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전시 다음 날 아침, 민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익숙해진 파리의 작은 침실이었지만 풍경은 어제까지와 달랐다. 바닥에는 정태준의 셔츠와 자신의 얇은 카디건이 함께 떨어져 있었고, 침대 옆 협탁에는 휴대전화 두 대와 약혼반지가 비친 물컵이 놓여 있었다. 34일 동안 혼자 사용했던 침대는 성인 남자 한 명이 더 누웠다는 이유만으로 눈에 띄게 좁아져 있었다.유리는 허리를 감은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려 했다. 잠든 줄 알았던 태준의 손에 바로 힘이 들어갔다.“어디 갑니까?”잠이 밴 낮은 목소리가 목덜미에 닿았다.“물 마시려고요.”“여기 있습니다.”태준은 눈도 뜨지 않은 채 협탁을 더듬었다. 그러나 물컵 대신 휴대전화를 잡았고, 다시 찾은 것은 유리의 카메라 배터리였다. 세 번째에야 물컵을 찾았지만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건네려다 물을 쏟을 뻔했다.유리는 웃으며 컵을 빼앗았다.“그냥 제가 일어나서 마실게요.”“가지 마십시오.”“주방 가는 것도 안 돼요?”“오늘만.”태준은 유리의 허리를 다시 끌어안고 얼굴을 어깨에 묻었다. 평소라면 이미 일어나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시차 탓도 있겠지만, 유리는 그가 일부러 눈을 뜨지 않으려 한다는 걸 알았다. 잠들었다가 깨어도 자신이 옆에 있는 상태를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듯했다.“정 변호사님, 파리에 일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휴가를 사용했습니다.”“일주일 내내요?”“나흘은 휴가고 사흘은 원격 근무입니다.”“로운에서 허락했어요?”“제가 파트너입니다.”“그럴 때만 권력을 쓰네요.”“유리 씨에게 가겠다고 새벽 비행기부터 예약하려던 때 쓰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아십시오.”태준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흐트러진 머리와 잠기운이 남은 얼굴은 서울에서 매일 보던 정돈된 변호사의 모습과 달랐다. 유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눈썹 끝을 천천히 쓸었다.“어제 제 사진 정말 괜찮았어요?”“네.”“약혼자라서 말고요.”“사진가 민유리의 관객으로도 좋았습니다.”“어떤 점이요?”“
최종 전시를 이틀 앞둔 아침, 민유리는 열다섯 장의 사진을 바닥에 펼쳐 놓고 한 시간째 순서를 바꾸고 있었다.연작의 시작은 두 개의 커피잔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한쪽이 비어 있는 게 싫다는 태준의 말에 커피를 새로 내려 채웠던 사진. 그 뒤로 구겨진 번호표와 아이의 숟가락, 뜨개질이 놓인 병원 복도 의자, 늦은 손님을 위해 덮어 둔 수프 냄비, 오래된 책상 위에 쌓인 편지가 이어졌다.끝에는 〈이름이 있는 자리〉와 〈돌려받은 자리〉가 있었다.유리는 마지막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가 다시 멀리 떼어 놓았다. 냉장고의 빈 용기에 새 이름표를 붙이는 손과 무단 판매된 사진이 내려간 가게 벽의 금속 고리. 두 사진 사이에는 설명하지 않은 사건이 존재했다. 관객은 이름표가 왜 중요하고, 빈 고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을지도 몰랐다.작업실에 들어온 클레르가 바닥을 살피며 물었다.“아직도 마지막 사진을 고민하고 있나요?”“〈돌려받은 자리〉를 넣으면 사건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요.”“당신은 사건을 폭로하려고 이 사진을 찍었나요?”“아니요.”유리는 빈 벽 사진을 들어 올렸다.“처음에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가게를 찍었어요. 하지만 이건 판매가 중단된 다음에 허락받고 찍은 사진이에요. 잘못 걸린 사진이 내려갔다는 게 안심돼서.”“그럼 그 감정을 보여 주면 됩니다.”“설명이 너무 많아지지 않을까요?”“사진이 모든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당신이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말할지 결정해야 하죠.”그 말은 유리가 사진을 찍으며 계속 고민해 온 문제와 같았다. 보여 주지 않기로 한 사람의 얼굴, 공개하지 않은 〈허락받은 미래〉, 프랑스 가게에서 회수된 시온의 사진. 모든 사실을 꺼내 놓는다고 더 진실한 작업이 되는 건 아니었다.유리는 작품 설명문을 다시 열었다. 무단 판매와 위조 계약서, 박소라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문단에 짧은 문장을 덧붙였다.어떤 자리는 비어 있어서 기다림을 보여 준다. 어떤 자리는 잘못 놓인 것이 사
계약서에 적힌 연락 담당자는 박소라였다.민유리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프린트랩 모노의 좁은 사무실을 떠올렸다. 벽면을 가득 채운 종이 견본과 대형 프린터의 열기, 잉크 냄새가 빠지지 않던 회색 카디건, 처음 방문한 유리에게 따뜻한 캔 커피를 건네던 여자.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박소라는 사진 전공자 출신으로, 아이돌 팬 전시와 생일 카페 출력물을 주로 담당했다.유리는 온리원의 첫 소규모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그녀를 알게 됐다. 인터넷 주문보다 직접 색을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며 여러 번 사무실을 찾아갔고, 소라는 유리가 마음에 들어 하는 보랏빛을 맞추기 위해 샘플을 열 장 넘게 뽑아 줬다. 팬의 얼굴이 들어간 원본을 발견했을 때도 먼저 알려 준 사람이었다.“이 부분은 잘라 내는 게 낫겠죠? 요즘 초상권에 민감하니까.”그 말을 믿었기에 유리는 테스트용 파일을 다시 보내 달라는 요청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신분증을 잃어버린 날 역시 소라가 프린트랩 책상 아래에서 주웠다며 직접 건네줬다. 유리는 지갑에서 빠졌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확인한 신분증에는 흠집 하나 없었고, 분실 신고를 취소하려 했으나 이미 재발급을 신청한 뒤라 그대로 폐기했다.하지만 박소라는 신분증을 돌려주기 전에 사본을 남겼다.그 사실을 깨닫자 기억의 모양이 완전히 달라졌다. 친절했던 말과 세심했던 행동, 온리원을 그만둔 뒤에도 가끔 안부를 물었던 메시지까지 모두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유리는 무작정 연락처부터 찾지 않았다. 박소라의 이름이 포함된 문서를 별도 폴더에 보관하고, 기억나는 사실과 추측을 분리해 적었다. 신분증을 주워 건네준 것은 사실이었다. 사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계약서 정황에 따른 추정이었다. 테스트 파일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사진을 반출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태준이 늘 강조하던 방식이었다. 화가 날수록 사실과 판단을 구분할 것.새벽 세 시를 넘기고서야 유리는 노트북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민유리의 메시지에 정태준이 답한 건 1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지금 전화하겠습니다.곧 화면에 태준의 이름이 떴지만 유리는 받지 않았다. 카운터 안쪽에서 가게 주인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통화를 시작하면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대에게 불필요한 경계심을 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은 태준에게 모든 판단을 넘길 때가 아니었다.유리는 통화를 거절한 뒤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가게 주인과 먼저 이야기할게요. 촬영한 증거는 따로 저장했어요. 위험한 상황은 아니에요.마지막 문장을 보내면서도 손끝은 차가웠다. 진열대에는 여전히 자신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공개한 적 없는 구도로 인쇄된 사진 속에는 정시온뿐 아니라 객석 끝에 서 있던 팬의 얼굴 일부까지 들어가 있었다.가게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당신이 찍은 사진입니까?”유리는 카메라에서 오래된 파일을 바로 찾을 수 없었다. 대신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작업 포트폴리오를 열었다. ‘온리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 중 저작권을 증명할 수 있는 일부를 별도의 폴더에 보관하고 있었다. 같은 공연에서 연속으로 찍은 사진과 원본 정보, 촬영 날짜가 화면에 나타났다.“이 사진과 같은 날 찍었습니다. 셔터 속도와 렌즈 정보도 확인할 수 있어요. 판매 중인 사진의 원본 파일도 한국에 보관돼 있습니다.”주인은 휴대전화와 상품을 번갈아 봤다. 방어적인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지만, 곧바로 잘못을 인정하지는 않았다.“나는 정식 유통 업체에서 샀습니다. 권리가 포함된 상품이라고 들었어요.”“그 업체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거래 정보를 손님에게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저는 손님이 아니라 저작권자입니다.”유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가게를 위협하거나 상품을 빼앗으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확보한 증거와 요구 사항을 정확하게 설명했다.“당장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권리 관계가 확인될 때까지 제 사진의 판매를 멈춰 주세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구입처와 거래 일자를 확인할
파리에 도착한 지 닷새째 되던 날, 민유리는 열두 장의 사진을 인화해 재단 작업실 벽에 붙였다.따뜻한 커피가 담긴 두 개의 컵, 승객이 오지 않은 버스 정류장, 비가 그친 뒤에도 접히지 않은 우산, 문 닫은 빵집 앞에 놓인 의자, 누군가를 기다리며 계속 켜져 있는 현관등. 사진 속에는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전까지 누군가 머물렀거나 곧 누군가 도착할 것 같은 자리가 있었다.유리는 마지막으로 기차역 승강장을 찍은 사진을 붙였다. 열차가 떠난 뒤 텅 빈 선로와 벤치 한쪽에 남겨진 꽃다발이 담긴 사진이었다. 누가 놓고 갔는지, 누구에게 주려고 가져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포장지 끝에 맺힌 빗방울과 아직 시들지 않은 꽃잎이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여 주고 있었다.“당신의 사진에는 항상 한 사람이 없네요.”옆에서 사진을 보던 야쿠프가 말했다. 그는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첫 번째 사진부터 마지막 사진까지 다시 훑었다.“기다림을 찍었으니까요.”“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기다림을 받는 사람도 없어요.”“그래도 두 사람의 자리는 있잖아요.”“당신에게는 보이는 것 같군요.”야쿠프의 말에는 비난이 없었지만 유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곧 시작된 중간 비평에서도 비슷한 의견이 나왔다. 클레르는 두 개의 컵을 찍은 사진과 꽃다발 사진을 특히 좋아했지만, 연작 전체가 지나치게 사적인 암호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유리에게 기다림은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하고 있어요. 그 친밀함이 사진의 장점이지만, 관객이 들어갈 자리가 좁아질 위험도 있습니다.”마리아가 팔짱을 낀 채 물었다.“그 한 사람은 약혼자예요?”소개 자료 사건 이후 누구도 태준에 관해 직접 묻지 않았지만, 유리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네.”“그래서 모든 사진이 집처럼 보였군요. 거리와 역을 찍었는데도.”클레르가 한 장을 가리켰다.“이 사진들을 버릴 필요는 없어요. 다만 당신이 아는 기다림만 찍지 말고, 당신이 모르는 기다림을 한 번 만나 봐요. 세상에는 돌아
파리 출국을 사흘 앞둔 밤, 민유리는 거실 바닥에 펼쳐진 세 개의 가방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자신이 준비한 건 중형 여행 가방 하나와 카메라 가방뿐이었다. 그런데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작은 기내용 가방이 하나 더 생겨 있었고, 거실 테이블 위에는 상비약과 보조 배터리, 휴대용 멀티 어댑터, 숙소 주변 병원과 경찰서의 주소가 정리된 서류철까지 놓여 있었다. 여권 사본은 방수 파일에 두 장씩 들어 있었고,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연락처는 종이 첫 장과 마지막 장에 똑같이 인쇄돼 있었다.유리는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던 정태준을 돌아봤다.“이 세 번째 가방은 뭐예요?”“기내용입니다.”“제게도 눈은 있어요. 왜 생겼냐고요.”“카메라 배터리와 필름을 위탁 수하물에 넣을 수 없으니 분리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노트북도 함께 넣으면—”“그건 원래 카메라 가방에 넣으려고 했어요.”“무게가 과도합니다.”“제가 들 수 있어요.”“들 수 있는 것과 6주 동안 들어야 하는 것은 다릅니다.”태준은 지나치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테이블 한쪽에 놓인 전자저울이 그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유리가 가방을 정리하는 사이 그는 모든 짐의 무게를 세 번씩 재고, 항공사 수하물 규정까지 출력해 두었다.“정 변호사님.”“네.”“저 여행 처음 아니에요.”“알고 있습니다.”“해외 투어도 다녀왔고, 혼자 출장도 여러 번 갔어요.”“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왜 비상 연락망이 열두 쪽이에요?”“여섯 쪽입니다. 양면 인쇄라 열두 쪽처럼 보이는 겁니다.”유리는 기가 막혀 그를 바라봤다. 태준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얼굴로 다시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문서에는 같은 줄이 한참 동안 떠 있었다. 읽는 척만 하고 있다는 걸 유리는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서류철을 내려놓고 그의 옆에 앉았다.“가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태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아닙니다.”“정말요?”“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생각 말고 마음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