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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다음 날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8 23:14:02

선고기일까지 남은 삼 주는 길면서도 짧았다.

유리는 매일 아침 다온북스로 출근했고, 퇴근한 뒤에는 라움 사진미술관으로 향했다. 인화된 사진의 색감을 확인하고 작품 사이의 간격을 조정하며, 캡션에 들어갈 문장을 몇 번씩 고쳤다. 집으로 돌아오면 태준과 늦은 저녁을 먹었고, 자정이 넘어서까지 전시 도록의 교정지를 펼쳐 놓았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다행이었다.

손을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는 선고 결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남기혁이 몇 년을 선고받을지, 재판부가 반성문을 어떻게 판단할지, 혹시 일부 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잠깐씩 떠올랐다가도 인화지와 교정 기호 사이로 밀려났다.

그러나 잠들기 직전이면 어김없이 돌아왔다.

“또 안 자고 있습니까?”

침실 문이 열리고 태준이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던 유리는 황급히 창을 닫았지만 이미 늦었다.

“뭘 보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화면을 그렇게 심각하게 봅니까?”

태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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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서에 적힌 연락 담당자는 박소라였다.민유리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프린트랩 모노의 좁은 사무실을 떠올렸다. 벽면을 가득 채운 종이 견본과 대형 프린터의 열기, 잉크 냄새가 빠지지 않던 회색 카디건, 처음 방문한 유리에게 따뜻한 캔 커피를 건네던 여자.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박소라는 사진 전공자 출신으로, 아이돌 팬 전시와 생일 카페 출력물을 주로 담당했다.유리는 온리원의 첫 소규모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그녀를 알게 됐다. 인터넷 주문보다 직접 색을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며 여러 번 사무실을 찾아갔고, 소라는 유리가 마음에 들어 하는 보랏빛을 맞추기 위해 샘플을 열 장 넘게 뽑아 줬다. 팬의 얼굴이 들어간 원본을 발견했을 때도 먼저 알려 준 사람이었다.“이 부분은 잘라 내는 게 낫겠죠? 요즘 초상권에 민감하니까.”그 말을 믿었기에 유리는 테스트용 파일을 다시 보내 달라는 요청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신분증을 잃어버린 날 역시 소라가 프린트랩 책상 아래에서 주웠다며 직접 건네줬다. 유리는 지갑에서 빠졌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확인한 신분증에는 흠집 하나 없었고, 분실 신고를 취소하려 했으나 이미 재발급을 신청한 뒤라 그대로 폐기했다.하지만 박소라는 신분증을 돌려주기 전에 사본을 남겼다.그 사실을 깨닫자 기억의 모양이 완전히 달라졌다. 친절했던 말과 세심했던 행동, 온리원을 그만둔 뒤에도 가끔 안부를 물었던 메시지까지 모두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유리는 무작정 연락처부터 찾지 않았다. 박소라의 이름이 포함된 문서를 별도 폴더에 보관하고, 기억나는 사실과 추측을 분리해 적었다. 신분증을 주워 건네준 것은 사실이었다. 사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계약서 정황에 따른 추정이었다. 테스트 파일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사진을 반출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태준이 늘 강조하던 방식이었다. 화가 날수록 사실과 판단을 구분할 것.새벽 세 시를 넘기고서야 유리는 노트북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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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유리의 메시지에 정태준이 답한 건 1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지금 전화하겠습니다.곧 화면에 태준의 이름이 떴지만 유리는 받지 않았다. 카운터 안쪽에서 가게 주인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통화를 시작하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에게 불필요한 경계심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은 태준에게 모든 판단을 넘길 때가 아니었다.유리는 통화를 거절한 뒤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가게 주인과 먼저 이야기할게요. 촬영한 증거는 따로 저장했어요. 위험한 상황은 아니에요.마지막 문장을 보내면서도 손끝은 차가웠다. 진열대에는 여전히 자신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공개한 적 없는 구도로 인쇄된 사진 속에는 정시온뿐 아니라 객석 끝에 서 있던 팬의 얼굴 일부까지 들어가 있었다.가게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당신이 찍은 사진입니까?”유리는 카메라에서 오래된 파일을 바로 찾을 수 없었다. 대신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작업 포트폴리오를 열었다. ‘온리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 중 저작권을 증명할 수 있는 일부를 별도의 폴더에 보관하고 있었다. 같은 공연에서 연속으로 찍은 사진과 원본 정보, 촬영 날짜가 화면에 나타났다.“이 사진과 같은 날 찍었습니다. 셔터 속도와 렌즈 정보도 확인할 수 있어요. 판매 중인 사진의 원본 파일도 한국에 보관돼 있습니다.”주인은 휴대전화와 상품을 번갈아 봤다. 방어적인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지만, 곧바로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나는 정식 유통 업체에서 샀습니다. 권리가 포함된 상품이라고 들었어요.”“그 업체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거래 정보를 손님에게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저는 손님이 아니라 저작권자입니다.”유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가게를 위협하거나 상품을 빼앗으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확보한 증거와 요구 사항을 정확하게 설명했다.“당장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권리 관계가 확인될 때까지 제 사진의 판매를 멈춰 주세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구입처와 거래 일자를 확인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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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출국을 사흘 앞둔 밤, 민유리는 거실 바닥에 펼쳐진 세 개의 가방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자신이 준비한 건 중형 여행 가방 하나와 카메라 가방뿐이었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작은 기내용 가방이 하나 더 생겨 있었고, 거실 테이블 위에는 상비약과 보조 배터리, 휴대용 멀티 어댑터, 숙소 주변 병원과 경찰서의 주소가 정리된 서류철까지 놓여 있었다. 여권 사본은 방수 파일에 두 장씩 들어 있었고,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연락처는 종이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똑같이 인쇄돼 있었다.유리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던 정태준을 돌아봤다.“이 세 번째 가방은 뭐예요?”“기내용입니다.”“제게도 눈은 있어요. 왜 생겼냐고요.”“카메라 배터리와 필름을 위탁 수하물에 넣을 수 없으니 분리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노트북도 함께 넣으면—”“그건 원래 카메라 가방에 넣으려고 했어요.”“무게가 과도합니다.”“제가 들 수 있어요.”“들 수 있는 것과 6주 동안 들어야 하는 것은 다릅니다.”태준은 지나치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테이블 한쪽에 놓인 전자저울이 그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유리가 가방을 정리하는 사이 그는 모든 짐의 무게를 세 번씩 재고, 항공사 수하물 규정까지 출력해 두었다.“정 변호사님.”“네.”“저 여행 처음 아니에요.”“알고 있습니다.”“해외 투어도 다녀왔고, 혼자 출장도 여러 번 갔어요.”“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왜 비상 연락망이 열두 쪽이에요?”“여섯 쪽입니다. 양면 인쇄라 열두 쪽처럼 보이는 겁니다.”유리는 기가 막혀 그를 바라봤다. 태준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얼굴로 다시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문서에는 같은 줄이 한참 동안 떠 있었다. 읽는 척만 하고 있다는 걸 유리는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서류철을 내려놓고 그의 옆에 앉았다.“가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태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아닙니다.”“정말요?”“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생각 말고 마음은요?”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약혼자의 이름 말고

    게시물을 올린 지 10분 만에 휴대전화 화면은 숫자를 세는 의미가 없어졌다. 알림이 백 개를 넘어가자 앱 아이콘 위의 숫자가 사라졌고, 메시지는 손가락으로 내리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쌓였다. 다온북스 동료들과 로운의 변호사들, 투어에서 만난 스태프들, 해외 공연 관계자들까지 축하를 보내왔다. 정태준의 어머니는 가족 단체 채팅방에 우는 얼굴과 하트가 섞인 이모티콘을 열두 개나 올렸고, 오현석은 ‘정 변호사가 이런 문장도 쓸 줄 알았느냐’며 진심으로 놀라워했다.그사이 기사 제목도 빠르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결혼 임박설’이었던 것이 두 사람의 게시물이 올라간 뒤 ‘정태준 변호사·민유리 작가, 직접 결혼 약속 발표’로 수정됐다. 몇몇 매체는 유리가 정시온의 오래된 팬이었다는 사실과 과거 홈마 ‘온리원’으로 활동했다는 내용을 다시 끌어왔고, 어떤 기사는 태준을 ‘최애의 친형’이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이 올린 세 문장보다 오래된 관계와 자극적인 표현이 더 크게 다뤄졌다.유리는 소파에 앉아 기사 하나를 읽다가 휴대전화를 뒤집었다.“역시 이렇게 되네요.”주방에서 물을 가져온 태준이 그녀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보지 마십시오.”“안 본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없어지지 않으니 굳이 유리 씨가 확인할 이유도 없습니다. 필요한 내용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그 말은 조금 위험한데요.”태준이 멈칫했다. 유리는 물잔을 손에 든 채 그를 올려다봤다.“정 변호사님이 다 정리해서 좋은 것만 보여 주겠다는 뜻처럼 들려요.”“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알아요.”유리는 그의 손을 잡아 옆자리에 앉혔다.“저도 예전처럼 댓글 하나하나 읽으면서 스스로를 괴롭힐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제가 감당해야 할 반응까지 태준 씨가 대신 골라 주는 건 싫어요.”“그럼 함께 확인하겠습니다.”태준은 곧바로 방식을 바꿨다. 휴대전화를 빼앗거나 기사를 숨기는 대신 노트북을 가져와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악의적인 신상 추측이나 사실과 다른 기사만 표시해 법적 대응이 필요한지를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반지를 낀 사람의 방식

    민유리가 잠에서 깬 건 휴대전화 알람이 울리기 7분 전이었다.평소 같으면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정태준 쪽으로 몸을 붙였을 텐데, 그날은 이불 밖으로 나온 왼손부터 확인했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흐린 아침 햇빛을 받아 조용히 반짝였다. 지나치게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투명한 돌 옆에 아주 작은 보랏빛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손가락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빛이 짧게 번졌다.어젯밤 일은 꿈이 아니었다.라면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건조대에 널어 둔 빨래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평범한 수요일. 정태준은 그 한복판에서 그녀에게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 유리는 대답보다 먼저 울었고, 울면서 웃었고, 결국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세 번쯤 연달아 ‘네’라고 했다.그 뒤의 일까지 선명하게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르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반지는 그대로 있습니까?”유리가 천천히 돌아봤다. 정태준은 진작 깨어 있었던 사람처럼 베개에 머리를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얼굴인데도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없어졌을까 봐요?”“밤새 불편하다고 빼 버렸을 가능성도 생각했습니다.”“그러면 실망하려고 했어요?”“다시 끼워 드리려고 했습니다.”“강제로?”“허락을 받은 뒤에.”완벽하게 교정된 대답이었다. 유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태준은 밀리는 척도 하지 않고 그 손을 붙잡았다. 엄지로 반지를 한 번 쓸어 본 뒤, 손가락 사이로 유리의 손을 깊게 끼웠다.“그런데 정 변호사님.”“말씀하십시오.”“제 반지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요?”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유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설마 자는 동안 쟀어요?”“그건 범죄에 가까운 방식입니다.”“그럼요?”“전에 서랍을 정리하다가 유리 씨가 가지고 있던 반지를 확인했습니다.”“그것도 허락 없이?”“정확히는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웠습니다. 안쪽에 호수가 적혀 있었습니다.”“그걸 외웠다고요?”“필요한 정보라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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