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8화. 집주인이 올라왔다
아침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서지안은 얼굴 위로 떨어진 햇빛에 눈을 떴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빛이 정확히 베개 끝에 걸려 있었다. 이 집에 햇빛이 드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길어야 두 시간. 날이 흐리면 그것조차 없었다.
지안은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다 멈췄다.
벽 너머가 보였다.
지난밤 내리지 않은 이불 뒤로 수도실 안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남시헌은 간이침대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긴 다리는 바닥까지 내려와 있었고, 고개는 벽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불편한 자세였지만 숨은 고르게 이어졌다.
새벽 세 시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지안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불을 내릴까 고민하던 순간, 시헌이 눈을 떴다.
정확히 지안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
“방금.”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거짓말.”
“왜 거짓말입니까?”
“자는 사람처럼 숨 쉬고 있었잖아요.”
“자는 척한 적 없습니다.”
“그럼 내가 구경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시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지안은 뒤늦게 자신이 한 말을 알아차렸다.
“구경한 건 아니고.”
“봤다는 건 인정하는군.”
“벽이 열려 있으니까 보인 거죠.”
“닫지 말라고 한 건 나지만, 계속 보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새벽에 자신의 상태를 들킨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소의 뻔뻔한 말투였다.
지안은 이불을 잡아당겼다.
“그럼 이제 닫을게요.”
천이 반쯤 내려왔을 때 벨소리가 울렸다.
현관문 옆의 낡은 초인종이었다.
지안과 시헌이 동시에 굳었다.
띵동.
이번에는 길게 눌렀다.
곧이어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지안 씨! 안에 있지?”
집주인이었다.
지안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세 통.
아침부터 진동으로 해둔 탓에 전혀 듣지 못했다.
“왜 왔지?”
“당신이 알지 내가 압니까?”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안은 행거 위의 이불을 완전히 내리며 낮게 말했다.
“숨어 있어요.”
“어디에?”
“수도실.”
“지금 여기인데.”
“침대 밑에라도 들어가요.”
시헌은 낮은 간이침대를 내려다봤다. 그가 한쪽 팔을 넣으면 가득 찰 만큼 낮았다.
“가능해 보입니까?”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문까지 두드렸다.
“월세 입금한 건 확인했어! 벽 무너졌다며? 아래층에서 물 샌다고 난리야. 문 좀 열어봐!”
지안의 얼굴이 굳었다.
“아래층까지 샜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당신 수도실에서 샌 거잖아요.”
“건물 문제겠죠.”
“지금 책임 따질 때예요?”
집주인이 문손잡이를 흔들었다.
“마스터키로 연다!”
지안은 욕을 삼키며 시헌을 방 안쪽으로 밀었다.
“침대 뒤에 있어요.”
“숨을 공간이 없습니다.”
“그럼 창문 밖으로 나가든가.”
“비상계단도 없는데?”
“어제는 도망갈 수 있다며요.”
“지금은 당신이 문 앞을 막고 있잖습니까.”
둘이 실랑이하는 사이 열쇠가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지안은 재빨리 안전고리를 걸고 문을 열었다.
“잠깐만요!”
문이 손바닥만큼 열리다 안전고리에 걸렸다.
집주인 최명숙이 눈을 흘겼다.
“안에 있으면서 왜 이렇게 늦게 열어?”
“자고 있었어요.”
“아침 여덟 시가 넘었는데?”
“새벽까지 일했으니까요.”
명숙은 지안의 어깨 너머를 들여다보려 했다.
지안이 몸으로 시야를 막았다.
“아래층 천장에서 물 떨어진대. 수도실 배관이 터진 것 같으니까 좀 보자.”
“지금은 안 돼요.”
“왜?”
“방이 엉망이라서.”
“내가 네 방 구경하러 왔어? 수리하려고 왔지.”
명숙은 안전고리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문을 더 열려 했다.
지안이 버티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에 누구 있어?”
“아무도 없어요.”
그 순간 뒤에서 재채기 소리가 났다.
아주 작게 참으려다 실패한 소리였다.
지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최명숙의 입이 벌어졌다.
“남자 있네?”
“아니에요.”
“방금 남자 목소리 났잖아.”
“텔레비전이에요.”
“너 텔레비전도 없잖아.”
명숙이 안전고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열어.”
“지금은 정말 곤란해요.”
“설마 신고해야 하는 사람 숨겨놓은 건 아니지?”
지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명숙은 요즘 남시헌 이야기가 온갖 채널에 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옥탑에 수상한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라도 들으면 돈이 되겠다며 먼저 카메라를 들이댈 인간이었다.
지안은 문을 닫고 안전고리를 풀었다.
그리고 시헌을 돌아봤다.
“일어나요.”
침대와 벽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시헌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안은 그의 옷차림을 훑었다.
검은 티셔츠와 편한 바지. 모자도 마스크도 없었다. 이 얼굴로 집주인 앞에 나갔다가는 끝이었다.
그녀는 옷걸이에서 자신의 회색 후드 집업을 꺼내 시헌의 머리 위로 씌웠다.
“숙여요.”
“작습니다.”
“머리만 가리면 돼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뒤 마스크를 건넸다.
“말하지 마요.”
“입이 없다고 해야 합니까?”
“감기 걸렸다고 할 테니까 기침이나 해요.”
“아까 재채기는?”
“그것도 감기.”
시헌이 마스크를 쓰는 동안 지안은 침대 위 이불을 일부러 흐트러뜨렸다. 베개도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바닥에 떨어진 시헌의 운동화를 현관 앞에 가져다 뒀다.
시헌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뭘 하려는 겁니까?”
“남자가 숨어 있는 것보다 남자친구가 자고 있는 게 낫잖아요.”
“남자친구?”
“진짜로 하자는 거 아니니까 표정 관리해요.”
지안은 문을 열었다.
명숙은 기다렸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제일 먼저 현관에 놓인 남자 운동화에 닿았다. 다음에는 흐트러진 침대, 마지막으로 벽 앞에 서 있는 시헌에게 옮겨갔다.
“누구야?”
“남자친구요.”
시헌의 눈이 지안을 향했다.
지안은 못 본 척했다.
명숙은 시헌을 위아래로 훑었다.
“남자친구가 있었어?”
“있으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는데, 여기서 같이 사는 건 안 돼. 계약서는 일 인 거주로 썼잖아.”
“같이 안 살아요. 어젯밤 비가 너무 와서 잠깐 온 거예요.”
“얼굴은 왜 가렸어?”
“감기 걸려서요.”
명숙이 시헌 쪽으로 다가갔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지안은 곧장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런 얼굴 아니에요.”
시헌의 시선이 그녀의 뒤통수에 꽂혔다.
“얼굴도 안 보여주면서 어떻게 알아?”
“제가 매일 보니까 알죠.”
지안은 자연스럽게 시헌의 팔짱을 꼈다.
시헌의 몸이 순간 굳었다.
두꺼운 팔뚝에 닿은 손바닥으로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안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작게 속삭였다.
“연기해요.”
시헌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리고 지안의 어깨에 한쪽 팔을 둘렀다.
예상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에 지안의 몸이 그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헌이 일부러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지 말라니까.
지안이 옆구리를 꼬집었지만 시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명숙의 표정이 묘해졌다.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네.”
“감기 걸리면 다 비슷해져요.”
지안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벽부터 보세요. 어제 비 오면서 갑자기 무너졌어요.”
명숙이 벽 쪽으로 다가갔다.
이불을 걷으려는 손을 지안이 막았다.
“먼지 날려요.”
“수도실 상태를 봐야 수리하지.”
“제가 사진 찍어서 보내드릴게요.”
“내 건물인데 내가 직접 봐야지.”
명숙이 고집을 부리며 이불 끝을 잡았다.
지안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수도실 안에는 시헌의 물건이 그대로 있었다. 노트북과 휴대전화, 생수와 간이침대까지. 한 번만 들여다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명숙이 이불을 들추려던 순간, 시헌이 갑자기 몸을 숙였다.
“콜록.”
기침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지안 쪽으로 기울었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그를 받쳤다.
시헌은 이마를 그녀의 어깨에 댄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지안은 그것이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철렁했다.
명숙도 이불에서 손을 뗐다.
“많이 아픈 거 아니야?”
“새벽부터 열이 심했어요.”
지안은 시헌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었다.
오히려 차가웠다.
하지만 손을 떼려는 순간 시헌이 손목을 잡아 그대로 두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이 지안을 바라봤다.
연기하라는 뜻인지, 정말 어지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병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조금 쉬면 괜찮대요.”
지안은 그를 침대에 앉혔다.
명숙은 아픈 사람 앞에서까지 벽을 뜯어볼 만큼 모질지는 못했다.
“알았어. 오늘 오후에 수리 기사 보낼 테니까 그전까지 사진 찍어놔.”
“오늘은 안 돼요.”
“또 왜?”
“남자친구가 아프다니까요.”
명숙이 지안을 빤히 보다가 혀를 찼다.
“연애도 돈 있을 때 해야지. 월세 두 달씩 밀리면서 남자는 잘도 만난다.”
지안의 얼굴이 굳었다.
대꾸하려는 순간, 침대에 앉아 있던 시헌이 먼저 말했다.
“월세는 제가 냈습니다.”
명숙이 돌아봤다.
지안도 시헌을 노려봤다.
조용히 있으라고 했는데 이 남자는 기회만 생기면 말을 했다.
“그쪽이 냈어?”
“네.”
“두 달 치를?”
“앞으로도 밀리지 않게 하겠습니다.”
명숙의 눈빛이 달라졌다.
키 크고 돈도 대신 내주는 남자친구.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아이고, 그런 사람이었어?”
명숙은 아까와 달리 웃는 얼굴로 시헌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른 나아. 다음에는 얼굴도 좀 보여주고.”
“그러죠.”
“그러긴 뭘 그래요.”
지안은 명숙을 현관 밖으로 밀어냈다.
“사진 보내드릴게요. 오늘은 올라오지 마세요.”
“알았어, 알았어.”
문이 닫히기 직전 명숙이 지안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숨길 게 따로 있지. 남자친구를 왜 숨겨?”
지안은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안전고리까지 건 뒤에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뒤돌아보니 시헌은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
후드와 마스크를 벗은 얼굴에는 조금 전의 아픈 기색이 전혀 없었다.
“연기였죠?”
“배우입니다.”
“말하지 말랬잖아요.”
“상황에 필요한 대사였습니다.”
“월세를 앞으로도 내겠다는 건 무슨 대사인데요?”
“남자친구 설정에 충실한 겁니다.”
지안은 기가 막혀 그를 노려봤다.
“지금부터 남자친구 아니에요. 문 닫히는 순간 끝났어요.”
“그건 곤란할 것 같은데.”
“뭐가요?”
시헌은 창문 쪽을 가리켰다.
지안이 커튼을 젖히자 아래층 베란다가 보였다.
최명숙이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워낙 커서 옥탑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내가 직접 봤다니까. 지안이 남자친구가 아주 훤칠해. 키가 얼마나 큰지 몰라.”
통화 상대는 한 명이 아닌 듯했다.
명숙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월세도 대신 내줬대. 어제부터 같이 있었나 봐.”
지안은 눈을 감았다.
태림하우스의 소문은 인터넷보다 빨랐다.
오후가 되기 전에 건물 사람 전부가 알게 될 것이다.
시헌이 지안의 옆에 섰다.
“연기, 계속해야겠군요.”
“누구 때문에요?”
“내가 아니라 당신이 먼저 남자친구라고 했습니다.”
지안이 커튼을 거칠게 닫았다.
그 순간 아래층에서 명숙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그런데 그 남자, 진짜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더라니까.”
# 외전 5화. 오늘도 함께 살겠습니다 [외전완결]남시헌이 두 번째로 반지를 내민 것은 첫 번째 약속 반지를 맞춘 지 정확히 일 년 뒤였다.이번에는 상자를 몰래 두지 않았다.서지안이 편집을 마치고 작업실에서 나오자, 거실 식탁 위에 작은 케이크와 반지 상자를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집 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촛불도 없었고 꽃잎도 뿌려져 있지 않았다.시헌은 촬영장에서 입고 돌아온 검은 티셔츠 차림이었고, 지안은 하루 종일 작업하느라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있었다.“이게 뭐예요?”지안이 묻자 시헌은 소파에서 일어났다.“결혼해달라는 뜻입니다.”“바로 말하네요.”“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상자도 안 숨기고요?”“숨기면 또 화낼 것 같아서.”“잘 배웠네요.”지안은 식탁 앞에 앉지 않았다.대신 시헌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오늘이에요?”시헌은 미리 준비한 답을 외우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오늘이 특별한 날은 아닙니다.”“그런데요?”“그래서 오늘 하고 싶었습니다.”그는 지안과 함께한 지난 일 년을 떠올렸다.남시헌의 복귀작은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지안의 채널 은 구독자 수보다 긴 영상으로 더 유명해졌다.정우현은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게 됐고, 백윤서는 독립 제작사의 연극으로 돌아갔다.최민석은 재판을 기다리면서도 자신이 보관했던 자료를 수사기관에 모두 넘겼다.장기석과 강태준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밝혀야 할 일도 남아 있었다.그래도 두 사람의 일상은 계속됐다.아침마다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확인하고.월세 이체 날짜가 되면 각자 절반씩 보내고.시헌이 촬영 때문에 집을 비울 때면 돌아올 시간을 알리고.지안이 밤새 편집하다 소파에서 잠들면 시헌이 담요를 덮어줬다.싸운 날도 있었다.시헌이 지안의 악성 댓글을 몰래 신고하다 들킨 날.지안이 몸살을 숨긴 채 사흘 동안 작업하다 쓰러진 날.남시헌의 해외 촬영 제안을 지안이
# 외전 4화. 결혼은 합의부터서지안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도 바로 열지 않았다.아침 일곱 시 십 분.남시헌은 이미 촬영장으로 출발한 뒤였다.머리맡에는 출발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가 남아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그가 만든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그런데 작업실 책상 위에 놓인 상자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짙은 남색 상자.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리본도 없고 메모도 없었다.지안은 문 앞에 서서 한동안 상자를 바라봤다.반지 상자와 비슷했다.너무 비슷해서 손을 대기 어려웠다.며칠 전 공개 연애 인터뷰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시헌은 중요한 발표는 지안과 먼저 합의하겠다고 답했다.그날 집에 돌아온 뒤에도 결혼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았다.지안 역시 묻지 않았다.말하지 않는 것이 거절은 아니었다.그렇다고 동의도 아니었다.그런데 상자가 나타났다.지안은 휴대전화를 들었다.[책상 위에 있는 상자 뭐예요?]촬영 중인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지안은 상자를 열지 않은 채 노트북을 켰다.오늘은 의 새로운 인터뷰를 촬영하는 날이었다.정우현이 직접 출연하겠다고 했다.공식적으로 사망한 뒤 다른 이름으로 병원에 감금됐던 팔 개월.남시헌을 배신했다는 누명을 쓴 시간.자신 대신 불탄 차량 안에 있었던 신원 미상의 피해자.우현은 수사기관에서 진술했지만 대중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시헌을 통해 그의 상태를 짐작하는 기사만 쏟아졌다.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고 했다.오전 열 시.정우현은 지팡이를 짚고 스튜디오로 들어왔다.해솔이 준비한 작은 공간이었다.배경은 흰 벽.의자 두 개.정면 카메라 한 대와 측면 카메라 한 대.우현은 카메라를 확인한 뒤 지안에게 물었다.“생방송은 아니죠?”“녹화예요.”“편집은?”“원하시는 부분만 자를게요.”“내가 멈추는 건 그대로 두고.”“네.”“울면?”“그것도 원하는 대로요.”우현은 의자에 앉았다.“시헌이 방송에서는 다
# 외전 3화. 카메라 밖의 사람남시헌의 복귀작 첫 촬영은 오전 여섯 시부터 시작됐다.서지안이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오전 4시 50분에 촬영장으로 출발했습니다.][주방에 아침을 두었습니다.][달걀은 중불로 익혔습니다.]지안은 마지막 문장을 확인하고 웃었다.주방 식탁에는 모양이 조금 찌그러진 달걀 프라이와 식빵이 놓여 있었다.검게 탄 부분은 없었다.노른자도 터지지 않았다.접시 옆에는 작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먹기 전에 사진을 보내주면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겠습니다.]지안은 접시를 촬영해 시헌에게 보냈다.[합격.]곧바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촬영이 시작된 모양이었다.지안은 혼자 아침을 먹은 뒤 작업실로 들어갔다.의 세 번째 영상 편집이 남아 있었다.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세림엔터테인먼트에서 칠 년 동안 연습생으로 지냈던 여자였다.그녀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목소리도 일부 변조해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자신의 침묵만큼은 자르지 말아달라고 했다.질문을 받고 대답하기까지 이십칠 초.말을 하려다 멈춘 시간 십사 초.울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숙였던 일 분 가까운 공백.예전의 지안이었다면 모두 잘라냈을 장면이었다.시청자가 지루해할 테니까.영상의 흐름이 끊길 테니까.그러나 이번에는 그대로 두었다.말하지 못하는 시간 역시 그 사람의 이야기였다.오전 열한 시가 넘었을 때 남시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전 촬영 종료.][달걀은 괜찮았습니까?]지안은 편집 프로그램을 잠시 멈췄다.[괜찮았어요.][촬영은요?]한동안 답장이 없었다.읽음 표시만 남았다.지안은 먼저 전화하지 않았다.대답을 기다렸다.약 오 분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오후 촬영에 호텔 장면이 있습니다.]지안의 손이 멈췄다.대본을 읽으며 알고 있던 장면이었다.주인공이 고향을 떠나기 전 오래된 여관에 머무는 장면.호텔 사건과
# 외전 2화. 공개 연애의 조건남시헌의 첫 복귀 인터뷰는 오후 세 시였다.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세 시간.서지안은 거실 바닥에 앉아 질문 목록을 펼쳤다.정우현이 보낸 예상 질문은 열두 개였다.복귀를 결심한 이유.호텔 사건 이후의 심경.정우현과 백윤서에 관한 질문.서지안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일에 대한 책임.그리고 마지막 항목.[현재 서지안 씨와 교제 중입니까?]지안은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이 질문이 나오면 뭐라고 할 거예요?”소파 대신 맞은편 상자에 앉은 시헌이 대답했다.“교제 중이라고 말하겠습니다.”“끝?”“더 설명해야 합니까?”“질문이 이어질 거잖아요.”지안은 다음 문장들을 읽었다.“언제부터 만났는지. 동거 중인지. 결혼 계획이 있는지. 서지안 씨가 복귀작에 영향을 미쳤는지.”“사실대로 답하면 됩니다.”“결혼 계획도요?”시헌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없습니까?”“지금 나한테 묻는 거예요?”“질문이 나올 수 있다면서요.”“그래서 오늘 결혼 계획까지 정하자고요?”“계획이 없다면 없다고 답하면 되고.”그는 지나치게 침착했다.지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있는 것 같은데.”“생각은 해봤습니다.”“언제요?”“이 집을 계약할 때.”“같이 산 지 며칠이나 됐다고.”“기간이 중요합니까?”“중요하죠.”“얼마나 지나야 생각해도 됩니까?”지안은 말문이 막혔다.남시헌에게 연애는 여전히 기준이 없는 영역이었다. 기준이 없으니 매번 자신에게 확인했고, 답이 없으면 정하려 했다.지안은 질문 목록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오늘 인터뷰에서 결혼 이야기는 하지 마요.”“왜요?”“내가 아직 대답 안 했으니까.”“그럼 질문이 나오면.”“계획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요.”“정해지지 않은 이유도 말해야 합니까?”“그냥 웃고 넘어가요.”시헌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적이 없습니다.”“배우잖아요. 웃는 것도 연기해요.”“당신과 관련된 질문에 연기하고 싶지 않습니다.”지안의
# 외전 1화. 계약이 끝난 다음 날서지안이 눈을 떴을 때 남시헌은 침대에 없었다.옆자리에 남은 온기는 아직 따뜻했다.커튼 사이로 아침 햇빛이 길게 들어왔고, 거실 쪽에서는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쨍그랑.지안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이번에는 타는 냄새가 났다.“남시헌.”대답은 없었다.침대에서 내려온 지안은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 걸쳤다.자신의 옷은 아니었다.커다란 셔츠 자락이 허벅지까지 내려왔다.어젯밤 두 사람이 거실에서 시작한 입맞춤은 침실까지 이어졌다.계약도, 약속된 연기도 아니었다.누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지 정해놓은 규칙도 없었다.그런데 아침이 되자 남자는 사라졌고 주방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지안은 급히 방문을 열었다.남시헌은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다.한 손에는 뒤집개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 화면을 내리고 있었다.화면에는 달걀 프라이 만드는 방법이 떠 있었다.“지금 뭐 해요?”시헌이 돌아봤다.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검은 티셔츠, 회색 바지 차림이었다.프라이팬 안에는 달걀로 추정되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아침 준비 중입니다.”“그건 이미 끝난 것 같은데요.”지안이 가스레인지를 껐다.“불은 왜 이렇게 세게 했어요?”“빠르게 익을 줄 알았습니다.”“요리할 때 강한 불이 무조건 좋은 게 아니에요.”“설명에는 중불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그런데요?”“중불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습니다.”지안은 이마를 짚었다.톱스타 남시헌은 수백 명의 스태프 앞에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었다.백만 명이 지켜보는 생방송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중불은 몰랐다.“아침은 내가 할게요.”지안이 뒤집개를 가져가려 하자 시헌이 손을 피했다.“내가 하겠습니다.”“왜요?”“공동생활 규칙에 적혀 있습니다.”냉장고 문에는 두 사람이 작성한 규칙이 붙어 있었다.[집안일은 가능한 한 반씩 나눈다.]시헌은 그중 집안일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어제 설거지는 내가 했으
# 50화. 월세는 반씩 [본편완결]“전액을 보냈다고요?”서지안의 목소리에 남시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아침 햇빛이 커튼 없는 창문을 통과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조금 전까지 잠결에 지안을 놓아주지 않던 사람은 사라지고, 잘못을 계산하는 얼굴만 남았다.“첫 달이라 내가 먼저 내는 편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누구한테요?”“집주인에게.”“나한테는 안 편한데요.”지안은 은행 앱을 다시 확인했다.월세 백이십만 원.입금자 남시헌.반드시 반씩 내자고 합의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왜 마음대로 보냈어요?”“마음대로 한 건 아닙니다.”“그럼 나한테 물어봤어요?”시헌의 입이 다물렸다.지안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돈 없는 합의서 다시 가져와요?”“그 합의서는 공동 대응에 관한 내용입니다.”“상대방 결정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아직 유효해요.”“내가 월세를 냈다고 당신 결정을 대신한 건.”시헌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지안의 눈빛을 확인했기 때문이다.“대신한 거 맞군요.”“네.”인정은 빨랐다.그러나 지안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처음에도 그랬어요.”“무슨 뜻입니까?”“돈을 주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잖아요.”월 오백만 원.밀린 월세.생활비.냉장고를 채운 음식.남시헌은 늘 지안보다 먼저 돈을 냈다.그 돈 덕분에 지안이 버틴 것도 사실이었다.그렇다고 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당신이 많이 버는 건 알아요.”지안이 말했다.“앞으로 나보다 훨씬 많이 벌 수도 있고요.”“아직 복귀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그건 나중 문제고.”지안은 시헌 앞에 앉았다.“나는 이 집에 얹혀살고 싶지 않아요.”시헌의 표정이 굳었다.“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당신이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느낄 수 있어요.”“내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약속한 대로 하면 돼요.”“월세를 반씩?”“네.”“수입 차이가 나도?”“월세는 반씩.”지안은 단호하게 말했다.“관리비도 반씩.”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