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 외전 5화. 이번에는 가족이 먼저입니다# 외전 5화. 이번에는 가족이 먼저입니다윤재혁의 어머니를 만나기로 한 날.한소이는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지난번 윤재혁과 맞선을 봤던 곳과 같은 호텔이었다.처음에는 서로를 가장 빨리 잊고 싶어 했고, 두 번째에는 정식으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오늘은 양쪽 가족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을 예정이었다.“왜 하필 여기예요.”소이는 로비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윤재혁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정확히는 약속 시간까지 이십칠 분이나 남아 있었으니 늦은 것도 아니었다.그런데 혼자 기다리고 있으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어머니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교수와 전공의라는 관계를 문제 삼으면.나이 차이가 크다고 걱정하면.혹시 결혼 이야기를 너무 빨리 꺼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긴장하자 생각이 많아졌고, 생각이 많아지자 말하고 싶은 문장들이 머릿속에 쌓였다.“한소이 씨.”익숙한 목소리에 소이가 고개를 들었다.윤재혁이 검은 정장 차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그의 뒤에는 윤서진이 꽃다발을 들고 따라왔다.“왜 둘이 같이 와요?”“오빠가 아침부터 너무 긴장해서 감시하러 왔어요.”서진이 대신 대답했다.“제가 긴장했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넥타이 세 번 바꿨잖아.”소이는 윤재혁의 넥타이를 바라봤다.짙은 남색 바탕에 작은 무늬가 들어간 것이었다.“잘 골랐네요.”“첫 번째가 더 나았어.”서진의 말에 윤재혁의 미간이 좁아졌다.“그럼 그때 말했어야지.”“오빠가 물어봤어?”“네 의견이 필요해서 보여 준 거잖아.”“같이 결정해야지. 보여 주기만 하면 어떻게 알아?”소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재혁 씨도 당하네요.”“한소이 씨가 가르친 방식입니다.”그는 소이의 손에 들린 가방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언제 왔습니까?”“방금요.”윤재혁의 시선이 얼굴 오른쪽으로 향했다.소이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눌렀다.“십 분 정도 됐어요.”“메시지는 왜 안
Last Updated: 2026-10-26
Chapter: # 외전 4화. 남자 친구의 보호자 면담# 외전 4화. 남자 친구의 보호자 면담토요일 오후 네 시 오십 분.윤재혁은 한소이의 본가가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차를 세운 뒤 시동을 끄지 못했다.소이는 조수석에 앉아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도착했어요.”“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왜 안 내려요?”“준비 중입니다.”“마음의 준비요?”“네.”윤재혁은 룸미러로 자신의 넥타이를 확인했다.평소 병원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집을 나선 뒤 벌써 네 번째로 매듭을 만지고 있었다.소이는 그의 손등을 가볍게 눌렀다.“그만 만져요. 그러다 목 졸리겠어요.”“많이 이상합니까?”“넥타이는 안 이상해요.”“그럼요?”“재혁 씨가 너무 긴장했어요.”그는 부정하지 않았다.차량 뒷좌석에는 과일 바구니와 꽃, 견과류가 들어가지 않은 수제 양갱 세트가 놓여 있었다.처음에는 건강식품을 사겠다고 했고, 소이가 말렸다.그다음에는 한우를 준비하려 했고, 그것도 거절당했다.결국 김정숙이 좋아한다는 꽃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선물만 골랐다.그 과정에서 소이는 같은 말을 열 번 넘게 했다.“엄마 수술받는 거 아니에요.”그때마다 윤재혁은 같은 대답을 했다.“수술보다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재혁 씨.”“네.”“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바로 잘못했다고 하지 마요.”“내가 잘못한 일이라면 인정해야 합니다.”“그건 맞는데, 우리 엄마는 질문하면서 답을 정해 놓는 사람이에요.”“한소이 씨와 비슷하군요.”소이의 눈이 가늘어졌다.“지금 들어가기 전에 싸울래요?”“아닙니다.”윤재혁은 바로 안전벨트를 풀었다.“가죠.”“도망 안 가고요?”“도망갈 생각 없습니다.”그가 뒷좌석의 선물을 챙겼다.소이는 차에서 내리며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제가 옆에 있을게요.”윤재혁이 소이를 바라봤다.병원에서 환자 보호자에게 위험한 수술을 설명할 때도 흔들리지 않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네.”“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요
Last Updated: 2026-10-26
Chapter: # 외전 3화. 맞선 주선자의 사후 관리# 외전 3화. 맞선 주선자의 사후 관리한소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방바닥에 길게 번져 있었다.소이는 베개 옆에 놓인 휴대전화를 더듬어 시간을 확인했다.오후 한 시 십이 분.“한 시?”그녀는 벌떡 일어나다가 이마를 감쌌다.밤샘 근무를 마치고 오전에 잠들었으니 오래 잔 것은 아니었다.문제는 오후 다섯 시가 마지막 입장 시간이었던 전시회였다.씻고 준비한 뒤 이동하면 늦지는 않겠지만, 식당 예약까지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했다.소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주방 쪽에서 규칙적인 칼질 소리가 들렸다.회색 티셔츠를 입은 윤재혁이 도마 앞에 서 있었다.식탁에는 달걀과 샐러드, 과일이 준비돼 있었다.소이는 주방 입구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봤다.“뭐 해요?”윤재혁이 고개를 돌렸다.“깼습니까?”“네.”“몸은 괜찮고요?”“어깨가 조금 뻐근해요.”그의 시선이 즉시 소이의 어깨로 향했다.“어디가 불편합니까?”“밤새 일하고 소파에서 세 시간 자고, 여기서 또 잤으니 당연한 거예요.”“진통제 필요합니까?”“의사 말고 남자 친구처럼 물어봐요.”윤재혁은 칼을 내려놓고 소이에게 다가왔다.“많이 아픕니까?”“아니요.”“마사지해 줄까요?”소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해 본 적 있어요?”“해부학적 구조는 압니다.”“그건 믿음이 더 안 가는데요.”그의 손이 소이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닿았다.“여깁니까?”“조금 아래요.”윤재혁이 손가락으로 굳은 부위를 눌렀다.생각보다 정확한 위치였다.소이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소리를 냈다가 입을 다물었다.그의 손이 바로 멈췄다.“아픕니까?”“시원해서 그런 거예요.”“계속해도 됩니까?”“네.”소이는 그의 가슴 쪽으로 등을 기대었다.따뜻한 손이 목 아래부터 어깨를 천천히 눌렀다.“전시회 갈 수 있겠습니까?”“당연하죠.”“피곤하면 가지 않아도 됩니다.”“그 말 하면서 예약 시간 계속 확인했죠?”윤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소이
Last Updated: 2026-10-26
Chapter: # 외전 2화. 잠만 자도 됩니까# 외전 2화. 잠만 자도 됩니까한소이가 눈을 떴을 때 휴게실 벽시계는 오전 여섯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삼십 분만 자겠다고 했는데 세 시간이 넘게 지나 있었다.그녀는 무언가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윤재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한 손에는 논문이 들려 있었고, 다른 팔은 소이의 어깨가 흔들리지 않도록 등받이 위에 걸쳐져 있었다.“왜 안 깨웠어요?”잠긴 목소리가 나오자 윤재혁이 논문을 내려놓았다.“잘 자고 있어서요.”“팔 안 저렸어요?”“저렸습니다.”“그런데 왜 그대로 있었어요?”“깨우지 말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소이는 그의 오른팔을 붙잡았다.손끝이 차가웠고 손가락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이건 참는 게 아니라 말하기로 했잖아요.”“자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묻습니까?”“깨워서 물어보면 되죠.”“그럼 싫다고 했을 겁니까?”소이는 잠시 그의 어깨를 바라봤다.“조금만 더 자겠다고 했을 것 같아요.”“그래서 안 깨웠습니다.”“그게 또 혼자 판단한 거잖아요.”“이번 판단은 후회하지 않습니다.”소이는 그의 팔을 천천히 주물렀다.윤재혁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감각은 있어요?”“조금씩 돌아옵니다.”“의사면서 신경 눌리게 계속 있었어요?”“영구 손상이 생길 정도는 아닙니다.”“그걸 어떻게 확신해요?”“한소이 씨 머리가 생각보다 가볍습니다.”“생각보다?”소이가 손을 놓자 그가 바로 팔을 움직여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칭찬이었습니다.”“실패했어요.”“다시 하겠습니다.”“어떻게요?”윤재혁이 소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오래 기대고 있어도 좋았습니다.”화가 나 있던 마음이 너무 쉽게 풀렸다.소이는 그의 손을 떼어 내지 않은 채 물었다.“환자분은요?”“새벽 네 시 이후로 혈압 안정적입니다. 추적 검사에서도 급격한 변화는 없었고요.”“직접 확인했어요?”“한소이 씨 팀에 물었습니다.”소이는 즉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Last Updated: 2026-10-26
Chapter: # 외전 1화. 두 번째 데이트의 조건# 외전 1화. 두 번째 데이트의 조건두 번째 데이트는 세 번이나 미뤄졌다.첫 번째는 한소이의 응급외과 당직이 길어졌고.두 번째는 윤재혁의 수술이 예상보다 늦게 끝났으며.세 번째는 약속 장소로 출발하기 직전, 소이가 맡은 환자에게 갑작스러운 복통이 발생했다.“이번 주도 어렵겠네요.”금요일 밤 열한 시.한소이는 의국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윤재혁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렸다.“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CT 확인했고 응급 수술이 필요한 상황은 아닙니다. 밤새 경과를 봐야 할 것 같아요.”“그럼 병원에 남습니까?”“네.”소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미안해요.”“왜 사과합니까?”“내일 아침부터 만나기로 했잖아요.”두 사람은 토요일 하루를 통째로 비워 두었다.오전에는 전시회를 보고, 점심은 소이가 고른 식당에서 먹고, 저녁에는 윤재혁의 집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수술 일정과 당직표를 몇 번이나 확인한 끝에 만든 계획이었다.“환자가 아픈 건 한소이 씨 잘못이 아닙니다.”“그래도 재혁 씨는 내일 휴일까지 바꿨잖아요.”“다음에 또 바꾸면 됩니다.”“실망 안 했어요?”잠시 침묵이 흘렀다.예전의 윤재혁이었다면 괜찮다고만 대답했을 것이다.그러나 이제는 싫은 것도 말하기로 했다.“실망했습니다.”소이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갔다.“역시 그렇죠?”“많이 기대했습니다.”“미안해요.”“하지만 소이가 환자를 두고 나오는 건 더 싫습니다.”윤재혁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러니까 실망한 것과 소이를 탓하는 것은 별개입니다.”소이는 말없이 휴대전화만 조금 세게 잡았다.이 사람은 여전히 정답처럼 말할 때가 있었다.다만 이제는 그 정답 안에 자신의 감정도 숨기지 않았다.“재혁 씨.”“네.”“병원으로 올래요?”“지금요?”“데이트는 못 해도 같이 야식은 먹을 수 있잖아요.”“근무 중 아닙니까?”“환자 검사 결과 기다리는 중이에요. 삼십 분 정도는 괜찮습니다.”전화기 너머
Last Updated: 2026-10-26
Chapter: # 60화. 맞선은 근무 외입니다 [본편완결]# 60화. 맞선은 근무 외입니다 [본편완결]이정훈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수술 다음 날 오후였다.진정제를 줄이자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였다.한소이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이정훈 환자분,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환자의 눈이 힘겹게 열렸다.초점이 흔들리던 시선이 소이의 얼굴에 멈췄다.기관 삽관 때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는 말에는 약하게 반응했다.“수술은 끝났습니다.”소이는 환자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설명했다.“배 안에서 출혈이 많았고 비장이 크게 손상돼 제거했습니다. 지금은 출혈이 멈췄고 혈압도 안정되고 있습니다.”이정훈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아내분과 아드님도 병원에 와 계십니다.”그 말을 듣자 환자의 눈가가 붉어졌다.손이 무언가를 찾듯 움직였다.소이는 그 손을 잡았다.“아드님도 무사히 집에 돌아갔습니다.”환자의 손가락이 소이의 손을 힘없이 눌렀다.“약속을 못 지킨 게 아니라 사고를 당하신 겁니다. 아드님도 알고 있습니다.”이정훈은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모니터의 숫자는 안정적이었다.이번에는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가족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긴장을 놓은 얼굴이었다.중환자실 밖으로 나오자 보호자와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남편이 깨어났습니까?”“간단한 지시에 반응하고 있습니다. 현재 수치가 유지되면 호흡관도 제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남학생은 고개를 숙인 채 소매로 눈을 닦았다.“아빠가 저 때문에 다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환자분께는 학생이 무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소이는 아이의 앞에 앉았다.“학생도 아버님을 만나면 꼭 말해 주세요. 사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요.”남학생이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아버님이 회복하시면 직접 말씀드리세요.”그날 저녁 이정훈은 호흡관을 제거했다.처음 나온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우리 아들은요?”침대 옆에 있던 아내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Last Updated: 2026-10-26
Chapter: # 특별외전 - 우리가 사는 방식# 특별외전 - 우리가 사는 방식## 진서아 시점결혼했다고 해서 라운지의 규칙이 바뀌지는 않았다.한시준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런데 결혼 후 첫 금요일, 그는 예약도 없이 라운지 문을 열고 들어왔다.나는 바 안쪽에서 그를 바라봤다."오늘 예약 없는데요."시준이 멈췄다."남편도 예약해야 해?""손님으로 올 거면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라운지에는 이미 손님이 몇 명 있었다.그중에는 강도현도 있었다.시준은 도현과 바 위에 놓인 디저트 상자를 번갈아 봤다.결혼 전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조합이었다."그럼 손님 아니면.""뭐로 왔는데요?"시준은 잠시 생각했다."너 보러.""그건 영업 끝나고요."직원 한 명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시준은 불쾌한 얼굴로 바 끝자리에 앉았다."그럼 예약할게.""오늘은 자리가 없어요.""여기 비어 있잖아.""그 자리는 예약석이에요.""누가.""곧 오세요."시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나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예약자를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남자라면 취소시키고 싶을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잠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끝나면 연락해.""가려고요?""네 규칙이라며."화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표정만으로도 라운지 온도가 내려갈 정도였다.그래도 나가야 할 때 나갔다.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괜찮으세요?""뭐가?""부사장님 화난 것 같은데.""맞아.""그런데 그냥 보내요?"나는 새 잔을 꺼냈다."화난 건 본인이 해결해야지."그날 마감을 마치고 나가자 시준은 건너편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정확히 네 시간 동안.차에 타자마자 그가 물었다."예약자 누구였어.""여자 손님이요."굳어 있던 얼굴이 아주 조금 풀렸다."그걸 먼저 말했어야지.""왜요?""괜히 기다렸잖아.""여자면 괜찮고 남자면 안 괜찮아요?"시준은 안전벨트를 매주는 척 내 쪽으로 몸을 기울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특별외전 - 한시준 시점(2)#특별외전 - 한시준 시점(2)## 네가 내게 걸어오던 날결혼식 날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많이 내리지는 않았다.문제는 비가 내린다는 사실 자체였다.나는 한 시간 단위로 기상 자료를 확인했다.오후에는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가능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실내로 옮길까요?"행사 담당자가 물었다.정원과 연결된 실내 공간은 이미 준비돼 있었다.하객을 전부 수용할 수 있도록 테이블 배치도 바꿀 수 있었다.결정만 하면 됐다.나는 정원 끝의 작은 단상을 바라봤다.서아가 그곳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말했다.그래서 이 장소를 골랐다.정확히는 서아가 골랐고, 내가 동의했다."기다려."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서아에게 전화하면 드레스와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비 이야기부터 꺼낼 것이다.그녀가 직접 결정하게 해야 했다.그 사실은 알았지만 기다리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오전 열한 시가 넘어 서아에게 메시지가 왔다.[비 오는 것도 괜찮아요.]나는 화면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밖 봤어?"[봤어요.]"정원 바닥 젖어."[의자만 닦으면 되죠.]"드레스도 젖을 수 있어."[그럼 조금 젖죠.]"감기 걸리면."[한시준 씨.]서아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저 결혼하러 가는 거지 야외 촬영하러 가는 거 아니에요.]"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원래대로 해요.]"비 계속 오면."[우산 쓰고요.]역시 진서아였다.나는 담당자에게 정원 예식을 그대로 진행하라고 말했다.대신 통로 위에 투명 천막을 설치하고, 하객 자리에 우산과 담요를 추가했다.서아가 부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선택을 바꾸는 일은 아니었다.비를 멈출 수는 없어도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준비할 수는 있었다.하객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강재혁은 나를 보자마자 웃었다."긴장하셨습니까?""아니.""넥타이가 비뚤어졌습니다."손을 올려 확인하자 멀쩡했다.재혁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농담입니다.""오늘 끝나고 보자.""결혼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2)#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2)## 내가 고른 결혼식결혼식을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다만 한시준과 결혼한다는 이유로 내 결혼식까지 한율그룹 행사가 되는 건 싫었다.그 생각이 더 확실해진 건 한율 비서실에서 보내온 첫 번째 결혼식 기획서를 본 뒤였다.서울 시내 특급호텔 그랜드볼룸.하객 예상 인원 천이백 명.정재계 주요 인사와 계열사 대표, 해외 협력사 관계자까지 포함된 명단.결혼식이라기보다 한율그룹 후계자의 공식 발표회에 가까웠다.나는 기획서를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뒤 시준을 바라봤다."이거 봤어요?"시준은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업무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뭘."나는 두꺼운 기획서를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표지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한율그룹 한시준 부사장 결혼식 진행안.신부 이름은 작은 글씨로 그 아래에 붙어 있었다.진서아."제 이름이 부제예요?"시준이 문서를 펼쳐보더니 표정이 굳었다."누가 보냈어.""비서실이요."그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었다.나는 그의 손을 눌렀다."또 전화부터 하지 말고요.""이건 내가 지시한 게 아니야.""알아요."시준이 원했다면 신부 이름조차 없는 결혼식 기획서가 왔을지도 모른다.그래도 그는 적어도 내게 묻기 전에는 장소조차 정하지 않았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시준이 물었다.나는 기획서를 다시 넘겨봤다."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건 하나 있어요.""뭔데.""음식."시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것만?""네."나는 기획서를 덮었다."결혼식은 작게 하고 싶어요."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얼마나 작게.""제가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만 부를 수 있을 정도로요.""그럼 한율 쪽은.""시준 씨가 정말 부르고 싶은 사람만요."시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한율 후계자의 결혼식은 개인 행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었을 것이다.회사와 집안, 언론과 투자자까지 모두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내가 그 현실을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특별외전 - 한시준시점 (1) #특별외전 - 한시준시점 (1) ## 처음으로 갖지 않기로 한 사람결혼한 뒤에도 진서아는 내 것이 아니었다.법적으로는 배우자였고, 같은 주소에 살았으며, 서류 위에는 내 이름 옆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하지만 그것이 서아를 소유할 권리는 아니었다.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망쳤다.에덴에서 진서아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정확히는 가지고 싶었다.긴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시선을 자신에게 모으는 태도.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그런 여자는 익숙했다.원하는 것을 물어보고,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면 됐다.그런데 진서아는 달랐다.완벽하게 웃으면서도 나를 보지 않았다.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알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알았지만, 그 안에 자신은 없었다.세 번의 미소가 전부 같다고 말했을 때 그녀의 눈빛이 처음으로 조금 변했다.그 짧은 흔들림이 마음에 들었다.그래서 손목을 잡았다.그녀가 나를 의식하게 만들고 싶었다."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서아가 내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기분이 나빴다.내 손을 거절한 여자는 있었지만, 내가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듯 말한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날부터 나는 진서아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단순한 승부라고 생각했다.다른 손님에게 보이는 얼굴과 내 앞에서 보이는 얼굴을 다르게 만들면 내가 이기는 것이었다.비싼 귀걸이를 보냈다.당연히 하고 올 거라고 생각했다.서아는 돌려보냈다.대신 값도 알 수 없는 검은 귀걸이를 하고 나타났다.내가 선택한 것을 거절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보여주는 여자.불쾌한데도 눈을 뗄 수 없었다.일부러 늦게 도착한 날에도 그녀는 기다리지 않았다.나를 위해 시간을 비워두는 대신 다른 손님을 받았다.다음부터는 늦지 말라고 했다.그 말을 듣고도 다시 예약했다.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부터 이미 지고 있었다.그녀가 정한 시간에 맞춰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1)#특별외전 - 진서아 시점(1)##내가 그 남자를 선택하기까지결혼한 뒤에도 한시준은 가끔 나를 손님처럼 기다렸다.정확히 말하면, 내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렸다."안 들어오고 뭐 해요?"늦은 밤 라운지 문을 열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계단 끝에 서 있었다.영업은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직원들도 모두 퇴근했고, 골목에는 겨울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네가 마감 중이었잖아.""열쇠 있잖아요.""라운지 열쇠는 없어.""집 열쇠 말고요."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손님으로 오지 않는 날에는 내가 먼저 부르기 전까지 계단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내 남편이 된 뒤에도 그랬다.처음 만난 날의 한시준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에덴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았다.비싼 정장과 손목시계 때문만은 아니었다.남자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시선이었다.무엇을 보고 있는지보다,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했다.한시준은 사람을 선택하는 눈으로 봤다.마음에 들면 가지고, 싫증 나면 놓아버리는 사람.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 없는 남자.그런 남자들은 오히려 다루기 쉬웠다.원하는 말을 해주고, 정해진 순간에 웃어주고,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을 주면 됐다.그날도 평소와 똑같이 웃었다.그런데 그가 말했다.세 번 다 똑같은 미소라고.처음에는 조금 놀랐다.그런 걸 알아보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그렇다고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내 손목을 잡고도 놓으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놓지 않을 것처럼 굴었으니까."밀어내지 않는다고 원하는 건 아니에요."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그 순간 시준의 눈빛이 달라졌다.기분이 상한 남자의 얼굴이었다.그런데도 화를 내지 않았다.대신 나를 더 오래 봤다.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그가 나를 손님에게 웃어주는 여자가 아니라, 자신을 거절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비싼 귀걸이를 돌려보낸 건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었다.정말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외전 5화. 매일 다시 선택할 사람#외전 5화. 매일 다시 선택할 사람진서아가 한시준의 집에서 지낸 지 여섯 달이 지났다.처음에는 일주일씩 연장하던 동거였다.두 번째 일주일이 끝났을 때는 서아가 먼저 기간을 말하지 않았고, 시준도 묻지 않았다.계절이 바뀌는 동안 드레스룸의 절반은 자연스럽게 서아의 옷으로 채워졌다. 화장대 위에는 립스틱과 향수가 늘어났고, 냉장고에는 시준이 먹지 않던 과일과 탄산수가 들어왔다.침실 구석의 수면등도 여전히 켜져 있었다.이제 시준은 불빛이 없으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같이 산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시준은 서아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시간을 확인했고, 서아는 그런 시준에게 라운지 영업시간표를 냉장고에 붙여놓으라고 했다.서아는 사용한 컵을 아무 곳에나 두었고, 시준은 발견하는 즉시 정해진 위치로 옮겼다.한 번은 서아가 일부러 컵을 거실과 침실, 드레스룸에 하나씩 놓아두기도 했다.시준은 말없이 전부 치운 뒤 다음 날 같은 자리에 새 컵을 가져다 놓았다."뭐 하는 거예요?""네가 필요해서 둔 줄 알았어.""제가 어지럽힌 거예요.""알아.""그런데 왜 다시 놔요?""내가 치우는지 시험한 거잖아."시준은 서아보다 먼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두 사람은 여전히 자주 부딪혔다.하지만 이제는 한쪽이 사라지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싫은 것은 싫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했다.문을 닫더라도 잠그지는 않았다.그 정도면 두 사람에게는 충분히 평온한 연애였다.서아가 시준의 변화를 눈치챈 것은 목요일 아침이었다.시준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자꾸 서아의 왼손을 바라봤다.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식탁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차에 타기 직전에도 시선이 같은 곳에 머물렀다.서아가 결국 손을 들어 보였다."왜 자꾸 봐요?"시준이 시선을 피했다."안 봤어.""세어봤는데 일곱 번 봤어요.""그걸 왜 세.""이상하니까요."서아는 그의 앞에 왼손을 내밀었다."뭐 묻었어요?""아니."
Last Updated: 2026-09-06
Chapter: # 외전 5화. 오늘도 함께 살겠습니다 [외전완결]# 외전 5화. 오늘도 함께 살겠습니다 [외전완결]남시헌이 두 번째로 반지를 내민 것은 첫 번째 약속 반지를 맞춘 지 정확히 일 년 뒤였다.이번에는 상자를 몰래 두지 않았다.서지안이 편집을 마치고 작업실에서 나오자, 거실 식탁 위에 작은 케이크와 반지 상자를 올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집 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촛불도 없었고 꽃잎도 뿌려져 있지 않았다.시헌은 촬영장에서 입고 돌아온 검은 티셔츠 차림이었고, 지안은 하루 종일 작업하느라 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있었다.“이게 뭐예요?”지안이 묻자 시헌은 소파에서 일어났다.“결혼해달라는 뜻입니다.”“바로 말하네요.”“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상자도 안 숨기고요?”“숨기면 또 화낼 것 같아서.”“잘 배웠네요.”지안은 식탁 앞에 앉지 않았다.대신 시헌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오늘이에요?”시헌은 미리 준비한 답을 외우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오늘이 특별한 날은 아닙니다.”“그런데요?”“그래서 오늘 하고 싶었습니다.”그는 지안과 함께한 지난 일 년을 떠올렸다.남시헌의 복귀작은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지안의 채널 은 구독자 수보다 긴 영상으로 더 유명해졌다.정우현은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게 됐고, 백윤서는 독립 제작사의 연극으로 돌아갔다.최민석은 재판을 기다리면서도 자신이 보관했던 자료를 수사기관에 모두 넘겼다.장기석과 강태준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밝혀야 할 일도 남아 있었다.그래도 두 사람의 일상은 계속됐다.아침마다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확인하고.월세 이체 날짜가 되면 각자 절반씩 보내고.시헌이 촬영 때문에 집을 비울 때면 돌아올 시간을 알리고.지안이 밤새 편집하다 소파에서 잠들면 시헌이 담요를 덮어줬다.싸운 날도 있었다.시헌이 지안의 악성 댓글을 몰래 신고하다 들킨 날.지안이 몸살을 숨긴 채 사흘 동안 작업하다 쓰러진 날.남시헌의 해외 촬영 제안을 지안이
Last Updated: 2026-10-14
Chapter: # 외전 4화. 결혼은 합의부터# 외전 4화. 결혼은 합의부터서지안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도 바로 열지 않았다.아침 일곱 시 십 분.남시헌은 이미 촬영장으로 출발한 뒤였다.머리맡에는 출발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가 남아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그가 만든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그런데 작업실 책상 위에 놓인 상자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짙은 남색 상자.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리본도 없고 메모도 없었다.지안은 문 앞에 서서 한동안 상자를 바라봤다.반지 상자와 비슷했다.너무 비슷해서 손을 대기 어려웠다.며칠 전 공개 연애 인터뷰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시헌은 중요한 발표는 지안과 먼저 합의하겠다고 답했다.그날 집에 돌아온 뒤에도 결혼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는 않았다.지안 역시 묻지 않았다.말하지 않는 것이 거절은 아니었다.그렇다고 동의도 아니었다.그런데 상자가 나타났다.지안은 휴대전화를 들었다.[책상 위에 있는 상자 뭐예요?]촬영 중인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지안은 상자를 열지 않은 채 노트북을 켰다.오늘은 의 새로운 인터뷰를 촬영하는 날이었다.정우현이 직접 출연하겠다고 했다.공식적으로 사망한 뒤 다른 이름으로 병원에 감금됐던 팔 개월.남시헌을 배신했다는 누명을 쓴 시간.자신 대신 불탄 차량 안에 있었던 신원 미상의 피해자.우현은 수사기관에서 진술했지만 대중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시헌을 통해 그의 상태를 짐작하는 기사만 쏟아졌다.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다고 했다.오전 열 시.정우현은 지팡이를 짚고 스튜디오로 들어왔다.해솔이 준비한 작은 공간이었다.배경은 흰 벽.의자 두 개.정면 카메라 한 대와 측면 카메라 한 대.우현은 카메라를 확인한 뒤 지안에게 물었다.“생방송은 아니죠?”“녹화예요.”“편집은?”“원하시는 부분만 자를게요.”“내가 멈추는 건 그대로 두고.”“네.”“울면?”“그것도 원하는 대로요.”우현은 의자에 앉았다.“시헌이 방송에서는 다
Last Updated: 2026-10-14
Chapter: # 외전 3화. 카메라 밖의 사람# 외전 3화. 카메라 밖의 사람남시헌의 복귀작 첫 촬영은 오전 여섯 시부터 시작됐다.서지안이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머리맡에 놓인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오전 4시 50분에 촬영장으로 출발했습니다.][주방에 아침을 두었습니다.][달걀은 중불로 익혔습니다.]지안은 마지막 문장을 확인하고 웃었다.주방 식탁에는 모양이 조금 찌그러진 달걀 프라이와 식빵이 놓여 있었다.검게 탄 부분은 없었다.노른자도 터지지 않았다.접시 옆에는 작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먹기 전에 사진을 보내주면 다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만들겠습니다.]지안은 접시를 촬영해 시헌에게 보냈다.[합격.]곧바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촬영이 시작된 모양이었다.지안은 혼자 아침을 먹은 뒤 작업실로 들어갔다.의 세 번째 영상 편집이 남아 있었다.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세림엔터테인먼트에서 칠 년 동안 연습생으로 지냈던 여자였다.그녀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목소리도 일부 변조해달라고 부탁했다.다만 자신의 침묵만큼은 자르지 말아달라고 했다.질문을 받고 대답하기까지 이십칠 초.말을 하려다 멈춘 시간 십사 초.울음을 참으려고 고개를 숙였던 일 분 가까운 공백.예전의 지안이었다면 모두 잘라냈을 장면이었다.시청자가 지루해할 테니까.영상의 흐름이 끊길 테니까.그러나 이번에는 그대로 두었다.말하지 못하는 시간 역시 그 사람의 이야기였다.오전 열한 시가 넘었을 때 남시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전 촬영 종료.][달걀은 괜찮았습니까?]지안은 편집 프로그램을 잠시 멈췄다.[괜찮았어요.][촬영은요?]한동안 답장이 없었다.읽음 표시만 남았다.지안은 먼저 전화하지 않았다.대답을 기다렸다.약 오 분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오후 촬영에 호텔 장면이 있습니다.]지안의 손이 멈췄다.대본을 읽으며 알고 있던 장면이었다.주인공이 고향을 떠나기 전 오래된 여관에 머무는 장면.호텔 사건과
Last Updated: 2026-10-14
Chapter: # 외전 2화. 공개 연애의 조건# 외전 2화. 공개 연애의 조건남시헌의 첫 복귀 인터뷰는 오후 세 시였다.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세 시간.서지안은 거실 바닥에 앉아 질문 목록을 펼쳤다.정우현이 보낸 예상 질문은 열두 개였다.복귀를 결심한 이유.호텔 사건 이후의 심경.정우현과 백윤서에 관한 질문.서지안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일에 대한 책임.그리고 마지막 항목.[현재 서지안 씨와 교제 중입니까?]지안은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이 질문이 나오면 뭐라고 할 거예요?”소파 대신 맞은편 상자에 앉은 시헌이 대답했다.“교제 중이라고 말하겠습니다.”“끝?”“더 설명해야 합니까?”“질문이 이어질 거잖아요.”지안은 다음 문장들을 읽었다.“언제부터 만났는지. 동거 중인지. 결혼 계획이 있는지. 서지안 씨가 복귀작에 영향을 미쳤는지.”“사실대로 답하면 됩니다.”“결혼 계획도요?”시헌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없습니까?”“지금 나한테 묻는 거예요?”“질문이 나올 수 있다면서요.”“그래서 오늘 결혼 계획까지 정하자고요?”“계획이 없다면 없다고 답하면 되고.”그는 지나치게 침착했다.지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있는 것 같은데.”“생각은 해봤습니다.”“언제요?”“이 집을 계약할 때.”“같이 산 지 며칠이나 됐다고.”“기간이 중요합니까?”“중요하죠.”“얼마나 지나야 생각해도 됩니까?”지안은 말문이 막혔다.남시헌에게 연애는 여전히 기준이 없는 영역이었다. 기준이 없으니 매번 자신에게 확인했고, 답이 없으면 정하려 했다.지안은 질문 목록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오늘 인터뷰에서 결혼 이야기는 하지 마요.”“왜요?”“내가 아직 대답 안 했으니까.”“그럼 질문이 나오면.”“계획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요.”“정해지지 않은 이유도 말해야 합니까?”“그냥 웃고 넘어가요.”시헌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적이 없습니다.”“배우잖아요. 웃는 것도 연기해요.”“당신과 관련된 질문에 연기하고 싶지 않습니다.”지안의
Last Updated: 2026-10-14
Chapter: # 외전 1화. 계약이 끝난 다음 날# 외전 1화. 계약이 끝난 다음 날서지안이 눈을 떴을 때 남시헌은 침대에 없었다.옆자리에 남은 온기는 아직 따뜻했다.커튼 사이로 아침 햇빛이 길게 들어왔고, 거실 쪽에서는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쨍그랑.지안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이번에는 타는 냄새가 났다.“남시헌.”대답은 없었다.침대에서 내려온 지안은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 걸쳤다.자신의 옷은 아니었다.커다란 셔츠 자락이 허벅지까지 내려왔다.어젯밤 두 사람이 거실에서 시작한 입맞춤은 침실까지 이어졌다.계약도, 약속된 연기도 아니었다.누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지 정해놓은 규칙도 없었다.그런데 아침이 되자 남자는 사라졌고 주방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지안은 급히 방문을 열었다.남시헌은 프라이팬 앞에 서 있었다.한 손에는 뒤집개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전화 화면을 내리고 있었다.화면에는 달걀 프라이 만드는 방법이 떠 있었다.“지금 뭐 해요?”시헌이 돌아봤다.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검은 티셔츠, 회색 바지 차림이었다.프라이팬 안에는 달걀로 추정되는 검은 물체가 있었다.“아침 준비 중입니다.”“그건 이미 끝난 것 같은데요.”지안이 가스레인지를 껐다.“불은 왜 이렇게 세게 했어요?”“빠르게 익을 줄 알았습니다.”“요리할 때 강한 불이 무조건 좋은 게 아니에요.”“설명에는 중불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그런데요?”“중불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습니다.”지안은 이마를 짚었다.톱스타 남시헌은 수백 명의 스태프 앞에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었다.백만 명이 지켜보는 생방송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중불은 몰랐다.“아침은 내가 할게요.”지안이 뒤집개를 가져가려 하자 시헌이 손을 피했다.“내가 하겠습니다.”“왜요?”“공동생활 규칙에 적혀 있습니다.”냉장고 문에는 두 사람이 작성한 규칙이 붙어 있었다.[집안일은 가능한 한 반씩 나눈다.]시헌은 그중 집안일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어제 설거지는 내가 했으
Last Updated: 2026-10-14
Chapter: # 50화. 월세는 반씩 [본편완결]# 50화. 월세는 반씩 [본편완결]“전액을 보냈다고요?”서지안의 목소리에 남시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아침 햇빛이 커튼 없는 창문을 통과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조금 전까지 잠결에 지안을 놓아주지 않던 사람은 사라지고, 잘못을 계산하는 얼굴만 남았다.“첫 달이라 내가 먼저 내는 편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누구한테요?”“집주인에게.”“나한테는 안 편한데요.”지안은 은행 앱을 다시 확인했다.월세 백이십만 원.입금자 남시헌.반드시 반씩 내자고 합의한 지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왜 마음대로 보냈어요?”“마음대로 한 건 아닙니다.”“그럼 나한테 물어봤어요?”시헌의 입이 다물렸다.지안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돈 없는 합의서 다시 가져와요?”“그 합의서는 공동 대응에 관한 내용입니다.”“상대방 결정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아직 유효해요.”“내가 월세를 냈다고 당신 결정을 대신한 건.”시헌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지안의 눈빛을 확인했기 때문이다.“대신한 거 맞군요.”“네.”인정은 빨랐다.그러나 지안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처음에도 그랬어요.”“무슨 뜻입니까?”“돈을 주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잖아요.”월 오백만 원.밀린 월세.생활비.냉장고를 채운 음식.남시헌은 늘 지안보다 먼저 돈을 냈다.그 돈 덕분에 지안이 버틴 것도 사실이었다.그렇다고 같은 방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당신이 많이 버는 건 알아요.”지안이 말했다.“앞으로 나보다 훨씬 많이 벌 수도 있고요.”“아직 복귀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그건 나중 문제고.”지안은 시헌 앞에 앉았다.“나는 이 집에 얹혀살고 싶지 않아요.”시헌의 표정이 굳었다.“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당신이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느낄 수 있어요.”“내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까?”“약속한 대로 하면 돼요.”“월세를 반씩?”“네.”“수입 차이가 나도?”“월세는 반씩.”지안은 단호하게 말했다.“관리비도 반씩.”시
Last Updated: 2026-10-14
Chapter: # 특별외전 2화. 나를 선택한 사람# 특별외전 2화. 나를 선택한 사람- 태건시점 - 결혼 다음 날, 나는 민서가 도윤에게 차이는 모습을 보며 눈을 떴다.도윤의 발이 민서의 뺨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민서는 아이의 발목을 잡아 이불 안으로 밀어 넣었고, 도윤은 잠든 채 다시 다리를 뻗었다.“도윤아.”민서가 낮게 불렀다.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나는 아이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이 덜 깬 채 대답했지만 민서가 웃는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이상한 아침이었다.도윤은 내 옆에서 자고 있었고, 민서는 같은 반지를 낀 채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우리 침대였다.나는 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우리 집.우리 방.우리 침대.민서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절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말들이었다.처음 본 유민서는 지나치게 태연했다.길을 잃은 도윤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울리지 않았고, 내가 나타났을 때 겁먹은 얼굴로 물러나지도 않았다.오히려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도윤이 아빠 맞아요?”확신하지 못하는 목소리였다.도윤이 나를 아빠라고 불렀는데도 의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맞는데.”내가 대답하자 민서는 도윤을 바로 넘겨주지 않았다.“그럼 아이가 왜 혼자 있었어요?”첫 만남부터 따졌다.나는 그게 싫었다.도윤을 잃어버린 사람은 나였고, 아이를 찾을 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내가 부족한 아빠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잠깐 놓친 거야.”“잠깐이어도 아이는 무서웠을 수 있잖아요.”민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래서 더 싫었다.나는 틀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수 있었다.맞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부터 마주해야 했다.그런데 도윤은 민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누나도 가.”도윤이 말했다.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아이는 원래 낯선 사람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처음 보는 사람이 가까이 오면
Last Updated: 2026-10-08
Chapter: # 특별외전 1화. 내가 먼저 고른 사람# 특별외전 1화. 내가 먼저 고른 사람-민서 시점 - 결혼 다음 날 아침, 내가 가장 먼저 본 것은 태건의 얼굴이 아니었다.도윤의 발바닥이었다.정확히는 내 뺨 옆에 놓인 작은 발이었다.나는 눈을 뜬 채 한동안 그 발을 바라봤다.어젯밤 분명 도윤을 가운데 눕혔다. 그런데 자는 동안 세로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아이의 머리는 태건의 옆구리에 붙어 있었고, 두 다리는 내 쪽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도윤아.”작게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발을 살짝 밀자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내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결혼 첫날밤의 다음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나는 결국 도윤의 발을 붙잡아 이불 안으로 넣었다.그때 태건이 눈을 떴다.“왜.”“네 아들이 나 걷어찼어.”태건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도윤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미안.”“네가 왜 사과해.”“내 아들이라며.”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얼굴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이런 아침을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이태건을 처음 봤을 때의 나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장면이었다.그날의 태건은 무서운 사람이었다.검은 옷.굳은 표정.사람을 믿지 않는 눈.그리고 처음 보는 아이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안겼다.“아빠.”도윤이 그 한마디를 내뱉었을 때, 나는 내가 알던 세상의 규칙 하나가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저런 사람이 아빠라고?그것도 저렇게 작은 아이의?나는 처음부터 태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그가 도윤의 아빠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오히려 더 의심했다.아이는 왜 혼자 있었는지.태건은 왜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지.아이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은 맞는지.지금 생각하면 태건 역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봤을 것이다.자기 아이 옆에 붙어 있으면서 계속 따지는 여자.그런데도 나는 떠나지 않았다.도윤이 내 손가락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때는 아이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대단한
Last Updated: 2026-10-08
Chapter: #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 외전 5화. 우리 애가 다시 골랐다 [외전완결]결혼을 정한 다음 날.태건과 민서는 하연을 먼저 만났다.장소는 도윤이 자주 가는 어린이도서관 근처 카페였다. 도윤과 하연의 정기 만남이 없는 날이라 세 사람만 마주 앉았다.하연은 민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태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우리 결혼하기로 했어.”짧은 말이었다.하연의 시선이 태건에게서 민서에게로 옮겨 갔다.놀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축하해.”“고마워.”민서가 대답했다.하연은 물잔을 만지며 잠시 생각했다.“도윤이한테는 말했어?”“아직.”태건이 말했다.“너한테 먼저 알리기로 했어.”하연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허락을 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윤보다 먼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결혼하면 바로 달라지는 게 있어?”하연이 물었다.“생활은 지금이랑 비슷해.”민서가 대답했다.“이미 같이 살고 있으니까.”“도윤이 돌봄은?”“지금처럼 태건이가 주로 맡고요.”민서는 준비해 온 말을 천천히 꺼냈다.“저도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만큼 제가 선택한 범위에서는 함께할 거예요. 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하연 씨와의 일정은 두 분이 계속 직접 조율해 주세요.”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민서 씨한테 엄마 역할을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알아요.”“도윤이가 결혼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하연은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엄마가 바뀐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그 부분부터 설명하려고.”태건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엄마는 그대로 너라고.”하연은 그 말을 듣고 시선을 내렸다.도윤의 엄마라는 자리를 확인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자신이 그 자리를 온전히 지켜 온 사람도 아니었다.그런데 태건은 하연의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역할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었다.“가족식은 작게 하려고 해.”태건이 말했다.“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밥 먹는 정도로.
Last Updated: 2026-10-08
Chapter: #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 외전 4화. 이번에는 내가 고르는 약속토요일 오후.도윤은 준우네 집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갔다.태건은 아침부터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네 시에 데리러 가는 거 맞지?”민서가 물었다.“응.”“그럼 세 시간밖에 없네.”“결혼 이야기하는 데 세 시간이 부족해?”태건은 소파에 앉아 민서를 바라봤다.민서는 식탁 위에 서류 몇 장을 펼쳐 두고 있었다.태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게 뭐야.”“내가 준비한 말.”“결혼 이야기하는데 서류가 필요해?”“필요해.”민서는 종이를 태건 쪽으로 밀었다.가장 위에는 두 사람의 현재 생활이 적혀 있었다.태건의 센터 근무와 소득.민서의 학업과 프로젝트 일정.공동생활비 분담.도윤의 양육비와 돌봄 체계.하연과의 정기 만남.태건은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이거 우리 집 구할 때 다 이야기한 거잖아.”“결혼하면 달라지는 게 있으니까 다시 보는 거야.”“뭐가 달라져.”“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거.”민서는 옆에 놓인 자료를 펼쳤다.혼인신고 이후 달라지는 법적 관계와 재산 관리, 의료 상황에서의 보호자 지위, 주거 계약과 세금에 관한 기본적인 내용이었다.태건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민서를 바라봤다.“이걸 다 알아봤어?”“응.”“언제.”“네가 계속 결혼 이야기할 때부터.”태건은 서류를 다시 내려다봤다.결혼이라는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었다.그런데 정작 결혼이 두 사람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좋아하고, 함께 살고, 오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민서는 마음이 부족해서 자료를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오래 함께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었다.“결혼하면 내 빚도 네가 책임져야 해?”민서가 물었다.태건의 표정이 굳었다.“빚 있어?”“없어.”“그럼 왜 물어.”“서로 모르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고.”민서는 질문 목록을 꺼냈다.학자금 대출.개인 채무.보험.저축.가족에게 정기적으로 보내는 돈.태건은
Last Updated: 2026-10-08
Chapter: #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 외전 3화. 졸업하는 아빠도윤의 유치원 발표회 날.태건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났다.도윤의 흰 셔츠를 다리고, 바지 주름을 펴고, 유치원에서 보내 준 안내문을 세 번 확인했다.준비물은 없었다.보호자는 열 시까지 강당으로 오라는 내용뿐이었다.그런데도 태건은 도윤의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아빠.”잠옷 차림의 도윤이 방문에 기대 서 있었다.“왜.”“오늘 가방 안 가져가.”태건의 손이 멈췄다.“알아.”“그런데 왜 봐?”“혹시 필요한 게 있나 해서.”“없어.”도윤은 하품을 하며 욕실로 걸어갔다.“나 노래 안 틀리게 해야 돼.”“집에서 계속 불렀잖아.”“친구들이 틀리면 나도 틀릴 수 있어.”태건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수도 있지.”도윤이 욕실 앞에서 돌아봤다.“틀려도 돼?”“응.”“선생님 안 화내?”“발표회는 시험 아니야.”도윤은 안심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민서는 그때까지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전날 프로젝트 회의가 늦게 끝난 탓이었다.태건은 침실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발표회 보호자는 자신과 하연이었다.민서는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도윤이 직접 정한 일이었고, 민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그런데 태건은 괜히 침실 안을 한 번 더 바라봤다.민서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이미 함께 돌아올 집에 있는 사람이었다.하연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짙은 남색 원피스 위에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손에는 작은 꽃다발도, 선물도 없었다.유치원에서 꽃과 장난감을 가져오지 말아 달라고 안내했기 때문이었다.“엄마.”도윤이 하연을 발견하고 뛰어갔다.태건은 따라가지 않았다.하연이 아이 앞에 몸을 낮췄다.“긴장돼?”“조금.”“엄마도 조금 긴장돼.”“엄마는 노래 안 하잖아.”“도윤이 보는 게 처음이니까.”도윤은 잠시 하연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같이 들어가.”하연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강당에는
Last Updated: 2026-10-08
Chapter: #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 외전 2화. 엄마가 오는 토요일“엄마, 내 집 봐.”도윤이 하연의 손을 잡아당겼다.하연은 현관 안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거실 바닥에는 새 수납장이 놓여 있었고, 민서의 책상 옆에는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조명이 기대어 있었다. 소파 위에는 태건의 겉옷과 도윤의 작은 가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누군가의 집을 구경하는 일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보였다.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누구의 물건이 어디에 놓이는지.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어떤 생활이 만들어졌는지.“잠깐 보고 가세요.”민서가 다시 말했다.하연은 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실례할게요.”“엄마, 여기.”도윤은 하연이 신발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작은방으로 데려갔다.방문 안쪽에는 자동차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창문 아래 낮은 침대에는 공룡 이불이 깔려 있었다.벽 한쪽 수납장에는 자동차와 기차가 줄을 맞춰 들어가 있었다.“이게 파란 자동차.”도윤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민서의 이전 집에 두고 다니던 장난감이었다.“누나 집에 있던 거 기억나?”하연은 자동차를 받아 들지 않고 아이가 든 모습을 바라봤다.“응. 도윤이 자리라고 했던 거.”“이제 여기 있어.”“좋겠다.”“엄마 집에도 내 거 있어?”질문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하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응.”태건이 그녀를 바라봤다.하연은 도윤에게 설명했다.“지난번에 같이 산 기차책이랑 도윤이 쓰는 컵 하나 있어.”“내 컵?”“초록색.”“왜 나한테 안 보여 줬어?”“도윤이가 엄마 집에 올 수 있게 되면 보여 주려고 했어.”도윤은 곧바로 물었다.“나 언제 가?”하연은 태건 쪽을 보지 않았다.도윤에게 묻고, 태건이 대신 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피하지 않았다.“아직 날짜는 안 정했어.”“왜?”“엄마 집에서 도윤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 아빠랑 먼저 확인해야 해.”“침대 있어?”“도윤이가 낮잠 잘 수 있는 자리부터 만들려고.”도윤은 자신의 방을 돌아봤다.“내 침대는 여기 있는데.”“맞
Last Updated: 2026-10-08