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시온 씨의 전 매니저요.”강세은의 말이 떨어진 뒤, 회의실 안에서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태준의 손을 꽉 잡았다. 태준의 손가락이 곧바로 맞물려 왔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으로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을 보면 묻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했다.현석이 먼저 침묵을 깼다.“전 매니저의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세은은 마른 입술을 적신 뒤 대답했다.“최민규요. 정시온 씨가 데뷔한 해부터 약 이 년 동안 로드 매니저로 일했던 사람입니다.”기록 담당자의 손이 움직였다. 현석은 세은 앞에 놓인 휴대전화와 작은 외장 저장 장치를 가리켰다.“오늘 제출하겠다고 한 자료가 그 사람과 관련된 겁니까?”“네. 예전에 사용하던 휴대전화와 백업 파일이에요. 박소라와 주고받은 메신저 대화, 메일, 받은 사진의 미리 보기 파일이 남아 있습니다. 원본 사진은 저장하지 않았어요. 무서워서 열어 본 뒤 바로 지웠는데…… 복구될 수도 있다고 해서 기기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잠금 비밀번호와 포렌식 분석 동의서는 준비하셨습니까?”“네.”세은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손이 너무 떨려 종이 모서리가 테이블에 몇 번이나 부딪혔다. 현석은 서두르지 않고 봉투를 받아 증거 목록과 대조했다. 그동안 유리는 세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최민규가 찍은 사진이라는 건 언제 알았어요?”유리의 질문에 세은이 고개를 들었다.“파일을 받은 날에는 몰랐어요. 박소라는 전부 온리원이 찍은 거라고 했습니다. 민유리 씨가 공개 스케줄에서는 팬들에게 좋은 사람인 척하면서 뒤로는 사생활 사진을 모아 해외 구매자에게 팔고 있다고 했어요.”“그 말을 왜 믿었죠?”세은의 눈가가 붉어졌다.“믿고 싶었던 것 같아요.”변명보다 더 잔인한 대답이었다. 유리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태준이 그 힘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내가 그런 사람이길 바랐다는 뜻이
ONLYONE_REAL_ID.zip.파일명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익명으로 활동하던 사람의 진짜 이름을 확인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위해 묶었다는 뜻. 박소라가 우연히 인화 주문서에서 유리의 신분증 사본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처음부터 ‘온리원’의 정체라고 표시해 건넸다는 증거였다.유리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은 채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따뜻했던 태준의 체온이 바로 옆에 남아 있었지만 손끝은 차갑게 식었다. 온리원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그 이름 뒤에 민유리가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사람은 손에 꼽혔다. 가족과 한나를 제외하면 과거 공동 전시나 인화 작업 때문에 실명을 교환한 몇몇 팬 사이트 운영자뿐이었다.“누가 떠올라?”태준의 물음에 유리는 곧바로 이름을 대지 않았다. 의심만으로 과거의 사람을 범인으로 정하고 싶지 않았다.“몇 명은 있어요. 그런데 지금 말하면 내가 기억을 그 사람한테 맞추게 될 것 같아요.”“알겠어.”태준은 더 묻지 않고 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상이 연결되자 현석은 이미 사무실에 나와 있었다. 한국은 이른 아침이었지만 뒤편 회의실의 불까지 모두 켜져 있었다.—두 분 예정대로 오늘 귀국하는 거 맞지?“응. 비행기 바꾸지 않았어.”—잘했어. 여기 있어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보다 파일 발신자를 특정할 단서가 나왔어.유리의 어깨가 굳었다.“메일 주소가 복원됐어요?”—주소 전체는 아직이지만, 압축 파일 내부에 삭제되지 않은 메타데이터가 남아 있었습니다. 맥 운영체제에서 만든 파일이고 사용자 계정명이 ‘POLARIS’로 기록돼 있어요. 첨부된 화면 캡처 중 하나에는 메신저 알림 일부도 남아 있고요.폴라리스.그 이름을 듣는 순간 유리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정시온의 데뷔 초부터 활동했던 팬 사이트로,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진과 푸른 색감으로 유명했다. 운영자는 강세은. 온리원보다 두 살
현석이 보낸 화면에는 유리의 과거가 폴더명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대학, 출판사, 공연장, 자택 주변. 자신이 붙인 적 없는 이름들이었고, 자신이라면 결코 사용하지 않았을 분류 방식이었다. 그 아래에는 사진에 우연히 등장했거나 유리와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표처럼 나열되어 있었다.A—유명인 또는 판매 가치가 높은 인물.B—가족, 연인, 소속사 관계자 등 유명인과 연결 가능한 인물.C—일반인. 신원 확인 불필요.정태준의 이름 옆에는 B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정시온의 친형 추정’, ‘법률대리인 활용 가능성’, ‘민유리와의 직접 접촉 기록 없음’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작성 날짜는 두 사람이 처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기 석 달 전이었다.유리는 문서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얼굴만 기억나는 사람도 있었다. 공연장 근처 카페에서 자주 마주쳤던 직원, 사진 인화를 맡기러 갔을 때 상담해 주었던 기사, 출판사 동료와 거래처 디자이너. 그들은 유리의 삶을 스쳐 간 사람이었지만 박소라의 표에서는 A와 B와 C 중 하나였다.“C는 신원 확인 불필요라네요.”유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판매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겠지.”태준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화면을 확대했다. 표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유리는 그의 엄지가 지나치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알아봤다. 화가 날수록 말과 행동이 더 차분해지는 사람이었다.“사람을 가격표처럼 나눴어요.”“응.”“시온이는 A고, 당신은 B고, 이름 모르는 사람은 C. 그런데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어요.”분류표의 주인은 유리였지만 정작 표 안에 유리는 없었다. 박소라에게 민유리는 사진을 찍은 사람도, 삶을 살아온 사람도 아니었다. 다른 인물들을 연결하는 통로였고 파일의 출처를 꾸미기 위해 빌릴 수 있는 이름이었다.태준이 현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현석이 받았다.—보고 있었지?“응. 외장 장치 원본 이미징은 끝났어?”—독일 쪽
정태준은 메시지를 읽은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독립 서점이 있는 골목을 향해 걷던 사람들은 두 사람을 피해 양옆으로 흘러갔고, 횡단보도의 신호는 어느새 한 번 바뀌었다가 다시 붉어져 있었다. 유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검은 코트와 오른쪽 손목의 시계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오래된 필름처럼 장면의 가장자리가 흐렸다. 분명 누군가를 찍었다. 겨울이었고, 눈이 조금 내렸으며, 남자는 법학관 앞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그가 얼굴을 돌릴 때 셔터를 누르지 않았던 것까지는 기억났다.태준이 먼저 휴대전화를 내렸다.“호텔로 돌아갈까?”“사진부터 확인하려고요?”“아니. 네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게 힘들어 보여서.”그 말에 유리는 자신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준은 이유를 묻기 전에 손부터 감쌌다. 마음대로 끌고 가지도, 괜찮을 거라고 단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선택을 기다렸다.유리는 독립 서점의 간판을 올려다봤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려고 했던 곳이었다. 창가에는 작은 사진집과 여행 에세이가 진열되어 있었고, 문이 열릴 때마다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자신들이 계획한 하루는 그대로 눈앞에 있었지만, 한국에서 날아온 문장 하나가 그 시간을 잡아당기고 있었다.“돌아가요.”“호텔로?”“네.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여기서 책을 봐도 아무것도 안 들어올 것 같아요.”태준은 알겠다고만 했다. 택시를 잡는 동안 현석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봉투와 사진을 분리하지 말고 현재 상태 그대로 보관해. 발견 경위와 인계자부터 확인해 줘. 우리 호텔로 돌아가는 중이야. 안전한 방식으로 영상 연결하자.유리는 그 문장을 옆에서 읽었다.“벌써 일하고 있네요.”“남편 업무인지 변호사 업무인지 아직 구분이 안 돼.”“구분해야 해요?”“해야지. 남편으로서는 사진을 당장 보고 싶고, 변호사로서는 보기 전에 증거 상태부터 확인해야 하니까.”“어느 쪽이 이겼어요?”“둘 다 보자는 데는 동의했어.”평소 같았으면 웃었을
화면 속 321번 사진은 확대할수록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유리온실 뒤편의 좁은 통로, 빗물이 맺힌 유리벽,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커튼 사이에서 오현석은 서한나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입술이 맞닿은 순간을 찍은 사진이었지만 요란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익숙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에 가까웠다. 현석의 다른 손은 한나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팔꿈치 아래를 받치고 있었고, 한나는 놀란 기색 없이 그의 재킷 깃을 붙들고 있었다.“이건 우연히 한 번 입 맞춘 사람들이 아닌데요.”유리의 말에 태준이 화면 오른쪽의 촬영 정보를 확인했다.“결혼식 당일 오후 세 시 사십이 분.”“시간을 묻진 않았어요.”“증거를 볼 때는 기본 정보부터 확인해야지.”“휴가 중인 변호사님 아니었어요?”“친구의 중대한 은폐가 발견됐는데 휴가가 중요해?”유리는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아래에는 윤혜림이 남긴 작은 표시가 있었다. 공개 갤러리에 포함되지 않으며, 당사자 동의를 확인하기 전까지 다운로드가 제한되는 사진이라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결혼식 전체 사진과 별도로 분류해 둔 모양이었다. 혜림은 우연히 포착한 순간을 신랑 신부에게는 알리되, 사진 속 사람들의 허락 없이 누구도 파일을 가져갈 수 없도록 잠가 두었다.그 표시를 발견하자 유리는 화면을 닫았다.“왜 닫아?”“보면 안 되는 사진이었어요.”“이미 봤는데.”“봤으니까 더 보면 안 되죠. 혜림 작가님도 잠가 뒀고.”태준은 아쉬운 표정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친구를 추궁할 준비가 이미 끝난 얼굴이었다.“현석이가 결혼식 날 나한테 증인 서명을 두 번 확인했어.”“그게 왜요?”“평소보다 말이 많았지.”“긴장해서 그랬겠죠. 자기도 몰래 연애 중이면서 친구 혼인 신고 증인란에 서명하려니까.”“그러고 보니 구청에서도 한나 씨한테 계속 커피를 건넸어.”“그건 현석 씨가 원래 친절해서…….”말끝이 흐려졌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이상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었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의 저울이 24.7킬로그램을 가리켰다.직원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고, 민유리는 아주 천천히 정태준을 돌아보았다. 태준은 팔짱을 낀 채 문제의 캐리어를 내려다봤다.“내가 카메라는 기내로 들고 타라고 했지.”“카메라는 기내 가방에 있어요.”“그럼 저 안에 뭐가 들었는데.”“렌즈 두 개, 조명 장비, 설치용 장갑, 테이프, 여분 케이블, 프린트 보관함, 옷.”“옷은 마지막이네.”“출장이잖아요.”“신혼여행이기도 하고.”유리는 대답 대신 그의 캐리어를 저울 위로 밀었다. 14.2킬로그램. 어딘지 억울할 만큼 단정한 숫자였다.“정 변호사님 가방에는 뭐가 들었는데요?”“옷, 상비약, 충전기, 네가 놓고 온 멀티어댑터 두 개, 진통제, 위장약, 밴드, 여분 배터리, 우산.”“……내 보호자 가방이에요?”“남편 가방.”태준이 아무렇지 않게 정정했다. 결혼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는 그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묘하게 능숙했다. 유리는 아직도 ‘남편’이라는 말을 속으로 한 번 굴려 본 다음에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직원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두 분 짐을 합산하면 허용 범위 안입니다.”“다행이네요.”“신혼여행이세요?”유리와 태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출장입니다.”“신혼여행입니다.”둘의 말이 정확히 겹쳤다. 직원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두 가지 다이시군요.”탑승권을 받아 든 유리가 태준의 팔을 툭 쳤다.“왜 혼자 신혼여행이라고 해요?”“왜 혼자 출장이라고 해.”“싱가포르 다큐멘터리 포럼에 초청받아서 가는 거잖아요.”“결혼식 열이틀 뒤에 같이 비행기를 탔고, 일정 뒤로 사흘을 비워 뒀잖아.”“그건 정 변호사님이 멋대로 연차를 길게 낸 거고요.”“대표한테 결재받았으니까 멋대로는 아니지.”“호텔도 내가 잡은 포럼 숙소 그대로면서.”태준은 잠깐 침묵했다. 그 미세한 틈을 유리는 놓치지 않았다.“왜요?”“방은 바꿨어.”“뭘로?”“도착하면 봐.”그의 시선이 지나치게 태연했다. 유리는 눈을 가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