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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히는 사람의 선택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4 02:41:28

윤혜림 작가와 만나기로 한 목요일 오후, 민유리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세 번이나 가방 안을 확인했다. 카메라 본체, 여분 배터리, 작은 단렌즈, 메모리카드. 오늘 촬영할 일은 전혀 없는데도 장비를 챙겨 나온 것은 습관에 가까웠다. 카메라가 있으면 어디에 손을 둬야 하는지 알 수 있었고, 어색한 순간에는 렌즈 뒤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정태준은 운전석에서 그런 유리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시동을 껐다.

“오늘 사진 찍으러 가는 거 아닙니다.”

“알아요.”

“그런데 왜 다 가져왔습니까?”

“혹시 모르니까요.”

“뭘요?”

유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준이 가방 위에 얹힌 그녀의 손을 바라보더니 안전벨트를 풀었다.

“두고 가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안 두고 갈 거예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물어봐요?”

“당신이 카메라를 들고 가는 이유를 당신 입으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려고.”

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요즘 변호사님이 자꾸 사람을 상담해요.”

“결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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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허락하지 않은 축하

    정태준은 곧장 전화를 걸지 않았다. 민유리의 휴대전화에서 메시지를 확인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원본 화면을 캡처하고, 발신 번호와 수신 시각이 함께 보이도록 별도의 사진을 남기는 것이었다. 첨부된 이미지도 전달받은 상태 그대로 저장했다. 그 모든 행동은 빠르고 정확했지만, 유리의 휴대전화를 쥔 손에는 눈에 띌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태준 씨.”“네.”“손부터 풀어요.”그제야 태준은 자신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가장자리를 세게 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천천히 힘을 풀고 유리에게 기기를 돌려주었다.“이 번호로 연락하지 마요. 발신자 확인은 제가—”“잠깐만요.”유리가 말을 끊었다. 태준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왜요?”“제 휴대전화로 저한테 온 메시지예요.”“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조심하는 것과 제가 빠지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태준의 입술이 굳었다. 온실 안에서 유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사람과 같은 남자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이제 그 얼굴이 분노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놀랐고, 두려웠고, 자신이 먼저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유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대신 혼자 답장하지는 않을게요. 우리 같이 문장을 정해요.”“답장을 해야 합니까?”“상대가 무슨 목적으로 보냈는지는 물어보고 싶어요. 사진을 어디서 찍었고, 다른 사람에게도 보냈는지 확인해야 하고요.”태준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질문만 보냅시다. 감정적인 반응은 하지 말고.”“그건 제가 정해요.”“유리 씨.”“제가 화났으면 화났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다만 지금은 화를 내기 전에 확인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예요.”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예전 같으면 유리를 차에 태워 집으로 보내고 자신이 모든 절차를 처리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고 싶은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결국 한 걸음 물러났다.“알겠습니다. 당신이 쓰고, 보내기 전에 같이 확인하죠.”유리는 메시지 입력창을 열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찍히는 사람의 선택

    윤혜림 작가와 만나기로 한 목요일 오후, 민유리는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세 번이나 가방 안을 확인했다. 카메라 본체, 여분 배터리, 작은 단렌즈, 메모리카드. 오늘 촬영할 일은 전혀 없는데도 장비를 챙겨 나온 것은 습관에 가까웠다. 카메라가 있으면 어디에 손을 둬야 하는지 알 수 있었고, 어색한 순간에는 렌즈 뒤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정태준은 운전석에서 그런 유리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시동을 껐다.“오늘 사진 찍으러 가는 거 아닙니다.”“알아요.”“그런데 왜 다 가져왔습니까?”“혹시 모르니까요.”“뭘요?”유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태준이 가방 위에 얹힌 그녀의 손을 바라보더니 안전벨트를 풀었다.“두고 가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저도 안 두고 갈 거예요.”“그럴 줄 알았습니다.”“그런데 왜 물어봐요?”“당신이 카메라를 들고 가는 이유를 당신 입으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려고.”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요즘 변호사님이 자꾸 사람을 상담해요.”“결혼 상대가 생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결혼 상대가 아니라 의뢰인 같아지면 상담료 청구할 거예요.”“이미 평생 계약을 앞두고 있는데 별도 비용까지 받습니까?”“그 계약, 아직 날짜도 안 썼거든요.”태준이 문을 열다 말고 그녀를 돌아보았다.“오늘 쓰면 되겠네요.”지나치게 태연한 말투였지만 손은 운전대에서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유리는 그가 결혼식 날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귀보다 손이 먼저 긴장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다. 상대를 재촉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은 때때로 기다리는 쪽에서 더 초조해졌다.유리는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윤 작가님 만나 보고요.”“네.”“온실도 다시 보고요.”“네.”“우리 둘 다 좋으면 그때 날짜 알아봐요.”그제야 태준의 손이 운전대에서 떨어졌다.“알겠습니다.”“표정은 하나도 안 기쁜데요?”“지금 웃으면 서두르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참고 있습니다.”“이미 충분히 보여요.”태준의 입꼬리가 결국 올라갔다. 유리는 그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카메라를 맡길 사람

    민유리의 첫 사진집 《좋아한다는 마음을 찍는 법》 출간 기념 행사는 토요일 오후 두 시, 다온갤러리 1층의 작은 서점에서 열렸다.행사 시작을 한 시간 앞두고 도착한 유리는 입구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사진들이 보였다. 파리에서 찍은 두 개의 커피잔, 비어 있는 의자,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가족의 뒷모습, 이름을 잘라낸 불법 인쇄물을 다시 원래 자리에 놓은 〈이름이 있는 자리〉. 그리고 그 아래, 손바닥만 한 활자로 적힌 이름.사진 민유리.한때는 사진 아래에 붙는 이름이 두려웠다. 정시온의 팬사이트 운영자 ‘온리원’이라는 이름이 자신을 삼켜 버릴까 봐 숨었고, 누군가가 그 이름을 멋대로 떼어 간 뒤에는 다시는 카메라를 들 수 없을 것 같았다.그런데 이제는 본명이 있었다. 감출 필요도, 빼앗길 이유도 없는 이름이었다.“밖에서 감상만 하실 겁니까, 작가님?”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유리가 돌아보았다. 정태준이 종이컵 두 개를 든 채 서 있었다. 검은 셔츠에 짙은 회색 재킷을 입은 그는 출판 행사보다는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의 기자회견에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유리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오늘은 제 약혼자가 아니라 관객으로 오기로 했잖아요.”“관객도 커피 배달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관객치고 너무 비장하게 입었는데요.”“사진집 첫 행사라면서요. 혹시라도 책에 시비 거는 사람이 있으면 법적으로—”“안 돼요.”“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표정이 이미 내용증명이에요.”태준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유리는 웃으며 그가 건넨 컵을 받았다. 뚜껑 위에는 검은 펜으로 ‘작가님’, 다른 컵에는 ‘관객’이라고 적혀 있었다.“직원분이 구분해 주셨습니까?”“제가 부탁했습니다.”“왜요?”“오늘은 역할을 헷갈리지 않으려고.”유리는 컵을 쥔 채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태준은 정말로 연습하는 중이었다. 유리가 앞에 설 때 자신은 한 걸음 물러나 있는 것. 누군가가 유리에게 질문하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함께 돌아가는 날

    전시 다음 날 아침, 민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익숙해진 파리의 작은 침실이었지만 풍경은 어제까지와 달랐다. 바닥에는 정태준의 셔츠와 자신의 얇은 카디건이 함께 떨어져 있었고, 침대 옆 협탁에는 휴대전화 두 대와 약혼반지가 비친 물컵이 놓여 있었다. 34일 동안 혼자 사용했던 침대는 성인 남자 한 명이 더 누웠다는 이유만으로 눈에 띄게 좁아져 있었다.유리는 허리를 감은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려 했다. 잠든 줄 알았던 태준의 손에 바로 힘이 들어갔다.“어디 갑니까?”잠이 밴 낮은 목소리가 목덜미에 닿았다.“물 마시려고요.”“여기 있습니다.”태준은 눈도 뜨지 않은 채 협탁을 더듬었다. 그러나 물컵 대신 휴대전화를 잡았고, 다시 찾은 것은 유리의 카메라 배터리였다. 세 번째에야 물컵을 찾았지만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건네려다 물을 쏟을 뻔했다.유리는 웃으며 컵을 빼앗았다.“그냥 제가 일어나서 마실게요.”“가지 마십시오.”“주방 가는 것도 안 돼요?”“오늘만.”태준은 유리의 허리를 다시 끌어안고 얼굴을 어깨에 묻었다. 평소라면 이미 일어나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시차 탓도 있겠지만, 유리는 그가 일부러 눈을 뜨지 않으려 한다는 걸 알았다. 잠들었다가 깨어도 자신이 옆에 있는 상태를 조금 더 누리고 싶은 듯했다.“정 변호사님, 파리에 일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휴가를 사용했습니다.”“일주일 내내요?”“나흘은 휴가고 사흘은 원격 근무입니다.”“로운에서 허락했어요?”“제가 파트너입니다.”“그럴 때만 권력을 쓰네요.”“유리 씨에게 가겠다고 새벽 비행기부터 예약하려던 때 쓰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아십시오.”태준이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흐트러진 머리와 잠기운이 남은 얼굴은 서울에서 매일 보던 정돈된 변호사의 모습과 달랐다. 유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눈썹 끝을 천천히 쓸었다.“어제 제 사진 정말 괜찮았어요?”“네.”“약혼자라서 말고요.”“사진가 민유리의 관객으로도 좋았습니다.”“어떤 점이요?”“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돌아온 사람의 자리

    최종 전시를 이틀 앞둔 아침, 민유리는 열다섯 장의 사진을 바닥에 펼쳐 놓고 한 시간째 순서를 바꾸고 있었다.연작의 시작은 두 개의 커피잔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한쪽이 비어 있는 게 싫다는 태준의 말에 커피를 새로 내려 채웠던 사진. 그 뒤로 구겨진 번호표와 아이의 숟가락, 뜨개질이 놓인 병원 복도 의자, 늦은 손님을 위해 덮어 둔 수프 냄비, 오래된 책상 위에 쌓인 편지가 이어졌다.끝에는 〈이름이 있는 자리〉와 〈돌려받은 자리〉가 있었다.유리는 마지막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가 다시 멀리 떼어 놓았다. 냉장고의 빈 용기에 새 이름표를 붙이는 손과 무단 판매된 사진이 내려간 가게 벽의 금속 고리. 두 사진 사이에는 설명하지 않은 사건이 존재했다. 관객은 이름표가 왜 중요하고, 빈 고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을지도 몰랐다.작업실에 들어온 클레르가 바닥을 살피며 물었다.“아직도 마지막 사진을 고민하고 있나요?”“〈돌려받은 자리〉를 넣으면 사건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요.”“당신은 사건을 폭로하려고 이 사진을 찍었나요?”“아니요.”유리는 빈 벽 사진을 들어 올렸다.“처음에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가게를 찍었어요. 하지만 이건 판매가 중단된 다음에 허락받고 찍은 사진이에요. 잘못 걸린 사진이 내려갔다는 게 안심돼서.”“그럼 그 감정을 보여 주면 됩니다.”“설명이 너무 많아지지 않을까요?”“사진이 모든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당신이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말할지 결정해야 하죠.”그 말은 유리가 사진을 찍으며 계속 고민해 온 문제와 같았다. 보여 주지 않기로 한 사람의 얼굴, 공개하지 않은 〈허락받은 미래〉, 프랑스 가게에서 회수된 시온의 사진. 모든 사실을 꺼내 놓는다고 더 진실한 작업이 되는 건 아니었다.유리는 작품 설명문을 다시 열었다. 무단 판매와 위조 계약서, 박소라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문단에 짧은 문장을 덧붙였다.어떤 자리는 비어 있어서 기다림을 보여 준다. 어떤 자리는 잘못 놓인 것이 사

  • 최애의 형이 제 정체를 알아버렸다   버린 적 없는 이름

    계약서에 적힌 연락 담당자는 박소라였다.민유리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프린트랩 모노의 좁은 사무실을 떠올렸다. 벽면을 가득 채운 종이 견본과 대형 프린터의 열기, 잉크 냄새가 빠지지 않던 회색 카디건, 처음 방문한 유리에게 따뜻한 캔 커피를 건네던 여자.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박소라는 사진 전공자 출신으로, 아이돌 팬 전시와 생일 카페 출력물을 주로 담당했다.유리는 온리원의 첫 소규모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그녀를 알게 됐다. 인터넷 주문보다 직접 색을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며 여러 번 사무실을 찾아갔고, 소라는 유리가 마음에 들어 하는 보랏빛을 맞추기 위해 샘플을 열 장 넘게 뽑아 줬다. 팬의 얼굴이 들어간 원본을 발견했을 때도 먼저 알려 준 사람이었다.“이 부분은 잘라 내는 게 낫겠죠? 요즘 초상권에 민감하니까.”그 말을 믿었기에 유리는 테스트용 파일을 다시 보내 달라는 요청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신분증을 잃어버린 날 역시 소라가 프린트랩 책상 아래에서 주웠다며 직접 건네줬다. 유리는 지갑에서 빠졌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확인한 신분증에는 흠집 하나 없었고, 분실 신고를 취소하려 했으나 이미 재발급을 신청한 뒤라 그대로 폐기했다.하지만 박소라는 신분증을 돌려주기 전에 사본을 남겼다.그 사실을 깨닫자 기억의 모양이 완전히 달라졌다. 친절했던 말과 세심했던 행동, 온리원을 그만둔 뒤에도 가끔 안부를 물었던 메시지까지 모두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유리는 무작정 연락처부터 찾지 않았다. 박소라의 이름이 포함된 문서를 별도 폴더에 보관하고, 기억나는 사실과 추측을 분리해 적었다. 신분증을 주워 건네준 것은 사실이었다. 사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계약서 정황에 따른 추정이었다. 테스트 파일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사진을 반출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태준이 늘 강조하던 방식이었다. 화가 날수록 사실과 판단을 구분할 것.새벽 세 시를 넘기고서야 유리는 노트북을 닫았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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