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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작가: 오월이

제1화

작가: 오월이
달빛이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버려진 제약 공장 안, 강해인의 몸은 거칠게 꼬인 밧줄에 묶여 있었다.

차갑고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기댄 채, 여자의 가느다란 손목은 높이 들어 올려진 채 벽에 고정돼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다가온 남자가 해인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얇은 여자의 허리가 남자의 손아귀 안에서 움츠러들었고, 남자의 입가에는 음습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강해인 씨. 아무도 몸값을 들고 안 오면, 그땐 미안하지만 말이야.”

해인의 뒤쪽에서 벨트를 푸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해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태겸한테... 한 번만 더 전화하게 해 줘.”

납치범이 비웃듯 웃었다.

“열 번을 전화해도 안 오는 인간인데 뭐가 달라져? 돈이든 몸이든, 하나는 내가 가져가야 할 거 아냐.”

그 말이 해인을 자극한 듯해서 몸을 비틀며 간신히 저항했다.

“고태겸은 올 거야. 말귀 못 알아들어? 나한테 손만 대 봐. 고태겸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죽여 버릴 거야.”

해인의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숨기지 못한 공포를 드러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납치범은 잠시 고민한 뒤 짜증 섞인 얼굴로 핸드폰을 던졌다.

“진짜 마지막이다.”

이번에는 신호가 이어졌다.

스피커폰으로 연결된 전화에서 해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태겸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해인아, 예주 쪽에 일이 좀 생겼어. 생일은 나중에 다시 챙기자.]

해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핸드폰 화면의 시간을 훑었다.

밤 10시 반.

한 시간 반만 지나면 생일은 끝이었다.

해인은 하루 종일 정성껏 차려입은 채 레스토랑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던 태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레스토랑을 나서는 순간 납치범에게 붙잡혀 차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지금 해인은 울음이 섞일 것 같은 목소리를 억눌러 말했다.

“나 납치당했어. 나 좀 살려줘.”

전화기 너머가 몇 초간 조용해졌다.

이내 태겸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예주가 교통사고를 당했어. 손목이 골절됐어.]

“그래서?”

해인이 전화기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 지금 죽기 직전이야, 고태겸. 말이 그렇게 어려워? 네 아내가 납치범 손에 죽게 생겼다고!”

다시 침묵.

잠시 후, 태겸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달래듯 낮아진 음성이었다.

[예주는 여기 연고도 없어. 손도 다친 채로 길바닥에 누워 있어. 내가 예주를 놔두면 예주는 어떡해? 해인아, 이런 걸로 농담하지 마.]

해인은 숨이 멎은 듯 굳었다.

‘농담이겠지?’

눈가에 시큰한 감각이 차오르면서, 머리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숨이 막혀 오는 느낌에 가슴이 조여 왔다.

“하예주는 손목이 부러진 거지, 죽은 게 아니야.”

해인의 입꼬리가 힘없이 올라갔다.

목소리에는 비통함이 배어 있었다.

“용호지구에서 북쪽으로 오십 킬로. 버려진 제약 공장이야. 고태겸, 내일 아침에 시신 수습하러 와.”

해인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통화는 끊겼다.

납치범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이를 악물고 강해인을 내려다봤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잔머리 굴릴 여유가 있나 보네?”

해인은 스스로를 비웃듯 웃었다.

“뭘 걱정해. 고태겸은 안 와.”

...

하예주는 누구인가?

처음 예주를 도왔을 때, 해인은 자신이 그런 존재를 곁에 들였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예주는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성적이 뛰어났다.

해인은 태겸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대며 예주를 후원했다.

반년 전, 학업을 마친 예주가 직접 찾아와서 은혜를 갚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태겸의 회사 건물 아래에서 기다렸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소처럼 일해서라도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고씨 가문 같은 최상위 재벌가에게 기부는 체면과 명분을 위한 일일 뿐이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태겸 역시 깊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예주는 자꾸 태겸의 시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얌전한 얼굴에 고개를 숙인 태도, 도움을 청하는 눈빛.

아마 그런 모습이 예주만의 무기였을 것이다.

해인이 이상함을 느꼈을 때, 이미 태겸은 예주 때문에 세 번이나 약속을 취소한 뒤였다.

세 번째는 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태겸은 오지 않았고, 혼인신고는 무산됐다.

하지만 사흘 뒤, 해인은 결국 결혼을 했다.

주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겸이 해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두 사람이 20년 넘게 함께 자라온 사이라는 것을.

예주는 고작 석 달 남짓 나타났을 뿐이었다.

20년과 석 달.

어디를 봐도 강해인이 질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해인은 자신과 태겸의 관계를 지나치게 믿고 있었다.

지금은 패배했을 뿐 아니라 목숨까지 걸린 상황이었다.

해인의 속눈썹 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슬픔과 실망, 체념과 분노가 선명한 얼굴 위에서 뒤섞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움을 품고 있었다.

납치범은 침을 한 번 삼켰다.

망설임 없이 강해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며 천이 찢어지려는 그때.

쾅!

총성이 차가운 밤공기를 갈랐다.

바깥의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나뭇가지에서 일제히 날아올라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거친 말을 내뱉던 납치범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습기 어린 바닥 위에 반듯하게 누운 시신.

머리에 정확히 한 발이 박혀 있었다.

튀어 오른 피가 강해인의 뺨에 묻었다.

본래도 창백하던 얼굴에 더 깊은 파열감이 더해졌다.

두려움을 느낄 틈도 없이, 해인은 본능적으로 총성이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연녹색 군복을 입은 남자가 어둠 속에 똑바로 서 있었다.

남자의 모습은 밤의 어둠과 거의 동화되어 있었고, 달빛 아래에서 어깨의 훈장이 차갑게 빛났다.

역광을 등진 채, 남자는 천천히 강해인 쪽으로 걸어왔다.

마른 낙엽을 밟는 군홧발 소리가 멀리서 가까워졌다.

그러다 발걸음이 멈췄다.

맑고 차가운 나무 향이 공기를 가르며 스며들었다.

코끝에 남아 있던 피 냄새가 흐려졌다.

놀라 고개를 든 해인이 마주친 남자의 눈은 고귀한 기품이 깔려 있었다.

남자는 한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압도적인 기세 탓인지, 숨이 막히는 듯한 긴장감이 공간을 채웠다.

손에 들린 총에서는 아직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해인의 얼굴에 남아 있는 공포를 본 남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총을 허리 쪽에 꽂으며 한 발 물러섰다.

시선이 얽힌 채 한유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강해인, 오랜만이네.”

...

해인이 신혼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한 시였다.

해인은 곧바로 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자,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 위에서 그대로 쏟아졌다.

그제야 얼어붙어 있던 몸이 조금씩 제 온도를 되찾았다.

해인은 젖은 얼굴을 한 번 훔쳤다.

‘조금만 어긋났어도, 다시는 못 돌아올 뻔했네.’

열여섯 살 이전의 해인은 가족 손바닥 위에서 자란 공주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열여섯이 되던 해, 모든 것이 무너졌다.

아버지와 두 오빠가 동시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재혼을 선택했다.

연달아 닥친 불행은 한때 완전했던 가정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그때 해인을 진흙탕에서 끌어올린 사람이 태겸이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시절, 해인을 바라보던 태겸의 눈빛.

아프게 젖어 있던 얼굴.

태겸은 그렇게 말했다.

“해인아, 나랑 같이 집에 갈래?”

그 말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켜진 불빛 같았다.

태겸의 가족은 곧 해인의 가족이 됐고, 태겸의 부모는 자연스럽게 엄마와 아빠가 됐다.

그날 이후 해인은 태겸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는 날, 불안해하는 해인을 위해 태겸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해인아, 내 여자친구가 돼 줘. 평생 잘할게...”

조명 아래에서 태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꽃을 좋아하는 해인을 위해서, 태겸은 수천 평의 꽃밭을 통째로 샀다.

오직 해인을 위해 피어나는 꽃들이었다.

명문가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두 사람은 타고난 한 쌍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망설임 없이 뺨을 후려쳤다.

결국 증명된 건 하나였다.

남자의 약속이란... 호르몬이 가장 왕성할 때 내뱉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

귀로는 들을 수 있어도, 믿을 가치는 없었다.

이제 태겸의 마음에는 예주라는 다른 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태겸이 해인에게 질렸을 수도 있고,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태겸은 변했다.

마음이 떠난 남자는 변기 닦은 칫솔보다 더 더러운 법이다.

해인은 화장대 앞에 앉아 꼬박 하루 밤낮을 보냈다.

태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해인이 포기하는 건 당연히 힘들었다.

고태겸이라는 남자는 강해인의 인생에서 너무 많은 중요한 장면에 함께 있었으니까.

해인이 멍하니 앉아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한 번 본 해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 고태겸이랑 이혼할 생각이에요.”

전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이내 돌아온 말.

[너희 언제 결혼했어?]

해인은 시선을 떨궜다.

‘숨겼지.’

혼인신고를 하던 날도 그랬다.

태겸은 예주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자리를 떴고, 그대로 일주일간 출장을 갔다.

어제 해인의 생일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결혼식은 없었지만 태겸의 부모와 식사를 했고, 해인은 사실상 고씨 가문의 작은 안주인으로 인정받은 상태였다.

해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어쨌든... 그 사람이랑 끝낼 거예요.”

목소리에 묻은 억울함을 알아챈 도수희가 조용히 말했다.

[언제 나올 거야? 엄마가 차 보내 줄게.]

길고 짙은 머리카락에 얼굴을 가린 해인이, 희고 매끈한 턱선을 드러낸 채 말했다.

“제 일에 엄마는 관여하지 마세요. 엄마한테 갈 생각도 없어요. 부탁이니까 저랑 좀 거리를 두세요.”

그 말을 들은 도수희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해인아... 그때 엄마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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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하~♡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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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은 고개를 내려 희정의 피 묻은 두 손을 바라봤다.망설임 없이 희정의 팔을 떼어냈다.“네가 내 멀쩡하던 인생을 다 엉망으로 만들었어. 집에도 못 돌아가게 됐고 일도, 인생도, 가족도 전부 망가졌어.”서진은 몸을 돌려 희정의 눈을 마주했다. 깨진 얼음판처럼 차가운 눈에 깊은 금이 간 것 같았다.“너 때문에 내가 잘못한 일이 너무 많아. 한유호 수술 건부터 시작해서 내 인생은 너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데까지 왔어.”“이제 확실하게 말할게. 나 후회해.”희정은 충격이 가득한 얼굴로 서진을 바라봤다.서진에게는 분노도 혐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감정이라도 있다면 아직 마음이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서진은 너무 무심했다.“바보처럼 네한테 휘둘린 걸 후회하고, 내가 한 잘못 때문에 가족까지 끌어들인 것도 후회해. 제일 후회되는 건 너를 알게 된 거야.”어쩌면 예전에 서진이 희정을 병원으로 데려가 임신중지 처치를 받게 했을 때부터, 두 사람에게 좋은 끝은 없다고 정해져 있었는지도 몰랐다.서진은 냉담하게 돌아서 떠났다.희정은 뒤쫓고 싶었지만 아랫배의 통증 때문에 더는 따라갈 힘이 없었다.두 걸음쯤 움직이다가 통증에 몸을 접고 주저앉았다. ‘이상해. 왜 이번에는 이렇게까지 아픈 거야?’그때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희정 앞에 멈춰 섰다.“차희정!” 건훈은 희정의 상태를 보자 바로 차에서 내려 부축했다. “왜 이렇게 안색이 하얘?”건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피로 젖은 희정의 옷을 발견하자 눈을 크게 떴다. “아이...”“없앴어.”희정은 건훈과 말을 하면서도 계속 서진만 바라봤다.하지만 보이는 건 점점 멀어지는 서진의 뒷모습뿐이었다.건훈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아, 나 진짜 아빠가 되는 줄 알았는데.”희정은 차갑게 받아쳤다. “태어나 봐야 사생아잖아. 이 세상에 나올 이유도 없어.”“너...” ‘사생아’라는 말에 건훈의 미간이 구겨졌다.건훈도 희정의 시선을 따라봤다. 서진은 이미 멀리 가면서 뒷모습도 손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763화

    경호원들이 병원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자, 희정은 새파랗게 질려서 거부했다. “싫어. 나 병원 안 가!”경호원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피가 이렇게 나는데 병원을 안 가겠다고요? 잘못되면 누가 책임집니까?”병원에는 경찰이 먼저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희정은 병원에 가면 스스로 경찰 손에 들어가는 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아무튼 안 가. 죽어도 병원은 안 가!”경호원은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희정을 쳐다봤다. 정말 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결국 경호원은 희정을 강제로 차 안에 태웠다.병원으로 이동하던 길에 서진이 나타났다.차창 밖에 익숙한 사람이 보이자 희정은 흥분해 유리창을 두드렸다. “차 세워! 빨리 세워! 서진아! 천서진, 거기 서!”경호원은 라경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허락을 받은 뒤에야, 차문을 열어 희정을 내려 줬다.희정은 비틀거리며 백 미터쯤 앞에 있던 서진에게 달려가 옷소매를 붙잡았다.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서진아, 며칠 동안 어디 있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정말 나 버린 거야?”서진의 상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몸에서는 술 냄새가 났고 눈은 충혈돼 있었다. 살도 쑥 빠져저 볼까지 패일 정도였다.희정은 서진의 허리를 와락 안았다. “우리 있던 집에 경찰이 왔었어. 나 겨우 빠져나왔어. 그날 일은 설명할 수 있어. 진건훈이 네 안전을 가지고 나 협박했어. 나도 어쩔 수 없이...”희정은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지만 서진은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아무 감정 없이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 희정을 불안하게 했다. 예전의 서진은 언제나 사랑과 기쁨이 담긴 눈으로 희정을 봤는데 지금은 지나칠 만큼 차가웠다.“서진아, 한마디만 해 줘. 이러면 나 너무 무서워. 궁금한 거 있으면 다 설명할게.”하지만 서진은 희정에게 궁금한 것조차 없는 듯했다.예전에는 서진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무시했던 희정이 이제는 서진의 작은 반응 하나에도 불안해했다.“맞다, 아이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5화

    말을 꺼낸 사람은 윤준이었다.태겸의 오래된 친구였고, 오늘 이 자리를 만든 당사자이기도 했다.윤준이 웃으며 말했다.“무슨 일이 있든 오늘만큼은 잠깐 접어 둬. 오늘은 내 여자친구 생일이잖아. 내 체면 좀 세워줘.”곧바로 맞장구가 이어졌다.“맞아. 태겸이 마음속엔 늘 해인 씨밖에 없는 거 다들 알잖아. 둘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해인 씨랑 조금만 삐걱해도, 나중에 태겸이 술 취하면 친구들 붙잡고 난리 나는 거 다들 봤잖아.”“야, 그런 소리 하지 마. 태겸이 언제 울어. 술병 안고 ‘여보, 사랑해’만 반복하지.”“...”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4화

    예주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묘한 빛이 스쳤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오빠가 해인 언니한테 너무 잘해 주는 거죠. 언니가 그걸 몰라주는 거예요.”그 말에 태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예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아까 그 진주 목걸이 말이에요...”태겸은 대답하지 않고 해인 옆자리에 앉았다.곧 첫 번째 경매 물품이 무대 위에 올려졌다.진주 목걸이였다.윤기 좋은 진주들이 조명 아래에서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해인은 한눈에 마음이 갔다.시작가는 4억 원. 해인은 망설임 없이 패들을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화

    이소정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졌다.“사설탐정? 사설탐정을 써서 태겸이를 조사했다는 거야? 해인아, 그런 건 하면 안 되지. 부부 사이에 상처만 남겨.”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서재 안까지 전해졌다.문이 열리며 고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인을 보자 자연스럽게 음성이 누그러졌다.“해인이, 왔구나.”고민건을 바라보던 해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은 저분처럼 머리가 희끗해졌을까?’그해, 두 회사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대형 프로젝트가 있었다. 원래는 고민건이 직접 협력사와 만나기로 되어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2화

    밖에서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해인은 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잠시 뒤, 현관문이 열리며 태겸이 들어왔다.실내로 스며든 발소리는 조심스러웠고, 점점 가까워지다가 해인 등 뒤에서 멈췄다.이어 단단한 남자의 팔이 해인 뒤에서 감겨 왔다.해인의 허리가 갑자기 조여 들었다.“여보...”태겸의 입술이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낮고 거친 숨이 섞인 남자의 목소리였다.“여보, 나 진짜 보고 싶었어.”밤공기를 머금은 태겸의 체온이 전해지자 해인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해인은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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