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7화. 새벽 세 시의 인기척
“내가 뭘 먹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벽 너머에서 대답이 늦었다.
서지안은 냉장고 문을 연 채 기다렸다.
우유와 샌드위치, 작은 팩에 든 방울토마토까지. 전부 지안이 편의점에서 자주 사던 것들이었다. 컵라면도 여러 종류 중 하필이면 늘 고르던 매운맛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정확했다.
“남시헌 씨.”
“들립니다.”
“대답은요?”
“한 달 동안 옆에 살았습니다.”
“벽 너머에서 내가 먹는 것까지 봤다고요?”
“본 게 아니라 들었죠.”
지안의 눈썹이 구겨졌다.
“컵라면 종류도 소리로 구분해요?”
“매번 같은 걸 사 오니까.”
“그걸 어떻게 알아요?”
또다시 침묵이었다.
지안은 냉장고 문을 닫고 무너진 벽 앞으로 갔다. 행거에 걸린 이불을 걷어내자 수도실 안에 앉아 있던 시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낡은 간이침대 위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표정은 태연했지만 화면은 꺼져 있었다.
“일부러 보고 있었죠?”
“옥상 입구가 이쪽에서 보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올 때마다 지켜봤다는 거잖아요.”
“누가 올라오는지 확인한 겁니다.”
“내 편의점 봉투까지 확인하면서?”
시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안은 양팔을 끼고 그를 노려봤다.
“계약서에 감시 금지 조항도 넣어야겠네.”
“감시가 아니라 경계입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똑같아요.”
“다음부터는 안 보죠.”
“이미 다 봐놓고?”
시헌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식이 싫으면 버려요.”
“버리라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돈을 보내요.”
“그것도 문제가 아니고.”
지안은 말하다 멈췄다.
문제가 뭔지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허락 없이 자신을 지켜봤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런데 그 관찰 끝에 냉장고를 채워둔 행동은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그녀가 무엇을 먹는지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것도 혼자 살기 시작한 뒤 처음이었다.
지안은 괜한 감정을 잘라내듯 이불을 다시 내렸다.
“다음부터는 묻고 사요.”
“알겠습니다.”
“내 방에도 들어오지 말고.”
“배송 기사가 넣었습니다.”
“내 냉장고 정리까지요?”
벽 너머가 조용해졌다.
지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들어왔네.”
“신선식품이라 상할까 봐.”
“계약 위반이에요.”
“계약금을 돌려줄 겁니까?”
“그걸 왜 내가 돌려줘요?”
“계약을 해지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시헌의 말투에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지안은 화를 내려고 입을 열었다가 그만뒀다.
저 남자와 말싸움을 계속하면 자신만 지쳤다.
“한 번만 봐줘요.”
“고맙군요.”
“다음에는 벌금 받을 거예요.”
“얼마?”
“백만 원.”
이번에는 이불 너머에서 짧은 웃음이 들렸다.
지안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며 혼잣말했다.
“돈 많다고 아주 여유롭지.”
그날 오후부터 지안은 부산 목격 영상의 후속편을 편집했다.
첫 영상이 조회 수 백만을 넘기면서 새로운 제보가 쏟아졌다.
부산역에서 남시헌을 봤다는 사진.
호텔 로비에서 찍었다는 흐릿한 영상.
택시 기사가 직접 태웠다는 음성 제보.
전부 가짜 영상이 올라온 뒤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지안은 제보 자료를 확인하다가 화면을 멈췄다.
사진 속 남자는 남시헌과 키도, 체격도 달랐다. 그런데 댓글에는 확실히 남시헌이라는 말이 가득했다.
한 번 믿기 시작하면 증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닮지 않은 얼굴에서도 닮은 부분을 찾아냈다.
“무섭네.”
작게 중얼거리자 벽 너머에서 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무섭다고 했는데.”
“벽 너머 대화 금지.”
“그런 규칙은 없었습니다.”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걷었다.
“새로 만들어요?”
시헌은 노트북 앞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지안이 나타나자 화면을 곧장 닫았다.
“그건 뭔데요?”
“당신이 알 필요 없는 것.”
“내가 뭘 먹는지는 알아도 되고, 당신이 하는 건 비밀이고?”
“네.”
“뻔뻔하네.”
지안은 벽을 짚고 그를 바라봤다.
“부산 영상은 성공했어요. 취재팀은 아직 부산에 있고, 가짜 목격담도 계속 들어오고.”
“며칠은 버티겠군.”
“그동안 다음 계획을 세워야죠.”
“내가 세웁니다.”
“영상은 내가 만들고?”
“당신은 필요한 만큼만 알면 돼요.”
지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필요한 만큼만 돈 주고 다른 편집자 찾아요.”
“왜 화를 냅니까?”
“같이 공범이 됐으면 최소한 뭘 하는지는 알아야죠.”
“우리는 공범이 아니라 계약 관계입니다.”
“그 계약 관계한테 냉장고까지 채워주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시헌이 입을 다물었다.
지안도 더 말하지 않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지안이었다.
“저녁 먹을 거예요?”
“각자 식사는 각자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둔 건 같이 먹으라고 산 거 아니에요?”
“당신 먹으라고 산 겁니다.”
지안은 괜히 목이 막혔다.
“그럼 마음대로 할게요.”
이불을 놓으려는데 시헌이 불렀다.
“서지안 씨.”
“왜요?”
“달걀은 두 개만.”
지안이 돌아봤다.
“안 먹는다면서요?”
“각자 먹는 겁니다.”
“내 방에서 내가 조리해서 갖다주는데?”
“비용은 지불하죠.”
“한 개에 오만 원?”
“그건 컵라면 가격이었고.”
지안은 피식 웃었다.
“달걀은 한 개에 십만 원이에요.”
“폭리군.”
“싫으면 굶어요.”
결국 저녁은 달걀프라이와 즉석밥, 김치였다.
지안은 시헌 몫을 접시에 따로 담아 벽 아래로 밀어줬다. 같이 먹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시헌도 방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대신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 먹는 저녁인데도 혼자가 아닌 기분이었다.
이상한 생활이었다.
지안은 그 감각이 익숙해지기 전에 노트북을 다시 켰다.
편집을 마친 시간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였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확인하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쿵.
낮고 무거운 소리에 눈이 떠졌다.
지안은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창밖에는 비가 그쳐 있었다. 옥상 난간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쿵.
다시 소리가 났다.
수도실 쪽이었다.
지안은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오전 3시 07분.
“남시헌 씨?”
대답이 없었다.
대신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짧게 들이마시고,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숨.
무언가 바닥을 긁는 소리까지 섞였다.
지안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남시헌 씨.”
이불을 걷자 어두운 수도실 안이 보였다.
시헌은 간이침대 아래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쪽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다른 손은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고, 초점을 잃은 눈은 지안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왜 그래요?”
지안이 벽을 넘어가려 하자 시헌이 몸을 움츠렸다.
“오지 마.”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어디 아파요?”
“카메라부터 꺼.”
“카메라 없어요.”
“거짓말하지 마.”
시헌은 벽 쪽으로 더 물러났다.
등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혔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뒤로 더 숨을 공간이 있는 것처럼 손으로 벽을 밀었다.
“불 꺼. 제발.”
수도실은 이미 어두웠다.
지안은 그제야 알았다.
그가 지금 이곳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남시헌 씨.”
지안은 천천히 몸을 낮췄다.
“여기 옥탑이에요.”
시헌의 숨이 더 가빠졌다.
“촬영하는 사람 없어요. 나밖에 없어요.”
“나가.”
“싫어요.”
“나가라고.”
“내 집에서 내가 어디를 가요.”
지안은 일부러 평소처럼 말했다.
그의 시선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지금 새벽 세 시고, 부산에는 가짜 당신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진짜 당신은 월세 삼십팔만 원짜리 옥탑 수도실에 있고.”
시헌의 손끝이 바닥에서 멈췄다.
“숨부터 쉬어요.”
지안은 자신의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나 따라 해요. 천천히 들이마시고.”
시헌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 못 믿겠으면 벽을 봐요. 저 벽 당신 때문에 무너진 거. 기억나죠?”
그의 시선이 무너진 벽 쪽으로 옮겨갔다.
“들이마셔요.”
지안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쉬고.”
몇 번을 반복한 뒤에야 시헌의 호흡이 조금씩 길어졌다.
지안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계약서에 적은 규칙처럼 선을 지켰다.
한참 후 시헌이 고개를 숙였다.
“몇 시입니까?”
“세 시 십사 분.”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소리 많이 냈어요?”
“벽 하나 무너지는 줄 알았죠.”
“미안합니다.”
처음 듣는 사과였다.
지안은 간이침대 위에 놓인 생수병을 가져다 그의 앞에 내려놨다.
시헌은 병을 집으려다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멈췄다.
지안은 뚜껑을 열어 다시 놓아줬다.
“자주 이래요?”
“가끔.”
“가끔인 사람치고는 대처를 전혀 못 하던데.”
“혼자 있으면 지나갑니다.”
“지금 안 지나갔잖아요.”
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안은 그 옆에 앉지 않고 벽 입구에 기대섰다.
“병원은?”
“안 갑니다.”
“약은요?”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어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어요.”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닙니다.”
평소의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지안은 안도했다.
재수 없는 남시헌으로 돌아온 게 차라리 나았다.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또 시끄럽게 하면 벌금 받을게요.”
“얼마?”
“백만 원.”
시헌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뭐든 백만 원이군.”
“큰돈을 받아야 기억하니까.”
지안은 몸을 일으켰다.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서지안 씨.”
그녀가 돌아봤다.
시헌은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한참을 망설였다.
“오늘만.”
“뭐가요?”
“벽을 닫지 마요.”
지안의 손이 이불 끝에서 멈췄다.
시헌은 끝내 그녀를 보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게만.”
그 말이 이상하게도 부탁처럼 들렸다.
지안은 아무 대답 없이 자신의 방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불을 내리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뒤에도 벽 너머의 숨소리는 한동안 잠잠해지지 않았다.
지안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호흡했다.
시헌이 따라올 수 있도록 일부러 조금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벽 너머에서도 같은 박자의 숨이 들려왔다.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긴 옥탑방에서 두 사람은 무너진 벽을 사이에 두고 같은 속도로 숨을 쉬었다.
# 외전 5화. 오늘도 함께 살겠습니다 [외전완결]남시헌이 두 번째로 반지를 내민 것은 첫 번째 약속 반지를 맞춘 지 정확히 일 년 뒤였다.이번에는 상자를 몰래 두지 않았다.서지안이 편집을 마치고 작업실에서 나오자, 거실 식탁 위에 작은 케이크와 반지 상자를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집 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촛불도 없었고 꽃잎도 뿌려져 있지 않았다.시헌은 촬영장에서 입고 돌아온 검은 티셔츠 차림이었고, 지안은 하루 종일 작업하느라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있었다.“이게 뭐예요?”지안이 묻자 시헌은 소파에서 일어났다.“결혼해달라는 뜻입니다.”“바로 말하네요.”“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상자도 안 숨기고요?”“숨기면 또 화낼 것 같아서.”“잘 배웠네요.”지안은 식탁 앞에 앉지 않았다.대신 시헌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오늘이에요?”시헌은 미리 준비한 답을 외우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오늘이 특별한 날은 아닙니다.”“그런데요?”“그래서 오늘 하고 싶었습니다.”그는 지안과 함께한 지난 일 년을 떠올렸다.남시헌의 복귀작은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지안의 채널 은 구독자 수보다 긴 영상으로 더 유명해졌다.정우현은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게 됐고, 백윤서는 독립 제작사의 연극으로 돌아갔다.최민석은 재판을 기다리면서도 자신이 보관했던 자료를 수사기관에 모두 넘겼다.장기석과 강태준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밝혀야 할 일도 남아 있었다.그래도 두 사람의 일상은 계속됐다.아침마다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확인하고.월세 이체 날짜가 되면 각자 절반씩 보내고.시헌이 촬영 때문에 집을 비울 때면 돌아올 시간을 알리고.지안이 밤새 편집하다 소파에서 잠들면 시헌이 담요를 덮어줬다.싸운 날도 있었다.시헌이 지안의 악성 댓글을 몰래 신고하다 들킨 날.지안이 몸살을 숨긴 채 사흘 동안 작업하다 쓰러진 날.남시헌의 해외 촬영 제안을 지안이
# 외전 4화. 결혼은 합의부터서지안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도 바로 열지 않았다.아침 일곱 시 십 분.남시헌은 이미 촬영장으로 출발한 뒤였다.머리맡에는 출발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가 남아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그가 만든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그런데 작업실 책상 위에 놓인 상자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짙은 남색 상자.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리본도 없고 메모도 없었다.지안은 문 앞에 서서 한동안 상자를 바라봤다.반지 상자와 비슷했다.너무 비슷해서 손을 대기 어려웠다.며칠 전 공개 연애 인터뷰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시헌은 중요한 발표는 지안과 먼저 합의하겠다고 답했다.그날 집에 돌아온 뒤에도 결혼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았다.지안 역시 묻지 않았다.말하지 않는 것이 거절은 아니었다.그렇다고 동의도 아니었다.그런데 상자가 나타났다.지안은 휴대전화를 들었다.[책상 위에 있는 상자 뭐예요?]촬영 중인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지안은 상자를 열지 않은 채 노트북을 켰다.오늘은 의 새로운 인터뷰를 촬영하는 날이었다.정우현이 직접 출연하겠다고 했다.공식적으로 사망한 뒤 다른 이름으로 병원에 감금됐던 팔 개월.남시헌을 배신했다는 누명을 쓴 시간.자신 대신 불탄 차량 안에 있었던 신원 미상의 피해자.우현은 수사기관에서 진술했지만 대중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시헌을 통해 그의 상태를 짐작하는 기사만 쏟아졌다.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고 했다.오전 열 시.정우현은 지팡이를 짚고 스튜디오로 들어왔다.해솔이 준비한 작은 공간이었다.배경은 흰 벽.의자 두 개.정면 카메라 한 대와 측면 카메라 한 대.우현은 카메라를 확인한 뒤 지안에게 물었다.“생방송은 아니죠?”“녹화예요.”“편집은?”“원하시는 부분만 자를게요.”“내가 멈추는 건 그대로 두고.”“네.”“울면?”“그것도 원하는 대로요.”우현은 의자에 앉았다.“시헌이 방송에서는 다
# 외전 3화. 카메라 밖의 사람남시헌의 복귀작 첫 촬영은 오전 여섯 시부터 시작됐다.서지안이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오전 4시 50분에 촬영장으로 출발했습니다.][주방에 아침을 두었습니다.][달걀은 중불로 익혔습니다.]지안은 마지막 문장을 확인하고 웃었다.주방 식탁에는 모양이 조금 찌그러진 달걀 프라이와 식빵이 놓여 있었다.검게 탄 부분은 없었다.노른자도 터지지 않았다.접시 옆에는 작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먹기 전에 사진을 보내주면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겠습니다.]지안은 접시를 촬영해 시헌에게 보냈다.[합격.]곧바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촬영이 시작된 모양이었다.지안은 혼자 아침을 먹은 뒤 작업실로 들어갔다.의 세 번째 영상 편집이 남아 있었다.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세림엔터테인먼트에서 칠 년 동안 연습생으로 지냈던 여자였다.그녀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목소리도 일부 변조해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자신의 침묵만큼은 자르지 말아달라고 했다.질문을 받고 대답하기까지 이십칠 초.말을 하려다 멈춘 시간 십사 초.울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숙였던 일 분 가까운 공백.예전의 지안이었다면 모두 잘라냈을 장면이었다.시청자가 지루해할 테니까.영상의 흐름이 끊길 테니까.그러나 이번에는 그대로 두었다.말하지 못하는 시간 역시 그 사람의 이야기였다.오전 열한 시가 넘었을 때 남시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전 촬영 종료.][달걀은 괜찮았습니까?]지안은 편집 프로그램을 잠시 멈췄다.[괜찮았어요.][촬영은요?]한동안 답장이 없었다.읽음 표시만 남았다.지안은 먼저 전화하지 않았다.대답을 기다렸다.약 오 분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오후 촬영에 호텔 장면이 있습니다.]지안의 손이 멈췄다.대본을 읽으며 알고 있던 장면이었다.주인공이 고향을 떠나기 전 오래된 여관에 머무는 장면.호텔 사건과
# 외전 2화. 공개 연애의 조건남시헌의 첫 복귀 인터뷰는 오후 세 시였다.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세 시간.서지안은 거실 바닥에 앉아 질문 목록을 펼쳤다.정우현이 보낸 예상 질문은 열두 개였다.복귀를 결심한 이유.호텔 사건 이후의 심경.정우현과 백윤서에 관한 질문.서지안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일에 대한 책임.그리고 마지막 항목.[현재 서지안 씨와 교제 중입니까?]지안은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이 질문이 나오면 뭐라고 할 거예요?”소파 대신 맞은편 상자에 앉은 시헌이 대답했다.“교제 중이라고 말하겠습니다.”“끝?”“더 설명해야 합니까?”“질문이 이어질 거잖아요.”지안은 다음 문장들을 읽었다.“언제부터 만났는지. 동거 중인지. 결혼 계획이 있는지. 서지안 씨가 복귀작에 영향을 미쳤는지.”“사실대로 답하면 됩니다.”“결혼 계획도요?”시헌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없습니까?”“지금 나한테 묻는 거예요?”“질문이 나올 수 있다면서요.”“그래서 오늘 결혼 계획까지 정하자고요?”“계획이 없다면 없다고 답하면 되고.”그는 지나치게 침착했다.지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있는 것 같은데.”“생각은 해봤습니다.”“언제요?”“이 집을 계약할 때.”“같이 산 지 며칠이나 됐다고.”“기간이 중요합니까?”“중요하죠.”“얼마나 지나야 생각해도 됩니까?”지안은 말문이 막혔다.남시헌에게 연애는 여전히 기준이 없는 영역이었다. 기준이 없으니 매번 자신에게 확인했고, 답이 없으면 정하려 했다.지안은 질문 목록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오늘 인터뷰에서 결혼 이야기는 하지 마요.”“왜요?”“내가 아직 대답 안 했으니까.”“그럼 질문이 나오면.”“계획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요.”“정해지지 않은 이유도 말해야 합니까?”“그냥 웃고 넘어가요.”시헌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적이 없습니다.”“배우잖아요. 웃는 것도 연기해요.”“당신과 관련된 질문에 연기하고 싶지 않습니다.”지안의
# 외전 1화. 계약이 끝난 다음 날서지안이 눈을 떴을 때 남시헌은 침대에 없었다.옆자리에 남은 온기는 아직 따뜻했다.커튼 사이로 아침 햇빛이 길게 들어왔고, 거실 쪽에서는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쨍그랑.지안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이번에는 타는 냄새가 났다.“남시헌.”대답은 없었다.침대에서 내려온 지안은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 걸쳤다.자신의 옷은 아니었다.커다란 셔츠 자락이 허벅지까지 내려왔다.어젯밤 두 사람이 거실에서 시작한 입맞춤은 침실까지 이어졌다.계약도, 약속된 연기도 아니었다.누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지 정해놓은 규칙도 없었다.그런데 아침이 되자 남자는 사라졌고 주방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지안은 급히 방문을 열었다.남시헌은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다.한 손에는 뒤집개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 화면을 내리고 있었다.화면에는 달걀 프라이 만드는 방법이 떠 있었다.“지금 뭐 해요?”시헌이 돌아봤다.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검은 티셔츠, 회색 바지 차림이었다.프라이팬 안에는 달걀로 추정되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아침 준비 중입니다.”“그건 이미 끝난 것 같은데요.”지안이 가스레인지를 껐다.“불은 왜 이렇게 세게 했어요?”“빠르게 익을 줄 알았습니다.”“요리할 때 강한 불이 무조건 좋은 게 아니에요.”“설명에는 중불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그런데요?”“중불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습니다.”지안은 이마를 짚었다.톱스타 남시헌은 수백 명의 스태프 앞에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었다.백만 명이 지켜보는 생방송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중불은 몰랐다.“아침은 내가 할게요.”지안이 뒤집개를 가져가려 하자 시헌이 손을 피했다.“내가 하겠습니다.”“왜요?”“공동생활 규칙에 적혀 있습니다.”냉장고 문에는 두 사람이 작성한 규칙이 붙어 있었다.[집안일은 가능한 한 반씩 나눈다.]시헌은 그중 집안일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어제 설거지는 내가 했으
# 50화. 월세는 반씩 [본편완결]“전액을 보냈다고요?”서지안의 목소리에 남시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아침 햇빛이 커튼 없는 창문을 통과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조금 전까지 잠결에 지안을 놓아주지 않던 사람은 사라지고, 잘못을 계산하는 얼굴만 남았다.“첫 달이라 내가 먼저 내는 편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누구한테요?”“집주인에게.”“나한테는 안 편한데요.”지안은 은행 앱을 다시 확인했다.월세 백이십만 원.입금자 남시헌.반드시 반씩 내자고 합의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왜 마음대로 보냈어요?”“마음대로 한 건 아닙니다.”“그럼 나한테 물어봤어요?”시헌의 입이 다물렸다.지안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돈 없는 합의서 다시 가져와요?”“그 합의서는 공동 대응에 관한 내용입니다.”“상대방 결정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아직 유효해요.”“내가 월세를 냈다고 당신 결정을 대신한 건.”시헌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지안의 눈빛을 확인했기 때문이다.“대신한 거 맞군요.”“네.”인정은 빨랐다.그러나 지안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처음에도 그랬어요.”“무슨 뜻입니까?”“돈을 주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잖아요.”월 오백만 원.밀린 월세.생활비.냉장고를 채운 음식.남시헌은 늘 지안보다 먼저 돈을 냈다.그 돈 덕분에 지안이 버틴 것도 사실이었다.그렇다고 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당신이 많이 버는 건 알아요.”지안이 말했다.“앞으로 나보다 훨씬 많이 벌 수도 있고요.”“아직 복귀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그건 나중 문제고.”지안은 시헌 앞에 앉았다.“나는 이 집에 얹혀살고 싶지 않아요.”시헌의 표정이 굳었다.“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당신이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느낄 수 있어요.”“내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약속한 대로 하면 돼요.”“월세를 반씩?”“네.”“수입 차이가 나도?”“월세는 반씩.”지안은 단호하게 말했다.“관리비도 반씩.”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