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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Penulis: 오월이
이소정의 안색이 단번에 굳어졌다.

“사설탐정? 사설탐정을 써서 태겸이를 조사했다는 거야? 해인아, 그런 건 하면 안 되지. 부부 사이에 상처만 남겨.”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서재 안까지 전해졌다.

문이 열리며 고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인을 보자 자연스럽게 음성이 누그러졌다.

“해인이, 왔구나.”

고민건을 바라보던 해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은 저분처럼 머리가 희끗해졌을까?’

그해, 두 회사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대형 프로젝트가 있었다.

원래는 고민건이 직접 협력사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급한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웠다.

대신 해인의 아버지와 두 오빠가 고민건을 대신해 나섰다.

협력사 측에서 마련한 차량으로 돌아오던 길, 사고가 났다.

강씨 집안의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하룻밤 사이에 해인은 가장 의지하던 아버지와, 늘 곁을 지켜주던 두 오빠를 잃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마저 해인을 떠났다.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자, 해인은 시선을 내렸다.

그러나 곧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부드럽게 다듬어진 얼굴 위로 흔들림 없는 표정이 자리했다.

“저, 태겸 씨랑 이혼할 생각이에요. 아버지 회사도 제가 다시 가져올 거고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시선은 분명했다.

말이 끝나자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고민건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이혼 이야기를 하는 거니? 태겸이가 너한테 잘못이라도 했어?”

태겸과 해인이 결혼한 지 따져 봐도 며칠 되지 않았다.

둘이 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절차와 예는 빠짐없이 치렀다.

해인에게 친정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고민건은 스스로 결정해 혼례 예물을 해인에게 직접 넘겼다.

시가로 상당한 단독주택이었다. 공사비만 해도 2천억 원이 넘는 집이었다.

누가 봐도 고씨 가문이 해인을 가볍게 대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해인은 가늘게 미간을 좁혔다.

“자세한 이유는 어머니께 여쭤보세요.”

그녀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해인은 아직 미성년자였다. 회사를 홀로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동안 YD그룹은 고민건이 대신 관리해 왔다.

이후 고씨 가문의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손이 모자라게 되었고, YD그룹은 자연스럽게 태겸에게 맡겨졌다.

어차피 고민건 부부의 생각 속에서 해인과 태겸의 결혼은 예정된 일이었다.

지금은 태겸이 YD그룹의 임시 대표이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소정은 이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굳었다.

“해인아, 작은 다툼 때문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니? 이혼이 그렇게 쉽게 입에 오를 말이야? 어느 부부가 안 싸우고 살아.”

이어 말이 길어졌다.

“그리고 태겸이도 지금 대표이사로 잘 하고 있잖아. 갑자기 회사를 되찾겠다는 건데, 너 회사 일 해본 적 있니? YD그룹이 네 손에서 흔들리면, 그건 네 아버지가 평생 쏟은 노력을 망치는 거야.”

해인은 차분하게 이소정을 바라봤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도 그게 잘 되든 안 되든, 제 일이잖아요.”

이소정은 더 이상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아이가, 또 말을 왜 그렇게 해.”

해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틀린 말 했나요?”

“너...”

그때 고민건이 이소정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이소정은 그제야 말을 삼켰다.

고민건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내 아들이 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말해 봐.”

이소정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태겸이는 늘 잘해 왔어. 무슨 큰 잘못이 있겠어? 전부 오해야. 해인이가 괜히 일을 키우는 거지...”

...

해인은 더 이상 고민건 부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조용히 몸을 돌려 고씨 가문의 본가를 나섰다.

이곳은 해인의 집이 아니다. 고민건 부부가 아무리 잘해 준다 해도, 해인은 결국 며느리일 뿐이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해인은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믿고 의지하던 사람인 진이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가씨.]

“아저씨,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YD그룹을 매각하려고 해요. 적절한 인수자를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미 결심하신 겁니까?]

“네.”

해인은 회사 경영에 재능도, 흥미도 없었다. 이미 자신의 일은 따로 있었다.

태겸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한 이상, 미련 없이 정리하고 싶었다.

회사를 되찾은 뒤 억지로 끌고 가느니, 제대로 된 사람에게 넘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게 아버지가 남긴 회사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어가는 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해인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아저씨, 이 일은 조용히 진행해 주세요. 태겸 씨에게는 아직 알리지 말아 주세요.”

YD그룹에서 태겸이 보낸 시간은 6년이었다.

지금 회사 안팎은 대부분 태겸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미리 알게 되면, 모든 일이 복잡해질 뿐이었다.

진이철은 곧바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

B시에서는 요 며칠 대형 경매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해인은 초대장을 받아 들고 잠시 바람을 쐴 겸, 기분 전환도 할 겸 행사장에 가기로 했다.

경매는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호텔에서 열렸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선 해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하예주였다. 연한 노란색의 트레인 달린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허리를 따라 밀착된 라인이 몸선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그 옆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태겸이 서 있었다.

예주는 한 손으로 태겸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몸을 가까이 붙여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공개된 자리였지만, 두 사람은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해인은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고 대표님, 이분이 여자친구시죠?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예주는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지며 태겸을 한번 바라봤다.

“고 대표님이 여자친구분을 정말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강해인 씨랑 같이 경매에 오신 거면, 좋은 소식이 곧 있는 건가요? 결혼 준비로 보석 보러 오신 건가요?”

상대는 예주를 해인으로 착각했지만, 태겸은 굳이 바로잡지 않았다.

해인은 두 사람 곁을 아무 표정 없이 지나쳐 갔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해인의 존재감은 쉽게 묻히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태겸은 뒤늦게 시선을 돌렸고, 해인을 발견하자 잠시 표정이 굳어졌다.

곧바로 예주를 두고 해인 쪽으로 걸어왔다.

“왜 여기 있어?”

예전 같았으면 다툼이 있어도 길어야 몇 시간이었다.

서로 감정이 상해도 결국 해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고, 그렇게 정리됐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태겸이 예상했던 시간보다 갈등은 훨씬 길어졌다.

해인의 생일에 함께하지 못했던 건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다.

태겸 역시 며칠 사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이도 아직 어린데, 내가 조금 더 양보하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태겸이 먼저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주 선 채 시선이 맞닿았다.

해인은 태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신혼여행은 잘 다녀왔어?”

태겸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소리야? 무슨 신혼여행?”

해인은 미간을 좁혔다.

“끝까지 모른 척하는 거야? 그게 재미있어?”

태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내가 예주랑 신혼여행 갔다고 생각한 거야? 오해야. 나 K국 몰디도에 간 건, 너 때문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인은 태겸을 지나 좌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예주랑 같이 경매장에 온 건데,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해?”

그 순간 태겸이 해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예주는 여기서 만날 친구가 있어서 내가 태워다 준 것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 아니야.”

이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보, 여기서까지 이러지 말자. 오늘 밤에 지윤준이 자리를 만들었어. 나랑 같이 가.”

해인은 이 자리에서 모든 걸 터뜨릴 생각은 없었다.

아직 회사 매각 문제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난 가기 싫어.”

태겸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우리가 결혼식은 못 했지만, 반지는 있어야지. 이번에 일부러 해외에서 너 주려고 산 거야.”

해인은 잠시 그 상자를 내려다봤다.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한정 제품.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예주가 끼고 있던 그 반지네.’

해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이내 손을 뻗어 반지를 받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태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해인이 선물을 받았다는 건, 이번 다툼이 일단락됐다는 신호였다.

연애하던 시절부터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으로 정해진 규칙이었다.

하지만 숨을 고를 새도 없이, 태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해인이 반지를 가볍게 던지자, 반지는 곡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졌다.

경매 시작을 알리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해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았다.

해인이 멀어지자, 예주는 쓰레기통으로 다가가 반지를 꺼냈다.

“오빠... 이건 오빠가 정성 들여 산 거잖아요. 오빠 마음이 담긴 건데, 해인 언니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요...”

태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겸의 표정은 아주 좋지 않았다.

해인이 고씨 가문 본가를 다녀간 날, 고민건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해인이 부모님까지 끌어들이고, 별것 아닌 일로 이혼 얘기까지 꺼내더라.’

‘사랑에 굶주린 고아 출신이잖아. 게다가 YD그룹도 결국 내 덕에 굴러가고 있는데.’

‘강해인이 나 없이 살 수 있겠어?’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태겸은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잘해줘서 저렇게 변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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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부모님 사고 고씨집안 짓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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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91화

    유호는 분명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이라는 기운이 복도 전체를 짓눌렀다.유호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자, 예철진마저 순간 굳어 버렸다.유호의 눈매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차가운 얼굴에는 싸늘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눈동자에는 얼음장 같은 기색이 깔려 있었다.유호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누군가의 심장 끝을 짓밟는 듯한 압박감이 번졌다.유호는 해인 앞까지 다가오더니, 별안간 경호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해인을 붙잡고 있던 경호원은 그 즉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표정마저 보기 흉하게 뒤틀렸다.유호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어디서 굴러먹던 더러운 손으로 감히 내 아내를 건드려? 내가 장식품으로 보여?”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드득’ 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경호원의 손목은 그대로 으스러지더니 기괴하게 꺾인 자세로 뒤틀렸다.병원 복도에는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가장 가까이 서 있던 해인은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유호는 재빨리 손을 들고 해인의 한쪽 귀와 뺨을 감싸면서 막아 주었다.유호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방금 경호원에게 잔혹하게 손을 쓴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유호는 해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 쪽으로 끌어안았다. 사람을 사로잡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목 안쪽에서 흘러나왔다.“조용히 해. 내 아내를 놀라게 하면,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경호원은 겁을 집어먹었다. 통증 때문에 덩치 큰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비명조차 마음대로 지르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경호원의 얼굴은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은 의료진에 의해 끌려가듯 옮겨졌다. 유호의 시선은 다시 예철진에게로 향했다.날카로운 눈빛에는 숨 막히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복도는 삽시간에 죽은 듯 조용해졌다.유호가 한 걸음씩 예철진 쪽으로 다가오자, 예철진은 저도 모르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90화

    병실을 나온 해인은 사람들 눈을 피해 전화를 걸었다.지금 주여진은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였다.환자를 데리고 있는 해인으로서는 저쪽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좋지 않았다.[해인아, 왜 그래?]전화기 너머로 권영자의 목소리가 들렸다.“할머니, 제가 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댁에 경호원들 다 있어요?”해인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권영자가 코웃음을 치듯 말했다. [그게 무슨 부탁이냐? 너는 한씨 가문의 사모님이야. 한씨 가문 경호원들이 너를 위해 움직이는 건 당연한 거지.]주여진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권영자도 사람을 보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런데 해인 쪽에서 먼저 전화가 온 것이었다.“할머니, 이쪽 일이 마무리되면 제가 다시 가서 뵐게요.”[서두르지 마. 네 어머니 몸부터 나아지는 게 더 중요하지.]통화를 마친 해인은 그제야 조금 숨을 돌렸다.‘이제 됐다.’해인은 다시 병실 쪽으로 돌아갔다.그런데 뜻밖에도 예철진이 이미 와 있었다.더 황당한 건, 예철진이 병실 문 앞을 떡하니 막아선 채 해인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가.”예철진의 목소리는 딱 잘라 끊겼다. “앞으로 여진이 간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애쓸 것 없다.”해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가 엄마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저를 못 들어가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예철진이 곧바로 받아쳤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구나. 그렇게까지 서둘러 전원을 시키겠다는 이유가 뭔데?”해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혹시... 저한테 들키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서 그러는 겁니까?”“무슨 헛소리야?”예철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면서 오히려 해인을 몰아붙였다. “수상한 건 너지. 여진이 곁을 지켜 온 사람은 나야. 네가 뭔데, 고작 수양딸 주제에 어른들 일을 멋대로 결정하려고 들어?”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태상은 분위기가 더 나빠지는 게 보이자 곧장 끼어들었다.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89화

    해인은 진심으로 우진의 앞날이 창창하다고 믿고 있었다.다만 지금의 우진은 한쪽으로만 파고들고 있었다.우진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뿐인 듯했다.물론 그 마음 안에는 연민도 조금 섞여 있을지 몰랐다. 지금 강씨 가문은 사실상 해인 혼자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해인은 우진의 선의를 느끼고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우진을 자기 곁에 붙잡아 둘 만큼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내가 도움이 필요한 건 맞아.”해인이 차분히 말했다. “그런데 우진 씨가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명의를 찾아서 우리 엄마를 낫게 해줄 수 있어? 아니면 내 앞으로의 생활까지 다 정리해 줄 수 있어?”“그 다음은? 우진 씨는 자기 미래를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리고 진로는, 커리어는?”해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우리 집안에서 우진 씨를 후원한 건, 우진 씨가 평생 내 주위를 맴돌라고 한 게 아니야.” “우진 씨 스스로 자기 삶을 잘 살고,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 그게 훨씬 제대로 된 보답이야.”우진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기에 해인은 여기까지 말한 뒤 더 이상 덧붙이지 않았다.해인은 간단히 짐을 챙긴 뒤 주여진을 보러 병원으로 향했다.우진은 멀어지는 해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우진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우진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인에게 실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도.해인에게 필요한 건 유호처럼 혼자서도 자기 몫을 해내는 남자였다.곁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어린 동생’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해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안에는 태상이 주여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태상은 간병인에게서 수건을 건네받아 주여진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있었다.친아들도 아닌 태상이 저 정도까지 해주는 모습이 해인에게는 뜻밖이었다.해인이 들어서자 태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해인 씨, 아버지는 오늘 오전 내내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88화

    유호는 조금 전 돌아오는 길에 따로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도 했다.그런데 상대도 처음에는 유호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전문가도 쉽게 단정하지 못하는 일이었다.그걸 지금 해인에게 털어놓는 건, 해인의 마음만 더 어지럽히는 일일 뿐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유호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나 진짜 스파이 노릇을 하고 온 건 맞아.”유호는 해인이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해인이 쓸데없는 상상으로 더 괴로워하지 않게 하려면, 어느 정도는 미리 말해 두는 편이 나았다.“여보, 나한테 조금만 시간 줘.”유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힘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차희정하고 어떻게 엮여 보이든, 그걸 그대로 믿지는 마.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내고 나면, 다 있는 그대로 말해 줄게.”지금 유호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자신의 두통이 칩과 관계가 있다는 정도만 알 뿐, 그보다 더 구체적인 건 아무것도 몰랐다.희정은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았고, 유호도 병원이나 전문 연구실에서 다시 살펴보기 전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해인은 그 말을 듣고 유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차창 밖 불빛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유호의 얼굴에는 명암이 번갈아 바뀌었다.그런데도 표정만큼은 한없이 진지했다.부부 사이라면 믿음은 있어야 했다.무엇보다 지금 해인은 다른 쪽으로 마음을 더 쏟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아직 병상에 누워 있었고, 사람의 마음이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붙잡을 수는 없었다.해인은 우선 주여진의 전원 문제부터 준비해야 했다....다음 날 아침, 해인은 와세라에 사직 의사를 밝히러 갔다.개인적인 일이 너무 많았다.휴가도 자주 냈고, 얼마 뒤에는 아이도 낳아야 했다.해인은 자신의 사정 때문에 회사 일에 차질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다.와세라 사람들은 다들 괜찮은 이들이었고, 맡은 일이 분명한 곳이었다. 해인이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 부담은 결국 아래 사람들에게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한두 번쯤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87화

    유호가 다가오는 걸 보자, 태겸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한 눈으로 유호를 바라봤다.태겸은 해인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기에 해인을 잘 알았다.해인은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할수록, 오히려 더 깊이 담아 두는 사람이었다.특히 마음이 얽힌 일에서는 더 그랬다.해인은 감정 안에 모래 한 톨도 섞이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었다.그러니 그때도 끝까지 미련 두지 않고 태겸을 떠난 것이었다.“먼저 올라가서 어머니 뵙고 올게.”태겸은 셔츠 깃을 한 번 정리한 뒤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둘만 남을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줬지만, 돌아서기 직전 유호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남겼다.유호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태겸이 무슨 뜻으로 그런 눈빛을 보냈는지 모를 리 없었다.기회만 생기면 태겸이 바로 해인을 다시 빼앗아 가겠다는 뜻이다.하지만 유호가 애지중지하는 사람을, 어떻게 태겸이 날름 빼앗아 가게 두겠는가?해인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본 유호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해인의 어깨를 감싸려고 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손끝은 허공만 스쳤다.유호는 의아한 얼굴로 해인을 바라봤다.“왜 이래? 몇 시간 비운 것뿐인데, 설마 진짜로 고태겸한테 내 자리를 뺏긴 거야?”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본인도 아는구나. 말 한마디 없이 몇 시간을 사라졌다는 걸.’해인은 유호를 좋아했다.그러니 질투도 났다.해인은 자기 감정을 꽤 잘 눌렀다고 생각했다.다른 여자였다면 진작 감정이 터져 나와 울고불고 난리를 쳤을지도 몰랐다.몇 시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그 사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하필이면 엄마가 쓰러진 날이었고, 해인이 가장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때였다.그런데 유호는 희정과 함께 있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그대로 길가로 걸어간 해인이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었다.유호는 해인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여보, 진짜 나 상대 안할 생각이야?”해인이 돌아섰다.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데이트 끝나니까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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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불과 몇 분 전, 해인은 유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유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런데 정말로 희정과 함께 있었다니.요즘 들어 유호는 조금 이상했다.가까이 있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멀어져 있는 듯한, 묘한 거리감이 자꾸만 느껴졌다.해인도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그래도 해인은 함부로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이건 고태겸의 입에서 나온 말일 뿐이야.’‘유호 씨와 나는 부부야. 문제가 있으면 직접 물어보고 확인하면 돼.’‘남의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어.’해인은 고개를 들고 태겸을 바라봤다.“우리 엄마 문병하러 온 거면 고마워. 그런데 고 대표가 내 앞에서 유호 씨랑 나 사이 흔들 생각으로 이런 말 하는 거라면, 그만했으면 좋겠어.”말을 마친 해인은 그대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런데 태겸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해인의 앞을 막았다.“난 그냥 사실대로 말한 거야.”태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해인아, 너 하예주 때문에 날 버렸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한유호한테는 기회를 주는 건데?”해인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고 대표는 유호 씨랑 다르니까.”태겸은 해인을 뚫어지게 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설마 한유호를 덜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고? 덜 신경 쓰는 사람한테는 더 너그러워지니까.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 사람이 뭘 하든 별로 상관없는 거잖아.”해인은 피식 웃었다.“상상력은 참 좋네.”해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싸늘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지 그래. 내가 유호 씨를 너무 사랑해서 미칠 정도로 못 놓겠다고.” “그래서 다른 여자랑 한 남자를 나눠 가져야 해도 유호 씨 옆에 있고 싶다고.”그 말은 태겸의 가슴 한가운데를 정면으로 찔렀다.태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면서 눈썹도 깊게 일그러졌다.마치 영혼마저 얻어맞은 사람 같았다.‘완전히 끝이야.’해인은 태겸의 멍한 표정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태겸이 받은 충격을 모른 척 지나갔지만, 태겸도 더 이상 얘기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45화

    태겸의 목소리는 꽤나 날이 서 있었다.“하예주 씨 올려 보내세요.”안내데스크 직원은 이번에는 눈치빠르게 곧바로 말했다.“네, 고 대표님. 제가 바로 작은 사모님을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전화기 너머의 태겸은 잠시 말이 막혔다.‘작은 사모님?’직원은 웃으며 덧붙였다.“네, 하예주 씨께서 본인이 고 회장님의 ‘예비 며느리’라고 하셨습니다.”예주는 핸드폰을 움켜쥔 채 긴장된 시선으로 화면을 바라봤다.‘지금 여기서 부정하면... 창피해지는 건 나야.’다행히도 태겸은 잠시 침묵했을 뿐, 그 말을 바로잡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41화

    어차피 곧 해인이 손봐 놓은 그 집에 예주가 들어와 살게 될 터였다.이미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었으니, 돈으로 보상하는 것도 충분히 말이 됐다.게다가 이 몇 년 동안 태겸은 YD그룹에서 벌어들인 돈도 적지 않았다.돈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저 에너지 보존 법칙일 뿐이었다.해인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덧붙였다.“고 대표님, 돈 다 준비되면 연락해. 그때 계약서 쓸 테니까. 최소 육천억이야. 한 푼도 깎을 생각하지 마.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6화

    그때, 예주가 입을 열었다.“부장님, 모두 같은 프로젝트 팀이고요, 책임도 서로 연결돼 있잖아요. 실험도 원래 두 명씩 짝을 이뤄서 진행하고, 강 대리님이랑 민 대리님은 원래 한 조였고요.”예주는 신승빈을 바라보며, 부드럽고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민 대리님이 급한 일로 자리를 비우셨다면, 강 대리님이 대신 확인하는 것도 책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그리고 회사에서도 다들 이야기하잖아요. 강 대리님은 곧 과장 승진하신다고요. 부장님도 팀에서 가장 많이 애써 주시는 분이시니까, 다들 그 부분은 마음에 두고 있을 거예요.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5화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게요. 강 대리님이랑 하 대리님 사이에 예전에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강 대리님이 하 대리님한테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신 게 좀...”예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물이 하나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해인 선배님은 학교 다닐 때부터 워낙 유명하셨잖아요. 저는 그냥 계속 존경해 왔을 뿐이에요.”예주는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아마 선배님이 저를 좀 오해하신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민하슬이 뭔가 떠올린 듯했다. 휴지를 꺼내 예주에게 건네면서 하슬이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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