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결국 남편인 내가 내 역할을 못 한 거야.”예철진은 주여진의 손을 더 세게 감쌌다. 목소리에는 짙은 자책이 묻어 있었다. “여보, 내가 미안해. 당신 원래 몸도 괜찮았잖아. 분명히 다시 좋아질 거야.”해인은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보는 것조차 불편했다.괜히 속이 뒤틀렸다.‘또 저래. 왜 저 사람은 늘 연기하는 것처럼 보일까?’해인은 시선을 거뒀다. 눈가에는 희미한 냉소가 떠올랐지만, 말투는 단호했다.“제가 여기 남아서 엄마가 회복하실 때까지 돌볼 거예요. 아까 의사 선생님도 말씀하셨잖아요.”“엄마는 조용히 쉬셔야 한다고요. 예씨 집안에서 제대로 못 모실 거면, 앞으로는 괜히 들쑤시지 말아 주세요.”예철진의 얼굴이 바로 굳어지면서 목소리도 차갑게 내려앉았다.“뭐라고 했니?”예철진은 해인을 노려봤다. “여진이는 우리 예씨 집안 사람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가라고 해? 고작 양녀 주제에.”해인은 이 상황이 너무 수상하다고 느꼈다.낮에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주여진은 멀쩡했다.그런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저렇게 병상에 누워 말도 못 하는 상태가 됐다.최수나의 죽음 이후, 해인은 전보다 훨씬 더 경계하게 됐다.가장 가까운 사람이 휘두르는 칼이 오히려 더 깊이 박힌다는 걸 이미 봤으니까.한원랑만 봐도 그랬다.겉으로는 최수나를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정작 사람이 사라지자 장례조차 제대로 치러 주지 않았다.예철진은 주여진의 중풍이 사고라고 했다.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우연이 많을 리가 있을까?해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예철진을 똑바로 바라봤다.예철진보다 수십 년은 어린 해인이었지만, 기세에서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서히 예철진을 눌러 버릴 듯한 힘이 실려 있었다.“엄마 바로 옆에 계셨으면서도 저렇게 크게 다치게 하셨잖아요. 지금도 중병으로 누워 계시고요.”해인의 목소리는 차갑고 또렷했다. “왜요? 본인이 제대로 못 지켰다는 말을 들으니 찔리세요? 무능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다른 사람이 나서는 것도 싫으
[엄마는 원래 몸도 건강하셨잖아. 나도 얼마 전에 뵀는데, 어떻게 갑자기 중풍이 와?]해인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유호의 전화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해인은 마음의 준비를 할 틈조차 없었다.얼마 전 모녀 사이에 불편한 말이 오간 건 사실이었다.그래도 유호는 알고 있었다. 해인의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주여진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정확한 상황은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여보, 내가 차 가지고 데리러 갈까?”[아니, 나 지금 이미 나왔어.]해인 쪽에서는 현관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일단 끊을게.]유호가 바로 말했다. “조심해서 가. 임신 중이잖아. 너무 뛰지 말고.”해인은 가는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심장은 제멋대로 쿵쿵 뛰었고,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목을 조여 왔다....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상에 누운 주여진의 얼굴은 창백했다.불과 몇 시간 사이에 훨씬 늙어 버린 사람처럼 보였다.주여진은 초점 잃은 눈으로 천장만 멍하게 바라보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예철진과 태상이 그런 주여진 곁을 지키고 있었다.물도 떠다 주고, 이것저것 손을 보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의사 말로는 네 어머니 상태가 이제 막 조금 안정된 거라고 하더라.” “지금은 미음 같은 유동식만 먹을 수 있고, 물도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했어. 잘못하면 사레가 들릴 수 있다고.”예철진은 태상의 손에 든 물컵을 보며 말을 이었다.“태상아, 바쁘면 먼저 가 봐도 된다. 여기는 내가 보고 있을게.”태상은 고개를 저었다.“아버지도 연세가 있으신데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있겠습니다.”그 말을 들은 예철진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여진이가 이렇게 됐는데 내가 집에 간들 잠이 오겠니...”예철진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그때... 조금만 더 빨리 붙잡았으면 여진이가 바닥에 넘어지면서 머리까지 부딪히진 않았을 텐데...”그동안 두 사람 사이가 어
한참이 지나서야 예철진이 겨우 숨을 골랐다.“여진아, 네가 믿든 안 믿든,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너한테 품었던 마음은 진짜였어. 내 인생에서 너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한 적은 없어.”주여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눈빛에는 가벼운 비웃음만 담겨 있었다.예철진은 그런 주여진을 잠시 가만히 바라봤다.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젓가락으로 주여진의 그릇에 반찬을 하나씩 얹기 시작했다.“이렇게 오래 얘기했으니 배고프겠네. 우선 밥부터 먹자.”주여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예철진을 봤다.정신이 나간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설마... 이 사람이 정말 음식에 손을 댄 걸 모르는 건가?’그런데 예철진의 얼굴에는 아무 흔들림도 없었다.예철진은 갈비를 주여진의 밥에 올려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국물도 두 숟갈 떠서 밥 위에 적셨다.주여진이 끝내 젓가락을 들지 않자, 예철진은 아예 그릇을 손에 들었다.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주여진의 입가로 가져왔다.“왜?”예철진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네가 직접 만든 건데 입맛에 안 맞아? 그래도 남김없이 먹어야지.”주여진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하지만 예철진이 곧장 주여진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국물이 주여진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다.볼을 지나 목덜미로 번졌고, 옷깃도 금세 젖어 들었다.주여진은 눈을 크게 떴다.하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주여진에게는 예철진을 밀쳐 낼 만한 기운이 없었다.예철진은 소름이 돋을 만큼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왜 피해?”예철진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죽더라도 너는 우리 예씨 집안 선산에 묻힐 거야. 여진아,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너를 버리지 않아...”주여진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바람에 식탁 위 음식은 전부 바닥으로 쏟아졌다.하지만 예철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예철진은 주여진을 꼼짝 못 하게 붙들어 둔 채, 한 숟갈씩 밥을 떠서 억지로 입안에 밀어 넣었다....“어디가 불편하십니까?”개인병원 진료실 안.가운 차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식탁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은 듯 굳어 버렸다.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지안이었다.지안은 곧장 달려가 반려견을 품에 안아 들었다.“코코?”반려견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네 다리는 허공을 향해 계속 떨리듯 버둥거렸고, 몸도 경련하듯 들썩였다.누가 봐도 이상했다.뭔가 잘못 먹고 탈이 난 상태였다.지안의 얼굴이 굳어졌다.이내 지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주여진을 돌아봤다.지안의 눈에는 선명한 증오가 드러나 있었다.“당신이네.”지안은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당신이 음식에 독을 탔지? 코코가 당신이 만든 갈비 먹고 이 꼴이 된 거잖아!”지안의 고함 같은 추궁을 받아도, 주여진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한편 예철진은 미처 삼키지 못한 갈비를 황급히 뱉어 냈다.“지안아, 네 어머니를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예철진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지만, 안에는 날 선 기색이 숨어 있었다. “그동안 네 어머니가 우리 집안을 챙겨 온 건 다들 봤잖아.”지안은 붉어진 눈으로 예철진을 쏘아봤다.“몰아붙인다고요? 제가 억지로 뒤집어씌우는 것 같아요?”지안은 품 안에서 점점 힘이 빠져 가는 반려견을 더 꼭 끌어안았다. “코코 입에서 거품 나오는 거 안 보여요? 코코는 원래 건강했어요. 맨날 뛰어다니고 잘 놀았다고요.”“코코가 지금 우리 집안 대신 당한 거예요. 다 살린 거라고요. 아빠가 그렇게 안 무서우시면, 식탁에 있는 갈비 전부 드셔 보세요.”“아줌마가 만든 갈비를 우리가 몇 년을 먹었는데, 어쩌면 우리도 진작에 몸이 망가졌을지 누가 알아요. 다 죽어 가고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지안은 울컥한 눈으로 반려견을 안은 채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주여진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도, 지안의 목소리에는 저주처럼 차가운 분노가 실려 있었다.“코코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저 절대 당신 가만 안 둬!!”지안이 사라지자 거실은 갑자기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예철진은 거실에 있던 가사도우미들
가사도우미가 문밖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 번 두드리며 알렸다.“사모님, 회장님께서 조금 전에 전화하셨어요. 오늘 저녁은 집에서 드신다고 하셨어요.”주여진은 녹음기를 다시 화장함 안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주여진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얼굴이었다.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난 뒤, 지난 십 년 가까운 세월은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다.그 시간을 주여진이 어떤 마음으로 견뎌 왔는지, 누가 알기나 할까?남편은 주여진의 사랑이었고, 두 아들은 주여진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들이었다.그런 사람들을 한꺼번에 떠나보낸 뒤, 주여진은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이별을 삼키며 살아왔다.‘복수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나는 벌써 십 년 전에 남편과 애들 뒤를 따라갔겠지.’어쩌면 오늘이 끝을 내야 하는 날일지도 몰랐다.해인이 주여진을 만나고 난 뒤부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엄마로서 주여진은 해인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주여진이 문을 열고 나왔다.“갈비는 사 왔니?”가사도우미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회장님께서 집에서 식사하시는 날이면 식탁에 탕수갈비가 꼭 올라가잖아요. 사모님도 참 살뜰하세요. 이런 건 저희가 하면 되는데, 늘 직접 하시잖아요.”주여진은 단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랑은 다르지. 다들 좋아하니까. 집안의 안주인인 내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런데 태상이는?”“태상 도련님은 일이 있어서 못 들어오실 것 같아요. 오늘은 집에서 식사를 못 하신답니다.”주여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내가 조금 있다 다 해 놓으면, 기사한테 시켜서 태상이한테 직접 보내.”가사도우미는 감탄하듯 말했다. “사모님은 정말 다정하세요. 태상 도련님이랑 지안 아가씨를 꼭 친자식처럼 챙기시잖아요.”주여진은 그 말에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날 따라 주여진은 유난히 오래 주방에 머물렀다.혼자 조용히 음식을 하며,
해인의 아버지 강정국과 해인의 두 오빠는 모두 올곧은 사람들이었다.해인의 아버지 강정국과 해인의 두 오빠에게는 분명한 도덕적 기준이 있었고, 돈만 쫓는 사람들은 아니었다.예전에 강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함께 친환경차 개발에 뛰어들었다.목적은 분명했다. YD그룹의 외연을 더 크게 넓히기 위해서였다.자동차 사업은 엄청난 자금을 잡아먹었다.핵심 부품을 대는 협력업체도 하나씩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했고, 조건과 품질을 세심하게 따져 가며 골라야 했다.다행히 그 일은 강정국 혼자 짊어져야 할 몫이 아니었다.고민건 역시 적지 않은 자금을 그 사업에 넣은 상태였고, 당연히 의사결정권도 함께 갖고 있었다.그날 술자리는 원래 고민건이 협력업체를 만나기로 되어 있던 자리였다.그런데 고민건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강씨 가문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나갔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바로 그 일로 비극이 시작될 줄은...사고가 난 뒤, 주여진은 한동안 고민건을 원망했다.하지만 고민건 역시 괴로워했다.고민건은 주여진 앞에서 자신의 뺨을 몇 차례나 세게 때렸고, 강씨 가문 사람들의 장례도 직접 도맡아 치렀다.강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오랜 세월 끈끈한 관계를 이어온 집안이었다.이런 일로 강씨 가문 뒤통수를 칠 이유가 없었다.애초에 두 집안의 협업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사고가 터지면서 자동차 사업은 도중에 완전히 막혀 버렸다.고민건도 손해가 컸다.이전에 넣어 둔 자금은 사실상 허공으로 흩어진 돈이나 다름없었다.주여진은 알고 있었다.진짜 원흉은 따로 있다는 걸.주여진은 녹음기 안에서 들렸던, 그 협력업체 관계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그 남자는 핵심 부품을 공급하던 사람이었다.사고가 났으니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그런데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사고가 워낙 크게 터져서 사회면을 뒤흔들 정도가 되자, 그 협력업체 관계자는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한밤중 자기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그 사람이 죽어
파일을 오래전에 저장해 두고 잊어버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앞뒤로 고작 3분 차이였다.이건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정확했다.누가 봐도 예주가 미리 계산해 두고 백업해 둔 정황이었다.이게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조건이 맞아떨어졌다.사람들 마음속에 의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해인은 예주가 억지로 순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바라봤다.‘이 사람, 정말 무고한 척은 잘하네.’그때 해인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방금 밀크티를 누가 쏟았는지 확인하는 거,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유호는 해인의 붉어진 뺨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야기 좀 했다고 벌써 부끄러워하네.’“네가 나를 찾아와서 YD그룹을 인수해 달라고 한 이유가 뭐겠어.”유호의 목소리는 낮았다.“내 능력을 본 거잖아. YD그룹을 더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유호가 소리 없이 웃었다.“그렇다면 결혼... 꽤 괜찮은 제안 아니야? 이렇게 하면 네가 안고 있는 문제도 다 정리되고.”해인은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이거... 내가 방금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 거지?’‘이게 도대체 어떻게 전개되는 거야.
해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볍게 연애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유호에 대한 인상이, 마음속에서 한결 더 두터워졌다.‘한유호는 노는 것뿐만 아니라... 꽤 무책임한 사람 같네.’권영자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에서도 격앙돼 있었다.울분이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난 몰라! 그 아가씨는 날 구한 은혜가 있는 사람이야. 네가 감히 이혼하겠다고 하면, 오늘 밤에 집에서 목 매달고 죽을 거야! 내일 넌... 본가에 와서 내 시신이나 거둬!]딱! 분노를 참지 못한 권영자는 소리를 치면서 전화를 끊었다.유호는 이런 반응에 이미 익숙했
유호는 해인과 50cm쯤 떨어져서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은 해인의 도자기처럼 하얀 뺨 위에 머물렀다.“밥 사준다며. 왜 멍하니 서 있어?”전화기 너머의 음성과 현실의 목소리가 겹치며 들렸다.해인은 고개를 들어 유호를 바라봤다.유호의 얼굴은... 열 번이 아니라 만 번을 봐도 여전히 시선을 사로잡는 얼굴이었다.그가 나타난 이후 주변의 소음도 한층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졌다.해인이 물었다.“뭐 드실래요?”유호가 직접 내려온 걸 보자, 데스크의 직원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