 없었던 민여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소리 하려던 그때, 밖에서 아이들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누구야? 야! 뭐 하는 거야!”곧이어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민여진이 문을 열어보자 아이들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던 제 분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리며 씩씩대고 있었다.“외부인 주제에 감히 날 혼내? 두고 봐! 우리 할머니한테 당장 이를 거야! 널 가만히 둘 것 같아?”아이가 먼저 도망치자 다른 아이들도 슬그머니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줄행랑쳤다.민여진은 숨을 깊게 한 번 들이쉬었다. 이마에서 번져오는 고통을 애써 참으며 문 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저기... 누구시죠?”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민여진도 당황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다시 말을 걸었다.“혹시... 임재윤 씨인가요?”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민여진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마에 젖어 붙어 있던 머리카락이 위로 쓸어넘겨졌다. 그는 손끝으로 천천히 민여진의 이마에 맺힌 피를 닦아냈다. 상처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했지만 근처를 스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따끔한 고통에 그녀는 헛숨을 들이켰다.심상치 않은 민여진의 반응에 남자는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말을 마친 민여진은 고개를 들고 예의 바르게 미소 지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지만 그 눈매에는 생기 넘치는 빛이 서려 있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임재윤은 마음속에서 이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몇 번이나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민여진의 손바닥에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괜찮아요.’잠시 고민하던 그가 다시 몇 글자를 더했다.‘저도 죄송했어요.’그 움직임에 잠시 멍하니 있던 민여진은 이내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그 말은 극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때도 임재윤은 민여진의 이마를 건드렸었다.“괜찮아요.”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그땐 제가 오해했던 거죠. 사실은 제가 걱정돼서 그랬던 거잖아요. 어젯밤에 이미 괜찮아졌었어요.”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다시 손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갔다.‘미안해요.’민여진의 손과 남자의 손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전에 그녀가 언급했었던 남녀 간의 예의라는 것을 철저히 지키기 위함인 듯했다. 그의 손끝이 손바닥 위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차가운 감촉에 괜히 간질간질해졌다.민여진은 그제야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이 사람을 박진성으로 착각한 건 정말 잘못된 판단이었다. 박진성이었다면 이런 사소한 일로 사과를 했을 리도 없었을 거고, 이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대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그 사람은 언제나 강압적인 방식으로 모든 걸 손에 쥐려 했다. 임재윤을 그런 사람과 헷갈렸으니 오히려 실례인 셈이었다.“오늘 여기까지 오신 건 혹시... 사과하려고 오신 거예요?”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안진 사람도 아닌 임재윤이 굳이 민여진의 집 앞까지 찾아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남자는 다시 민여진의 손바닥을 가볍게 두 번 두드리며 긍정의 답을 했다. 민여진이 웃으며 말했다.“사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오히
“여진아, 가지 마.”휴대전화를 손에 든 임재윤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던 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가다니? 나 계속 여기 있잖아. 어딜 간다는 거야?”임재윤은 민여진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꿈꿨어. 네가 나를 떠나는 꿈. 안진 마을로 돌아간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서 계속 너를 찾아 헤매며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갔어.”간신히 손을 뻗어 민여진의 손가락을 잡은 임재윤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가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그녀가 떠날까 봐.민여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재윤아, 그건 그냥 꿈이야. 게다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내가 너를 피하겠어.”가쁜 숨을 몰아쉬던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나서야 진정된 듯 답했다.“네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그럴 리가 없잖아.”민여진은 웃음을 지었다. 임재윤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안 해도 되는 걱정을 하고 그래. 난 항상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해.”민여진의 말에 순간 임재윤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서렸다.“친구일 뿐이야?”실망이 묻어난 그의 말에 민여진은 말문이 막혔다. 임재윤은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급히 타자를 했다.“여진아, 혹시 내가 원망스러워? 너를 좋아한다면 지난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너한테 숨긴 거 때문에 많이 상처받았어?”민여진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전에도 말했지만,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대답하기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것 때문에 미안해할 거 없어.”“하지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전 여자 친구 얘기잖아. 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네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놔야 했어. 그래야 너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을 거 아니야.”민여진이 부정하려는 순간 임재윤은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타자를 이었다.“아니면 너는
민여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진시우는 그제야 자신이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말들이 홧김에 터져 나온 것 같았다.“여진 씨, 걱정하지 마세요. 임재윤과 그 여자 사이는 이미 끝난 일이에요.”진시우가 말을 이었다.“임재윤이 여진 씨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그 여자에 대한 마음은 정리했다는 거겠죠.”민여진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만약 임재윤이 정말로 그 여자를 정리했다면 자신이 그 얘기를 꺼냈을 때 그렇게 반응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뭔가를 숨기는 듯 말을 흐리는 진시우도 의심스러웠다.하지만 민여진은 어차피 자신과 임재윤은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누군가를 품고도 왜 그녀한테 고백한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오고 있었다.진시우는 재빨리 달려가 수술 경과와 치료 방향에 관해 물었다. 의사는 수술은 잘 되었지만, 앞으로 수술을 한 차례 더 진행해야 하고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병실로 옮겨진 임재윤은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진시우는 뒤처리를 해야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혼자 임재윤의 곁을 지키고 있던 민여진은 수술 부위가 보이지 않아 조심스럽게 이불을 끌어 올려 주려다 임재윤의 손과 맞닿았다.그 순간, 임재윤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임재윤?”민여진이 손을 빼내려 했지만, 임재윤이 힘을 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병실로 돌아와 이 광경을 목격한 진시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의식이 없는 상태에도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있어야 시름이 놓이나 봐요.”민여진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신이 없는 상태로 손을 잡더니 놓지 않네요.”“여진 씨, 피곤하세요?”“아니요. 잠을 많이 자서 괜찮아요.”“다행이네요.”진시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가 급하게 좀 할 일이 생겨서 아마 내일 아침이 돼야 돌아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